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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라…!"
1978년 6월의 어느 여름날, 뜨거운 열기로 새하얗게 달아오른 굵은 모래가 굴러다니던 운동장에서는 웅변대회가 한창이었습니다. 머리를 빡빡 밀어 윤기가 반질거리는 머리를 한 중학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로 질서정연하게 운동장에 앉아 졸고 있었습니다. 이때 느닷없이 연단에 올라선 한 연사가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잡아라!"
"저기 날아다니는 파리나 모기를 잡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를 잡으란 말이냐? 바로 북한괴뢰도당의 괴수 김일성을 때려잡으라는 말입니다. …" 그는 나보다 한 학년 위의 선배로서 3학년이었습니다. 이름이 김성일이었는데, 이름자의 위치만 살짝 바꾸면 김일성이 된다는 생각에 이후로도 가끔 속으로 웃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웅변대회에 나와 이렇게 "○○○을 때려잡아라"와 같은 비인간적인 구호를 외치는 연사는 없습니다. 세상이 변했습니다. 모두가 6월항쟁의 덕입니다. 6월항쟁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6월항쟁 이전에는 대통령 이름만 불러도 국가원수 모독죄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다는 소문이 사실처럼 번져있었습니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니면 누가 일부러 낸 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모두 그 소문에 벌벌 떨었답니다. 그래서 우리가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대통령의 함자를 부를 땐 반드시 뒤에다 '각하'란 존칭을 붙였습니다. 게다가 대통령은 박정희, 국무총리는 김종필, 국회의원은 채문식이 영원히 하는 것으로 알았던 나의 어린 시절 대통령은 임금님이었습니다.
그러던 세상에 개벽이 일어났습니다. 6월항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시민들이 거리로 뛰어나오고 자동차들은 거리에서 클락숀을 빵빵 거렸습니다. 당시의 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였습니다. 1972년 유신헌법이 만들어진 이래로 대통령은 국민들이 뽑지 않고 체육관에서 몇몇 사람들이 모여 뽑았습니다.
소위 간선제란 것이었는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뽑는 것입니다. 서슬퍼런 유신시절에 대의원들을 모아놓고 '공갈 반 회유 반' 하면 안 넘어갈 사람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6월항쟁으로 국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뽑게 되었습니다. 물밀듯이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의 저항에 전두환 독재정권도 결국 항복선언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최규석의 만화 『100℃』는 6월항쟁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중고등학생들이 읽기 쉽도록 만화로 그린 책입니다. 권영호라는 주인공도 어린 시절 웅변대회에 나가 빨갱이를 때려잡자고 외치던 당찬 반공소년이었습니다. 그러던 주인공이 대학에 들어가 진실을 마주하게 되면서 고민하게 되고 결국 운동권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그런 아들이 빨갱이들에게 물들게 될까봐 노심초사하던 어머니, 그러나 아들이 구속되자 누구보다 앞장서서 독재에 맞서던 어머니를 통해 결국 세상은 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말없이 직장생활에 충실한 영호의 형 영진은 6월항쟁의 주역이었던 넥타이부대의 표징입니다.
이 책은 6월항쟁 승리의 소식으로 끝을 맺습니다. 완강하게 아들 영호와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다 민가협에 빠진 아내를 못마땅해하던 아버지도 마지막에는 택시기사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6월항쟁의 클락숀에 손을 얹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은 개벽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작가 최규석은 부록 뒤에 실어놓은 <작가의 말>을 통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관한 통렬한 비판을 던집니다. 6월항쟁은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루어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민주주의는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것이 작가의 관점입니다. 진짜 민주주의는 경제민주주의란 것입니다. 정치민주주의가 아무리 꽃을 피워도 경제민주주의가 없다면 그것은 날개 없는 민주주의입니다.
6월항쟁으로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직접 뽑게 되었지만, 여전히 철거민들은 두드려 맞고 생활현장에서 쫓겨나고 있고, 노동자들은 전태일 열사가 했던 것처럼 줄기차게 목숨을 내던지지만 연예인의 성형기사만큼도 조명을 받지 못하며, 전태일 열사가 제 몸에 불을 붙이며 지키라고 절규했던 근로기준법은 걸레처럼 개악됐습니다.
그래서 6월항쟁은 반쪽의 혁명입니다. 6월항쟁이 완전한 혁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나머지 반쪽, 즉 경제민주주의를 당성해야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6월항쟁은 끝난 것이 아니며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항쟁이 지닌 역사적 의미가 지대하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는 처음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로부터 이 작품의 작업을 제안받았을 때 거절을 할 심산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첫 이유는 그 사건에 대하여 별로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배알이 꼬여서'라는 그의 이유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이유는 배알이 꼬여서였다. 87년 이전 공고를 졸업한 동네 형님들은 20대 후반이면 혼자 벌어서 제 소유의 자그마한 주공아파트에서 엑셀을 굴리며 아이들을 낳고 키웠었지만, 지금 내 또래의 친구 중에 부모 잘 만난 경우를 빼면 누구도 그런 사치를 부리지 못한다."
글쎄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87년 이전에 공고를 졸업한 동네 형님들이 부럽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그때보다 현저하게 살기 어려워진 현실에 대한 푸념일까요? 공고를 다니다 82년에 취업이란 걸 나와서 기름밥을 먹으며 젊은 시절을 보낸 저로서는 이해가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아마 작가의 동네 형님들은 모두 두산중공업(구 한국중공업)이나 현대자동차 같은 대공장에 다니는 모양입니다. 아마 그런 곳이라면 틀림없이 맞는 말입니다. 그런 대공장에 다니지 않더라도 작가의 동네 형님쯤 되는 사람들은 작은 아파트에 엑셀을 굴리며 아이를 낳고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도 어려워졌습니다. 그 동네 형님들 중 상당수는 비정규직으로 떨어져 작은 아파트와 엑셀을 유지하며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버거운지 모릅니다. 물론 작가 또래의 친구들은 그런 생활조차 경험해보지 못했으니 배알이 꼴릴 만도 합니다. 6월항쟁은 정치민주주의를 달성했지만, 새로운 환경에 발빠르게 적응한 자본은 새롭게 진화했습니다.
6월항쟁 이전의 그들은 독재에 순종하며 그들이 쳐주는 보호막 속에서 돈을 벌면 되었지만, 이제 그들은 스스로 법을 만들고 세상을 통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근로자파견법을 만들고, 이게 발전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했으며, 이제는 이보다 더 진화한 새로운 제도를 찾고 있습니다. 모든 노동자를 개인사업자로 만들겠다는 게 현재 그들의 구상입니다.
어쩌면 작가는 이런 모든 현실, 미완의 혁명에 대한 불평, 이런 것들로 인해 배알이 꼬여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의 제안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작가는 지난날에 비해 통치자들에 대한 말문이 조금 트인 걸 겨우 민주화라고 말한다면 할 말 좀 참고 좀더 배불리 편하게 먹고 사는 게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탓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사회의 문제로 고통받으면서도 제 탓만 하고 사는 사람들 앞에서 20년 전에 이룩한 민주화를 찬양하는 것은 삶의 질과 민주주의가 아무런 연관을 갖지 않는다고 선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행사장 귀빈석에 앉은 분들 가슴에 달린 카네이션 같은 것으로 만드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작가가 작업을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이 작품이 전국의 중고등학교에 배포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아무것도 아닌 걸 위해 수많은 사람들―역사교과서에 등장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처럼 터무니없이 약하고 겁 많고 평범한 사람들―이 피와 땀을 흘렸고 제 삶의 기회를 포기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지키는 것이 생각보다 무척 어려운 일이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안심할 정도로 튼튼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강화하고 보완하려는 노력이 없이는 어느날 '사람 좋아 보이는 도둑놈에 의해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하고 싶었다."
마지막 그의 바람은 그의 얘기처럼 '이 책이 인터넷에 발표됨과 동시에 집권한 이명박 정권에 의해 생생한 현장체험을 곁들인 교육이 진행되고 있는 중'입니다. 아마도 이 책은 수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이미 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전적인 인쇄물을 통해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보는 것도 색다른 추억입니다.
내가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자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녀석이 다가와 '잽싸게' 집어갔습니다. 이 책이 만화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는 아이의 표정은 그리 밝거나 신나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심각한 표정이 자못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짐짓 모른 척 재미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아이에게 6월항쟁은 너무나 무서운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책장을 다 넘겨보는 아이가 대견스럽기도 했습니다. 아이에게 '아름다운 꽃노래'만 틀어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으로 다를 바 없지만, 그러나 미래가 그들의 것이라면 그래선 안 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이 책은 만화입니다. 만화는 재미있습니다. 무거운 주제이지만 편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만화의 커다란 장점입니다. 시간을 많이 소비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주어진 것인지 알게 해주고 싶다면 이 책을 사서 먼저 읽어본 다음 권해보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6월항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껏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하는 소중한 역사의 자산입니다. 또 6월항쟁은 정치민주주의로 끝나서는 안 되고 경제민주주의를 달성하고자 하는 지난한 투쟁을 통해 완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가장 절절하게 잘 표현해놓은 것 같은 박재동 화백의 추천글로 마무리하겠습니다.
『100℃』는 우리의 심장을 다시 요동치게 하고 잠자던 세포들을 일깨워
지금의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되짚어보게 한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속에 어떠한 역사가 묻혀있는가를! 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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