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슬픈 사연도 시간이란 처방은 자연스럽게 상처를 아물게 한다. 그런데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도 불리게 하는 이런 습성은 이처럼 순기능만 하는 건 아니다. 종종 바람직하지 못한 다른 용도로 이용되기도 한다. 주로 세속적인 정치인들에게 활용되는 이 속성은 냄비근성이라는 비아냥조의 대접을 받는다.
석궁테러, 한 대학교수가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석궁으로 쏘아 상해를 입혔다고 해서 떠들썩한 사건이 있었다. 2007년 1월의 일이니 벌써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석궁에 맞았다는 판사는 피를 흘리며 병원에 실려 갔다고 했으니 혹시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를 받았던 기억이 아련하다. 이 사건 역시 망각의 늪 속에 깊이 빠졌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신문기자와 공동취재를 가다
며칠 전,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기획취재부장)가 물었다.
“부권씨, 혹시 김명호 교수 사건 알아요?”
“아뇨. 모르겠는데요.”
“아, 그러면 석궁사건이라고 들어 봤죠?
“아, 예, 기억이 나는 것 같습니다.”
“창원에 박훈 변호사가 그 사건 변호를 맡았는데, 이게 애매한 게 참 많은 사건이거든요. 내가 낼 모래 취재를 갈 건데, 같이 안 갈랍니까? 이런 사건들은 신문기자하고 블로거가 공동으로 취재를 해서 세상에 많이 알려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혹시 함께 갈만한 블로거 생각나는 사람 없습니까?”
오늘자 경남도민일보에 실린 경남도민일보 기사
그리고 어제 김주완 기자와 함께 박훈 변호사 사무실에 갔다. 우선 사무실 분위기는 말쑥하고 단아한 느낌이었다. 일반 변호사 사무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따로 변호사실이 마련되어 있지도 않았다. 직원들과 함께 사무실을 쓰고 있었다. 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 출신답게 권위의식 같은 건 따지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변호사실이 있으면 조용히 취재하기에 좋았겠지만, 다행히 그날은 일요일이라 다른 직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석궁사건 담당 변호사는 소탈하고 서민적인 인상이었다
인상이 매우 편안했다. 말투도 서글서글한 것이 상대를 편안하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변호사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호사들은 말투나 인상에서부터 매우 칼날 같은 인상을 풍긴다는 게 내 선입견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질문하는 기자 앞에 앉은 변호사가 마치 취조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착각도 들었지만, 인터뷰는 매우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박훈 변호사는 고대법대를 졸업하고 한때 동양매직에서 영업사원으로 뛰기도 했다. 대리점을 개설하고 판매를 촉진하는 것이 주로 그가 하는 일이었다. 실적이 매우 좋았다. 회사 전체로 보아서도 최고 실력 있는 영업사원이었다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김기자가 질문하자,
“에이, 뭐. 나는 한 번도 밀어내기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실적이 좋긴 좋았으니까….”
밀어내기란 영업이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대리점에 상품을 떠넘기는 매출방식이다. 가매출로 불리기도 한다. 심한 경우에는 회사 창고에 물건은 그대로 놔두고 송장만 끊어서 대리점에 안기는 편법도 한다고 한다. 대리점으로서는 골치 아픈 일이지만, 거역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나도 직장생활 할 때 이런 일은 무시로 보아온 터였으므로 별로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아뭏든 밀어내기를 안 하고도 실적이 좋았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그의 능력이나 열성이 탁월했다는 걸 은근히 강조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며 강직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가 금속노조 법률원에서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나선 것부터 그렇지만, 그곳에서 그는 100만원, 많이 받아도 300만원이 넘지 않는 수입으로 8년을 버텨왔다. 그에게 책정된 명목상 임금은 500만원이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이제 금속노조 법률원에서 독립해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지만, 여전히 그의 주 수임대상은 노동사건이다.
“부권씨는 뭐 궁금한 거 없어요? 질문할 거 있으면 지금 물어 보시죠.”
아무도 맡지 않는 사건을 수임한 운동권 출신 변호사
김주완 기자가 내게도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이미 김주완 기자의 질문에서 모든 게 나왔다. 그는 취재 전부터 치밀하게 공부를 하고 온 듯했다. 택시를 타고 박훈 변호사 사무실로 가는 내내 취재자료를 복사해서 줄을 그어가며 읽고 있었다. 박훈 변호사도 대단하지만, 그를 취재하러 가는 기자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있는 권력 고법 부장과 싸우는 변호사도 대단하지만, 이 사건의 내막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기자의 싸움도 만만하지 않았다.
취재하러 가는 택시 안에서 취재자료를 미리 훑어보는 김주완 기자.
“저야 뭐 특별하게 물어볼 게 없는데…, 학교 다닐 때 학생운동 한다고 공부도 안 하시고, 졸업하시고는 영업사원으로 몇 년 뛰어다니시다가 갑자기 사법시험 공부 한 2년 해서 그렇게 철커덕 붙는 걸 보면 머리가 대게(‘대단히’의 경상도말) 좋으신가 봐요?”
“하하…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법대를 나왔지만, 사실 학교 다닐 땐 공부할 시간도 없었죠. 엉뚱한 데 쫓아다니느라고요. 그렇지만 법이란 게 그래요. 결국 법이란 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사회과학이거든요. 법 공부는 안 해도 사회과학 공부는 많이 했죠. 정의,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 삶인가? 결국 그런 이야기니까 별로 어려운 게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사회에 대한 애정이나 통찰력이 있으면 되는 거지요.”
어려운 게 아니라는 그의 말은 1%도 수긍할 수 없었지만, 법은 곧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며 그래야 한다는 그의 답변은 정말 훌륭한 철학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어떻게 금속노조 법률원에서 8년을 버텼으며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석궁테러사건 김명호 교수의 변론을 맡았는지 이해가 가는 답변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엉뚱하긴 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훌륭한 질문을 한 꼴이 되었다고 자랑을 해도 별로 욕먹을 거 같지는 않다.
탄광촌에서 자란 어린 시절
박훈 변호사의 부친은 전남 나주 출신으로 탄광 일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러다 문경 탄광촌에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고 태백의 광산촌에서 형이 태어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보령에는 성주탄광이 있었다. 그러다 8살 때 전남 화순에 있는 탄광촌으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나머지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화순은 지금은 광주의 베드타운이 되어있는 것처럼 당시에도 광주와 매우 밀접한 곳이었다.
광주항쟁 당시 그의 동네는 시민군의 무기조달처였다고 했다. 만여 명이 넘는 광부들이 일하는 화순탄광에는 다이너마이트와 예비군 훈련용 칼빈 소총이 있었다. 어린 시절 무기와 사람을 싣고 떠나는 군용트럭을 보았다. 유언비어도 난무했고 전쟁의 공포도 느꼈다. 너무 어려서 실체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던 그는 대학에 진학하고 그해 3월 8일, 처음 열린 학내집회에 주저 없이 참여했다. 누구의 권유도 없었다. 완전한 자의였다. 당시는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총학생회가 막 태동하던 시기였다.
그가 사람에게, 특히 고난과 역경 속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그의 어머니 고향이 문경 탄광촌이란 사실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반가웠다. 나 역시 문경 탄광촌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나왔다. 그곳은 나에게 영원한 노스탤지어이기도 하다.
어쨌든 김명호 교수가 박훈 변호사를 선택한 것은 피고의 입장에선 참 잘 한 일이었던 것 같다. 물론 아무도 맡아주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그는 이 사건에 가장 적합한 변호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편 김명호 교수나 그의 가족들이 어떻게 서울에서 창원에 있는 변호사를 알고 찾았을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다.
고지식하고 타협을 모르는 피고인과 강직한 성품의 변호사의 만남
그러나 그 점에 대해 따로 물어보지 못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물어보아야겠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김명호 교수에겐 자신을 변호해줄 변호사보다 동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부당한 사법부의 폭력에 저항하여 손을 맞잡고 함께 싸워줄 동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미 판사들이 모인 회의에서 엄단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재판을 진행하는 이 부조리하고 부당한 엉터리 재판에 맞서 싸워줄 용감한 변호사는 대한민국에 박훈 밖에 없다는 판단을 김명호 교수나 그의 측근들은 했을 것이다.
재판은 끝났다. 대법원 판결도 나왔다. 징역 4년 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박훈 변호사와 김명호 교수에게는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다시 민사소송이 진행 중이다. 부당한 재판으로 인해 입은 피해에 대해 손해를 배상하라는 청구를 해놓은 상태다. 처음에 10 원을 청구했지만, 이 금액으로 재판을 진행하면 소액심판 사건으로 떨어지게 되므로 다시 1억5천만 원으로 소송가액을 조정해서 합의부 재판으로 옮겼다. 박훈 변호사(왼쪽) 사무실에서 노트북을 놓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박훈 변호사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 사건은 조작이 명백해요. 아니 자기들이 정당하면 왜 혈흔 감정에 응하지 않는 겁니까? 기각한 판사 말로는 피해자인 부장판사의 혈액을 채취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거 아주 쉬워요. 명령하면 되지요. 그리고 응할 의무가 있는 거에요.”
재판부는 별 설명 없이 피고 측이 요구하는 증거물에 묻어있는 혈흔이 누구의 것이지를 감정하자는 요구를 기각했다. 이미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는 당시 제출된 피해자의 피가 묻어있다는 옷가지에 묻어있는 혈흔에서 유전자 감식 결과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 혈흔이 누구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어떤 남자의 혈흔이라고만 나와 있다. 이게 누구 것인지 감정하자는 요구를 재판부는 아무 이유 없이 거부하는 것이다.
“석궁테러? 재판부가 저지른 사법테러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재판을 대한민국 사법부가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더욱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피해자(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와이셔츠에는 혈흔이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겉옷과 내의에 선명하게 묻어있는 피가 가운데 입는 와이셔츠에는 한 방울도 흔적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풀린다고 해도 또 다른 의문들은 계속 남는 것이지만, 도대체 이 가장 기본적인 의문에 대해 해명할 의지가 없는 재판부를 보면 기가 막힌다고 했다. 대명 천지에 이런 재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가장 유력한 증거를 재판부가 스스로 기피하는 것인지 그 속내는 재판부 외에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 재판을 보면 경찰에서 확보한 흉기로 사용된 부러진 석궁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사라졌고, 국과수에서 조사하고 유전자형을 확보하고 있는 혈흔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재판부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희대의 미스터리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종종 벌어졌던 역모사건을 다루는 국청에서나 벌어졌음직한 무모함이 대한민국 법정에서 벌어진 것이다.
“대법원까지 형사재판이 모두 끝났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면서도 민사재판을 걸고 계속 싸우는 것은 역사에 기록을 남기기 위함이에요. 언젠가는 세상이 변할 겁니다. 사법부도 언젠가는 상식 앞에 손을 드는 날이 있을 겁니다. 그때를 위해서 기록을 만들어놓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해달라는 기자에게 박변호사는 말했다.
언론이 조명 안 해주어도 진실은 끝까지 밝힌다
“당부가 뭐 있겠어요. 언론이란 게 끈질기게 보도하고 하는 것도 아니니까…. 아무리 큰 사건도 두 달이면, 뭐 끝나고 말잖아요? 언론의 조명 못 받아도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하는 사건이 많지요. 이 사건도 그 중에 하나에요.”
박훈 변호사는 언론에 대한 신뢰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했다. 언론 역시 망각의 늪에서 별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시류에 영합하고 선정적인 기사에 매달리는 것은 언론의 명백한 한계다. 진실을 끝없이 파헤치고 밝혀내고자 하는 의지가 언론에 부족하다고 비판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언론도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상품일 수밖에 없다는 변명으로 회피하기엔 너무나 빈약한 변명이 아닌가.
끝으로 박 변호사는 김명호 교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고지식한 분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고지식한 분이죠. 이 말은 어떤 경우에도 타협이나 굴복을 안 할 사람이란 뜻이에요. 억지를 부린다고요? 그런 게 절대 아니에요. 생각해보세요. 아들이 군대 가서 죽었는데, 어떻게 죽었다는 건지 아무도 모른다고 해보세요.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냥 있겠어요? 바로 그런 거죠. 아주 간단하게 진실을 밝힐 수 있는데 재판부가 그걸 거부했어요. 이건 절대 용납이 안 되죠. 아마 이 양반, 끝까지 갈 거에요. 나도 마찬가지고….”
나는 김명호 교수가 사건 당일 왜 석궁을 들고 판사 집에 찾아갔었는지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리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또 이 사건에서 그건 쟁점도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나 상식적인 의문, “왜 사법부는 혈흔감정을 거부하는 걸까? 왜 스스로 의혹을 사는 행동을 할까?”
사무실을 내려와 우리는 경창상가의 돼지국밥집에서 따뜻한 국밥 한 그릇씩을 먹었다. 그리고 곧바로 헤어져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을 어루만지며 그가 하는 진실작업이 성공하길 빌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왜? 무엇 때문에 혈흔 감정을 하지 않겠다는 것일까? 법원이 마음만 먹으면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일을…. 왜? 무엇 때문에 세인의 의혹을 감수하면서까지 상식을 포기하는 무리수를 두는 것일까?”
민사소송(재판부의 불법부당한 재판으로 인한 손해에 대한 배상 청구)에서 다시 혈흔감정을 신청해 놓았다고 하니 법원의 대응을 유심히 지켜볼 일이다. 이번에도 거부할까?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을 이번에도 거부한다면 이 재판은 명백히 조선시대의 국청보다 못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추위는 여전히 매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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