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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투쟁구호 가득한 낙동강 발원지 태백

낙동강 천삼백리 길을 걷는다

  제1구간 너덜샘에서 분천리까지

황지는 태백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황부자란 구두쇠가 있었는데 어느날 대문앞에서 한 노승이 목탁을 두드리며 시주를 청했다. 그러자 외양간을 치고 있던 인색한 황부자는 시주대신 두엄 한가래를 퍼다 “이거나 가져가라”며 노승의 바랑에 넣어 주었다.

마침 방아를 찧다가 이를 본 며느리가 시아버지 대신 용서를 구하며 쌀을 한되박 담아 시주를 올리자 노승은
이 집은 운이 다했으니 따라오되 어떤 일이 있더라도 뒤를 돌아보아선 안 된다
고 당부를 주었다. 아기를 업고 한참을 노승의 뒤를 따라가는데 느닷없이 집 쪽에서 뇌성벽력이 쳤다.


이에 놀란 나머지 노승의 당부를 잊고 뒤를 돌아본 며느리는 그만 아기를 업은 채로 돌이 되고 말았다. 뇌성벽력이 떨어진 황부자의 집터는 땅속으로 가라앉아 커다란 연못으로 변했는데 후에 사람들은 이 연못을 황지라고 불렀다. 삼척군 도계읍 구사리 산마루에 가면 돌로 변한 아기를 업은 며느리(미륵바우)와 뒤따라가다 함께 돌이 된 개(개바우)가 돌미륵으로 남아있는데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황지는 현재 둘레 100m의 상지, 50m의 중지, 30m의 하지 등 세개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이는 것은 상지다.


몇 년 전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다가 벽에 붙은 경주 최부자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아마 지하철공사에서 교훈이 될만한 이야기를 골라 차량 벽에 붙여놓은 모양이었는데 매우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되었다. 요즘도 그렇게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거기엔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우리 속담에 부자는 3대를 못 넘긴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경주 최부자는 대대로 만석꾼을 누렸는데 그 집안에 내려오는 가훈 중에 곳간이 차기를 기다리지 말고 비우라는 가르침이 있었다. 후손들은 이 가르침을 잘 따랐고 대대로 부귀를 누릴 수 있었다.

 

얻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버리고자 하면 얻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런 교훈이었으리라. 버린 것은(희사한다는 뜻도 직역하면 버린다는 것이다) 곧 거름이 되어 다시 더 많은 부를 이 가문에 가져다 주었으리라는 뜻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은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귀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우리땅 걷기" 회원들에게 설명 중인 신정일 선생

그런데 황부자는 인색할 뿐만 아니라 성격도 매우 괴팍했던 모양이다. 시주를 안 하면 그만이지 두엄을 퍼다 노승에게 던져줄 건 또 뭐란 말인가? 어떻든 황부자에게 내린 벌로 인해 만들어졌다는 황지는 그러나 평온했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이 연못은 이 도시의 노인들에겐 더없이 좋은 휴식공간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대한 호수는 아니라도 그래도 꽤나 큰 호수를 기대했던 내 마음은 적이 실망스럽다. 그러나 황지가 지금은 이렇게 작아졌지만 원래의 황지는 이보다 두 배는 넓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많아지고 발길이 잦아지면서 크기도 자꾸 줄어들었을 것이다. 신정일 선생의 설명을 듣고 있으려니 옛사람들이 밟았을 황지가 그리워진다.
 

황지연 입구에는 낙동강 천삼백 리 길 예서부터 시작되다 라고 쓴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서는 물차 두 대가 황지에 파이프를 들이대고 물을 퍼 담고 있었다. 마침 곁에 있던 문화해설사에게 물어보았더니 태백시는 지금 심각한 식수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황지의 물을 퍼다 정수해서 태백시민들에게 공급하고 있다고 했다.

하루 5천톤의 물이 솟는 황지의 물을 퍼담고 있는 물차.



원래 태백시는 1989년까지만해도 이곳 황지의 물을 식수원으로 사용했다. 그러던 것이 정선에 광동댐이 만들어진 이후로는 그곳에서 물을 공급받아 먹었다. 그런데 지난 겨울 내도록 계속된 사상 최악의 가뭄으로 광동댐이 거의 말라버렸다. 그리하여 물을 제대로 공급할 수 없게 된 태백시는 제한급수 중이라고 했다.  
 

그랬구나, 태백시로 들어오면서 보았던 두 주먹을 불끈 쥔 투쟁구호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구나. 나는 낯설지 않은 그 투쟁구호가 적힌 현수막을 보면서 오래 전의 사북사태를 생각했었다. 1980 4, 유신체제의 몰락은 탄광의 노동자들에게도 발언권을 주었다. 그들은 막장에서 나와 사북읍내를 장악했다.

 

당시 동원탄좌 노동자들의 요구는 어용노조 위원장 사퇴임금인상이었다.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말이 전설처럼 떠도는 곳에서 막장의 광산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도시를 장악한 것이다. 당시 사북에서 중3짜리 까까머리였던 후배의 증언에 의하면 총파업을 주도한 것은 남자들이 아니라 여자들이었다고 한다.

 

몸빼 입은 아줌마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파업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였다고 하는데, 심지어는 철도를 점거한 것도 이들 부녀자들이었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파업이랍시고 술에 취한 남정네보다 여자들이 훨씬 조직적이고 강력했다. 원래 모든 무용담이 그러하듯 세월이 흐르면 전설이 담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북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승리로 끝난 20여일 후, 5·17 비상계엄령이 발표되고 진주한 군대와 경찰에 의해 70여명이 연행되고 이중 40여명이 구속되었는데 상당수가 부녀자들이었다는 사실은 그 친구의 말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이 이야기는 황지와 도계, 사북 등지에서 광산노동자로 일했던 나의 형들이 증언하는 바이기도 하다.

 

태백시내 거리 곳곳에 매달린 현수막들은 과거를 회상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제 이곳엔 막장도 광산노동자들도 술 취한 남정네를 대신해 파업을 독려할 여자들도 없다. 오로지 자작나무들이 허옇게 머리를 둘러싼 태백산과 고원도시를 지키고 있는 주민들, 그리고 낙동강과 한강의 발원지를 보고픈 우리 같은 관광객들만이 있을 뿐이다.
 

불끈 쥔 주먹이 그려진 현수막은 한두 개가 아니라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웬 난데없는 투쟁구호란 말인가? 그것은 물 때문이었다. 20만의 인구가 흥청거리던 이 검은 도시엔 아직도 6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떠나지 못하고 남아있다. 그리고 이들에겐 해마다 증가하는 관광객이 주요한 수입원일 것이다. , 어딜 가나 사람이 있는 곳엔 깨끗한 물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물이 끊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대 강인 낙동강과 한강 발원지를 담고 있는 태백시에서 일어나는 일치고는 아이러니였다
. 황지에서 솟아나는 물만으로 수많은 세월을 버텨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광산이 개발되고 급격하게 인구가 늘어나면서 부족한 식수원을 확보하기 위해 인근 정선에 광동댐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댐은 지독한 가뭄 앞에 속수무책, 과거에 비해 3분의 1로 줄어든 인구의 식수는 고사하고 버쩍 말라버린 바닥만 드러내고 말았다. 댐의 바닥엔 물 대신 자갈이 굴러다니는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지난 가을께만 해도 가득 찬 저수량으로 넘실대던 댐이 불과 몇 달 사이에 이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변하다니….

물이 없으면 관광객들도 오지 않겠지만 자신들도 살지 못한다. 이들이 도시 곳곳에 내다 걸어놓은 두 주먹 불끈 쥔 플래카드를 보며 나는 미안함을 느꼈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가야 한다. 저 플래카드 아래를 지나 황지천을 따라 낙동강을 걸어야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며 이곳에 온 목적이다.      파비 <제1구간 일정; 3월 27~29, 2박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