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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미스 리플리 장미리는 유죄일까요?

미스 리플리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거짓말도 진심을 갖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다, 능숙한 거짓말쟁이는 어쩌면 가장 진실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물론 이것은 궤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리플리 장미리는 보통의 거짓말쟁이와는 다릅니다.

그녀는 치열한 아니 처연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늘 불행했습니다. 그녀에겐 행복이란 먼 이웃나라의 이야기며 동화 속에나 등장하는 현실성 없는 이야깁니다. 그녀는 불행을 씹으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고 사는 기생충 같은 인간들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그녀의 거짓말에 눈물어린 진심이 담겨있는 듯이 보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장미리가 기회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사실 그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기회는 고급 대학을 나온, 말하자면 미리 예정된 어떤 사람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훔쳤습니다. 그녀는 동경대학교 출신으로 자신을 위조했습니다.

위조된 동경대 출신 장미리 또는 동경대 출신으로 자신을 위조한장미리, 그녀는 유죄일까요? 저는 앞선 포스팅 ☞내가 미스 리플리에 박수치며 응원하는 이유 에서도 말했지만, 장미리가 자신을 훌륭하게 위조해서 정말 대단한 호텔리어로 성공했으면 하고 바랍니다.
즉, 다시 말해 저는 그녀에겐 하등의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저의 견해에 찬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거짓말이 잘못이 아니라고? 학력을 위조해 사회에 혼란을 조성하는 것이 어째서 범죄가 아니란 말이지? 정말 이해할 수 없군.”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저는 과거에(물론 지금도) 이른바 운동권이라 불리는 친구나 선배들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소위 동지라고 서로 부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때 이들은 혁명을 꿈꾸기도 했던(‘했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제 이들 중 대부분은 꿈을 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이들을 진보운동가, 진보주의자, 진보파 등으로 부를 수 있겠습니다. 이들 중에는 환경운동으로 전업을 한 사람도 있고, 학력철폐운동을 하는 분도 있으며, 시민단체의 주요인사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언론인이 된 사람도 있고 판사가 된 사람도 있으며, 어떤 수련회에서 저와 한팀이었던 이 중에는(나이도 저보다 한두 살 많은 정도입니다) 국회의원을 거쳐 광역시장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가장 열렬한 학력폐지주의자일 걸로 생각하지만,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지만, 현실에선 전혀 다른 행동을 보입니다. 하루는 이들끼리 술을 먹다가 사소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관우가 들고 다니는 청룡언월도의 무게가 얼마냐는 것이었죠.

사실 이 논쟁은 매우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관우가 들고 다니는 청룡언월도의 무게를 달아본 바가 없으며, 또 관우가 실제로 청룡언월도를 들고 다녔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연의>에 관우가 청룡언월도를 들고 다녔으며 그 무게가 팔십이근이라고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연의>를 쓴 나관중은 삼국지의 시대보다 무려 천년이나 후세의 사람이니 우리가 고려태조 왕건이나 그의 오른팔이었다는 유금필 장군에 대해 아는 것보다 더 유비나 관우, 장비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82근이야.” 다른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아니야. 80근이야.” 장난으로 시작된 칼 무게에 대한 의견 차이는 급기야 자존심 싸움으로 변질됐습니다. 둘은 끝까지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좌중의 가장 나이 많은 한사람이 나섰습니다.

“내가 들어볼 때 80근이 맞는 것 같네. 아무래도 자네는 이 친구에 비해 지적 능력이 떨어지지 않나.” 결론은 나지 않았지만 대충 분위기는 80근으로 정리됐습니다. 참고로 좌장이란 그이는 서울대 출신이며, 80근을 주장한 이도 스카이 출신이었습니다. 그럼 참담한 패배를 맛본 그 사람은? 그는 이도저도 아닌 공돌이였습니다.

저는 이때 의외로 이른바 혁명을 꿈꾼다는 이들에게도, 진보주의자, 진보… 진보… 하고 외치는 사람들에게도 뼈에 사무친 학력주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들에게도 남모르는 우월주의가 숨어있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서울대 출신의 좌장과는 학력에 관한 하나의 에피소드가 더 있습니다. 그는 부산고 출신이었는데 아마 그의 매제가 경남고 출신이었던 모양입니다. 하루는 이 매제와 술상을 앞에 두고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가족들이 모두 모인 명절날이었겠죠.

“형님, 부산고는 솔직히 거렁배이 학교 아닙니까?” 과거 부산지역에서 최고의 명문이라고 하면 그래도 역시 부산고와 경남고를 쳐줍니다. 이날 이 두 처남매부는 경상도말로 대차게 다퉜습니다. 그래봐야 가족들 간의 문제이니 별 탈 없었을 테지요.

이 이야기를 하며 그 좌장은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반에서 20등 안에 들면 전부 서울대 간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진실이었을 겁니다. 한편에선 서울대가 별 것 아니라고 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서울대는커녕 대학 문턱도 못 가본 입장에서 보면 이건 명백한 우월주의의 선언이었습니다.

저는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이른바 운동권들의 위선적인 행태를 수없이 보아온 터라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보아도 그리 놀라지도 않습니다. 자, 본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장미리는 지쳤습니다. 학번(!)이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한강다리로 가는 것? 맞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강다리 대신 거짓말을 택했습니다. 저도 거짓말은 무척 싫어합니다. 제 주변에도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87년에 어느 도시의 전경대에서 졸병으로 군 복무 중이었는가 하면 또 전경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투사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와 마주치는 것이 죽기보다 싫지만, 그러나 장미리의 거짓말은 신성하기까지 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밑바닥 인생 장미리는 살기위해 강고한 학력사회를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그래, 나 동경대 나왔다, 어쩔래. 이래도 나 안 뽑아 줄 거야? 동경대 나왔으면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말 안 해도 알 거고. 나하고 일하게 된 걸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거야.”

물론 학력도 없고 배경도 없는 모든 사람들이 리플리처럼 탁월한 능력을 가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저도 리플리를 일반적인 경우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내가 미스 리플리에 박수치며 응원하는 이유 에서 제가 신정아 씨를 두둔하는 듯한 말을 하자 어떤 분이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신정아씨는 그리 유능한 큐레이터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줄 잘서고 비위잘맞춰서 그정도 자리에 올라간겁니다. 학력위주의 사회 분명히 문제있습니다만 신정아씨를 옹호할 건덕지는 전혀없습니다. 신정아씨 실력이 궁금하시다면 직접 찾아보세요 미술에대한 이해 안목이 있는여자가 감히 미술계 이런 오명을 남길짓을 했겠습니까?”

저는 이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이해는 하겠지만 박수를 쳐줄 생각은 없습니다. 왜 “신정아 씨가 감히 미술계에 이런 오명을 남길 짓을 했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저는 특히 ‘감히’라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신정아 씨가 ‘감히’ 자격(학력)도 없이 미술관 큐레이터가 될 생각을 했다”고 그는 비난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신정아 씨를 옹호할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어쨌든 그녀는 범죄를 저질렀고 합당한 벌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신정아 씨가 학력도 능력도 없으면서 유능한 큐레이터인 것처럼 포장하고 또 그 경력으로 대학교수까지 했다면, 월등한 학력을 소지한 다른 큐레이터나 대학교수들의 실력이란 것도 결국 거기서 거기 아니냐고 말입니다.


처음의 질문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미스 리플리 장미리는 유죄일까요? 어떻습니까? 참 난감한 질문이지요? 아마도 장미리의 학력위조행각이 밝혀지면 수갑을 차고 경찰서로 끌려가겠지요. 그리고 판사는 유죄판결을 내릴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저의 마음은 결코 그녀에게 유죄판결을 내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죄는 온전히 그녀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오늘날 심각한 노인문제로 불효자가 양산되고 현실이 모두 불효자들의 탓이 아닌 것처럼…, 이 또한 사회적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가 그녀에게 던지는 판결문은 이렇습니다.

“너는 왜 진즉 한강다리에서 뛰어내리지 않은 거지? 넌 낙오자였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뿐이었단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넌 끝내 살아남아 사회로 하여금 엄청난 비용을 물게 하는 것인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