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마음이 머무는 도시 그 매혹의 이야기 -
이희수 지음/바다출판사
여행의 묘미는 변함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간을 찾아 지나간 시간들을 추억하는데 있다. 우리는 그 추억을 통해 과거에 대한 회상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무런 기억의 도움 없이도 그저 아름다움이나 웅장함, 위대함 따위만으로도 얼마든지 여행의 목적한 바를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하고 웅장한 아름다움도 거기에 추억이 저장되어 있지 않다면 생명이 없는 나무와 같을 것이다. 우리는 나무에 돋아나는 연초록 이파리들에 감동하면서 지난 겨울을 생각한다. 그 나무는 그 자리에 남아서 지난 겨울의 온갖 풍상과 눈보라를 다 견뎌내고 드디어 연초록 이파리로 세상을 맞이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너무나 빠른 세상에 살고 있다. ‘빨리, 더 빨리’가 모토였던 7~80년대를 지나왔던 우리에게 세상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의 풍경일 뿐이었다. 우리는 세상 속에 살면서도 그 세상에 머무르지 못하고 늘 지나쳐야만 하는 나그네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음이 어디에 머무는지도 모르는 채 습관처럼 달려왔던 것이다.
<마음이 머무는 도시 그 매혹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우리에게 오래된 공간을 찾아 시간을 추억하며 머무르길 권하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여기 실린 문화도시들은 빠르지 않은 도시들이다. |
그보다 저자의 어쩌면 사치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이 권고는 시간의 노예가 되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해 마음을 기댈 만한 오래된 공간이 필요함을 역설적으로 말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매우 매력적인 책이다. 우선 편집부터가 제목처럼 매혹적이다.
큼지막한 활자는 이 책 속의 공간을 여행하게 될 독자들의 눈의 피로를 덜어준다. 활자를 여행하는 중간중간에 오래된 유적과 도시의 사진을 배치해 쉬어갈 수 있도록 하는 배려도 훌륭하다. 활자 속에 들어있는 역사를 읽고 난 다음 휴식 삼아 사진 속의 밀라노 두오모를 물끄러미 쳐다보라. 그리고 두오모의 지붕에서 하늘을 찌르고 있는 3159개의 조각상들을 세어보라.
그저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풍경처럼 책 속의 활자와 사진들을 스쳐가지 말고 차에서 내려 그 풍경 속에 빠지듯 해보라. 그리하여 오랜 세월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간에서 지나간 시간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라. 그리하여 느림의 미학을 마음껏 느껴보라. 그렇게 해서 그 속에서 마음껏 노닐 수 있기를 이 책은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늘 반만년 유구한 단일민족의 역사를 자랑해왔다. 민족주의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어서 독재자에게마저도 유용한 도구다. 우리가 어린 시절 암기를 못해 혼나던 국민교육헌장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어야 하는 이유에도 반만년 유구한 역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반만년 역사는 언제나 그렇듯 말 속에서만 있었을 뿐 실제로 그 역사는 왜곡되고 부수어지기 일쑤였다.
나는 “에스파냐의 건축물을 보면서는 제발 연대를 묻지 말라”며 고개를 흔들었다는 안내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하나의 성당을 완성하기 위해 천 년의 세월을 기다릴 줄 안다. 고딕양식에서 출발하여 바로크 시대를 거쳐 19세기 현대 건축의 요소까지 모두 담고 있다는 팔마 대성당은 사진만으로도 인류의 위대함이 느껴진다.
천 년의 세월을 넘어온 이 위대한 건축물을 과연 누구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오늘 누군가가 백 년 혹은 이백 년에 걸쳐 땅을 파고 다지고 기초를 놓고 다시 굳기를 기다리는 지루한 건축물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바보가 아닌가. 당신 대에 끝내지도 못할 일을 도대체 누구를 위해 한단 말이요.”
나는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많은 도시들의 오래된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또한 심한 질투심을 느꼈다. 우리는 왜 저런 곳에서 살지 못하는가. 몇 년 전 프랑스의 세계적인 사진작가 얀이 유네스코의 파견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산하를 찍다가 그런 말을 했다. “미안하지만 한국의 도시들은 도저히 카메라를 들이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우리는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어딘가에서 그 역사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역사는 둘째치고 사람들에게 평온한 안식을 주는 마음이 머물만한 그런 도시를 찾는 것도 꽤나 어려운 일이다. 자본주의적 속도와 실용만이 강조된 획일적인 건축물들과 거대한 간판들 사이에서 우리의 마음이 잠깐이라도 머물 곳이 없다는 것은 실로 불행한 일이다.
<마음이 머무는 도시 그 매혹의 이야기>는 포르투갈의 아름다운 도시 포르투에서 시작하여 쇼팽과 조르주 상드가 사랑한 마요르카, 중세 절대왕권에 밀린 교황청이 피난해있던 프랑스의 아비뇽, 밀라노와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를 거쳐 고대 그리스 신화의 고향 크레타 섬으로 떠난다. 그리고 석양이 아름다운 동유럽 최고의 문화도시 프라하에 잠깐 들른 다음 에메랄드 빛 지중해를 건넌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도시 터키 안탈리아는 산타클로스의 고향이다. 이곳에서 지중해를 따라 다시 서쪽으로 가면 고대신전과 조각상의 위대함을 만날 수 있는 룩소르(테베) 그리고 까뮈와 지드의 정신적 고향 알제가 기다린다. 그리고 지중해를 떠나 아시아에서 앙코르와트와 이슬람문화의 화려함과 역동성이 살아 숨쉬는 파키스탄 라호르를 만난다.
라호르는 농부의 아들이었던 나나크가 힌두교를 접목해 이슬람 시크교를 창시한 곳이다. “자비를 너의 모스크로 삼고, 신앙을 너의 기도 방석으로 삼고, 정직한 삶을 너의 <꾸란>으로 삼고, 겸허함을 너의 율법으로 삼고, 경건함을 너의 예식으로 삼아라.”라는 가르침을 새기며 혹한의 땅 이르쿠츠크와 우리와 닮은 사람들이 옛모습을 간직한 채 살고 있는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를 거쳐 캐나다 밴쿠버와 미국의 첨단도시 시애틀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장 그르니에는 “사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 덜 힘들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여행하게 될 이 책 <마음이 머무는 도시 그 매혹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도시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의 정이 느껴지는 도시다. 이 도시들에선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사는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이 도시들의 거리를 걷게 된다면 살아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의 기억 속에 잠자고 있는 옛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수천 년간 숙성된 깊은 맛과 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부족하나마 이 도시의 거리를 직접 걷는 즐거움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굳이 포르투나 알제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우리의 마음이 머물 수 있는 거리를 찾는 여유로움을 선물해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다면 혹시나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게 되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파비
마음이 머무는 도시 그 매혹의 이야기 - 이희수 지음/바다출판사 |
'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벌한 세상에 읽는 ‘고민하는 힘’ (0) | 2009.06.01 |
---|---|
신영철사태로 다시보는 사법비리 (1) | 2009.05.22 |
사람과 개의 공통점과 차이 (2) | 2009.05.08 |
알라딘-티스토리 서평단에 합격했어요! (5) | 2009.03.26 |
습지와 인간이 만들어온 역사와 람사르 (5) | 2008.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