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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그들이 역사교과서를 지배하고자 하는 이유

진리경찰이란 필명을 쓰는 온라인 활동가가 있었다. 그가 요즘도 활동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명박 정권 초기 촛불정국을 전후하여 맹활약(!)한 그는 지독스럽게 빨갱이를 혐오했다. 아니 혐오하고자 하는 모든 대상을 빨갱이로 몰았다.

 

그는 가끔 시인 흉내도 냈는데 다음과 같은 글을 다른 이의 블로그에 댓글로 남기기도 했다.

 

장하다 대한민국 전투경찰

그대는 우리의 전사우리의 자랑

대한민국 전투경찰

그대는 우리의 폭동진압 공격특별대원

(중략)

수백 개의 돌과 쇠파이프와 화염병과

머릿속이 새빨간 벌레 같은 폭도들로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북괴의 흉악한 공작을

그대 몸뚱이로 내리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면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하략)


이미 오래전에 증발해버려 어느 누구의 기억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을 필명이 왜 무단히 생각났을까? 그것은 아마도 <1984>에 등장하는 사상경찰과 너무도 흡사한 이름 때문이었으리라. 물론 진리경찰이 곧 사상경찰을 흉내 낸 것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나의 상상력일 뿐이다. 어쩌면 진리경찰은 <1984>의 존재 자체를 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진리경찰은 <1984>를 읽었을 것이다. 조지 오웰의 다른 명저 <동물농장>도 함께. 죽을 때까지 철저한 사회주의자로서 이상을 꿈꾸었던 오웰의 이력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의 저작을 반공주의 교과서로 활용했던 점을 생각한다면, 진리경찰은 다분히 이념적 의지가 함축된 작명이었을 것이란 짐작도 가능하다.


젊은 작가 오웰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스페인내전에 참전했다. 영국독립노동당과 스페인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연합 민병부대에 배속된 그는 이곳에서 적과 싸우기에 앞서 같은 편인 스페인공산당의 탄압으로 동지들이 학살되는 장면을 목도하게 된다. 이른바 친 소련파 스페인공산당의 헤게모니 투쟁이다.


긴박한 상황, 자신도 체포되면 총살당할 위기에 처하지만 오웰은 아내이자 동지 아일린과 함께 가까스로 탈출해 영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즉각 <카탈로니아 찬가> 저술에 돌입한다. 엄청난 충격에 분노의 화신처럼 그의 펜은 맹렬하게 전체주의를 향해 포탄 세례를 퍼붓는다. 스탈린주의로 변질된 공산주의는 그에게 전체주의였다. 사회주의 이상사회를 위해 공산주의는 1차적으로 척결되어야 할 악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카탈로니아 찬가>에 이어 <동물농장><1984>가 탄생한다. 오웰이 스페인내전에 참전하여 스탈린주의자들의 참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세 권의 의미 있는 저술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아이러니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실제 현장을 기록한 르포임에도 80여 년의 시공을 넘는 데는 한계를 보여준다. 아무래도 사회,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당시와는 너무나 달라진 오늘날의 눈으로 그 시대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에 반해 <동물농장><1984>는 다르다. 때로는 사실을 다룬 기록보다 허구를 그린 소설이 훨씬 진실을 잘 전달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두 편의 책은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1984>는 조지 오웰이 마치 예언자의 눈으로 과거의 시점에서 오늘을 보며 글을 썼던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다.


<1984>는 마치 예언서와 같다. 1940년대에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해냈을까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에게 증오심을 주입하고 세뇌하는 얇은 금속판 통제 장치 텔레스크린은 하루 종일 쉼 없이 떠들어대는 종편방송들과 곳곳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를 연상시킨다.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들을 째려보며 증오를 촉구한다. 잘 차려입은 붉은 얼굴들이 오리처럼 경쟁하듯 꽥꽥거리는 화면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함께 꽥꽥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현대의 텔레스크린 앞에서 증오와 적의로 뭉쳐진 진리경찰들은 그렇게 해서 또 생산되고 단련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1984>에서 우리가 전율하는 것은 바로 다음 말이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

 

이 말을 다시 쓰면 이렇게 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도 지배하기 위해 과거부터 지배하고자 한다.”

 

섬뜩하지만 이보다 진실을 담은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1940년대의 런던에서 2015년 서울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지 않은가. 박근혜 정권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은 괜한 것이 아니다. 빅 브라더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과거를 자기 편의대로 고치고 싶은 것이다. 현재처럼 미래도 지배하기 위해…….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기록국에서 했던 일은 과거 발행된 신문기사를 고치는 일이었다. 기록국의 다른 동료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채 홀로 빅 브라더의 명령에 따라 이미 발행된 신문을 끄집어내 오늘 일어난 결과에 적합하게 새로 써서 다시 편철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매일매일 새롭게 고쳐 써서 편철되는 역사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영혼이 없는 활자들일 뿐이다. 2015년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집필진들도 바로 그런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윈스턴들처럼 그들은 은밀한 곳에 숨어 서로의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채 과거의 역사를 끄집어내 지울 것은 지우고 새로운 활자들로 채울 것은 채울 것이다.


맑지만 쌀쌀한 4월 어느 날 13시 괘종시계가 울리는 것으로 시작한 <1984>는 비극적 엔딩으로 결말짓는다. 서양에서 13은 불길함을 나타내는 숫자다. 우리의 미래는 어떨 것인가. 어제, 대통령은 자기를 비판하는 국민들을 향해 “IS 테러범 같다며 강한 적의를 드러냈다. 텔레스크린이 ‘2분 증오’로 골드스타인을 단죄하듯, 방송들은 연일 시위대에게 증오와 적개심을 퍼부을 것이다.

 

1984년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