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경찰청 내에 숨어있는 스파이가 누군지 어렴풋이, 그리고 종반으로 다가오면서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는 스파이의 실체를 실제로 접하게 되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경찰청의 고위간부였던 것입니다. 본청 국장이면 얼마나 높은 계급일까요? 우선 최고위 인사인 경찰청장은 치안총감이고 단 1명뿐입니다. 그다음 계급이 치안정감으로 본청 차장, 서울, 경기지방청장, 경찰대학장 이렇게 4명이 있습니다.
치안총감과 치안정감, 이 5명의 바로 다음 계급이 치안감입니다. 26명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본청 국장급과 지방경찰청장이 이에 해당합니다. 군대로 치면 치안정감은 군사령관, 치안감은 군단장 내지는 사단장쯤 되는 걸로 보면 되겠습니다.
▲ 경찰청 수사국장 신경수
아무튼 경찰청 내에 잠입한 살인마 조현민의 스파이는 경찰청 수사국장 신경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신국장이 스파이여서가 아니었습니다. 경찰청 수사국장을 일개 민간범죄자의 스파이로 상정할 수 있는 드라마의 설정이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하긴 지난주에 종영한 <추적자>에선 유력한 대통령후보가 야욕을 위해 살인과 납치, 재판조작을 서슴지 않는 것으로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리얼한 드라마의 설정에 치를 떨면서도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경찰청 수사국장 신경수는 어쩌면 대통령후보 강동윤의 또다른 모습일지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신국장이 야망을 채우기 위해 악행의 그늘에 숨어 악마와 손잡았다는 설정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있을 수 있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조현민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악마였습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조현민은 살인에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아픔이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복수,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에 대한 집착, 이 두 가지가 그를 악마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마이면서도 나름대로 동정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불가피하게 악의 수렁에 빠진 자에게 보내는 연민의 정이 가능했습니다. 만약 조현민이 불행한 과거를 겪지 않았다면, 그의 아버지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면 악인을 응징하기 위해 스스로 악마가 되는 선택을 했을까.
그런데 극이 중반을 넘겨 종반으로 달려오면서 경찰청 내에 숨겨둔 스파이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사이버수사대의 수사관과 연구원이 물망에 올랐습니다. 그중에 증거분석전문가 강응진 박사가 스파이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강박사는 피라미에 불과했습니다. 더 큰 스파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경찰청 수사국장 신경수. 놀랍지 않습니까? 경찰청에서 청장과 차장 다음으로 중요한 보직에 있는 수사국장이 세강그룹 신임회장 조현민의 스파이였다니.
경찰청 최고수뇌부의 한사람이 재벌그룹 회장의 간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존재하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실체, 유령. 경찰청 수사국장이란 지위가 이를 가능케 했습니다. 그는 법과 정의라는 그늘에 숨어 악행을 일삼는 유령이었던 것입니다.
자, 그런데 사람들이 놀라움을 표시하면서도 과거에는 상상조차도 불가능했던 이런 불편한 설정에 이의를 달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대한민국 경찰수사의 최고봉이 추악한 범죄집단의 일원이란 사실에 왜 그다지 놀라거나 분루를 쏟지 않는 것일까요?
지극히 현실가능한 시나리오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따위의 불편한 설정은 실은 현실에서 얼마든지 보아오던 것이었습니다. <추적자>의 강동윤은 어쩌면 우리 정치사에 실재하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마당에 신경수쯤이야….
아무튼, <유령>에서 어둠속에 숨어있는 그림자처럼 실체를 알 수 없던 유령의 존재가 경찰청 내에서도 가장 온화하고 이해심 많은 신경수 경찰청 수사국장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전율이 일었습니다. 정말 무서운 일이죠.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이 유령을 지배하는 더 큰 유령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유령은 <추적자>에서 강동윤이 원했던 바처럼, “누구에게도 고개 숙일 필요가 없는, 영원한 권력”입니다. 강동윤은 대통령 자리조차도 예의 영원한 권력으로 가기 위한 발판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노무현대통령도 이에 대해 말한 바가 있습니다.
“권력은 이미 자본(시장)으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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