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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이런저런이야기

블로그 개설 1주년을 맞아 그날을 추억함

오늘은 제가 블로그를 시작한 지가 딱 1년이 되는 날입니다. 제 블로그를 개설한 날짜는 2008년 4월 19일입니다. 공교롭게도 4·19혁명 기념일입니다. 그러나 정작 저는 9월 1일이 되어서야 혁명을 했습니다. 원래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와 정성인 기자의 권유와 도움으로 블로그를 개설했던 것인데 그때만 해도 저는 넷맹이었습니다. 

2008년 8월 30일 경남 블로거 컨퍼런스. 사진=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그래 블로그를 개설해놓고도 이전에 다른 홈페이지나 신문에 기고했던 글 몇 편을 올렸을 뿐 손도 안 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작년 8월 30일 경남도민일보에서 주최하는 <경남 블로거 컨퍼런스>에 참석한 이후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무언가 재미있을 것 같다는 짜릿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9월 1일 첫 포스팅을 했고 , 그 예감은 사실이었습니다. 

지금은 하루라도 블로그를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칠 정도로 블로그에 푹 빠졌습니다. 블로그는 미디어입니다. 물론 미디어가 아니라 개인 일기장 정도에 만족하고 있는 블로거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미디어용으로 개발된 것이라는 데 별 이견은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미디어 이전에 자기 계발 내지 자기 만족 정도로도 충분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블로그를 하다 보면 이유없이 악플을 만나, 하긴 세상에 이유없는 일은 없습니다. 길을 가다가 괜한 시비에 휘말려도 그게 다 그 길을 갔기 때문에 당하는 수난인 것이겠지요. 하여튼 마음 고생을 하게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래도 기쁨이 훨씬 큽니다. 도민일보(블로거스경남)에서 매월 주최하는 블로그 강좌는 배움 이전에 만남의 기쁨을 선물로 주기도 합니다. 

기념일을 맞이하여 무언가 특별한 이야기를 기념식처럼 하고 싶었으나, 마침 아는 선배와 저녁 술자리 약속이 생기는 바람에 작년 9월 1일 처음으로 올렸던 글을 다시 리바이벌 하는 것으로 기념식에 대신합니다. 물론 이 기념식은 저 혼자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함께 축하해주고 싶은 신 분은 마음속으로 박수라도 한 번 쳐주세요.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다른 생물계와 구분되는 확실한 이유 중에 직립도 있고,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도 있겠지만 저는 무엇보다 술을 만들어 마실 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하고 분명한 특성은 바로 음주에 있다, 이런 말씀이죠. 애주가인 제가 늘 하는 궤변입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을 축복하실 때도 술을 사용하셨죠. 

그럼 이만 저는 주님과는 또 다른 주님을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모두들 행복한 밤 되십시오.
 아, 작년 오늘보다 저의 머리는 더욱 가벼워지고 슬픈 모습이 되었답니다. 아직 남들은 봐줄 만 하다고 하지만…. 그리고 오늘 날씨는 1년 전 그날과 똑같이 신선합니다. 그때의 기분이 어제 일처럼 느껴집니다. 블로그란 이래서 좋은 것이로군요.         파비   

제목: 목욕탕에서 만난 남자          2008. 9. 1

오랜만에 목욕탕에 갔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우리 아이 말마따나 여름하고 전쟁을 치르고 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그렇게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밤 사이 패주하는 적군들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산들거리는 바람을 선봉장으로 가을이 해방군처럼 진주해 들어왔다. 아! 얼마 만에 느껴보는 상큼한 기분인가.

살갗을 녹여버릴 듯 짜증스럽게 달려들던 열풍은 간 데 없고 선선한 미풍이 달착지근한 연인의 밀어처럼 감겨든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다정한 연인의 팔에 이끌리듯 여름 내 시달린 몸통을 달래러 목욕탕으로 갔다.
휘뿌옇게 김이 서린 거울 앞에 앉았다. 거울을 바라보았다. 앗! 이게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웬 낯선 남자가 거울 속에 앉아 있었다.

물을 뒤집어쓴 남자의 머리에선 듬성듬성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수리 아래쪽은 텅
비었다. 앞머리 부분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비바람에 스러진 갈대 꼴이다. 바닷물이 불어나 대륙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일본열도마냥 그렇게 간신히 붙어있었다. 몇 달 만에 목욕탕에서 만난 내 얼굴이 이처럼 낯설 줄이야.

나는 평소에 거울을 거의 들여다보지 않는다. 얼굴에 화장품도 바르지 않는다. 달리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귀찮아서 하기 싫은 것이다. 아내가 사다주는 남성용 스킨과 로션은 10년이 다돼가도록 먼지를 이불삼아 화장실에서 잠을 잔다. 그것도 몇 해 전에 혹시나 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다 버렸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나는 머리에 빗질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손으로 몇 번 쓰다듬기만 해도 손질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그저 빗으로 머리를
빗지 않아도 되니 참 편리하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거울은 더욱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물을 한바가지 뒤집어쓰고 보니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얼굴이 거울 속에 드러난 것이다.

갑자기 오래된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유달리 목욕을 즐겼었다. 목욕을 하고 난 다음 머리를 말리면서 거울을 들여다볼 때의 그 흡족한 만족감을 좋아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 날아올랐다가 스르르 떨어지는 머리카락들의 질감은 마치 고요한 겨울들판에 함박눈이 내려앉듯 포근했다. 아, 이다지도 고운 머리카락이라니! 나는 나르시스가 된 기분으로 바라보며 만족감에 취하곤 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머리에 빗질하는 것도 귀찮은 남자가 되었다. 그저 손가락을 빗살처럼 만들어 머리를 몇 번 어루만져 주는 것으로 외출준비를 끝낼 수 있다는 것에 무척 행복해하며 그 편리함에 고마워했다.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게 된 것도 그즈음부터였으리라. 팍팍한 일상 때문이었을까? 나는 어느새 ‘거울도 보지 않는 남자’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거울 속에서 나는 전혀 낯선 새로운 남자를 만난 것이다.

2008년 9월 1일 밤  파비


  ps; 머리를 말리고 거울을 들여다보니 다시 잘 정돈 된 내가 거기 있었다.
        아직 허무하게 비어버린 공간을 감추어줄 만큼의 모발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테지.
        머잖아 앞머리에 위태롭게 매달린 섬들도 필경 침몰해야만 할 운명을
        받아들여만 할 게 분명할 터이다.
        우연히 목욕탕에서 만난 낯선 남자는 내게 새로운 나를, 아니 본래의
        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미래의 내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는 기회도 주었다.
        창 밖에선 지금, 가을바람에 실려 온 빗방울이 마른 대지를 적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