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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군대에서 자대배치받던날 개 맞듯이 맞은 이야기

오랜만에 군대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여자들이 말하기를 남자들 모이면 축구 이야기와 군대 이야기 빼면 시체라고 하던데, 나한테는 별로 해당없는 이야깁니다. 나는 기억에 군대 이야기 별로 한 기억이 없습니다. 사실 나는 할 만한 군대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남들처럼 전방에서 뺑이 친 것도 아니고 후방에서 편안하게 보냈습니다.

우리 학교 때는 교련선생님이 이렇게 군복을 입고 몽둥이를 들고 학생들을 지도했다. 군폭력을 여기서부터 가르친 건 아닌지.


그것도 논산훈련소에서 교리개선팀에서 3년 동안 복무하다보니 별로 군대스런 이야기를 할 만한 게 없습니다. 나는 그래도 꽤 일찍 사수가 된 편인데 나와 나의 조수 세 명은 매일 총과 대검만 들고 한적한 곳에 가서 노닥거리다 해가 지면 부대로 돌아오기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만들어낸 총검술은 내가 제대한 후 교범이 되어 전 군에 보급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제대 후 자동적으로 사수가 된 녀석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녀석들은 여전히 자대에 있지 않고 전국의 부대를 돌면서 신식 총검술을 보급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 놈들 팔자는 나보다 더 편했던 것이죠. 그러나 이런 내게도 이등병 시절은 어김없이 있었으니, 이때야말로 천추에 한을 새길 만큼 아픈 기억이 만들어진 시기였습니다.
 
지옥훈련 같았던 겨울비 속 각개전투, 용감한 군인으로 태어나다

나는 논산훈련소 28연대 7중대에서 신병훈련을 받았습니다. 12월 30일, 억수처럼 쏟아지는 겨울비 속에―겨울비가 여름 장마비보다 더 지독했다―각개전투 4단계 마지막 훈련은 그야말로 지옥훈련 같았습니다. 좌우 그리고 저 앞에서 펑펑 터지는 TNT와 머리위로 씽씽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LMG 탄환은 억수같은 겨울비의 추위도 모두 잊게 만들었습니다. 

이날 우리는 완전 해병대였죠.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각개전투 교장에 설치된 LMG는 거의 6·25 때 쓰던 것으로 노후정도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습니다. 창원이 고향인 입대동기 녀석이 바로 이 부대에 배치되었거든요. 그 녀석은 3년 동안 이 LMG만 쏘다가 제대했는데 졸면서 방아쇠를 당겼다더군요. 아니 그냥 방아쇠를 철사 같은 걸로 고정시켜 놓았다던가? 

여름에는 주전자를 준비하고 있다가 수시로 총신에 부어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한참 쏘다보면 총신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거지요. 그럼 어떻게 되겠습니까? 총알이 훈련병들 머리 위 2M 이상을 유지하며 직선으로 날아가야 하는데 엿가락처럼 휜 총신을 통과한 총알이 그렇게 갈 수야 없는 거지요. 나머진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어떻든 나는 이렇듯 지옥훈련을 무사히 통과하고 이듬해 1월4일 자대배치를 받아 훈련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아침부터 부대 연병장에는 트럭들이 줄지어 서있고 동료들은 하나 둘 그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나는 동료들이 모두 사라지도록 부르지도 않는 겁니다.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나 마침내 나도 이름이 불려지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맨 마지막이었습니다. 이미 서산에서는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를 데리러 온 기간병은 나를 트럭에 태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갈 곳은 바로 28연대와 나무 몇 그루로 담을 치고 있는 부대였던 것입니다. 훈련소에 조교로 차출된 것이었습니다.

아, 이럴 수가… 트럭을 타고 또는 기차를 타고 멀리 전방으로 산골로 떠나는 꿈을 꾸던 나는 몹시 실망스러웠습니다. 폴이 푹 죽어 따라가는 나를 함께 차출된 위에서 말한 창원에서 왔다는 동기 녀석이 위로를 합니다. "야, 그래도 여기가 전방보다는 훨씬 편할 거 같지 않나?" 하긴 그렇습니다. 여긴 그래도 후방이고 게다가 우리는 훈련소 조교가 될 모양입니다.

훈련병으로 빡빡 길 때 조교의 위엄을 익히 보았던 터입니다. 음, 그래 이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겠군. 내가 배치받은 곳은 교도대대였습니다. 교도대대라 하면 무슨 교도소 지키는 부대 같다는 인상을 줍니다만, 이곳은 전방에서 소대장을 마치고 내려온 중대장 TO를 교육시키거나 교관·조교 교육, 훈련소 교장을 관리 등을 담당하는 부대였습니다. 

본부중대에서 대기 중 술 취한 고참병에게 개 맞듯이 맞다

나중에 동기놈은 교장관리 중대로 갔고 나는 교육대 조교로 빠졌습니다. 우리를 데려간 기간병은 본부중대 행정실에 우리를 잠시 대기시켰다가 저녁을 먹인 다음 본부중대 내무반으로 우리를 데려갔습니다. 나와 나의 동기는 이곳이 우리가 30개월 동안 살게 될 최종 종착지라고 착각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이곳은 잠깐 대기하는 곳이었습니다. 

갑자기 병장 계급장을 단 고참이 우리를 불렀습니다. 잽싸게 뛰어가서 배운 대로 "이병 ○○○" 하고 관등성명을 복창하면서 차렷자세로 그 고참의 앞에 섰습니다. 그러자 그 병장은 "이 새끼들이 뭐야. 뭐? 이병? 야이 새끼들아, 등짝은 어디다 빼 먹었어? 니들이 등신이야? 똑바로 다시 못해?" "넷, 다시 하겠습니다. 이등병 ○○○"

그러자 그 병장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외치다시피 말했습니다. "야, 너는 새끼야. 근데 얼굴이 왜 그렇게 건방지게 생겼어, 엉?" 그러더니 다짜고짜 제 뺨을 철썩하고 갈기는 것입니다. 그의 손바닥이 뺨을 훑고 가면서 순간 독한 술냄새가 함께 스쳐갔습니다. 속으로 덜컥 겁이 났습니다. "이 새끼, 술 취했잖아." 

나도 학교 때 집단얼차려 내지 폭력에 많이 시달렸다. 덕분에 군대 가서 적응하긴 쉬었다.


그때 시간이 7시쯤 되었을 겁니다. 그 병장은 나와 함께 간 내 동료는 존재 자체를 까먹었다는 듯이 나만 갖고 갈구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왜 건방지게 생겼느냐는 겁니다. 글쎄, 나는 그 전에도 또 그 이후에도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대체로 인상이 좋다고 말합니다. 인상 덕분에 업무상 도움도 많이 받은 편입니다. 

엎드려 뻗쳐 시켜놓고 배를 찬다든지 쪼그려 뛰기를 시킨다든지 내무반 끝에서 내무반 입구까지 뛰어갖다오기를 시킨다든지 하면서 괴롭히던 그 병장도 결국 점호시간이 다가오자 나를 놓아주었습니다. 8시 30분부터 9시 사이, 점호가 끝나자 그 병장은 다시 나를 불렀습니다. 다른 병사들은 모포를 깔고 취침준비를 하고 있었고요. 

운 좋은 나의 동기 녀석도 모포를 까는 모습이 옆눈으로 보였습니다. 정말 울고 싶더군요. 그런데 이번에 이 친구 눈이 좀 돌아갔다는 느낌이 들면서 공포가 검은 구름처럼 스멀스멀 내 몸을 휘감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졸병에게 병기고에 M16을 꺼내라고 시키더군요. 다른 고참들이 말렸지만, 이 친구를 제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시간 동안 나는 적군을 향해 사용하도록 되어있는 M16소총 개머리판으로 난타당했습니다.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나는 침상에도 올라가지 못하고 군화를 신은 채로 그 미친 병장에게 맞았는데 12시가 넘어 다른 병장들이 달려들어 총을 빼앗고 그를 데리고 나간 후에야 겨우 벗어든 군화에선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습니다.

양말이 질퍽질퍽할 정도였으니 어지간히도 맞앗던가 봅니다. 그리고 그날 아무 생각없이 잠들었습니다. 어떻게 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남들이 놀랄 정도의 기억력을 갖고 있지만, 정말 이때는 기억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틀을 더 묵은 다음 바로 옆에 붙어있는 교육대로 배속받아 진짜 자대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배속받은 자대는 본부중대와 테니스장 하나를 사이로 막사가 나뉘어져 있는 부대였던 것입니다. 자대에 갔더니 오랜만에 졸병 들어왔다고 모두들 반겼습니다. 게다가 내가 자대에 배치받은 날이 토요일이었는데, 다음날 일요일 본부중대와 축구시합이 있었고 내가 이 게임에서 두 골이나 터뜨리며 승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군대는 축구 잘 하면 패가 잘 풀린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더군요. 나는 순식간에 우리 부대에서 영웅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날은 졸병답지 않은 대접으로 우쭐해졌던 하루였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당시 통제군번이었던 노 상병이 나를 불렀습니다. 교육생 막사 뒤로 불려간 나에게 그 고참이 물었습니다.

본부중대에서 맞았다고 다시 자대 고참병에게 개 맞듯이 맞다

"야, 정 이병. 너 본부중대에서 김 병장 한테 개 맞듯이 맞았다메." "네, 그렇습니다." "야, 이 새끼야. 그런데 왜 보고를 안 해. 어? 왜 보고를 안 하냐고. 그리고 너 이 새끼, 왜 본부중대 애새끼들한테 맞고 다니는 거야. 어? 누가 맞으라고 그랬어. 이 새끼야. 본부중대하고 우리가 얼마나 앙숙인지 몰라서 그래? 이 새끼가 빠져가지고 말이야." 

그날 나는 다시 개 맞듯이 맞았습니다. 다행히 노 상병은 M16을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때릴 때는 마치 전우의 걱정하는 마음까지 느껴져 안도하는 마음으로 맞았다는 걸 여러분께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무슨 개소리냐고요? 그게 군대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만 가면 모두 이상해지는 거지요. 

다 때리고 난 노 상병이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습니다. "야, 내가 너한테 감정 있어서 이러는 거 절대 아니다. 다 너를 아끼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다음부턴 절대 본부중대 애들한테 맞으면 안 된다. 그리고 거기 병장이라고 해서 경례할 필요도 없어. 우리는 오로지 우리 부대 고참들만 고참으로 인정하는 거야, 알았어?" 

"이등병 ○○○,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노 상병의 손바닥이 철썩하고 내 뺨을 스쳐갔습니다. "야 임마, 우리는 이등병 ○○○ 이러는 거 아니야. 뭐야 촌스럽게… 그냥 이병 ○○○, 이러란 말이야. 너 가르치는 사수가 안 가르쳤어? 임마 이거 손 좀 봐야 되겠구만." 하여간 이등병인지 이병인지 이 가련한 졸병이 무얼 알겠습니까?  

그래도 이 노 상병이 내가 졸병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인간답게 대해준 고참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데려다 미리 구타를 한 것도 다른 고참들이 불러다 때리게 되면 사태가 복잡해질 것 같아 미리 손을 쓴 거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미리 때려주어서 더 큰 구타를 막아준 노 상병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게 내가 살던 군대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생활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이등병 생활을 거의 마감할 무렵 교리개선팀이 꾸려졌는데 나는 그 일원으로 뽑혔기 때문에 내무반을 벗어나 있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나에겐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죠. 만약 계속 그렇게 맞고 살아야 했다면 내 성격에 무슨 짓을 벌였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ps1; 참, 본부중대에서 나를 밤새도록 때리던 그 병장은 열흘 후에 제대했다. 어디 가서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나 내나 나이도 비슷한데 잘 살고 있겠지. 나는 아직도 가끔 그놈 생각을 하며 이를 갈고 있지만… 
ps2; 내가 이등병 시절부터 제대할 때까지 정기적으로 또는 비정기적으로 꾸준하게 육일명 37호(육군일반명령; 구타근절에 관한 참모총장 명령)를 교육 받았지만, 그 교육 받고 나면 고참들이 다시 졸병들 모아놓고 구타를 했다. 저런 거 보고 간 키우지 말라는 경고의 뜻으로…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기는 일이었다.  
      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