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전국시대를 종식시킨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단행했다. 그가 갱유, 즉 역사상 유례없는 대학살을 자행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서에 대해서만큼은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분서로 인하여 진시황 이전의 수많은 위대한 문명들이 잿더미 속에 사라졌다.
인류 문명을 향한 치명적 테러는 진시황만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이런 분서가 예외 없이 저질러진 시대가 있었다. 기원 2~4세기 초기 기독교는 신성에 대한 해석을 놓고 갈등과 대립이 치열한 시기였다. 그노시스파로 불리는 영지주의는 당대 세계의 중심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가톨릭을 위협했다.
책을 불태우려는 사람들, 책이 가진 나비효과를 잘 알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은 가톨릭이 승리했고, 그노시스파의 모든 종교적 저작물들은 이단이란 이름 아래 망각의 불길 속에 내던져졌다. 20세기에 이르러 이집트의 동굴에서 2천 년 동안 깊이 잠들어 있던 그노시스의 파피루스가 발견되면서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는데, 신국론과 고백록으로 중세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를 닦은 아우구스티누스도 처음엔 그노시스파(마니교)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20세기 후반의 대한민국에도 분서는 예외 없이 행해졌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정부에서 인정하지 않는 책을 소지하고 있다가 불심검문, 압수수색 등에 의해 교도소로 간 사람들이 많았다. 교도소란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곳이란 뜻이다. 최근엔 국방부에서 금서목록을 만들어 물의를 일으킨 일도 있었다.
18세기 조선에서도 예의 이 분서는 어김없이 행해졌는데, 당시 조선에는 정치에서 소외된 남인들을 중심으로 천주교가 널리 퍼지고 있었다. 이에 체제적 위협을 느낀 조정은 천주학 관련 서적에 대한 대대적인 분서를 단행했다. 천주교 관련 서적을 가지고 있다가 발각되는 날엔 책과 함께 목이 잘려나갔다.
그러나 역시 가장 악명 높은 분서는 근세기 중국에서 벌어졌다. 문화혁명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홍위병들의 이 잔혹한 테러가 처음 시작한 곳이 유서 깊은 소림사였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오쩌둥이 공산당원들의 자녀들을 불러 모아 홍위병을 처음 조직한 곳이 바로 소림사였던 것이다.
495년경에 세워진 소림사는 중국 선불교의 발상지다. 소림사를 창건한 달마는 특정한 자세로 벽만 바라보면서 수행에 정진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고자 했다. 후에 이러한 선법은 《벽암록》이란 책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동양세계에 선불교가 꽃피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누구도 금지할 수 없는 자유가 존재하는 곳, 깊숙한 정신세계
《벽암록》이 추구하는 선이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고유한 힘과 그 힘의 원천을 가리키는 말이다.' 문화혁명의 광풍은 《벽암록》을 추종하는 선승들을 무력으로 제압했지만, 승려들은 '그들의 정신세계 속으로 깊이 침잠해서 홍위병은 절대 얻을 수 없는 자유, 그리고 마오쩌둥조차 절대 금지할 수 없는 자유에 도달했다.'
책 vs 역사 - 볼프강 헤를레스.클라우스-뤼디거 마이 지음, 배진아 옮김/추수밭(청림출판) |
볼프강 헤를레스는 독일의 저명한 언론인이다. 1950년 독일 바이에른에서 태어난 그는 빌 게이츠를 비롯한 유명한 경영자들을 불러 자기 프로그램에 담는 등 매우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을 뿐 아니라 다수의 정치서적, 실용서, 소설을 집필했고, 다큐멘터리 영화 연출로도 유명한 저널리스트다.
그는 자신이 쓴 책 《책 vs 역사 》에서 '책이 만든 역사' 혹은 '역사가 만든 책'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역사는 책을 만들었지만, 책은 다시 역사를 만들었다. 모든 책이 역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헤를레스는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수백만 독자가 읽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러나 이 소설은 역사까지 만들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장미의 이름》은 책의 가공할 힘에 대해 다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책이다. 그는 역사를 만든 책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 판매량을 잣대로 책의 영향력을 가늠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한다. "엄청난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코란》은 역사를 만들었다. 그런데 세계를 바꾼 책 중에는 인류의 기억에서 거의 사라진 작품도 적잖이 있다."
책과 역사 사이에는 사람이 있다. 헤를레스는 어떤 책은 금서가 되고 또 어떤 책은 불태워지는데, 이런 행위를 하는 자들은 책을 두려워해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불에 타 사라지는 것은 그저 잉크와 종이일 뿐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도 없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고, 생각은 자유로우며, 생각을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책 속의 활자를 취사선택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 책이 선정한 역사를 만든 책 50권의 구성에 불만을 가지는 독자가 있을 수도 있다. 또는 이 책의 저자가 활자 틈새 곳곳에 숨겨놓은 가치관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아마도 어쩌면 헤를레스는 유럽 중심주의나 루터교에 경도된 측면이 있을 수도 있다. 또 어쩌면 헤를레스는 지나치게 마르크스나 마오쩌둥을 비난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독자들의 몫이다. 독자들은 얼마든지 이 책을 비판적으로 읽을 자유가 있으며 그럴 권리도 있다. 만약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경향성에 대해 불평하면서 책을 고른다고 한다면 우리가 읽을 책은 세상에 한 권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책은 독자가 읽으면서 새롭게 해석하고 창조적으로 다시 쓰는 것이다.
그 점만 잘 유의해서 본다면 이 책은 실로 유용한 책이다. 책을 대하는 독자들의 태도가 조금이라도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이 책은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500년 전 탄생한 공자의 《논어》를 설명하면서 1899년 중국에서 발생한 비밀결사 대원들의 철도 습격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헤를레스의 화술은 역시 그가 유능한 저널리스트임을 실감하게 한다.
한번들 읽어보시라. 그러면 어떤 분서나 금서로도 막을 수 없는 책의 위대한 힘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경 첫 구절에 의하면 태초에 말이 있었다고 한 것처럼 인류 역사를 만들어온 수많은 말들이 있었다. '세계 역사상 가장 막강한 힘을 지닌 서적들의 배후엔 어떤 본보기와 선구자, 갖가지 상상과 아이디어, 유례를 알 수 없는 신화와 전설'이 숨어 있을까?
단, 헤를레스의 관점을 탓할 생각은 버리고, 독자 여러분이 가진 생각의 그물에 활자의 물고기를 걸러 가면서 차분하고 천천히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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