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5.12 신영철 대법관이 마속? 그럼 이완용은 이순신이다 by 파비 정부권 (19)
  2. 2009.04.23 곽재우가 신선처럼 살다간 망우정에서 by 파비 정부권 (5)

사진자료-레디앙, 이창우 화백

신영철이란 이름은 대한민국 사법역사의 오점이다. 법관들에겐 수치스러운 이름이다. 그런 신영철 대법관에게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회가  ‘경고·주의 조처 권고’라는 미온적인 처분을 내린 것에 대해 전국의 일선 판사들이 반발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만약 대법원의 의지대로 신영철 파동이 이대로 유야무야 넘어간다면 앞으로 영원히 법관들은 치욕스런 오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자신들의 판결이 정의와 공평으로부터 나왔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일선 법관들이 대법원장에게 결단을 촉구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 결단이란 다름아닌 신영철 대법관 스스로의 사퇴를 종용하거나 그러지 아니할 경우 징계위원회에 회부해 적법절차에 따르는 것이다. 일선 법관들의 움직임으로부터 아직 사법부에서 정의라는 이름이 완전히 축출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아주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잠깐 엉뚱한 시비 하나를 걸고자 한다.


신영철이 마속이라고? 천하의 제갈량이 통곡하겠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가 “신 대법관의 행태는 명백히 재판관여에 해당했다”며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는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모법을 보여야한다”고 신 대법관의 징계를 거듭 촉구했다고 한다.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 읍참마속이라….
우리는 보통 조직 내의 어떤 특정한 사람을 솎아낼 것을 요구할 때 이 읍참마속이란 고사를 자주 인용한다. 그렇다면 마속이란 이 고대의 인물과 신영철을 비교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내가 볼 때는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비록 마속이 제갈량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공명심에 군사를 움직여 크나큰 실책을 범했다고는 하나 그는 촉한의 가장 뛰어난 장수 중 한사람이고 제갈량이 최고로 아끼는 심복이었다. 가정전투에서 대패한 마속은 거점을 상실해 나라를 위태롭게 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스스로 묶어 참하기를 청했으니 그 충성심 또한 가히 천하일절이다. 그러나 지금 마속과 비교되고 있는 신영철이란 사람은 어떠한가? 그는 법관의 신분을 망각하고 권력에 아부한 사람이다.


그가 무엇 때문에 일선 재판장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신속한 재판을 독려했을까? 심지어는 판결의 방향까지 유도하는 듯이 인상을 주면서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이명박 대통령의 추천을 받아 대법관으로 영전했다는 사실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그런 신영철을 마속에 견주다니…, 마속이 지하에서 들으면 대성통곡을 할 일이다. 제갈량이 이 소식을 들으면 “내 충심에 따른 결단이 신영철 같은 자에게 비유되다니 내 이럴려고 마속을 죽였던가?” 하고 땅을 치며 통분할 일이다. 


‘읍참마속’ 아니라 ‘일벌백계’라고 해야
신영철 같은 아부꾼에게 「읍참」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법관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행정부의 시녀로 전락시킨 신영철 같은 사람을 「마속」과 비교하다니 어불성설이다. 오로지 「일벌백계」의 심정으로 결단하기를 촉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닌가?
김훤주 기자가 늘 주장하는 것처럼 말을 정확하게 구사하기도 해야 하지만, 적절하게 쓸 줄도 알아야 한다. 신영철 대법관 탄핵을 주도하는 일선 법관들의 충심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그들에게 감사한다.


다만, 신영철을 마속과 같은 훌륭한 인물에 견주는 것이 언짢을 뿐이다. 신영철은 법관의 양심을 팔았다. 그는 사법부에 마속이 아니라 이완용에 불과하다. 이완용이 절대 이순신에 비교돼서는 안 되는 것처럼 신영철도 결코 마속에 비교되어서는 안 되고 그럴 만한 가치도 없는 인물이다. 어쨌든 이번 기회가 신영철 같은 인물이 법원에 절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망우정(忘憂亭)

망우정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곽재우 장군이 말년에 은거하다 쓸쓸히 생을 마감한 곳이다. 곽재우는 1602년 경남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낙동강을 바라보는 자그마한 언덕 위에 기와집을 짓고 망우정이라 이름 지었다. 이때부터 자신의 호를 망우당이라 하고 세상과 절연한 채 낚시로 세월을 낚으며 신선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의 행적에 관하여 다소 신비화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를 들여다보면 정말 신선이든 도인이든 되지 않고서는 올바른 정신을 유지하며 살기는 힘들었을 것이란 짐작을 해본다.

1592년은 선조가 왕이 된지 24년이 되는 해였다. 역대 조선의 왕들 중에 선조처럼 무능할 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로 좁은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낸 것으로 평가 받는 왕도 드물다. 

“말짱 도로묵”이란 말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는 선조의 품성이 어떠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는 왕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피난생활의 곤궁함은 왕이라고 해서 피할 수는 없는 노릇. 매일 올라오는 밥상에는 입맛을 당기는 음식이라곤 구경하기 힘들었을 터이다. 

그런데 어느 날, 참으로 맛있는 생선이 반찬으로 올라왔다. 이름이 묵이라고 하는 고기였는데, 감격한 왕은 그날로 그 고기에다 은어란 이름을 하사했다. 뒷날 대궐로 돌아온 왕이 다시 그 고기를 찾아 먹어보았더니 의주행궁에서 먹던 그 맛이 아니라, 매우 실망한 왕은 이렇게 말했단다. “도로 묵이라 하라!” 그래서 ‘말짱 도로묵’이란 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후로  말짱 도로묵이란 “헛수고 말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선조는 이렇듯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성격이었던 데다가 의심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난세가 되면 영웅이 태어나게 마련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의령 사람 곽재우였다. 곽재우는 남명 조식의 문하생이었는데 조식의 제자들 중에 특히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이 많았다.
 

1789년(정조13년)에 지방유림들이 세운 추모비. 망우정 지붕 너머 낙동강은 세월따라 이리로 흐르다 저리로 흐르다 한다.


곽재우는 다른 장수들과 연합작전으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도 전남 담양 출신의 의병장 김덕령과 합동으로 왜적을 크게 물리친 의령 정암진 전투가 유명하다. 또 1594년에는 이순신, 김덕령과 함께 거제 장문포에서 합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특별히 김덕령과는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주 절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런 김덕령 장군이 역모를 꾸몄다는 무고를 뒤집어쓰고 옥사하고 말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덕령은 감옥에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나와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왜군을 벌벌 떨게 하던 의병장의 마지막은 참혹했다. 김덕령 뿐만이 아니었다. 나중엔 이순신도 옥에 갇혀 사형 직전까지 갔다. 유성룡의 변호로 겨우 목숨을 건진 이순신은 백의종군했다.

김덕령, 이순신과 연합작전으로 큰 전과를 올리며 그들과 우의를 다지던 곽재우에겐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곽재우 장군도 한때 경상감사 김수로부터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던 적이 있다. 김수는 왜군을 피해 도망만 다니던 자였는데, 곽재우가 세곡을 훔쳤다고 거짓 고변을 한 것이다.

결국 초유사 김성일의 장계로 풀려나긴 했지만, 곽재우 장군이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을 모두 마다하고 이곳에 은거하게 된 연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럼 선조는 왜 이토록 전공이 특출한 장군이나 의병장들에게 모질었던 것일까? 후세 사람들은 이를 두고 선조의 소심한 의심병과 공을 세워 민심이 두터워지는 장군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의주행궁에서 돌아와 백성들에 의해 시커멓게 잿더미로 변한 경복궁을 바라보는 선조의 심사가 어떠했을까 생각해보면 한편 그럴 듯한 말이다. 그의 눈에는 무력을 갖추고 민심까지 얻은 장수들이 언제든 자신을 권좌에서 밀어낼지도 모르는 위험한 세력이었을 것이다. 말짱 도로묵의 변덕에다 소심한 의심병에 찌든 선조에겐 왜적보다 이들이 더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망우정 편액


   
망우(忘憂)란 근심·걱정을 잊는다는 뜻이다. 곽재우 장군에게 근심 걱정이 무엇이었을까?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의 내용이 선조의 미움을 사 합격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은 이후 출사의 뜻을 접었던 장군은 그러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무려 스물아홉 차례에 걸쳐 벼슬을 제수 받는다.

이중 열네 번은 고사하고 열다섯 번은 출사하였으나 이마저도 곧 사직하고 마침내는 이곳 망우정에 몸을 숨겼다. 여기서도 끝끝내 사정하는 광해군의 청을 못 이겨 두어 번 임지로 나갔으나 곧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곳 망우정에서 곽재우는 모든 곡기를 끊고 신선처럼 살았다고 한다.  

외손에게 상속된 이 집은 나중에 여현정으로도 불렀다.


곡기를 끊고 사람이 살 수가 있었을까. 물론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아련하긴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위인전에 묘사된 장군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어느 날 저녁 해가 질 무렵, 손과 발을 깨끗이 씻고 강을 바라보며 장군은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리고 맑은 술을 한 잔 들이킨 다음 그 술을 다시 귀로 쏟으며 앉은 채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어린 마음에도 장군이 참으로 신비롭게 느껴졌었다. 붉은 옷을 입고 적진을 좌충우돌하던 신과도 같은 존재가 강변에 홀로 앉아 맑은 술잔을 들고 신선처럼 마지막을 장식하는 모습은 고고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오늘 망우정에 올라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은 어쩐지 처량하기만 하다. 

초라한 세칸 짜리 기와집 대청마루 위 편액에 선명한 忘憂亭(망우정), 근심과 걱정을 잊겠다는 저 뜻을 그저 의롭다거나 신비롭게만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떨쳐 일어선 장군들 중에 유독 이순신과 곽재우의 공이 제일”이라고 칭송했다. 그런 장군이 고향인 의령에서 꽤 떨어진 이곳에다 집을 짓고 말년을 보낸 뜻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고 고개를 갸웃거려보아도 짐작하기 어려우니 아직 나는 신선의 경지에 오르긴 틀렸나 보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