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뭐 드라마를 보신 분이면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유신이 자기 입으로 말했으니까요. "가야세력이 살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2인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2인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공주님을 여왕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유신은 왜 선덕여왕과 결혼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일까 김유신장군릉. 왕이 아닌 장군의 무덤은 묘라고 한다. 그러나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그의 묘는 '릉'이 맞겠다.
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이 말합니다. "네가 공주님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고 왕이 되는 방법도 있지 않겠느냐?" 유신의 아버지 김서현공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신은 절대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2인자가 되어야 하지만, 결코 1인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제가 왕이 된다면 신라의 모든 귀족들이 연합하여 우리를 적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내전이 일어납니다. 가야세력과 신라세력이 싸움을 벌이게 되는 거지요. 그렇게 되어서는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영민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미 서라벌의 권력 판도를 한 눈에 꿰고 있습니다.
아마 김유신이 진평왕의 부마가 되어 왕이 되고자 한다면 그와 가장 절친한 알천마저도 등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알천 역시도 신라의 진골귀족이기 때문입니다. 알천이 제 아무리 김유신과 친하다고 하더라도 신라의 왕족으로서 가야계가 왕이 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을 터입니다(여왕의 부군이 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만명부인이 김유신에게 한 말 말입니다. "네가 공주님과 결혼하여 부마가 되어 왕이 되면 되지 않겠느냐?"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부마도 왕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답은 "네, 할 수도 있습니다."가 되겠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닙니다. 인류 역사상 신라만큼 화통한 나라는 없었습니다. 세계 역사상 한 나라가 천 년 동안 이어진 것은 로마와 신라뿐입니다. 그러나 로마에 여왕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로마는 철저한 부권사회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와 함께 서구문명의 뿌리를 이룬 것은 로마법입니다.
신라는 부마도, 외손자도 왕이 될 수 있는 나라였다
정복이 전공인 로마는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을 추방하거나 노예를 만드는 데 세계 최고의 기술을 발휘했습니다. 그런 로마는 강력한 무력을 가진 자만이 통치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에서 여왕이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신라는 달랐습니다. 신라는 처음부터 부족들이 연합하는 과정을 거쳐 탄생된 나라입니다. 차츰 고대국가의 틀이 갖춰지면서 배타적 왕권이 형성되는 것은 다른 나라들과 다를 바가 없지만, 여전히 연합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화백회의도 그 중 하나입니다. 신라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신라는 천년 역사를 통틀어 왕이 된 사위만 8명이 나왔습니다. 그 최초의 인물은 너무도 유명한 석탈해입니다. 미추왕,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 흥덕왕, 경문왕, 신덕왕은 모두 사위로서 왕이 된 인물들입니다. 이 중 미추왕은 김알지의 후손으로 최초로 김씨가 신라의 왕이 된 사람이죠.
외손자로서 왕이 된 경우도 흘해왕, 지증왕, 진흥왕 등 3명에 이릅니다. 여기에 더해 3명의 여왕도 나왔습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그리고 진성여왕이 그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모계사회 이후 남녀평등을 가장 잘 실천한 나라는 신라였다고 말해도 그리 과언이라고 탓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이쯤에서 만명부인의 말을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지요. "덕만공주와 결혼해 부마가 되어 왕이 되면 가야세력의 안전을 보장받지 않을까!" 그러나 김유신은 영리합니다. 영리한 만큼 계산능력도 대단히 뛰어납니다. 그는 자기가 왕이 되면 오히려 신라귀족들의 반발에 직면해 멸망의 길을 가게 되리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가야계를 지키기 위한 김유신의 치밀한 계략은 '선덕여왕 옹립'
그래서 그는 왕이 되기보다 왕을 옹립하여 제 2인자의 자리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덕만공주를 사랑하던 김유신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 덕만을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하면서 연모의 정을 끊어버리겠다고 한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네티즌들이 거기에 불만을 토로했었지요.
"아니 덕만이 왕이 되더라도 결혼할 수 있잖아. 그러면 되잖아. 여왕은 삼서제에 따라 세 명의 남편을 둘 수 있다며? 그런데 연모의 정을 끊겠다니 웬 황당한 소리야. 너무 웃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김유신은 역시 역사가 말해주듯 매우 권력 지향적이고 냉철하며 계산에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덕여왕을 향한 연정을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현실적인 인간이 되기로 마음먹은 것이겠지요. 그 정도는 돼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역사상 신하로서 대왕의 칭호를 얻은 공전절후의 인물 김유신이라면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어쨌든 김유신은 자기 부모님들에게 덕만공주와 결혼할 수 없는 이유를 밝혔습니다. 이는 가야계의 보존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김서현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계책임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좀 짓궂은 이들 중에 김유신이 덕만공주와 혼인할 수 없는 이유를 드라마가 아닌 다른 곳(역사적 사실)에서 찾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유신에 비해 덕만이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이죠. 일부(혹은 다수)에서는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이미 할머니가 다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어떤 확증적인 사료는 없습니다. 다만 유추하는 거죠. 그럼 우리도 역시 자유롭게 유추해볼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유신과 결혼하기엔 선덕여왕이 나이가 너무 많다?
천명의 아들인 김춘추가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던 632년에 30세였습니다. 여기에다 덕만공주가 장녀라는 삼국사기의 기사를 배척하고 삼국유사를 따른다면, 선덕여왕의 당시 나이를 50대 이하였다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드라마의 무대가 되고 있는 610년 경 덕만공주는 20대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도 나이가 많습니다. 유신이 595년생이니 그래도 아직 15세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간단하게 생각합시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남녀의 적당한 결혼연령차에 관한 인식은 모두 17세기 양대 병란 이후 어렵던 시절에 만들어진 꼬마신랑 같은 생각들입니다.
여자가 한 10년 연상이라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봅니다. 아마 그때는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시다. 게다가 덕만은 공주입니다. 그것도 왕위계승권 1순위자. 그러므로 김유신이 덕만공주와 결혼할 수 없는 진정한 사유는 유신랑 본인이 고백한 것처럼 원대한 대의에 따른 것입니다.
덕만공주을 왕으로 옹립하여 자신은 2인자가 됨으로써 가야계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 역시 김유신은 훌륭합니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게 아닙니다. 실제로 김유신은 신라의 2인자로 확실한 기반을 닦았습니다. 이후 백년에 걸쳐 김유신의 가문은 권세를 누립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화무십일홍이란 말도 있습니다. 김유신이 죽은지도 100년이 지나면서 서서히 신라계 귀족들은 가야계에 불만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가야계는 신라계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차츰 역모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생기기 시작합니다.
미추왕과 담판을 지어 가야계를 구하는 김유신
마침내 혜공왕 15년(779년)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갑옷에 말을 타고 40여 명을 이끌고 나타난 김유신은 죽현릉으로 들어가 미추왕에게 따집니다. "신이 신라을 위기에서 구하고 삼한을 통일한 공이 있다. 혼백이 되어서도 신라를 지킬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경술년에 신의 자손들이 죄 없이 죽임을 당해 서운하기 짝이 없다. 신라를 떠나고자 한다."
이에 미추왕(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의 영혼이 간곡히 만류하자 회오리바람은 왔던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혜공왕은 혼비백산하여 황급히 김유신의 묘를 찾아 사죄하고 김유신이 세운 취선사에 토지 30결을 바쳐 명복을 빌었다고 합니다. 김유신은 죽어서도 가야계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공주와 결혼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히는 김유신의 심정을 이해하는 데 꽤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울러 작가의 상상력도 아무렇게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도 알았으므로 작가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게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유신랑과 보종랑의 결투는 왜 이리 질질 끄는 겁니까? 오늘 결판 낼 줄 알았더니만…. 내일은 반드시 결판을 내겠지요. 결과를 알면서도 그게 자꾸 기다려집니다. 이건 아주 묘한 감정인데요. 아마 드라마 초반에 유신랑이 당한 수모를 빨리 갚아주기를 바라는 뭐 그런 심정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리라 생각하는데,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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