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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곽재우가 신선처럼 살다간 망우정에서

망우정(忘憂亭)

망우정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곽재우 장군이 말년에 은거하다 쓸쓸히 생을 마감한 곳이다. 곽재우는 1602년 경남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낙동강을 바라보는 자그마한 언덕 위에 기와집을 짓고 망우정이라 이름 지었다. 이때부터 자신의 호를 망우당이라 하고 세상과 절연한 채 낚시로 세월을 낚으며 신선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의 행적에 관하여 다소 신비화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를 들여다보면 정말 신선이든 도인이든 되지 않고서는 올바른 정신을 유지하며 살기는 힘들었을 것이란 짐작을 해본다.

1592년은 선조가 왕이 된지 24년이 되는 해였다. 역대 조선의 왕들 중에 선조처럼 무능할 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로 좁은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낸 것으로 평가 받는 왕도 드물다. 

“말짱 도로묵”이란 말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는 선조의 품성이 어떠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는 왕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피난생활의 곤궁함은 왕이라고 해서 피할 수는 없는 노릇. 매일 올라오는 밥상에는 입맛을 당기는 음식이라곤 구경하기 힘들었을 터이다. 

그런데 어느 날, 참으로 맛있는 생선이 반찬으로 올라왔다. 이름이 묵이라고 하는 고기였는데, 감격한 왕은 그날로 그 고기에다 은어란 이름을 하사했다. 뒷날 대궐로 돌아온 왕이 다시 그 고기를 찾아 먹어보았더니 의주행궁에서 먹던 그 맛이 아니라, 매우 실망한 왕은 이렇게 말했단다. “도로 묵이라 하라!” 그래서 ‘말짱 도로묵’이란 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후로  말짱 도로묵이란 “헛수고 말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선조는 이렇듯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성격이었던 데다가 의심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난세가 되면 영웅이 태어나게 마련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의령 사람 곽재우였다. 곽재우는 남명 조식의 문하생이었는데 조식의 제자들 중에 특히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이 많았다.
 

1789년(정조13년)에 지방유림들이 세운 추모비. 망우정 지붕 너머 낙동강은 세월따라 이리로 흐르다 저리로 흐르다 한다.


곽재우는 다른 장수들과 연합작전으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도 전남 담양 출신의 의병장 김덕령과 합동으로 왜적을 크게 물리친 의령 정암진 전투가 유명하다. 또 1594년에는 이순신, 김덕령과 함께 거제 장문포에서 합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특별히 김덕령과는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주 절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런 김덕령 장군이 역모를 꾸몄다는 무고를 뒤집어쓰고 옥사하고 말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덕령은 감옥에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나와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왜군을 벌벌 떨게 하던 의병장의 마지막은 참혹했다. 김덕령 뿐만이 아니었다. 나중엔 이순신도 옥에 갇혀 사형 직전까지 갔다. 유성룡의 변호로 겨우 목숨을 건진 이순신은 백의종군했다.

김덕령, 이순신과 연합작전으로 큰 전과를 올리며 그들과 우의를 다지던 곽재우에겐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곽재우 장군도 한때 경상감사 김수로부터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던 적이 있다. 김수는 왜군을 피해 도망만 다니던 자였는데, 곽재우가 세곡을 훔쳤다고 거짓 고변을 한 것이다.

결국 초유사 김성일의 장계로 풀려나긴 했지만, 곽재우 장군이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을 모두 마다하고 이곳에 은거하게 된 연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럼 선조는 왜 이토록 전공이 특출한 장군이나 의병장들에게 모질었던 것일까? 후세 사람들은 이를 두고 선조의 소심한 의심병과 공을 세워 민심이 두터워지는 장군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의주행궁에서 돌아와 백성들에 의해 시커멓게 잿더미로 변한 경복궁을 바라보는 선조의 심사가 어떠했을까 생각해보면 한편 그럴 듯한 말이다. 그의 눈에는 무력을 갖추고 민심까지 얻은 장수들이 언제든 자신을 권좌에서 밀어낼지도 모르는 위험한 세력이었을 것이다. 말짱 도로묵의 변덕에다 소심한 의심병에 찌든 선조에겐 왜적보다 이들이 더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망우정 편액


   
망우(忘憂)란 근심·걱정을 잊는다는 뜻이다. 곽재우 장군에게 근심 걱정이 무엇이었을까?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의 내용이 선조의 미움을 사 합격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은 이후 출사의 뜻을 접었던 장군은 그러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무려 스물아홉 차례에 걸쳐 벼슬을 제수 받는다.

이중 열네 번은 고사하고 열다섯 번은 출사하였으나 이마저도 곧 사직하고 마침내는 이곳 망우정에 몸을 숨겼다. 여기서도 끝끝내 사정하는 광해군의 청을 못 이겨 두어 번 임지로 나갔으나 곧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곳 망우정에서 곽재우는 모든 곡기를 끊고 신선처럼 살았다고 한다.  

외손에게 상속된 이 집은 나중에 여현정으로도 불렀다.


곡기를 끊고 사람이 살 수가 있었을까. 물론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아련하긴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위인전에 묘사된 장군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어느 날 저녁 해가 질 무렵, 손과 발을 깨끗이 씻고 강을 바라보며 장군은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리고 맑은 술을 한 잔 들이킨 다음 그 술을 다시 귀로 쏟으며 앉은 채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어린 마음에도 장군이 참으로 신비롭게 느껴졌었다. 붉은 옷을 입고 적진을 좌충우돌하던 신과도 같은 존재가 강변에 홀로 앉아 맑은 술잔을 들고 신선처럼 마지막을 장식하는 모습은 고고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오늘 망우정에 올라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은 어쩐지 처량하기만 하다. 

초라한 세칸 짜리 기와집 대청마루 위 편액에 선명한 忘憂亭(망우정), 근심과 걱정을 잊겠다는 저 뜻을 그저 의롭다거나 신비롭게만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떨쳐 일어선 장군들 중에 유독 이순신과 곽재우의 공이 제일”이라고 칭송했다. 그런 장군이 고향인 의령에서 꽤 떨어진 이곳에다 집을 짓고 말년을 보낸 뜻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고 고개를 갸웃거려보아도 짐작하기 어려우니 아직 나는 신선의 경지에 오르긴 틀렸나 보다.    파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