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은 분분하였다. 참 잘 만든 영화라는 쪽과 그렇지 않다는 쪽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하나의 감상에는 모두 동의하였다. 눈물 없이 보기 힘든 영화라는 것. 분분하였으나 통일된 것은 공감, 바로 공감이었다.
극장을 나서면서 원호가 물었다.
“감회가 새로우셨겠네예.”
“허허, 뭘…….”
그러나 실제로 그랬다. 나는 과거의 추억에 잠겨, 감정에 겨워 보았다. 그리고 영화 속 주인공들을 걱정했다. 왜냐하면 그 과거의 추억이란 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으므로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어둠이 점령한 0시, 우리는 자동차가 드문드문 지나가는 희뿌연 도로를 건너 술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함께 영화를 보았던 변호사가 말했다.
“참 나도 눈물 짜며 영화를 봤네요. 그런데 법률적으로는 논란이 있을 장면들이 많았어요. 예를 들면 아줌마가 폭행당하는 장면이라든가…….”
그것은 법률가로서 정의에 대해 갖는 당연한 의구심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며 엄연한 부조리가 정의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마트의 여성노동자들이 계약의 성실한 이행을 촉구하며 농성하던 천막이 무자비한 용역들의 쇠파이프와 워카발에 짓이겨질 때, 그곳에 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며칠 전 읽었던(그리고 페북에 썼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경구가 생각났다.
“인디언들은 서구의 초기 정복자들과 맞서 싸울 때, 오랫동안 그저 창으로 그들의 어깨를 때리는 방식으로만 대응했다. 그럼으로써 자기들이 창으로 찌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인 것이다. 하지만 서구인들은 총을 쏘는 것으로 그것에 대응했다. 비폭력은 한쪽만 실천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내가 위 인용문을 경구(警句)라고 하는 데에는 의미가 있다. 비폭력은 결코 일방에 의해서만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은 진리이다. 자본은 겨우 공장을 점거하는 정도에도 폭력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구사대란 이름으로 용역을 고용해 본원적인 폭력을 전격적으로 행사한다. 폭력에는 폭력만이 방법이다.
그리하여 영화 <마트>의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면서 감동적이었다. 그 장면 뒤에 검은 화면에 피어오르는 자막은 차라리 사족이었다. 없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저 카트를 몰고 돌진하는 아줌마들의 결의에 찬 눈빛들, 그것으로 끝내었다면…… 그 이후의 일은 우리 모두의 상상으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날들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다.
@다음영화
ps; 라스트 자막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투쟁 끝에 회사와 협상한 결과 노조지도부만 빼고 나머지 조합원은 모두 복직시키기로 했다는 것이다. 절반의 승리였다. 그러나 길게 보면 이는 승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노조지도부만 뺀다는 것은, 앞으로 누가 감히 노조지도부가 되려 하겠는가를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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