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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이야기

부러진 화살 보고 정치판 보니, 사쿠라 되고 싶다?

오늘 이 시간, 영화 <부러진 화살>의 원작자인 서형 작가와 블로거들의 인터뷰 모임이 있습니다. 저는 가지 못했습니다. 깜빡 까먹고 있었기도 했지만 기억 했더라도 어제 이를 뽑고 실로 꿰매놓은 상태라 갈지 말지를 놓고 망설였을 겁니다.

장복산님이 쓴 글을 보고서야 아차 했는데, 제목이 특별했습니다. ‘사쿠라처럼 살겠습니다.’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이런 제목을 달았을까? 걱정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한 마음으로 마우스를 눌렀습니다. 예상대로 비감함이 느껴집니다. 합리적 보수의 사쿠라 선언이라니.

장복산님은 자신을 늘 합리적 보수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그분은 틀림없이 합리적 보수입니다. ‘합리적’인만큼 진보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일 줄 아는 분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장복산님은 왜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사쿠라처럼 살겠다”고 하였을까요? 약간 의아한 마음으로 가만히 읽어보니 그제야 왜 그런 제목을 달았는지 이해가 됐습니다. 반어법이었습니다. “사쿠라처럼 살겠다”는 말로 원칙이 무너진 사회를 비판하고 싶었던 겁니다.

영화 <부러진 화살>의 주인공 김명호 교수는 지독스럽게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편법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대학교수직에서 해직됐습니다. 정답이 없는 문제를 내는 잘못을 범했으면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그게 그의 원칙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재임용에서 탈락했습니다. 이유는? 네가 뭔데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느냐는 거지요. 무슨 소리냐고요? 학교의 부정을 감추고 감싸고도는 게 학교의 위신을 세우는 건데 대학교수란 작자가 솔직히 모든 것을 공개하고 잘못을 빌자고 하니 미친놈이라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이분은 자신의 민사재판을 담당한 판사에게 석궁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물론 석궁으로 판사를 위협해 편파재판을 했다는 자백을 받으려 한 혐의는 확실히 유죄고 벌을 받아야 합니다. 김 교수도 그 점에 대해선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문제는, 재판부가 김 교수와 변호인이 주장하는 어떤 신청도 거부했다는 겁니다. 가장 기본적인 확인사항이라 할 수 있는 피해자의 옷에 묻어있는 피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보자는 혈흔감정신청도 기각했습니다. 기각, 기각, 기각….

저도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만, 저뿐 아니라 영화관을 가득 메운 관람객들은 모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습니다. 말도 안 된다는 거였지요. 김 교수는 법전을 높이 들고 흔들며 “왜 법대로 안 합니까? 왜 원칙대로 안 합니까?” 하고 소리쳤지만 그들은 벽창호였습니다.

자, 사쿠라처럼 살겠다는 반어법이 왜 나왔는지 아시겠지요? 더러운 세상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자포자기의 마음이 없지도 않아 보입니다. ‘아무리 해도 더러운 놈들한테는 이길 수 없어. 그러니 우리도 그냥 대충대충 양심 따위 엿 바꿔먹고 살자고.’

장복산님은 말합니다. “어떤 때는 자신에게 석궁이라도 겨누고 싶을 만큼 정의감과 열정이 많을수록 분노와 좌절이 많은 사회에서는 오히려 ‘사쿠라’가 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앞부분엔 이렇게 썼습니다.

“장정임 시인도 '한 수학교수는 원칙을 고수했다는 이유로 이 사회에 팽배한 적당주의와 집단이기주의에 의해 교수직에서 내쫓긴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는 것도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권력의 자리나 따뜻한 자리를 지키려면 지식과 열정이 아니라 그저 말없이 웃어주고 따라주는 겸손(?)과 타협해야 한다는 사실도 모르고 원칙과 상식을 따지는 내가 얼마나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자조적으로 결론 짓는군요. “나는 얼마 전에 ‘나는 합리적 보수입니다’라는 글을 쓰더니 오늘은 사쿠라를 자청하고 있습니다. 원칙만 따지는 고집불통 보다는 차라리 사쿠라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장복산님이 결코 정말로 사쿠라가 되겠다는 심정으로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장복산님의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보수주의자로서 보수파의 핵심이며 트레이드마크인 합리주의를 실천하려는 장복산님의 피로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느껴집니다.

“영화 부러진 화살에서 재판이 개판이라고 하더니 요즘은 정치판도 개판이고 선거판도 개판인 모양입니다. 누구를 위한 단일화고 무엇을 위한 단일화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 때는 정말 피곤하다는 생각만 듭니다.”

장복산님은 얼마 전 문학평론가이자 경남도민일보 논설위원인 정문순 씨의 손석형 씨의 도의원 중도사퇴 총선출마가 정치수준을 높이는 것이라는 칼럼을 비판하는 제 글에 이런 댓글을 달기도 했습니다. ‘손석형 씨 옹호논리가 어처구니없다’는 취지의 글이었습니다.

“원칙이나 상식을 이야기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변절하고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야 잘사는 것입니다. 정치도 자기욕망대로 하는 것이 잘 하는 정치이다, 국민은 철저하게 무시해야 합니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김명호 교수는 고집스럽게 원칙을 고수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원칙만 잘 지키면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됐습니까? 대학의 경영진과 교수들, 사법부의 판사들은 모두 사쿠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김 교수가 말했습니다. “이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 그럼 정치판은 어떨까요? 장복산님 말씀처럼 마찬가집니다. “이게 정치판입니까? 개판이지.” 야권후보단일화는 잘 될까요? 잘 안 될 것 같습니다. 왜? 개판이니까요. 사쿠라들이 판치는 판이니까요.

지금쯤 <부러진 화살>의 원작자와의 인터뷰가 끝나고 어쩌면 산호동의 어느 주점에서 뒤풀이 중일지도 모르겠군요. 무슨 얘기들이 오갈까요? 서형 작가에게 창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개판에 대해 물어보았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그도 그랬을까요?

“내가 석궁사건 심층취재 해봐서 아는데, 역시 사쿠라가 되는 게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