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읽었던 <나는 왜 쓰는가>에서 조지 오웰은 그렇게 말했었다. “작가가 글을 쓰는 첫 번째 동기는 ‘순전한 이기심’ 때문이다.” 그리고 오웰은 그 ‘순전한 이기심’에 대해 친절하게 이렇게 번역해 놓았다. ‘허영심.’
처음부터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많이 배워야 한다거나, 그래서 허영심을 채워야 한다거나 하는 따위의 엉뚱한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늘 내가 읽고 주제넘게 서평이란 걸 써야 하는 책, <책을 읽을 자유>의 프롤로그를 통해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배움을 통해 얻는 지식은 사람에게 자신감을 준다. 대학 진학을 포기한 조지 오웰도 숱한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그런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을 쓰는 이유는 “유명해지고 싶은 허영심 때문”이라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책을 읽을 자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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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자유>의 저자 이현우 역시 그 비슷한 감흥을 두툼한 책의 첫머리 프롤로그에서부터 내게 주었다. 아주 예감이 좋다. 책을 읽기도 전에 뭔가 커다란 수확을 거둔 농부처럼 마음이 풍성하다. “인생은 ‘책 한 권’ 따위에 변하지 않아.”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그럼 지금껏 수많은 위인들이 특별한 책 한 권에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했던 것은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거의 모든 정치인들이 인터뷰에서 밝히는 것처럼, 어떤 한 권의 책을 통해 인생의 가치관을 정립했다고 하는 것은 그럼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여러 권’입니다. 우리가 좀 ‘덜 비열한 인간’이 되거나 더 나아가 ‘비열하지 않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면 ‘한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 다수의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인생이 아직도 비열한 인생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가 ‘책만 읽어서’가 아니라 ‘책을 덜 읽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멘트는 평균 독서량이 ‘한 달에 한 권’에도 미치지 못하는 한국인의 독서 습관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는 독서캠페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인간이 한 권의 책만 가지고 어떤 깨달음을 얻거나 가치를 정립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사실이다.
책을 읽을 자유 - 이현우(로쟈) 지음/현암사 |
물론 이 특이한 주장 역시 그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책 읽는 뇌>라는 책의 저자가 그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그는 덧붙여 인류가 책을 읽게 된 것은 전체 인류사에 견주어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고, 대중적인 독서는 불과 100여 년의 역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너무 당연한 말이라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독서 능력이라는 ‘발명품’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별한 옵션’이다. “인간은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서란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강력한 무기”다.
<책을 읽을 자유>의 저자 이현우는 <로쟈의 저공비행>이란 블로그의 주인장으로 더 유명하다. 나도 사실은 이현우란 이름은 이번에 처음 들었을 뿐이며 로쟈란 이름부터 먼저 알았다. 특별히 지적 허영심이 강한 내게 그의 블로그는 매우 인상적이며 매력적이었다.
<책을 읽을 자유>는 로쟈의 꾸준한 블로그 활동의 결과물이다. 몇 년 동안 알라딘 서평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과 <한겨레>와 <경향신문>, <시사인>등에 실었던 서평이 보태졌다. 그래서 이 책은 그의 표현처럼 매우 ‘불룩한’ 책이 되었다. 무려 600여 페이지에 달한다.
그러나 크게 걱정할 것은 없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600여 페이지를 달리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주제, 즉 한 권의 책을 위한 서평에 보통 3페이지, 어떤 경우엔 겨우 1페이지 정도의 가벼운 산책만 하면 된다. 물론 좀 더 긴 것도 가끔 만날 수 있다.
저자에게 있어 책 읽기란 머나먼 이국 땅에서 ‘서울에서 가져온 라면에 김치를 먹을 때’처럼 행복한 일이다. ‘인류가 산출해낸 가장 위대한 정신들의 거처이자 가장 아름다운 양식들의 창고’를 만나는 일이다. 그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독서에 처형된’ 존재였다.
그러나 우리는 굳이 이 선택 받은 저자처럼 책이 만든 단두대에 행복하게 목을 들이밀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저 독서를 아침 저녁으로 하는 이닦기처럼 습관처럼만 할 수 있다면 족하다. 책을 애인처럼 늘 곁에 두고 자주, 혹은 가끔이라도 애무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흐뭇한 일이랴.
그러다 혹시 알겠는가. 정말 우리도 어느 순간, 행복하게 자청하여 목을 들이밀 ‘단두대의 칼날’을 얻게 될지. 그리하여 진정한 영혼의 거처를 만나게 될지도. 물론 저자의 넋두리처럼 ‘화려한 정신의 맨션’으로 안내 받는 게 아니라 ‘맨땅에 헤딩’할 때가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책을 읽을 자유 - 이현우(로쟈) 지음/현암사 |
ps1;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고도 돈만 굴리면 이윤을 얻을 수 있다고 발악하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예비 노동자인 대학생들은 자본이 자신을 착취해주기를 간절하게 바랄 수밖에 없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이 바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편입’이라는 것이 이 시대 젊은이들의 정직한 토로다.” <379p, 사상의 은사에서 사상의 오빠로, <리영희 프리즘>, 고병권 외, 사계절> 위 글을 읽으면서 ‘책을 읽을 자유’는 고사하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취업 수험서를 팔 자유’밖에 없이 ‘자본의 착취’로부터 호명 받을 날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오늘날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정신들의 거처’니 ‘양식들의 창고’니 논하는 것이 배부른 헛소리가 아닌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어쩌랴. 당장 육신의 생활고 때문에 영혼의 거처를 포기한다는 건 가엾은 일이 아닌가. 인류를 다른 생명체들, 예컨대 “오징어나 말미잘과 다르게 해주는 것”이 바로 독서다. 인류에게 주어진 이 ‘특별한 옵션’을 포기하는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더 불행한 것은, 아직 이 세상은 몇몇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특별한 옵션’을 집행할 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을 부여했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책이 읽기 싫어서’가 아니라 ‘책을 읽을 수가 없어서’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 현실이다. ps2; 책을 1페이지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다 읽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특히 이 책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그저 내키는 대로 어느 페이지건 심지 뽑듯이 뽑아 읽어도 좋을 그런 책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마음대로 읽을 자유’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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