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커서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참으로 날카로운 안목과 놀라운 통찰력이십니다. 정은아 KBS 아나운서가 국민을 향해 대통령 앞에서 말할 땐 기립하라고 주문했다는 지적은 보통사람이라면 그냥 무심코 지나쳤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보통사람이란 오랜 유교적 전통과 더불어 독재에 익숙한 향수를 그리워하는 그런 사람들만을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주어진 환경을 내 탓이려니 하고 살아가는 대개의 서민들을 이름입니다. 그저 일어서라면 일어서고 앉으라면 앉는 그런 백성들 말입니다.
그러나 커서님께선 일개 아나운서가 국민을 향해 대통령 앞에서 기립하라고 훈계하는 장면을 놓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밑바닥 으슥한 곳에 도사린 권력에 대한 굴종과 통치자의 지배욕을 어김없이 파헤치셨습니다. KBS 사장이 바뀌었다고 하더니 국민으로부터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받던 KBS 아나운서의 태도에도 바로 반영이 되나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래서 아직 임기도 다하지 않은 전임 KBS 사장을 쫓아내고 새사람을 사장자리에 앉혔나봅니다.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았던 박정희 씨가 제일 먼저 방송국부터 점령했다고 하더니 역시 대통령께선 역사에서 많은 것을 배우신 분이십니다.
앉아있던 이명박 대통령이 일어서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 옆에 앉아있던
정은아 아나운서도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일어났답니다. 방송에 나와서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지금은 왕조시대가 아니지요.
우리는 북한처럼 '위대한 지도자동지'를 대통령으로 모신 것도 아니고요.
<사진출처 - 경남도민일보>
그런데 혹자는 정은아 아나운서가 단지 질문자가 카메라에 잘 잡히지 않을 것이 염려되어 일어서라고 한 것일 뿐 적절한 진행에 대해 과도한 비난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박합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세계 10위권 안팎의 경제대국이며 21세기를 선도할(?) 대한민국의 공영방송 KBS와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자긍심에 충만한 카메라맨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입니다. 손석희 씨가 진행하는 MBC 백분토론에서 질문자들은 모두 편안하게 앉아서 질문을 하지만, 그 질문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시청자는 단언하건데 한 사람도 없습니다. 또 오히려 서서 질문할 때보다 더 자연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칠 수도 있고 대통령과의 대화라는 어려운 자리가 보다 부드러워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커서님은 그저 무심코 지나쳤으면 좋았을 것을 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일까요? 그래도 명색이 대통령인데 그냥 좀 일어서주면 어떠냐고, 별걸 가지고 다 따진다고 타박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실 커서님의 입장에선 이 문제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란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한 이후에 단 한 번도 국민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겸손한 공복의 자세를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제 1조를 굳이 읽어주지 아니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주인이 국민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집권기간 내내 보여준 대통령의 행태는 국민이 주인이란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마치 과거의 독재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자신의 임무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니 커서님이 국민들더러 기립(!)하라고 훈계하는 정은아 아나운서에게 일갈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저는 이쯤에서 KBS 아나운서마저도 알아서 기는 역사적 반동의 시대에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글을 올린 커서님의 지사적 용기에 다시 한 번 경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중간에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국민과의 대화>를 지켜보신 끈기에도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도무지 신통찮은 방송을 계속 지켜보는 것은 건강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듯하여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술이나 한 병 사서 마실 요량으로 동네 점방에 갔더니 역시 저하고 똑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화가 난 표정으로 술값을 지불하며 “에이... 되지도 않는 이야기 듣는다고 귀만 버렸네”하며 울그락불그락 했습니다. 그러면서 초등학생들에게도 욕을 들어먹는 대통령이 무슨 대통령이냐며 슈퍼주인아저씨에게 항의 아닌 항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슈퍼주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참 비극적인 일입니다!” 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슈퍼주인의 말씀이 초등학생들에게조차 조롱받는 대통령을 둔 국민이 비극적이라는 것인지, 초등학생에게 조롱받는 대통령이 비극적이라는 것인지, 아직 그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답이 어느 쪽이든 비극은 비극임이 확실하다는 사실 만큼은 참으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우리 아이도 말합니다. 자기네 반에서 이명박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우리 아이도 그리고 그 아이의 친구들도 대통령을 조롱하는 노래를 스스럼없이 부르며 놉니다. 그러나 저는 이명박을 조롱하는 노래를 부르며 노는 초딩들을 바라보며 비극이 아니라 어렴풋이나마 희망을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제쯤에나 스스로 일어서서 존경의 표시를 보내며 대통령에게 말하고 싶은 그런 시대를 볼 수 있을까요?
2008. 9. 10 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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