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선덕여왕이 화제다. 더불어 화랑세기에 대한 관심도 대단하다.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를 베껴 썼다고 주장되는(!) 필사본 화랑세기는 그러나 위작논란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부끄러운(?) 조상의 역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라거나 “현재의 시선으로 당시를 재단하는 오류”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미실이란 여인은 거의 모든 풍월주들과 인연을 맺고 있다. 아비가 2세 풍월주였던 그녀는 5세 풍월주 사다함과도 연인사이였을 뿐 아니라 6세 풍월주 세종의 부인이며 동시에 7세 풍월주인 설원랑과도 부부의 연을 맺었다. 세종과의 사이에서 난 하종이 11세 풍월주이고 설원랑과의 사이에서 난 보종은 16세 풍월주가 되었다. 또한 32세 풍월주는 그녀의 원손이다.
그 외에도 미실은 진흥왕, 동륜태자, 진지왕, 진평왕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신라의 왕들과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미실이 매우 문란한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그때의 성풍속이 그러했고 나아가 이를 권장(?)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미실은 색공(色供)을 하는(또는 해야 하는) 신분의 여자였으니 아주 합당한 일이었을 것이다.
미실의 실제 남편인 세종은 이사부 장군과 왕비의 사이에서 난 자식으로 진흥왕과 어머니가 같다. 미실 또한 진흥왕비의 조카라고 하니 그 관계도를 그려보면 매우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에서 미실을 가운데 두고 미실의 남편이거나 자식들인 진골귀족들이 모여 미실의 혼사문제를 논하는 장면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런 근친상간은 신라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덕여왕보다 조금 빨리 시작한 천추태후를 보자. 거기도 선덕여왕 못지않은 복잡한 성풍속이 우리를 어지럽게 한다. 천추태후는 태조왕건의 손녀로서 자기와 배다른 오라비인 경종에게 시집을 간다. 그것도 친동생과 함께 경종의 비가 되는 것이다.
경종이 죽자 천추태후의 여동생이며 경종의 왕비였던 헌정왕후는 태조왕건의 아들인 왕욱(경주원군)과 사랑을 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가 곧 대량원군으로 나중에 고려 제8대왕 현종이 된다. 태조왕건 이후 목종에 이르기까지 안정을 찾지 못하던 왕위세습은 현종 조에 안정을 찾아 이후 모든 고려왕들은 현종의 자손들로 채워진다.
그런데 이 현종이 우리시대의 시선으로 말하자면, 불륜의 씨앗인 것이다. 그럼에도 왕족의 혈통이라 하여 원군(태자)의 칭호를 내리고 나중에 왕위에 오르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사부 장군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왕비의 자식이라 하여 전군(태자-왕자-전군으로 이어지는 왕족의 호칭)에 봉해진 세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물론 태종이라 불리는 장군 이사부도 내물왕의 4대손이니 김씨로서 왕족이다.
자, 그런데 내가 오늘 주목하는 대목은 이렇게 신라와 고려를 거쳐 유행했던 복잡한 성풍속도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좀 어지럽긴 하지만, 이해할만 하다. 저 유명한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도 자기가 꿈꾸었던 이데아를 지탱해줄 주요한 장치는 바로 부인공유제라고 하지 않았던가. 통치계급인 철인들의 이기심을 막을 장치로서…
물론 신라 성골-진골 귀족들의 성풍속이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구석기시대―사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구석기시대이며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극히 미미한 일부분에 불과하다―로부터 내려온 전통을 이은 것이든 아니면 골품제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든 말이다.
여기서 내가 궁금했던 것은 색공(色供)이란 제도에 대해서다. 나는 처음에 드라마가 시작될 때 미실이 색공술을 펼친다고 해서 무협지에 등장하는 여마두 정도를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색공이란 왕이나 왕족의 세대세습을 위해 색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색이란 애매모호한 표현은 다름 아닌 섹스를 말함이다.
미실이 바로 색공을 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진흥왕부터 그의 아들인 동륜태자와 진지왕, 그리고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 대에까지 색공을 했다. 그뿐 아니라 진흥왕의 씨 다른 형제인 세종의 정실부인이었으며 자기의 외가 쪽 5촌 아저씨뻘 되는 설원과도 교제하여 아이를 낳았다. 그럼 색공은 여자만 하는 것이었을까? 선덕여왕은 어땠을까?
선덕여왕의 남자관계에 대해서 알아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신라 말의 진성여왕은 매우 문란하여 황음을 하다 결국 나라를 망쳤다는 기록들이 많지만, 현명한 군주로서 추앙받는 선덕여왕에게 스캔들(?)과 관련한 자료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이 정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음지식-문화원형>편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용수와 용춘은 진지왕의 자식들인데―선덕여왕에게는 숙부뻘이다―선덕여왕을 받들도록 했다. 처음에 용춘이 진평왕의 명으로 선덕을 받들었으나 자식이 없어 물러나고 용수가 받들었다. 역시 자식이 없어 물러났다. 선덕이 왕위에 오르자 용춘이 다시 선덕여왕의 지아비가 되었으나 역시 자식이 없어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글쎄… 확실하지는 않지만, 선덕여왕도 색공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물론 여왕에게 색공을 했던 남자들은 모두 성골이거나 진골 귀족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야 왕실의 혈통이 보존되니까…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알 수 없다. 더 알고 싶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미루어 짐작건대, 그때처럼 개방적인 시대라면 남자왕족이 색공을 받았다면 여자왕족도 틀림없이 색공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색공이란 제도가 있기는 있었다는 전제하에… 그런데 과연 드라마에서 그런 내용을 다룰까? 그러지는 않을 것 같다. 요즘 시대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므로.
아 참,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용수와 용춘은 모두 선덕여왕의 언니인 천명공주의 남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천명과 용수(공식적으로는 용춘)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태종무열왕 김춘추다. 그러고 보면 진평왕의 공주들은 실로 대단한 스캔들의 소유자들이었다. 선덕여왕의 동생인 선화공주는 백제 무왕과 결혼하여 의자왕을 낳지 않았던가.
생각할수록 흥미진진하다. 과연 이 복잡한 관계를 MBC 드라마는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흐흐흐 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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