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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합천 홍류동 소리길은 왜 소리길일까?

언제부터인가 무슨 길 무슨 길 하는 게 유행이 됐습니다. 제주 올레길이 히트를 치고 나서부터 너도나도 덩달아 올레길 만들기가 유행하더니 그게 조금 진화해서 둘레길도 생기고 이제는 지자체별로 특색에 맞게 이름을 따로 만들기도 합니다.

마산에도 그런 영향으로 길이 하나 생겼는데 구산면 저도에 가면 비치로드란 길이 있습니다. 풀어보면 바닷가길 정도가 되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비치로드란 이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바다가 저 아래 까맣게 보이기는 하지만 바닷가를 밟을 수 있는 길이 사실은 없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비치로드란 생경한 외국말이 귀에 익숙하지 못한 탓도 있었을 테지만 길 이름과 실제 모양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좋은 길을 걷고 난 보람에 비해 뭔가 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깁니다. 명실상부란 말도 있지만 실제를 잘 드러내는 이름을 짓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에 비해 올레길이니 둘레길이니 하는 이름들은 얼마나 편안합니까? 대구 팔공산에 가면 누리길이란 이름도 있다는데 이 또한 잘 지은 이름인 듯합니다. 명실상부한 이름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비치로드란 버터 냄새나는 이름보단 훨씬 정겹지 않습니까? 아무튼 좋은 바람입니다.

△ 우리를 인솔하고 간 경남도민일보 부설 갱상도문화학교 추진단장 김훤주 기자의 사진을 잠시 빌려왔습니다. 홍류동 소리길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이런 절경들이 걷는 이들의 발목을 잡습니다.

합천에도 이런 바람을 타고 길이 하나 생겼는데 이름 하여 소리길입니다. 소리길. 어감이 참 좋습니다. 대체 어떤 길이기에 소리길일까요? 소리길은 유명한 홍류동 계곡에 생긴 길입니다. 홍류동 하면 그 유명세에 비해 사람들의 발길을 별로 타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한 곳이지요.

보통 사람들은 해인사 입구에 만들어진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해인사를 둘러본 다음 곧장 가야산을 정상을 정복하고 돌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였던 것입니다. 물론 저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다보니 역시 저도 홍류동을 듣기만 했을 뿐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최치원이 그 경이로운 아름다움에 탄복해마지 않았다는 홍류동 계곡에 생긴 소리길이라니. 도대체 어떤 길이기에 소리길이라 이름 지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소리길에 들어서자 벌써 가슴이 설레고 귀가 쫑긋거립니다.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요?

물소리였습니다. 길을 걷는 내내 단 한시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물소리. 그래서 소리길이었나 봅니다. 인근 마을에 사는 어떤 이의 대답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계곡길을 걷는 내내 물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으니 그래서 소리길이지요.”

그러고 보니 그랬습니다. 얼마 전에도 경남도민일보 갱상도문화학교추진단을 따라갔던 문경새재 고갯길을 걸었던 적이 있었지만 이런 소리가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았습니다. 문경새재 1관문에서부터 2관문까지 걸을 동안 계곡물이 단 한시도 곁을 떠난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그만큼 홍류동 계곡이 크고 우렁차다는 뜻일까요? 홍류동 계곡은 실로 크고 우렁찼습니다. 우선 계곡을 덮고 있는 바위들의 색깔에서부터 압도적인 느낌이 전해져왔습니다. 소리길을 적당한 사이를 두고 갈라 우뚝 서있는 거대한 암벽들이 걷는 이들의 발길을 사로잡습니다.

물론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 길이 여기만 있으란 법은 없습니다. 지리산 뱀사골에 단장된 길에도 물소리가 끊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뱀사골에선 듣는 물소리와 여기서 듣는 물소리는 뭔가 확실히 다른 느낌을 줍니다.

널찍하게 잘 단장된 뱀사골 탐방로에 비해 오솔길 같은 홍류동 소리길의 모양 때문일까요? 그렇습니다. 소리길은 오솔길이었습니다. 구불구불하고 적당히 오르내리는 오솔길. 가는 내내 울창한 숲속에선 상큼한 바람 냄새가 코를 자극합니다. 물소리와 바람 냄새의 절묘한 조합.

원래 소리길은 새로 만든 길이 아니고 오랜 옛날부터 있던 길이었습니다. 어쩌면 나무꾼이나 해인사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 불자들이 다녔을 길입니다. 아마도 매우 힘든 길이었을 겁니다. 그 길을 살짝 손 보고 단장하여 사람들이 편하게 소리를 즐기며 걸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소리길이겠지요.

△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홍류동 계곡. 사진은 역시 김훤주 기자의 것입니다.

9월 29일 우리가 소리길을 걷던 날은 마침 비가 내렸습니다. 그런 탓인지 새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설령 한두 마리 새가 우지진다 해도 물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청명한 날에 이 길을 걷는다면 여러 마리의 새들이 우지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물소리와 바람소리, 새소리의 합주가 되는 것이지요.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마을 뒷산에도 소리길 비슷한 게 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마산시가 만든 길인데요. 무학산 둘레길 초입(혹은 마지막 코스)에 새소리가 들리는 편백나무 울창한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이 소리는 진짜 새소리가 아니라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기계음이었답니다. 그 기괴망측한 아이디어에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지요. 그냥 바람소리에 담겨오는 편백나무의 향긋한 내음만 감상하는 편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무튼 홍류동 소리길. 정말 멋진 길입니다. 이름과 실제도 잘 어울려 명실상부하게 소리길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정운현 선생이 내지른 감탄사야말로 이 길이 얼마나 아름다운 길인지를 잘 드러내주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니 합천군, 지금까지 뭐 한 거야!”

여러분도 이 길을 걷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면 정말이지 명실상부란 말을 실감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제 짐작에 최치원이 신선이 되었다면 틀림없이 이곳 홍류동에서 여러분이 듣는 것과 똑같은 물소리를 들으며 인간의 탈을 하나둘 벗겨갔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농산정에 앉아 홍류동 계곡을 타고 흘러내려오는 물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 틈엔가 여러분은 신선이 되어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리 되려면 여러분도 최소한 최치원 선생 정도의 참을성은 있어야겠지요.

속세를 버리지 못하는 평범한 인간은 아무리 아름다운 금강산을 보고서도 배가 고프면 금방 산을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지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