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그러니까 김태호씨가 총리후보에서 낙마한 날이기도 하고 한국이 일본에 강제합병된 이른바 경술국치 100년이 되던 날, 저희 장인께서 별세하셨습니다.
김태호씨 집안이 초상집이 되었겠다고 그날 오전에 썼더니만, 도리어 거꾸로 되고 말았습니다. 장인어른은 저희가 모시고 살았습니다. 모시고 산 건지 얹혀 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2003년 5월 3일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로 딸만 많은 집안의 막내딸이었던 아내를 둔 탓으로(혹은 덕으로) 처가살이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후 아내의 언니들이 저를 따로 불렀습니다. 당시 저는 창원 상남동(현 성산구 상남동)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처가는 마산 월영1동이었습니다. 언니들이 말했습니다.
"아이고 정서방은 아직 나이도 있고, 애들도 어리고, 딱 됐네." (그 다음 말도 있었습니다만, 그건 여기서 생략하겠습니다.)
그때 우리 애들은 아직 어려서 유치원에 다니거나 겨우 뒤뚱거리며 걸어다닐 정도였습니다. 저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은 언니들이 그렇게 어르는 통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저는 거의 침묵으로 약속한 것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처가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장인어른도 무척 반가운 얼굴로 친히 "고맙다!"를 연발하셨지요. 처음엔 좋았습니다. 그러나 차츰 처음과 같은 애틋함은 사라지고 불편함만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를 잃은 장인은 짜증이 많았습니다. 특히 먹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으셨던가 봅니다. 돌아가신 장모님은 유독 먹거리를 잘 하셨습니다. 특히 장어국은 전국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일품이었습니다.
마산 완월성당 한솥밥집(무의탁노인무료급식소) 주방에서 10년 넘게 봉사활동을 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그 일을 하셨으니 보통 분은 아니었습니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가장 섭섭했던 것이 바로 이 음식이었습니다. 장모님은 워낙 부지런하신 분이었는데, 가끔 새벽부터 어시장 수협공판장에 나가 꽁치를 경매로 받아 오십니다.
그리고 그걸 집 마당에서 하루종일 손질하시고 딸과 사위들을 부릅니다. 먹는 낙이 참으로 풍성했던 시절이었지요. 특별히 술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술도 많이 마시라고 권하고 그러셨습니다.
그런 장모님을 잃은 장인어른이었으니 딸이 해주는 밥이 썩 그렇게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가끔 이들 두 부녀는 다투기도 했는데 그건 순전히 음식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덩치와 비슷해보이는 아담한 밥상을 들고 장인 방으로 들어가 "아버지, 밥 드이소" 하고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장인의 짜증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이리 와봐라. 이게 뭐꼬. 간이 와 이렇노."
그러면 아내는 또 나왔다는 투로 "아니 그게 뭐가 어떻다는 말입니꺼. 괜찮구만. 아버지가 입맛이 이상해지신 거 아입니꺼?" 그러나 곧 상을 물려나와 다시 차려 들고 들어가고야 맙니다.
아내는 어디를 멀리 가려고 해도(출장이나 여행)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음식 때문이지요. 그런 아내와 장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나는 나이가 들더라고 내 밥 정도는 챙겨먹을 줄 알아야 할 텐데."
세월이 흐르면서 다투는 이유는 음식만 아니고 다른 사소한 일로도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서서히 커가기 시작하는 애들도 문제였습니다. 몸이 불편한 장인은 시끄럽게 떠들며 돌아다니는 애들이 귀찮았던가 봅니다.
아이들이 커가는 만큼 집은 점점 좁아지는데 갈수록 미운짓 투성입니다. 그래서 이번엔 애들을 놓고 딸과 장인이 다투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다툼들은 아주 사소한 것이며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분 좋은 기억은 오래 남지 않아도 나쁜 기억은 영원한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아내와 장인이 아주 사이가 안 좋아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처가살이를 시작한 얼마 후부터 일 때문에 4년 가까이 광양, 울진, 서울 등 객지에서 주로 생활했기 때문에 잘 몰랐습니다만, 돌아와 보니 사정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2년여 전, 장인어른이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으며 돌아가실지도 모르겠다는 전화가 아내로부터 왔습니다. 아내는 울고 있어서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아내는 마치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할 듯이 울어댔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아, 이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었구나.'
그러나 장인은 두 달 만에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이건 어디까지나 저희들 기준입니다만)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부녀는 밥상을 사이에 두고 다투기를 자주 했습니다. 아내도 장인도 모두 바로 얼마 전의 일은 모두 잊은 듯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아내의 남편으로서 아내의 편을 들자면, 그래도 아내는 자기 아버지를 위해 장어국을 끓이고, 소고기를 준비하면서도 저나 아이들을 위해선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게 몹시 서운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저까지 나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금년 1월 3일, 장인께서 다시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이번엔 진짜 안 좋은 것 같았습니다. 마산연세병원에서 "여기서는 힘드니 삼성병원으로 옮기자"고 해서 삼성병원 중환자실에 한 달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성병원 의사도 "마음의 준비를 하라"던 장인은 더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연세병원으로 옮겨왔습니다. 아무래도 집이 가까우니 간호하기 좋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 장인어른의 상태는 매우 호전된 듯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마음을 놓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엊그제 덜컥 돌아가시고 말았던 것입니다.
돌아가실 때 장인의 옆에는 막내딸인 제 아내가 혼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간식으로 과일을 조금 드신 다음 얼마 있다가 숨을 컥컥 몰아쉬며 고통스러워하는 장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무척 괴로웠을 것입니다.
31일 장인을 장지에 모시고 난 다음날, 어제였군요, 아내는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지 못하겠다며 신경안정제를 사다 먹고 일찍 잠들었습니다.
아내는 장례를 치르는 중에도 가장 슬퍼했습니다. 장모님이 돌아가실 때도 그랬지만 이번엔 유독 더한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어쩌면 자기 탓 때문일 거라는 자책감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입관례는 월남성당 연령회에서 일곱 분이 나오셔서 해주셨습니다. 자식들도 하기 어려운 일을 정말 성심껏 해주셨습니다. 면도도 깔끔하게 해주시고. 그 옆에서 아내는 돌아가신 장인의 얼굴을 잡고 한동안 놓지를 못해 간신히 떼어냈습니다.
마산 월남성당에서 31일 오전 9시에 장례미사를 올리고 장지로 떠날 때도 아내는 거의 실신하다시피했습니다. 원래 딸들 중에서도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데다가 장모님 때도 보았던 터였지만, 저로서는 매우 당혹스런 일이었습니다.
저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아내와 장인이 그렇게 사이가 썩 좋지 못하다고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해였던 것입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인데, 저는 그 당연한 진리를 몰랐습니다.
오늘이 삼오입니다. 장인의 유골은 장모님의 곁에 함께 모셨는데 오늘 그곳에 가야 합니다. 처형네 가족이 도착하기 전 잠깐 이렇게 짬을 내 글을 적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경남블로그공동체 회원님들, 고맙습니다. 따로 연락드리지 못했는데도 모두들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를 아는 지인들, 많이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희 장인 떠나시는 길을 외롭지 않게 모실 수 있었습니다. 거듭 감사 드립니다. 장인·장모님을 뵙고 온 후 저녁에는 월남성당에서 삼오미사가 있습니다. 그걸로 장인어른을 위해 자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납니다.
참으로 허망합니다.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안됩니다. 아내는 아마도 며칠 더 휴유증이 가겠지요. 그러나 곧 털고 일어날 것입니다. '산 사람은 그래도 산다'는 말은 아내를 위해 있는 말일 터입니다.
아, 전화가 왔습니다. 나오라는군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블로그도 한동안 못했네요. 다시 시작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저도 아직은 좀 그렇습니다.
김태호씨 집안이 초상집이 되었겠다고 그날 오전에 썼더니만, 도리어 거꾸로 되고 말았습니다. 장인어른은 저희가 모시고 살았습니다. 모시고 산 건지 얹혀 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2003년 5월 3일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로 딸만 많은 집안의 막내딸이었던 아내를 둔 탓으로(혹은 덕으로) 처가살이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후 아내의 언니들이 저를 따로 불렀습니다. 당시 저는 창원 상남동(현 성산구 상남동) 아파트에 살고 있었고, 처가는 마산 월영1동이었습니다. 언니들이 말했습니다.
"아이고 정서방은 아직 나이도 있고, 애들도 어리고, 딱 됐네." (그 다음 말도 있었습니다만, 그건 여기서 생략하겠습니다.)
그때 우리 애들은 아직 어려서 유치원에 다니거나 겨우 뒤뚱거리며 걸어다닐 정도였습니다. 저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은 언니들이 그렇게 어르는 통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저는 거의 침묵으로 약속한 것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처가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장인어른도 무척 반가운 얼굴로 친히 "고맙다!"를 연발하셨지요. 처음엔 좋았습니다. 그러나 차츰 처음과 같은 애틋함은 사라지고 불편함만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를 잃은 장인은 짜증이 많았습니다. 특히 먹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으셨던가 봅니다. 돌아가신 장모님은 유독 먹거리를 잘 하셨습니다. 특히 장어국은 전국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일품이었습니다.
마산 완월성당 한솥밥집(무의탁노인무료급식소) 주방에서 10년 넘게 봉사활동을 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그 일을 하셨으니 보통 분은 아니었습니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가장 섭섭했던 것이 바로 이 음식이었습니다. 장모님은 워낙 부지런하신 분이었는데, 가끔 새벽부터 어시장 수협공판장에 나가 꽁치를 경매로 받아 오십니다.
그리고 그걸 집 마당에서 하루종일 손질하시고 딸과 사위들을 부릅니다. 먹는 낙이 참으로 풍성했던 시절이었지요. 특별히 술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술도 많이 마시라고 권하고 그러셨습니다.
그런 장모님을 잃은 장인어른이었으니 딸이 해주는 밥이 썩 그렇게 마음에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가끔 이들 두 부녀는 다투기도 했는데 그건 순전히 음식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덩치와 비슷해보이는 아담한 밥상을 들고 장인 방으로 들어가 "아버지, 밥 드이소" 하고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장인의 짜증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이리 와봐라. 이게 뭐꼬. 간이 와 이렇노."
그러면 아내는 또 나왔다는 투로 "아니 그게 뭐가 어떻다는 말입니꺼. 괜찮구만. 아버지가 입맛이 이상해지신 거 아입니꺼?" 그러나 곧 상을 물려나와 다시 차려 들고 들어가고야 맙니다.
아내는 어디를 멀리 가려고 해도(출장이나 여행) 가기가 어려웠습니다. 음식 때문이지요. 그런 아내와 장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나는 나이가 들더라고 내 밥 정도는 챙겨먹을 줄 알아야 할 텐데."
세월이 흐르면서 다투는 이유는 음식만 아니고 다른 사소한 일로도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서서히 커가기 시작하는 애들도 문제였습니다. 몸이 불편한 장인은 시끄럽게 떠들며 돌아다니는 애들이 귀찮았던가 봅니다.
아이들이 커가는 만큼 집은 점점 좁아지는데 갈수록 미운짓 투성입니다. 그래서 이번엔 애들을 놓고 딸과 장인이 다투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다툼들은 아주 사소한 것이며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분 좋은 기억은 오래 남지 않아도 나쁜 기억은 영원한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아내와 장인이 아주 사이가 안 좋아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처가살이를 시작한 얼마 후부터 일 때문에 4년 가까이 광양, 울진, 서울 등 객지에서 주로 생활했기 때문에 잘 몰랐습니다만, 돌아와 보니 사정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2년여 전, 장인어른이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으며 돌아가실지도 모르겠다는 전화가 아내로부터 왔습니다. 아내는 울고 있어서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아내는 마치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할 듯이 울어댔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아, 이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사이가 나쁜 것이 아니었구나.'
그러나 장인은 두 달 만에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이건 어디까지나 저희들 기준입니다만)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두 부녀는 밥상을 사이에 두고 다투기를 자주 했습니다. 아내도 장인도 모두 바로 얼마 전의 일은 모두 잊은 듯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아내의 남편으로서 아내의 편을 들자면, 그래도 아내는 자기 아버지를 위해 장어국을 끓이고, 소고기를 준비하면서도 저나 아이들을 위해선 그러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게 몹시 서운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저까지 나설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금년 1월 3일, 장인께서 다시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이번엔 진짜 안 좋은 것 같았습니다. 마산연세병원에서 "여기서는 힘드니 삼성병원으로 옮기자"고 해서 삼성병원 중환자실에 한 달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성병원 의사도 "마음의 준비를 하라"던 장인은 더 나빠지지도 좋아지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연세병원으로 옮겨왔습니다. 아무래도 집이 가까우니 간호하기 좋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 장인어른의 상태는 매우 호전된 듯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마음을 놓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엊그제 덜컥 돌아가시고 말았던 것입니다.
돌아가실 때 장인의 옆에는 막내딸인 제 아내가 혼자서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간식으로 과일을 조금 드신 다음 얼마 있다가 숨을 컥컥 몰아쉬며 고통스러워하는 장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며 무척 괴로웠을 것입니다.
31일 장인을 장지에 모시고 난 다음날, 어제였군요, 아내는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지 못하겠다며 신경안정제를 사다 먹고 일찍 잠들었습니다.
아내는 장례를 치르는 중에도 가장 슬퍼했습니다. 장모님이 돌아가실 때도 그랬지만 이번엔 유독 더한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어쩌면 자기 탓 때문일 거라는 자책감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입관례는 월남성당 연령회에서 일곱 분이 나오셔서 해주셨습니다. 자식들도 하기 어려운 일을 정말 성심껏 해주셨습니다. 면도도 깔끔하게 해주시고. 그 옆에서 아내는 돌아가신 장인의 얼굴을 잡고 한동안 놓지를 못해 간신히 떼어냈습니다.
마산 월남성당에서 31일 오전 9시에 장례미사를 올리고 장지로 떠날 때도 아내는 거의 실신하다시피했습니다. 원래 딸들 중에서도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데다가 장모님 때도 보았던 터였지만, 저로서는 매우 당혹스런 일이었습니다.
저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아내와 장인이 그렇게 사이가 썩 좋지 못하다고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해였던 것입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인데, 저는 그 당연한 진리를 몰랐습니다.
오늘이 삼오입니다. 장인의 유골은 장모님의 곁에 함께 모셨는데 오늘 그곳에 가야 합니다. 처형네 가족이 도착하기 전 잠깐 이렇게 짬을 내 글을 적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어려운 걸음을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 경남블로그공동체 회원님들, 고맙습니다. 따로 연락드리지 못했는데도 모두들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를 아는 지인들, 많이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희 장인 떠나시는 길을 외롭지 않게 모실 수 있었습니다. 거듭 감사 드립니다. 장인·장모님을 뵙고 온 후 저녁에는 월남성당에서 삼오미사가 있습니다. 그걸로 장인어른을 위해 자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납니다.
참으로 허망합니다.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안됩니다. 아내는 아마도 며칠 더 휴유증이 가겠지요. 그러나 곧 털고 일어날 것입니다. '산 사람은 그래도 산다'는 말은 아내를 위해 있는 말일 터입니다.
아, 전화가 왔습니다. 나오라는군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블로그도 한동안 못했네요. 다시 시작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저도 아직은 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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