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일이 지나도 헤어나지 못하는 꼴을 보고 이상하다 이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하지만 우리 형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신다면 그런 말씀 못하실 것이다. 중2 중퇴에 시멘트공장으로, 채탄장으로, 후끼야마로, 사끼야마로, 그러다 잠시 세신실업 노동자로 있던 형이 마지막으로 30년 정착한 곳은 전라도 목포의 바다였다. 그리고 결국 바다에서 죽었다. 어린 형과 빗물 떨어지는 처마 밑에 서서 오들오들 떨며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나도 원래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대구에 있는 염색공단으로 갈 참이었다. 그걸 형이 막았고 중학교만이 아니라 운 좋게 기계공고까지 나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형은 결국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먼 바다에서 바라보기만 하다가 떠났다. 형은 자신의 짐도 하나 남기지 않았다. 형의 것이라 생각하고 가져왔던 앨범, 수첩 등이 든 보따리는 모두 내 것이었다. 우리 애들 사진도. 심지어 형은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받았던 상장이며 통지표까지 보관하고 있었다(보니 대체로 온순하고 착실하고 성실한 학생이었다고). 그런 형은 목포에서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지면 늘 동생 자랑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형이 남긴 것이 하나 있다. 잊어버렸던 아니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가족사. 마치 요즘 유행하는 연속극 대본 같은 이야기. 뻔한 이야기다. 비밀의 문. 완전 소설이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ㅠㅠ
<페북 탐라에 쓴 글을 기록 차원에서 여기 보관하기로 함>
왼쪽이 형. 6학년이고 나는 1학년 때다. 뒤에 보이는 초가집이 우리집이었고 그 앞에 신작로가 있다. 가로수는 아마도 미루나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가 서있는 바로 뒤 도랑 앞으로는 모두 논이었다. 가을이면 이곳에서 메뚜기를 잡아 구워먹었고, 여름에는 개구리를 잡아 뒷다리만 잘라내 연탄불에 구워먹었었다. 그게 우리들 간식이었다.
고1 겨울방학 때다. 형은 방위 제대하고 진주에 내려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진주성에서 찍었다.
온순 착실하고 책임감이 강하고 뭐 대충 그런 학생이었다. 하긴 거의 대부분이 온순착실하다. 성적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늘 올수라고 생각했는데, 학년말 때 체육을 미를 받았다. 그래서 석차도 밀렸다. 생각해보면 운동은 잘하는데 체육을 잘 못했던 듯. 턱걸이는 철봉에 매달린 채 몸을 올리지를 못하니 한 개도 못하고 뜀틀은 넘지를 못했고 평행봉은 아예 올라가지도 못했다. 하지만 축구는 거의 선수급이었고 100미터는 12초8까지 뛰었다. 아무튼 체육은 이론에도 약해서 필기시험을 쳐도 엉망이었음. ㅠㅠ 중학교도 형이 보내주었는데 통지표도 형이 간직하고 있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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