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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이런저런이야기

헤르메스, 메르쿠리우스, 머큐리

헤르메스는 제우스가 아내 헤라 몰래 한 님프와 외도를 하여 낳은 아들이다. 그는 전령이며 소매치기이며 재담꾼이며 거짓말쟁이이며 발 빠른 여행자이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마이아를 떠나 모험에 나섰는데 자기 재주를 십분 발휘하여 아레스의 칼, 포세이돈의 삼지창, 아프로디테의 허리띠, 아폴론의 황금 뿔이 달린 하얀 소 50마리 등을 훔쳤다.


그는 제우스 앞에 나아가 웅변가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함으로써 아버지의 마음을 사는데 성공했고 신들의 전령에 임명되었으며 올림포스 열두 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베르베르에 따르면 대신 그는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그러나 영악한 헤르메스는 다음과 같은 단서를 달았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때로 깜박 잊고 진실을 다 말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헤르메스는 독창적인 악기를 만들기도 하고 설형문자를 발명하기도 하는 등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이런 재능 탓이었던지 그는 계약의 성사나 사유재산의 유지를 관장하는 신인 동시에 도둑들의 신이기도 한 모순적인 지위를 얻게 되기도 한다.


헤르메스라는 이름은 돌무더기라는 그리스어 헤르마에서 유래되었다고 믿어지는데 돌무더기는 그리스에서 경계 혹은 이정표를 나타낸다. 그는 길과 관련된 모든 것, 도로와 교차로, 시장, 선박 따위를 관장하는 신이며 여행자의 길 안내도 그가 맡았다. 죽은 자를 하계, 즉 하데스로 인도하는 것도 그의 책임이었다. 그는 또 점성술사의 신이기도 했다.


헤르메스 역시 다른 신들처럼 여신 혹은 님프, 인간과 결합하여 여러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아우톨리코스이다. 이 아우톨리코스의 손자가 오디세이아의 영웅 오디세우스이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에서 오디세우스를 뛰어난 지혜, 언변, 기략, 용기, 인내를 지닌 인물로 그리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그의 증조부 헤르메스처럼 교활한 모사꾼이다. 그는 트로이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려는 미르미돈의 영웅 아킬레우스를 잔재주와 계략으로 참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으며 뱀에 물려 렘노스 섬에 버려진 필록테테스와 그의 활과 화살이 없이는 결코 트로이를 정복할 수 없다는 예언자의 점괘에 따라 그를 데려오기 위해 파견되어 일을 성사시킨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전쟁이 끝나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길에 오랜 세월 방황과 모험을 겪고서야 비로소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와의 재회가 허락되고 이타카 왕의 지위도 되찾게 된다. 10년에 걸친 표류는 신들의 저주가 결정한 운명 때문이었지만 어쩌면 헤르메스로부터 전해진 유전자 탓은 아니었을지. 오디세우스는 헤르메스처럼 이중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헤르메스의 로마식 이름은 메르쿠리우스이다. 영어식 이름은 머큐리이다. 내가 머큐리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고급 미제 자동차 때문이었다. 아마 1993년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어떤 재판 때문에 부산고등법원에 한 달에 한번 정도 출석해야 할 일이 있었다. 보통은 시외버스를 타고 사상터미널에 내려 대중교통을 이용해 법원에 갔지만 가끔 친구 차를 타고 갈 때도 있었다.


정수 차를 타고 갔을 때였다. 친구 차는 경차의 대명사로 이름을 떨치던 티코였는데 부산 법원 근처는 아시다시피 차를 댈만한 장소를 찾기가 어려웠다. 재수가 좋았던지 몇 바퀴를 돈 끝에 겨우 한 곳을 찾아내 주차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재판을 마치고 돌아오니 떡하니 티코보다 크기가 세배는 됨직한 대형 세단 한 대가 앞을 막고 있는 게 아닌가. 머큐리였다.


건물 경비를 부르고 잠시 후 머큐리 기사가 왔다.


“아니 건방지게 감히 우리 변호사님 주차하는 자리에 티코가 대?” 
“하루 종일 쓴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이게 너거가 전세 냈나? 너거만 여기다 대라는 법이 있나? 뭐 티코가 어째? 운전기사 주제에 눈은 높아가지고.”


성질 더러운 정수의 입에선 쌍욕마저 나올 태세였다. 그러자 이번엔 그 고명하신 변호사님께서 내려오셨다.


“뭐꼬. 누가 여기다 차를 대라고 했노. 차 빼주지 마라.” 
“아 씨발 진짜 이거 엿같네. 외제차도 오데 순 고물딱지 같은 거 하나 가지고서는. 알았다, 그래 함 해보자.”


친구는 당장 112에 전화를 걸었고 순찰차가 출동했고 양쪽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순경은 다른 문제는 일단 알아서들 법대로 하시면 될 일이고 자기는 머큐리에 딱지부터 떼야겠다며 스티커를 꺼내들고 변호사에게 면허증 제시를 요구했다.


뭐 그 다음 일은 상상들 하시는 대로다. 법집행을 잘 아는 변호사는 당장 꼬리를 내리고 차를 빼도록 지시했고 운전기사는 투덜거리며 차를 뺐으며 우리는 의기양양하게 티코를 몰고 현장을 떠났다. 머큐리의 주인과 그의 머슴은 도둑놈 같은 인상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어있었지만 헤르메스처럼 교활하고 영악하지도 언변에 능하거나 머리회전이 빠르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우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