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산문집 - 짧은 여행의 기록을 읽고 있다. 재미있다. 그의 문체가 반갑다. 아, 나는 왜 지금껏 기형도를 몰랐을까. 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도 함께 있다. 간간이 지루해지면 그의 시를 읽는다.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는 한 심야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아마도 영화를 보다가 뇌졸중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죽음조차도 극적이다. 그는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았던 듯 시와 산문들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는데, 결국 젊은 나이에, 서른을 넘기지 못하고 망자들의 세계로 떠났다.
짧은 여행의 기록 첫 번째 행선지는 특별하게도 대구이고 거기서 장정일 소년을 만나 호프집에 갔다가 너무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는 기형도의 성격을 눈치 챈 장정일의 배려로 자리를 옮겨 윈저궁을 본뜬 지하레스토랑에서 맥주를 마신다. 이때가 1988년 8월 2일 밤이었으며 기형도는 이듬해 3월 7일 사망하였으니 장정일과의 해후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리라.
8시 46분이다. 재빨리 설거지를 하고(그러지 않으면 애들 엄마가 늦게 들어와 화를 낼 것 같다. 오늘은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다) 약수터에서 물을 떠다 놓은 다음 영화를 보러가야 한다. 심야영화의 제목은 카트다. 얼마 전에 이성철 교수에게 “카트요? 처음에 저는 그게 뭘 자르는 이야긴 줄로 알았습니다”라고 말했던 이가 바로 나였다.
어떤 영화일지 기대가 된다. 게다가 초대받은 영화다. 공짜라서 더 기대가 된다. 초대한 이는 마산의료원에서 칼잽이로 근무하는 최원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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