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한 책이다. ‘실록에서 지워진 조선의 여왕’이라고? 조선에 여왕이 있었던가?
<혜주>라는 제목만 보아서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도 없고 또 저자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잘 나가는 공지영이나 전경린, 최근 표절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신경숙 같은 유명 작가가 아닌 바에야 누가 이런 밋밋한 제목의 책에 손을 내밀까. 그런데 부제가 당돌하다.
‘실록에서 지워진 조선의 여왕’
소설은 의외로 속도감이 있었다. 글은 간결하여 짧은 단문들로 채워졌고 거의 은유가 없이 직설적이었다. 깊이 생각하거나 고민할 겨를 없이 책장은 술술 넘어갔다. 시종 연속되는 사건들이 흥분과 긴장을 고조시켰다. 게다가 적절하게 뿌려놓은 성애 장면에 신경이 곤두선다. 어쩌면 그것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핵심 주제였다.
혜주는 주인공 혜명공주가 왕이 된 후에 불리는 이름이다. 작명에서부터 풍기는 뉘앙스가 심오하다. 사실 <혜주>라는 책 제목을 보는 순간 번쩍 누군가를 떠올렸으며 호기심이 극도에 다다랐다. 혜주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 복잡한 성관계로 얽혀있는데 작명처럼 이러한 설정도 독특하기 이를 데 없다. 게다가 혜주가 어릴 적부터 보모상궁에게 방중술을 배웠다는 대목에선 아연해진다. 그리고 민 상궁이 다시 그 예의 방중술을 무극스님에게 전수하고 혜주의 정인으로 삼게 한다는 대목에 이르면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르지 않고 누가 배기랴.
더욱 놀라운 것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지만 무극만은 민 상궁이 혜주의 생모인 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생물학적 모녀관계의 두 여자를 품으면서 무극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단순한 애욕의 포로였을까? 무극은 어떨지 몰라도 혜주는 애욕의 포로였다. 어린 그녀가 어떻게 그토록 빨리 성에 눈을 뜨고 집착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이 책에서 별다른 설명은 없다. 다만 혜주의 생부와 생모의 전력으로부터 그것이 유전 문제가 아닐까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 초반부의 혜명공주에게 연민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달째 폭우가 쏟아져 온 나라가 몸살을 앓는 상황에서 숨겨둔 정인과의 정사가 그리워 궁궐을 빠져나가 며칠씩 나타나지 않는 여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혜주가 열락에 몸을 맡기고 있는 사이 한강이 범람하여 두물섬의 마을 한 개가 수몰되고 주민 백여 명이 몰살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급한 보고도 정념에 사로잡힌 혜주를 빼내올 수는 없었다. 닷새의 휴가를 모두 채우고 돌아온 여왕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이렇게 말한다.
“청년들은 헤엄쳐 나왔다는데 다른 사람들은 뭐했나요? 물가에 사는 사람들이 헤엄도 하나 못 치나요?”
자, 이쯤 되면 천하에 우둔한 사람이라도 상상력은 한군데로 모아진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두물섬 참사가 잊혀갈 즈음 이번엔 역병이 돌아 수많은 백성이 죽어나간다. 시체가 쌓여 썩는 냄새가 진동하지만 조정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니 하는 일이 없다고 하는 게 제대로 된 표현일 것이다. 결국 반정이 일어나고 혜주는 폐주가 되어 쫓겨날 운명에 처한다. 때는 혜명공주가 왕좌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해. 이 또한 의미심장한 메타포다.
간결하고 직설적인 문체의 소설은 전반적으로 투박했다. 명쾌한 설명이 없는 설정들에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한다. 갑작스런 사건 전개에 당혹스럽기도 하다. 때로는 어이없는 대사들에 실소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왕비가 회운사에서 시중을 드는 무극스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우리 공주와 짝을 맺어주면 참 좋겠구나”라고 생각하는 대목은 실로 난센스 아닐지. 어려서 고아가 된 무극은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천출인 것이다. 대체적인 구성과 문장도 매끄럽지 못하다. 너무 촌스럽다거나 속물적인 표현들도 문제로 지적될 수 있겠다.
그러나 빠른 템포로 전개되는 <혜주>는 힘이 있었다. 박진감이 넘쳤다. 재미있고 다음 장면의 기대로 책장 넘기기를 멈출 수 없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 아무리 지고한 사상이 담긴 글이라도 재미가 없어 읽히지 않으면 그뿐이다.
<혜주>에는 시대를 엿보게 하는 무수한 장치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다름 아닌 노천이란 책사였다. 그는 이른바 3인방의 한사람으로 여왕의 심복이다. 하지만 그 정체는 의혹투성이다. 두물섬 참사에 대한 대책을 묻는 혜주에게 그는 이렇게 간한다.
“(괘념치 마시옵소서.) 백성들은 마구간 누렁소나 뒷간 똥돼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들은 나면 죽고 죽으면 또 태어나는 법이옵니다. 부디 성심을 굳건하게 보지(保持)하시옵소서.”
그랬던 노천은 혜주가 폐주가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삿갓을 쓰고 대중들 속에 숨어 이렇게 중얼거렸다.
“폐주의 패망은 그의 운명이요, 그를 망하게 한 것은 내 소임인 것을…….”
그는 ‘내부자’였던 것일까? 노천은 본디 술객으로 앞날을 내다보는 신통력이 있었다. 그런 자를 내부자로 배치했다는 것은 이 소설의 작자 또한 신통력이 있다는 뜻이렸다. 소설 <혜주>는 영화 <내부자>가 개봉되는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출판되었으니 영화의 감독과 교감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실로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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