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3천여 장에 달하는 사진이 제 컴퓨터의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다 보니 속도가 무척 느려졌습니다. 그래서 귀찮은 몸을 이끌고 청소를 하기로 했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계속 두어야 할 사진과 버려야 할 사진을 고르는 일입니다.
그중에 지난 4월 달에 찍어둔 사진 하나에 눈길이 갔습니다. 마산 불종거리였는데요. 고급 베엠베(BMW) 승용차 한 대가 짐차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차 주인은 잠시 어디론가 일을 보러 간 모양입니다. 차 안에는 할머니 한분이 있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 트럭이 올라오는 길은 불종거리에서 오동사거리로 통하는 길입니다. 위로 올라가면 창동사거리가 나옵니다. 옛날에는 이 도로들에 버스도 다니고 차가 많이 다녔지만 지금은 상권활성화를 위해 밤에는 차없는 거리를 조성했습니다. 다른 불법주차 차량들도 많이 보이긴 합니다만 BMW는 도로변에 바짝 붙인 것도 아니고 거의 도로 중앙 쪽에 아주 편한 상태로 주차돼 있습니다. 게다가 오동사거리에서 불종거리로 통하는 도로 입구를 막고 섰습니다. 잘 하면 지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트럭 운전사는 비싼 베엠베라 걱정이 되었던지 몇 번 시도하다 포기하고 기다리더군요.
맥주병을 잔뜩 실은 트럭은 매우 바쁜 듯 보였지만 어쩔 수 없이 차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참이 지나서야 차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얼추 20여 분은 지난 듯싶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터라 그 모양을 다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나름대로 점을 쳤던 것이지요. “이 차의 주인은 틀림없이 여자일 거야.” 차 주인은 여자가 맞았습니다. 적당하게 젊은 여자였습니다.
짙은 검은색으로 위장된 선글라스를 낀 여자는 베엠베 앞에서 서성거리는 트럭 운전사를 힐끗 쳐다보고는 곧장 운전석에 앉더니 횡하고 사라져버렸습니다.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트럭 운전사를 보았을 때 그는 정말 멍청하다는 표현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듯이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있더군요.
자, 이글을 읽으시는 어떤 여자분께서는 저에게 왜 하필이면 점을 쳤는데 그게 여자였느냐면서 힐난을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차 주인이 여자였을 거라고 짐작을 한 것은 아니랍니다. 나름대로 제게도 살아오면서 얻은 경험칙이란 게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아마도 한 십오 년은 더 되었을 성 싶은데요. 저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창원에 가면 만세대 가까운 아파트가 밀집된 토월-상남지구가 있습니다. 거기에 성원주상가라고 있는데 그 건물에 갓난아이였던 우리 큰애 주치병원이 있었습니다.
주상가 앞 도로변에 설치된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아이를 안고 병원에 다녀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하루는 병원에 갔다가 내려오니 제 차 앞에 웬 커다란 승용차 한 대가 떡 버티고 서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주차장으로 들어오기 귀찮으니까 그냥 달려오던 그대로 도로변에 세워두고 일을 보러간 모양입니다.
이건 어떻게 옆으로 빠져나갈 길도 없고 해서 기다리는데 30분이 지나도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근 40여 분이 지나서 차 주인이 나타났습니다. 30대 중반의 여자였습니다. 당시엔 그 비슷하거나 젊었을 나이의 저는 있는 짜증 없는 짜증 다 모아 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랬더니 이 여자분, 완전 선수더군요. “차도 다 썩은 똥차 타고 다니는 주제에 뭔 잔말이 많아. 이 ×××야.” 온갖 험한 욕설을 다 쏟아내는데 가만있을 남자 있습니까? 같이 받았더니 글쎄 멱살을 잡고 흔드는데 죽는 줄 알았습니다. 힘이 엄청 세더군요.
그날은 날씨가 추워서 목이 긴 스웨터를 입고 있었는데 옷이 다 늘어질 정도였습니다. 상황은 그렇게 종료됐습니다. “차도 ×같은 거 타고 다니는 주제에 조심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여자는 횡하고 사라졌습니다. 물론 저는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았죠. 패잔병의 비애.
그 여자의 차는 그랜저였고 제 차는 캐피탈이었습니다만, 그렇게 썩은 차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제 차는 뽑은 지 얼마 안 되는 새 차였지만 그 그랜저는 구형으로서 도색상태도 매우 안 좋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제 차를 보고 썩은 똥차라니... 그래도 무려 8백만 원 가까이 주고 산 찬데...
아무튼 그 이후에도 많은 여성들이 보여주는 자동차 에티켓은 실로 실망스러웠습니다. 어쩌다 시내버스가 정류장으로 들어서는데 승용차 한 대가 길 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있어서 기사가 짜증내는 걸 볼 때면 속으로 이런 점을 다시 치는 것입니다. “여자일 거야.” 그리고 그 점은 신통하게도 맞아떨어집니다.
물론 저는 그 이후에 절대 여자들에게 이러면 된다느니 안 된다느니 하는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성원주상가 앞에서와 같은 경우를 다시 당하더라도 조용히 웃으며 지켜보기만 해야겠다는 생각이지요. 속으로는 개발씨발 하면서.
어쩌면 지난 봄 불종거리의 트럭 운전사 아저씨도 같은 심정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 그가 15년 전의 저처럼 불만을 토로했더라면 더한 모욕을 당했을지도 모릅니다. BMW와 맥주운반용 트럭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니까요.
사실 이런 생각이 그때 언뜻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와, 이차는 여기 세워놔도 누가 손도 못 대겠다. 이런 고급차를 괜히 건드렸다가는 살짝 긁히기만 해도 그 수리비가 패가망신 수준일 텐데.’ 그래서 아마 그 운전사는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에이,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 피하지.’
아, 이 글을 써놓고 보니 페미니스트들 입장에선 별로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나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 여성들의 권리의식이 커지고 사회진출이 왕성해지는 만큼 의무와 책임도 비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부분도 분명 있으니까요.
남자 운전자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폭력적인 운전태도라든지 신호위반을 밥 먹듯이 한다든지 하는 태도는 고쳐야 할 남자 운전자들의 병폐입니다. 게다가 남자들도 이런 사소한 운전 에티켓을 지키지 않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쪽 팔린 줄 모르는 거지요. 대개의 남자들은 체면을 중시해서 그런 짓을 잘 못하는데도 말입니다.
사진을 정리하다가 지난봄에 찍어둔 사진을 보고 생각이 나서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베엠베를 몰고다니는 짙은 선글라스의 여자에 대한 저의 생각은 그저 추측일 뿐입니다. 트럭 운전사가 항의를 했다면 그녀는 매우 공손한 태도로 사과를 표명하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을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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