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친혼'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09.10.05 '선덕여왕' 유신, 사랑 버리고 근친결혼한 까닭 by 파비 정부권 (4)
  2. 2009.09.25 황남대총금관으로 보는 선덕여왕 탄생의 비밀 by 파비 정부권 (6)
  3. 2009.09.13 선덕여왕과 천추태후로 살펴보는 근친혼 by 파비 정부권 (54)
  4. 2009.07.11 선덕여왕, 미실의 출신성분은 무엇이었을까? by 파비 정부권 (8)
  5. 2009.07.08 선덕여왕, 근친혼의 이유는 무엇일까? by 파비 정부권 (68)
김유신이 미실의 아들 보종의 딸 영모와 결혼했다. 물론 이는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의 이야기다. 이전에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유신이 협박에 굴복해 미실의 가문에 장가를 든 것은 난센스란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실제로는 미실이 유신의 가문과 혼사를 맺음으로써 권력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했을 것이란 사실이 보다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김유신의 가문이 신라 진골인 것은 시혜인가, 노력의 결과인가

김유신의 조부인 김무력은 금관가야 구형왕의 아들이다. 그는 신라에 귀순한 이후 전장에 나가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관산성전투에서는 성왕을 죽여 백제부흥운동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김무력은 그 공으로 대각간의 지위에 올랐다. 무력의 아들 서현 역시 낭비성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으며 각간의 자리에 올랐다. 각간은 신라 17관등 중 1등위다.

나중에 삼한을 병합한 김유신이 태대각간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대각간이나 태대각간은 상설적인 벼슬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비정규적으로 특설한 것이었다. 김유신의 가문은 신라에 귀순한 이래 대대로 각간에 올랐을 뿐 아니라 진골귀족으로 행세했다(참고로 신라에서는 진골귀족이 아니면 3등위 이상의 관직에 오를 수 없다). 

신라가 귀순한 가야의 왕족에게 진골귀족의 작위를 부여한 것은 나름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테지만, 그것이 다만 시혜적인 것이었을까? 신라란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열린 사고 구조를 가진 나라였을 수 있다. 박씨족에서 석씨족으로, 다시 김씨족으로 왕권이 이전되는 과정을 보아도 그렇다. 신라는 통합왕조였던 것이다. 

하나의 왕조가 다른 왕조를 배타적으로 멸망시키는 관계가 아닌 상생하는 관계였다고나 할까. 여기에 가야계가 하나 더 추가된 것이다. 이런 전통에 따라 신라는 가야계의 유력한 왕족인 유신의 가문을 진골로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 가문이 진골귀족이 된 것이 단순히 가야의 왕족이었기 때문일까?

그들이 아무리 가야의 왕족 출신이라도 탄탄한 무력이 없었다면 모두 불가능한 일이다. 구형왕은 신라에 귀순함으로써 자신과 자식들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영지에 대한 관할권까지도 일정하게 유지했을 것이다. 우리가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면서 유심히 살펴볼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비담의 화랑 입문기다. 

정치적 입지는 무력보다 혼사가 더 큰 변수

비담은 화랑이 되었지만 아직 낭도가 없다. 말하자면 그는 병사 없는 장군이다. 만약 비담이 끝내 낭도를 구하지 못한다면 그는 영원히 나홀로 화랑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여러분은 하나의 의문도 들지 않는가? 어째서 신라는 화랑으로 임명한 또는 인정한 자에게 낭도를 나누어 주지 않는 것일까? 아무튼 김유신은 이런 문제로부터 자유롭다. 

그러나 이런 무력도 그저 가문의 귄위를 지키는 정도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결국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우지 않고서 패망한 왕조의 가문의 영광을 일군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나 마찬가지다. 김무력과 김서현은 수많은 전쟁에서 공을 세웠지만 앞으로 김유신도 마찬가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열심히 노력하는 자가 항상 승리의 월계관을 쓰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잘 가르쳐준다. 여기엔 보다 복잡한 고도의 변수가 작용하는 것이다. 그 변수란 다름 아닌 혼사다. 오늘날의 재벌가나 정치인, 고위관료 집단의 혼맥을 살펴보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신학림 전 언론노조위원장의 말에 의하면,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조선일보와 이명박 대통령의 혼맥도라고 하니 관심있는 분들은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란다. 아마도 내가 느낀 그대로라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거미줄로 쳐진 망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덕업일신 망라사방>이 아니라 <우리끼리 망라독점>이라고 말해도 하나도 지나치지 않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김유신과 영모의 결혼도 분명히 책략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에서도 그랬을 수 있다. 김유신이 자신의 누이들과 김춘추를 결혼시키기 위해 벌인 쇼를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꿈을 사고 판 누이들의 이야기로 너무도 유명한 이 아름다운 고사의 그림자 속에는 무서운 책략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김유신의 연애담, 천관녀와의 사랑

그런 김유신에게도 애절한 연애담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천관녀와의 사랑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천관녀는 기생이라고도 하고 제관이라고 하며 주막집 처녀라고도 하는 등 다양한 신분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몇 해 전, KBS 사극 <연개소문>에 등장했던 천관녀는 미실의 양녀로서 하늘에 제사를 주관하는 천관이었다. 

천관녀가 어떤 출신의 여인이었던지간에 분명한 것은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천한 가문에 속했음은 그다지 틀지지 않아보인다. 만명부인으로 말하자면, 법흥왕의 동생 입종갈문왕의 손녀이며 진흥왕의 동생 숙글종(숙흘종이라고도 발음함)의 딸이다. 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은 왕족이었다. 

당시는 왕족의 명예와 특권을 위해 철저하게 근친혼이 행해지던 때였다. 김유신이 비록 진골귀족이라고는 하나 패망한 가야의 왕족일 뿐이었다. 내물왕계의 후손으로 철저한 근친혼이 신국의 도라고 배웠던 만명공주에게 김서현은 절대 결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만명공주는 김서현을 따라 만노군(충북 진천)으로 도망쳐 그곳에서 유신을 낳았다. 

물론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렇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는다. 김서현은 당대의 명장이며 신라 최고의 관등 각간에 '대'자를 더한 대각간이다. 신라 천년역사를 통틀어 대각간의 지위을 받은 인물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런 김무력의 가문과 혼사를 맺는 것은 왕족이라 하여 거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아무튼 만명공주는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젊은날의 에피소드로 인해 콤플렉스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콤플렉스는 자연스레 출세지향적인 성향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런 만명부인에게 천관녀는 가당치도 않은 존재였다. 그런데 자신의 기대를 짊어진 아들 유신이 천관녀에게 빠지다니. 만명부인은 유신에게 호통을 쳤다.

유신, 출세를 위해 애마의 머리를 자르다

"나는 어렵게 너의 부친과 결혼하여 너를 낳았다. 너는 어찌하여 가문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냐? 술 파는 천한 계집과 어울리다니 정신이 있는 게냐, 없는 게냐?" 크게 꾸지람을 들은 김유신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했다. "다시는 천관녀를 만나지도 않을 것이며 그 집에 가지도 않겠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술 취한 유신을 등에 태운 말은 천관녀의 집으로 갔다. 유신의 말은 명마였다. 유신이 술에 취하면 가는 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술에 취한 유신이 천관녀의 집에서 운우의 정으로 밤이 깊어감을 잊었음은 물론이다. 다음날 아침 술이 깬 유신은 대경실색했다. 어머니에게 한 맹세를 깨뜨린 것이다. 

다음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신의 말은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려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주인의 연애를 도운 결과는 비참한 죽음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유신은 진정으로 천관녀를 사랑했을까? 아니면 하찮은 노리갯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천관녀가 주막집 기생이었다면, 그래서 유흥 목적으로 드나든 것이었다면, 만명부인의 충고를 받아들인 유신은 매우 강단이 있는 젊은이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천관녀가 단순히 주막집 기생이 아니라, 요즈음 주로 대세를 이루는 주장처럼 제사를 주관하는 천관이었다면 이야기는 매우 달라진다.

유신 역시 어머니 만명부인과 마찬가지로 매우 출세지향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때 그가 자기 명마의 목을 자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출세를 위해 사랑도 과감하게 버리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영모와 결혼했으며 또 후에 자기 누이가 김춘추와 결혼하여 낳은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유신도 근친결혼, '혼사는 정치야심의 도구'

말하자면, 김유신도 자기 가문의 권위와 특권을 만들기 위해 근친혼을 강행했던 것이다. 하긴 강행이란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그 시대에 근친혼이란 이상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신국의 도란 이름으로 권장되던 행위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원술랑이 바로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난 공주가 김유신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이다. 

그토록 출세지향적이었던 김유신, 그래서 천관녀와의 연애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말의 목을 잘랐던 김유신, 그러나 천관녀를 향한 사랑의 감정은 가슴속에 남아있었던 것일까? 백제를 멸망시키고 돌아온 김유신은 자신이 드나들던 천관녀의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천관사란 이름의 이 절은 오는날 흔적은 없고 자취만 남아 천관사지라고 불린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김유신이 영모와 결혼하는 장면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김유신은 정말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군. 자기 감정을 다스리며 저토록 처절하게 이성에 충실하다는 것은 보통 수양이 깊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실로 삼한통일을 이룰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거기에 대해선 뭐라고 말할 자신은 없다. 사람에겐 저마다 가치관이 다르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는 뉴스를 통해 한국 최고 재벌의 후계자가 이혼하는 것도 보았으며, 또 그 최고 재벌에 시집을 갔다고 해서 신데렐라가 되었다가 스스로 이혼을 결심하고 나온 사람도 보았다. 

신데렐라가 동화 속에서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의 테마일지는 몰라도 현실에서는 어떨까? 왕비가 된 신데렐라는 과연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혹은 왕비가 된 신데렐라가 잃어버린 것은 없을까? 단지 유리구두 한 짝 뿐이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인생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은 아니었을까? 

천관사를 완성한 김유신, 천관녀에게 무어라 말했을까?

아무튼 김유신이 미실가문과의 혼사로 정치적 제휴를 맺어 가야 유민들을 살렸다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다. 가야 유민들은 김유신에게 목숨을 빚졌다. 그들은 생사를 다해 충성을 다할 것이니 김유신으로서는 확실한 무력을 확보한 셈이다. 그나저나 후반부에서 김유신과 최대의 각을 세우게 될 비담은 어떻게 자신의 군대를 만들어갈까? 

좀 촌스럽게 말한다면, "그것이 궁금하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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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daum.net/mylovemay/?t__nil_login=myblog BlogIcon 실비단안개 2009.10.06 0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흠 - 읽고나니 김유신이 천박하게 보이는군요.
    이러면 안되는데~^^

    • Favicon of https://go.idomin.com BlogIcon 파비 정부권 2009.10.09 1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람이란 훌륭한 면이 있는 반면에 부정적인 면도 함께 가지고 있는 법이죠. 문제는 긍정적인 면이 얼마나 부정적인 면을 극복하는가 하는 것이겠지요.

  2. 전적동감 2009.10.07 2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회주의 자의 전형 김유신

    삼국땅따먹기 라고 칭하겠소 이들 한테 삼국통일은 너무 거창 하므로 땅따먹기 과정에서 김춘추 란놈

    하는 짖거리 보면 김유신과 다를 바가 전혀 없소

    요즘 그동네 인간들 하는거와 왜그렇게 똑같은지

    • Favicon of https://go.idomin.com BlogIcon 파비 정부권 2009.10.09 10: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이 동네(갱상도) 사람이라... ㅎㅎ
      김유신의 처신(출세지향적인)을 기회주의라기보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생각해보시면 어떨까요?

      김춘추가 백제를 공격할 때 그의 딸과 사위가 대야성에서 죽은 데 대한 복수심도 있었다고도 하니까... 역사란 경우에 따라서는 사소한 일 때문에 굴절되기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신라밀레니엄파크에서 찍은 사진

선덕여왕 탄생의 전시대적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미리 말한다면 그건 신라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라는 매우 개방적인 사회였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랐다.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문화를 받아들이며 제도를 정비한 데 비해 신라는 이들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유심히 유물을 관찰한 사람이라면 찬란한 신라문화의 독자적인 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고분은 찬란한 문화유산의 보물 창고

이재호가 쓴 <천년 고도를 걷는 즐거움(한겨레신문사)>에 이런 일화가 있다. 경주의 고분들에 일제는 아무런 의미없이 1호부터 155호까지 번호를 붙였다. 일제는 1920년대에 대대적인 고분 발굴에 착수했는데 금령총과 금관총 등에서 금관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이어 129호분을 발굴하자 금관이 또 나왔다. 이에 본국과 긴밀히 연락한 총독부는 발굴을 중단했다. 

그리고 때마침 일본에 신혼여행 중이던 스웨덴의 구스타프 6세 황태자에게 "신라 천 년 고도 경주에서 금관이 나왔고, 지금 발굴 중인 고분에서도 금관이 나올 기미가 있다"며 발굴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유혹했다. 물론 아시아 침략의 야욕을 위해 서방과 선린관계를 맺으려는 일본의 계략이었다. 구스타프는 고고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는 사람이었다.  

구스타프는 당장 현해탄을 건너 경주에 왔다. 각본대로 금관이 발굴되었음은 물론이다. 흥분과 감동으로 금관을 잡은 황태자는 손을 파르르 떨었다. 이를 지켜보던 일본관리가 만면에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황태자님이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음…." "황태자님이 직접 발굴에 참여하셨으니 서전국(스웨덴)의 이름을 따 서전총이 어떨지요?" 

"안 될 말이오. 찬란했던 동양의 나라 신라 왕릉에 서양 이름을 붙이다니 당치도 않소. 아까 보니 금관 정수리에 봉황 세 마리가 붙어 있던데 봉황총이 어떻겠소." 결국 129호분의 이름은 스웨덴과 봉황의 이름을 합쳐 서봉총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고고학적 지식과 안목을 갖춘 서양의 황태자에게도 신라의 금관은 휘황찬란한 것이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1971년 경주관광개발종합계획이 수립되었을 때 대릉원에서 제일 큰 98호분을 발굴하기로 했다. 이 고분을 발굴하기 위한 예행연습으로 바로 옆에 있던 155호분을 먼저 발굴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여기서 천마도가 나왔다. 예행연습으로 발굴한 고분에서 천마도와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금관(국보 188호)을 비롯해 1만 5천여 점의 유물이 쏟아지다니.

그리하여 155호 고분은 천마총이란 이름을 얻었다. 신문에 보니 천마도는 30여 년이 흐른 오늘에서야 비로소 전체 모습이 공개되었는데 머리에 뿔이 달린 모습이 유니콘을 닮아 앞으로 많은 논란이 예상된다고 한다.   

국보 188호 천마총 금관. 플래시를 쓸 수 없어 사진 상태가 안 좋다.


황남대총의 주인은 누굴까?

천마총에서 연습을 끝낸 발굴팀은 1973년부터 2년 3개월에 걸쳐 98호분을 발굴했다. 여기에 연인원 3만 2800명이 투입되었다. 이 98호분이 바로 황남대총이다. 이곳에서도 3만 50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황남대총은 북분과 남분으로 이루어진 쌍총인데 남분은 왕, 북분은 왕비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북분에서는 금관(국보 191호)이 나왔는데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남분에서는 금관이 나오지 않고 대신 은관이 나왔다는 것이다.  남분에는 60세 전후의 남자와 순장된 것으로 보이는 여자의 유골이 나왔는데 남자의 유골은 내물왕 또는 실성왕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관이 출토된 고분의 제작시기를 5세기에서 6세기 초반으로 볼 때 이 시기의 왕은 대략 6명으로 압축되는데 내물, 실성, 눌지, 자비, 소지, 지증왕이다. 이 중에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은 누구일까? 여기에 대해 일본의 역사학자 요시미즈 츠네오는 그의 저서 <로마문화 왕국, 신라>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그는 남분의 주인을 실성왕으로 보고 있다. 

그 이유로 실성왕은 왕족이 아닌 신분으로 왕위에 오른 유일한 신라의 왕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모든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성왕 외에도 왕족이 아니면서 왕이 된 인물은 이미 여럿 있었다. 우선 유명한 석탈해가 있다. 석탈해는 왕족이 아니었다. 다음 미추왕도 있다. 그도 역시 왕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왕의 사위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부마로서 왕이 된 사람들인데, 어쩌면 아들이 없는 왕의 공주를 대신해서 왕좌를 이어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요시미즈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석탈해나 미추왕 또는 내물왕의 경우에 박씨족, 석씨족 혹은 김씨족과의 권력투쟁을 통해 왕권을 쟁취한 것이라면 말이다.  
 
황남대총의 왕비는 금관, 왕은 은관?

실성왕은 김씨족이긴 하지만, 즉 김알지의 후손이긴 하지만 최초의 김씨 왕인 미추왕의 자손이 아니다. 그러므로 왕족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물왕의 사위였다. 내물왕이 죽으면서 어린 아들들을 대신해 사위에게 왕좌를 넘겼다. 실성왕은 왕이었지만 미추왕(또는 내물왕)의 딸인 왕비에 비해 계급이 낮았다. 

신라 왕릉 최대 규모의 황남대총. 길이는 남북으로 120m 동서로 82m, 높이는 남분이 22m 북분이 23m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왕은 은관을 쓰고, 왕비는 금관을 쓰고 누워있는 무덤의 실체'에 대해 이보다 더 확실한 대답은 없을 것이다. 또 혹자는 같은 맥락에서 내물왕의 무덤이 아니겠느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실성왕은 눌지에게 피살당해 권력을 상실했는데 이토록 거대한 무덤을 조성했을 리 없다는 차원에서 눌지왕의 능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물왕의 무덤이라는 주장은 비록 석씨왕의 사위로서 왕이 되었으나 김씨족 왕권의 기틀을 닦은 강력한 군주라고 평가한다면 별로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다. 눌지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실성왕을 죽이고 권력을 빼앗았다고 하나 그는 내물왕의 아들로서 정통성이 있다. 은관을 쓰고 누워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리 보면 가장 확실한 무덤의 임자는 아무래도 요시미즈의 주장처럼 실성왕이다. 그런데 어떻게 눌지에게 피살당해 권좌에서 밀려난 왕의 무덤이 이토록 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미스터리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커다란 핸디캡이 있다. 바로 의식이며 고정관념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왕을 보는 눈은 가졌지만 왕비를 보는 눈은 갖지 못했다. 

기록에 의하면 실성왕의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라고 한다. 그러나 연대 차이로 볼 때 이는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아마도 미추왕의 적손이거나 내물왕의 딸일 가능성이 크다. 미추왕의 딸이라고 하는 것은 김씨 왕족의 정통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 왕에 비해 신성한 혈통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황남대총의 여주인은 왕보다도 강한 권력자였다

어떻든, 우리는 황남대총의 북분과 남분의 피장자를 통해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북분의 피장자는 여왕이 아니었는데도 왕만이 쓸 수 있는 황금수목관과 호화찬란한 장신구를 비롯해 로마유리잔과 자기 등이 부장되었지만, 남분의 피장자는 비록 왕이었지만 왕비에 비해 낮은 신분 탓으로 은관과 금동관과 기타 무기·무구류가 부장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은 원래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한데, 자신을 암살하려던 실성왕을 오히려 시해하고 왕이 된 눌지조차도 어쩔 수 없이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는데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세력관계다. 실성왕의 왕비는 눌지왕의 이모이고 눌지왕의 아내는 실성왕의 딸이다. 눌지왕 주변에는 강력한 외척, 여인들의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우리는, 어째서 왕비의 무덤인 북분에서 왕이 쓰는 황금수목관이 나오고 왕의 무덤에서는 은관과 금동관만이 나왔는지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MBC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보듯 미실이라는 여인이 구축한 권력관계란 것이 그렇게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란 사실도 함께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미실이 구축한 구도란 것은 결국 선덕여왕이 왕좌에 오를 수 있는 토대다. 선덕여왕이 비록 성골이라고는 하나 여자로서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하여 아직 어떤 구체적인 해명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삼국사기에서 '성골남진'을 이유로 들고 있는데 이는 그저 불가피한 하나의 조처였을 뿐이라는 소극적인 해명 아닌 해명에 불과하다. 

신라 왕릉 중 가장 거대한 황남대총은 활발하고 진취적인 신라 여인들의 패기를 보여주는 블랙박스다. 그러나 우리는 이 블랙박스를 푸는 열쇠를 잃어버렸다. 여기에는 통일신라 후기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유교의 영향으로 고대의 전통을 깡그리 부정하는 풍조도 한몫했다. 이 풍조에 편승한 김부식은 암닭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으로 선덕여왕을 비하했다. 

황남대총 사이를 지나가는 두 사람. 무슨 생각을 하며 걸어가고 있을까?


그러나 결국 여왕도 배타적 근친혼을 통해 탄생한 왕족일 뿐, 
중요한 것은 골품귀족의 이해에 반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  
 
그러나 그 역시도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고 문물을 장려한 선덕여왕의 공덕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완곡하게 "여자가 왕이 되었는데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은 신통한 일이다"라고 비틀어 말했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우연히 왕이 된 여인이 아니다. 또는 성골이 남진하여 그리된 것도 아니다.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진덕여왕과 이백여 년이 지나 다시금 등장한 진성여왕은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사대주의 사관으로 씌어진 삼국사기, 이를 극복했으나 여전히 한계를 가지고 있는 삼국유사만으로 고대사회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 그러므로 비록 필사본이라 해도 화랑세기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실로 위안이라 아니할 수 없다.

화랑세기 진본이 나타나기 전에는 위작 논쟁은 아마도 종지부를 찍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기와 유사에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고대 신라 사회의 생활상을 그려보는 기쁨을 화랑세기를 통해 누려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화랑세기의 이야기를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은 다른 어떤 왕릉보다 우뚝 솟아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황남대총의 여주인이 아닐까?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이 분묘의 여주인이야말로 당당하게 신라정계에서 활약한 미실과 선덕여왕의 전신이란 사실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전제가 있다면, 황남대총의 여주인이든 미실이든 선덕여왕이든 타고난 혈통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철저한 근친혼을 통해 배타적 신분으로 만들어진 왕족이거나 성골들이다.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은 수수께끼다. 무덤들은 말이 없다. 대릉원을 순례하던 날, 마치 계곡을 타고 바람이 흐르듯 거대한 무덤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무척이나 시원했다. 황남대총 사이를 걸어가며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래,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일 뿐이다.

"와,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참 잘 생겼다." 

ps; 마무리가 희끄무리하지만 잠이 와서 할 수 없이 예약 걸고 그냥 잡니다. 내일 시간 나면 손 보겠습니다.
     뭐 크게 무리는 없다고 보지만, 결론은 신라사회는 여왕이 탄생하는 데 큰 거부감이 없는 사회였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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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 대릉원 황남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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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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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www.tsori.net BlogIcon Boramirang 2009.09.25 06: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 보고 갑니다. ^^

  2. Favicon of https://lovetree0602.tistory.com BlogIcon 초록누리 2009.09.25 08: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주인이 누구였는지 정말 궁금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잠깐이나마 고고학을 공부했었는데 제게는 궁금한 내용입니다. ^^ 주인이 누구였을까요.. 밝힐 수 있을까요?

    김부식의 사관에 대한 정리 잘 읽고갑니다.

  3. Favicon of http://blog.daum.net/mylovemay/?t__nil_login=myblog BlogIcon 실비단안개 2009.09.25 08:4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요즘 제가 살아가는 맛 중의 하나가 파비님의 신라역사(왕가)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학교에서는 왜 삼국사기와 유사의 지은이 등 겉만 외워라고 했는지 -
    그들이 무지해서 그랬을까요?^^

    고맙습니다.^^

    • Favicon of https://go.idomin.com BlogIcon 파비 정부권 2009.09.25 09:4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걸 외우라고 시킨 것은 그게 시험에 나오기 때문이옵니당~ 덕분에 이런 것도 써보고 그러지 않습니까요? ㅎㅎ 이렇게 격려해주시니 바쁜데 그냥 손 안 봐도 되겠습니다요. 원래 건물 올리기보다 수리하는게 더 힘들고 돈이 많이 드는 법입니다요. ㅋㅋ

우리는 선덕여왕을 통해 신라가 얼마나 성적으로 개방된 사회인가 하는 걸 알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라민 전체에 해당되는 건 아니고 골족, 즉 성골과 진골귀족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개방적인 성풍속은 이미 오래전부터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처용가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처용가는 개방적인 성풍속과는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사실은 아내의 외도를 눈 감아주는 마음 넓은 처용에 대한 이야기지요. 이에 감복한 도깨비(역신)가 은혜를 갚는 뜻에서 처용의 그림이 붙어있는 집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는 룰을 세웁니다. 그러나 어떻든 이런 처용의 관용은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대목입니다.

신라에 이어 등장한 고려왕조도 성풍속이 개방적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쩌면 족내혼에 관해선 신라보다 더 발달했을지도 모릅니다. 고려왕실의 족내혼은 왕씨 정권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려 4대 임금 광종은 족내혼을 권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지방 호족세력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근친혼을 통한 결속은 필수였을 것입니다. 

엊그제 <선덕여왕>에서 비담과 덕만공주의 혼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성공하지 못한 문노의 계책이었지만, 족내혼에 관한 좋은 예시가 될 수 있겠습니다. 비담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진지왕과 도화녀의 아들인 비형과 실존인물 비담의 합성모델로 진지왕과 미실 사이에서 난 아들입니다. 즉 진평왕과는 사촌지간이란 얘기죠. 덕만공주에게는 5촌 당숙이 됩니다.  

우리나라 민법에는 8촌 이내의 친족은 결혼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4촌 이내의 친족이 아니면 결혼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본법으로 말하면 지금이라도 덕만과 비담은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불법입니다. 2005년 이전에는 동성동본간 결혼도 불법이었습니다. 이런 법외혼 관계는 부정기적인 정부의 특별법을 통해 구제받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이 민법규정(동성동본 금혼법)에 대해 위헌심판제청이 일어나자 유림에서는 "동성동본금혼제는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단군건국초부터 전래되면서 관습화된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으로서 전통문화의 하나" 라고 주장했지만, 최근 드라마 천추태후나 선덕여왕을 보면 이런 주장들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어쨌든 고려시대까지도 근친혼은 불법이 아니었으며 위에서 말한대로 권장되기까지 했습니다. 신라시대는 1부1처제 사회였습니다. 물론 고려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왕은 달랐을 것입니다. 왕은 나라를 통치하지만 한편 자손을 번창시켜 왕실을 안정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왕들은 여러 명의 부인을 두는 것입니다. 미실의 경우에 색공을 드는 여인이란 특수한 신분을 빼면 그녀도 1부1처제의 원칙에서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만약 미실이 그녀의 계책대로 황후에 올랐다면 어땠을까? 이건 좀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랬다면 세종과는 이혼해야 되겠지요. 아무리 미실이지만 두 사람과 결혼관계를 유지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상대는 일국의 황제입니다. 미실과 설원공의 관계는 단지 연인관계일 뿐입니다. 미실과 설원공의 사이에서 난 보종은 실제 친자관계를 인정하여 미실의 아들로 인정 받습니다만, 설원공은 그저 연인일 뿐입니다. 세종이 묵인하고 있을 뿐이죠. 기분 나쁘면 이혼할 수도 있겠으나, 이사부 장군의 아들 세종은 감정보다는 권력을 택했습니다.

어쩌면 미실보다 세종이 더 무서운 사람입니다. 아니라구요? 멍청해서 그렇다구요? 음,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습니다. 하긴 드라마에서 세종과 하종 부자는 좀 멍청하게 그려지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욕심은 배밖에 나와 왕이 되고 싶어 안달입니다. 다 미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하여간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대체로 멍청합니다.

일본의 경우에도 왕족은 철저하게 족내혼을 통해 혈통을 보존합니다. 현 아키히또 일왕이 역사상 최초로 왕족 외의 여자와 결혼했다고 해서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는 사실은 앞서 제 블로그에서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이같은 족내혼 또는 근친혼은 최근 들어,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2000년대 들어 TV사극에 자주 등장합니다.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그리고 가장 최근엔 천추태후, 이 천추태후는 그야말로 근친혼을 다룬 드라마라 할 만큼 본격적이고 노골적이었습니다. 사촌형제들이 결혼을 하거나 숙질 간에 혼인을 하는 예는 허다한 일에 속합니다. 심지어 자매가 동시에 왕후로 간택되어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경종에게 시집 간 천추태후와 헌정왕후가 그렇습니다. 

경종과 이들 두 자매는 사촌지간입니다. 경종이 죽자 헌정왕후는 숙부인 왕욱과 연애를 하게 되고 그 사이에서 아들을 얻게 되는데 이가 곧 대량원군입니다. 그리고 이 대량원군이 강조의 정변으로 실각한 목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데 바로 현종입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이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왕욱과 헌정왕후는 결혼한 사실이 없습니다. 그들 두 사람은 연인었지만, 부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왕실은 그들 사이에서 난 아들을 왕족으로 인정하여 대량원군이란 칭호를 내리고 마침내는 왕좌에까지 앉혔습니다. 법도보다는 혈통을 중시한 것입니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법도 위에 신국의 도가 있다." 김대문의 조부인 예원공은 유학에 심취하여 근친간 결혼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의 모친이 타이르며 한 말입니다. 신국의 도. 도대체 이 신국의 도란 무엇일까요? 예원의 모친이 말한 바처럼 인간의 도리보다 위에 두었다는 것은 국가의 존망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 <천추태후>에서는 목종이 물러나고 현종이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현종이 결혼을 하게 되는데요. 선대왕인 성종의 딸과 혼인을 합니다. 성종으로 말하자면 현종의 어미인 헌정왕후의 오라비이니 성종의 딸은 모계로 보면 4촌지간입니다. 그러나 현종의 아비 왕욱은 성종과 헌정왕후의 숙부가 되니 부계로는 5촌 당숙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국혼으로 다시 실권을 잡은 성종대의 경주 유학파들은 여세를 몰아 천추태후를 탄핵하며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 사유가 장히 헛갈립니다. 천추태후가 사통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들이 세운 현종 임금 역시 천추태후의 동생인 헌정왕후가 사통을 하여 낳은 혼외 자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현종은 결코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지요. 

드라마가 역사를 각색하다 보니 일어난 혼선이라고 보여집니다.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역도로 몰아 처단하는 것으로 끝냈다면 간단한 것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쨌든 고려시대에도 신라의 신국의 도와는 좀 다르겠지만 그 비슷한 사상이 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근친혼도 결국 역사의 산물이었다, 이런 말입니다.

천 년도 훨씬 전의 일을 이해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당시에는 친형제 자매가 아니고선 혈족이란 유대감도 별로 없었을지 모릅니다. 삼촌이니 사촌이니 하는 개념조차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개념들보다는 신국의 도가 우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대체 그 신국의 도란 무엇이었을까요?  

근친혼에 '도'라는 거창한 의미까지 부여한 걸 보면 어떤 특별하고 심오한 사상이 숨어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만.     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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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두두발이 2009.09.13 15: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래서 조선조 호주제도를 가지고 근친을 막는 법이다 라고 말하는 일부 유생들의 말이 근거가 없다는 거죠 정확히 말하자면 아버지쪽 근친을 막는 법이다가 맞지 어머니쪽으론 여전히 근친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겹사돈도 매우 비일비재 했고요 예를들면 조선조 인종역시 피는 썪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외사촌동생을 후궁으로 삼았고요
    문정왕후의 오빠의 딸을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죠

    • 파비 2009.09.13 19:4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래서 이번 개정민법은 친가, 외가를 불문하고 8촌이내의 친족을 근친으로 규정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그 전엔 친족은 8촌, 외족은 4촌 이런 식으로 차등을 두었었죠. 동성동본금혼법 폐지는 진작에 됐어야 했지요. 제 친구 중에도 동성동본 결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거 웃기는 게 제 처는 김해김씨 삼현공파인데, 제가 아는 김해 김씨는 전부 삼현공파더라고요. 우리나라에 김씨들이 거의 천만명 쯤 되나요? 하하

  3. 두두발이 2009.09.13 15: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또 조선 초기에 세조 부인이나 성종의 아내2명 전부다 같은 집안에서 왔고요 어머니쪽 근친은 오히려 더 장려되었던거 아닌가요

    • 한반도주민 2009.09.13 16:27  댓글주소  수정/삭제

      조선시대에는 이성(異姓) 6촌 간의 금혼도 원칙이었습니다.

      고려말부터는 외가에 대한 근친금혼도 엄격해집니다.
      충렬왕 때에는 외 4촌, 공민왕때에는 이성(異姓) 6촌 간의 혼인을 금하였고, 이성(異姓) 6촌 간의 금혼은 조선 성종 조에 확립된 원칙이 됩니다. 다만, 동성불혼의 원칙이 워낙 강조되다보니 상대적으로 이성친족에 관한 금혼규정은 등한시해서 외, 고종은 6촌간에도, 이종의 경우는 심지어 4촌 간에도 결혼하는 경우가 조선시대에도 있었죠.
      이런 이유 때문인지 동성동본불혼을 주장하는 유림측에서도 이성(異姓)친족 간의 금혼은 현재의 8촌이 아닌 6촌이면 족하다고 주장하더군요.

      사견으로는 동성(同姓)친족은 8촌금혼, 이성(異姓)친족은 6촌금혼이면 족하고 봅니다.
      현행 민법은 획일적인 평등의 기준을 강조하다보니 규정만 따져 보면, 역사적으로 혼인을 막은 일이 없고 친족의식도 박약한 이성(異姓)7촌, 8촌 간 결혼까지 금지시키고 무효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증조할머니의 본가쪽 친족이나 외할머니의 본가쪽 친족에 대하여는 친족개념이 전무하다 싶이해서
      지킬 수도 없고 실효성이 없이 혼인의 자유만 제약하는 규정이라고 평가할 만 합니다.

  4. 두두발이 2009.09.13 15: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8촌이내면 다 가까운 친척 아닐까요 요즘처럼 애안낳는 시기에 2대만 독자를 낳아도 가장가까운 친척이 8촌인데

    • 파비 2009.09.13 19:43  댓글주소  수정/삭제

      애를 안 낳으니 오히려 8촌은 고사하고 6촌은 아예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더군요. 그리고 애 한명만 낳는다 이리 보면 사촌은 없어지는 거지요. 당연히 6촌도 없는 거고... 이 촌수란 게 애를 많이 낳아야 생기는 거잖아요. ㅎㅎ

  5. 아하... 2009.09.13 16: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것은 모르겠고. 우리나라 전통에 대해서 유림은 말할 자격이 없다. 유림에 의해 망가진 전통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유림이 한 짓이 중국에 새대하는 짓이었는데 그게 우리 민족의 전통인가? 더욱 웃기는 것은 조선시대에는 중구의 것을 따르느 것만이 인가의 도리라고 하다가 지금은 일제가 남긴 악법을 우리의 전통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거다. 이게 유학과 유학자들이 모인 집단인 유림의 정체다.

    • 한반도주민 2009.09.13 16:3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친금혼 문제에 있어 유림을 빼고 논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제사나 장례 등은 또한 어떻습니까.

      받아들일 만한 것은 온고지신하고,
      (동성불혼의 획일적 법적금지나 호주제 따위를 없앤 예와 같이)
      합리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고루한 것은 폐습으로 타파하면 그만입니다.

    • 파비 2009.09.13 1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반도주민/ 일단 온고지신에는 적극 동의합니다. 온고지신, 정말 좋은 말입니다.

  6. 호라 2009.09.13 18: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근친혼은 혈통 외에 재산과도 관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친혼이 과학적으로는 나쁠 지 몰라도 인간관계로만 따지면
    오히려 외부 사람보다 더 안전하고 서로의 안녕을 위해
    안전할 수 있지요.
    근친혼을 나쁘게는 생각 안합니다. 외국의 경우는 사촌간에도 결혼이 가능한 걸요.

    • 파비 2009.09.13 19:47  댓글주소  수정/삭제

      근친도 일단 아이를 두 명 이상 낳아야 생긴다는 사실을 이해하시고 모두들 생산활동에 열심히 노력합시다. 흐흐. 이러니까 이거 꼭 가족계획협회에서 나온 거 같네요. 우리 어릴 때는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이게 구호였는데... 격세지감이죠?

  7. 일본 2009.09.13 18: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 사촌이내면 혼인이 안된다고 하셨는데 4촌이내가 아니라
    3촌이내의 혈족인 경우에 혼인이 금지됩니다.
    4촌끼리의 결혼은 허용됩니다.


    근친계수를 구할때 양쪽이 서로 혈연관계가 0임을 전제로 할 경우에는
    쉽게 구할수 있습니다.
    2의 n승 분의 1입니다.


    남매 1/4 4촌간에는 1/16 이 됩니다. 사촌간의 경우 6퍼센트 정도가 나오는데
    이 정도의 비율은 비 혈연관계에서 나오는 유전이상 확률보다 다소 높긴 하지만
    여자가 노산일 경우에 자연히 올라가는 경우의 수치와 비슷하다고 하니
    실제로 4촌 끼리의 혼인은 유전적 이상이 발현될 소지는 미미 하다고 생각하고
    이것이 많은 국가들이 오늘날 까지도 사촌간의 혼인을 인정하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촌간의 혼인을 금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유전적 이유라기 보다는
    유교 문화라는 사회문화의 특수배경에 있다고 생각되네요...

  8. Favicon of http://blog.daum.net/mylovemay/?t__nil_login=myblog BlogIcon 실비단안개 2009.09.13 18: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본이나 우리 선조들이나 근친혼은 눈 감아주는 정도가 아니라
    권장사항인데,
    동성동본 뿐 아니라, 이성동본인 김해 김씨, 김해 허씨는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지만,
    문중에서 허락이 되지않는 성씨들입니다. 다른 성씨도 이런 경우가 있지요.

    근친혼을 선호하거나 장려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파비 2009.09.13 19:51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 아내도 김해 김씨거든요. 이분들 그런데 워낙 인구가 많아서 이 집안에서 근친결혼(동성동본간 결혼)이 많았을 것 같거든요. 지금이야(2005년 이후) 민법이 개정되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9. 전에 읽은바론... 2009.09.13 23: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려시대는 잘 모르겠으나 신라시대 같은경우에 근친혼이 많았던 것은 신분유지 및 상승 때문에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후대에 갈수록 성골은 적고 진골은 많아지니. 성골을 자신의 배우자로 둠으로써 조금이라도 자신의 후예의 피가 왕족중에서도 순수한 혈통임을 보여주는 식이라고 전 이해했는데. 실제로 부부생활이 이루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에 관한 다른 블로그도 본거 같은데.

    우리가 보기엔 형의 부인을 형 죽자마자 바로 맞이 한다던지 작은 어머니를 내 부인으로 맞이 한다던지 하는 것은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이지만 그런 측면이라면 그 시대상이거니 하고 이해할순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고대엔 평균 수명도 낮았는데 현대 수명으로 비추어볼때 할머니 되기 직전인 사람을 자기 부인으로 맞을순 없잖아요. 그래서 이런 논리가 더 와닿았는도 모르겠네요.

    • 파비 2009.09.14 01: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모든 것은 그 시대의 눈으로 봐야지 현대인의 시각으로만 재단하려고 하면 어려워지죠. 결혼제도란 것도 결국은 문명의 소산인데... 처음부터 원래 존재했던 것은 아닌 것이고. 학설에 따라 갈릴 수는 있겠지만, 모성이란 본능적으로(원초적) 존재하는 것이지만 부성은 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거든요. 오늘날에도 모성과 부성의 차이는 존재하죠. 모성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늘 찬사의 대상이지만...

      형사취수는 고대로부터 많은 지역에서 행해져왔고 요즘도 파키스탄 같은 데선 있다고 그러던데요. 이건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제도가 없다면 굶어죽을 수도 있죠. 우리나라처럼 산업화가 고도화된 나라에선 상상이 안 가는 일이지만...

  10. 흠.. 2009.09.13 23: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무리 사촌간의 결혼이 허락되는 사회라도... ㅡㅡ; 이상하네요. 울 사촌오빠나 사촌 동생을 생각하면... 우웩!
    지금 자연스럽게 사촌끼리 결혼하는 사회라면....? 이상하다.

    • 파비 2009.09.14 0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나 과거에 민법은 과도하게 근친의 범위를 확장해서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측면이 있죠. 8촌이내의 친족에 들지 않으면 결혼을 허용하도록 한 것은 불과 4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답니다. 그러나 이런 법도 사실은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17세기 이후 나라가 병란에 휩싸이면서 요즘으로 말하자면 강경보수파(노론)가 득세하면서 만들어진 풍습이라고 하더군요.

  11. 허참 2009.09.14 03: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미부터머을 넘들 많군요
    지애비부터먹을년도 많구여
    에라이숸 개종자들이로고

  12. 혼혈파워 2009.09.14 04:5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4촌간에 낳은 자식이 열등한 인간을 낳을 확률이 적다고는 하나,
    유전형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비슷한 형질의 인간만 늘어납니다.

    원래 생물은 무성생식(자기복제)에서 유성생식으로 변화했습니다.

    왜냐?

    무성생식은 자신과 동일한(또는 비슷한) 형질의 후손을 생성하는데, 이것은 환경이 변화할 경우 치명적입니다. 쉽게 말해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싸그리 몰살한다는 얘기죠.

    그러한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고등생물체는 모두 유성생식을 합니다. 물론 문명이 발달했으니 날씨가 좀 바뀐다고 다 죽거나 하지는 않겠죠.

    그러나 후손의 유전형질이 선조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퇴보요 순리에 거스르는 역리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8촌의 근친제한 ....... 이것은 너무나 약합니다. 두자리수 이상으로 늘려야 합니다.

  13. 혼혈 확대 2009.09.14 05:0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4촌간의 결혼을 그다지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것에 경악을 하게 되는군요.
    이건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찰스 다윈이 사촌하고 결혼하게 자식을 낳았는데, 빌빌대는 자식들을 보며 결국 죽을때까지 후회했다는 사실.

    근친혼은 철저히 억압하되, 정반대인 혼혈을 적극 권장해야 하는 이 때,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발상들인지..

    개인적으로는 8촌 제한도 불만입니다. 무슨근거로 8촌을 운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30촌까지 샅샅이 조사해서 금지범위를 더더욱 넓히고 이를 어길경우 강력하게 처벌해야 합니다.
    왜 30 이냐면 8도 근거가 없는 숫자이니 30이라고 안될 이유는 없기 때문이지요.

    확률적으로 문제가 없다 뭐다 하는데, 한가지 자명한게 있지요. 부모의 유전형질이 서로 다르면 다를 수록 그 자식의 유전자는 보다 월등해집니다. 그런데 겨우 생각들을 한다는게.. 4촌간의 결혼이 그렇게 열등한 자식을 낳는게 아니라니 ....

    동양인이 백인보다 신체적으로 확실히 떨어집니다. 이건 확실히 자명한 사실입니다. 왜일까요?

    농경민족과 유목민족의 차이입니다. 농경민족도 족외혼을 한다고는 하지만 별로 족외혼 답지도 않은 가까운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유목민족은 이동하면서 그나마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혼인을 했지요. 이게 몇백년만 쌓여도 이렇게 달라집니다.

    근친혼은 범죄니 거론할 필요조차 없고, 비공식적으로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같은 민족내의 결혼도 공식적으로 권장해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혼혈은 적극 권장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 자연의 순리입니다.

  14. 혼혈파워 2009.09.14 05: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참고 : 인류의 역사와 역겨운(!) 근친혼의 성행 >

    생각외로 인간들의 근친혼은 엄청나게 성행했습니다.

    A라는 사람이 있을 때,
    그 부모의 수는 2명,
    조부모 4명(2의 2승),
    증조 8명(2의 3승),
    고조 16명(2의 4승),
    현조 32명(2의5승)...
    이 됩니다.

    즉 1대를 거슬러 올라갈 때마다 2의 거듭제곱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우리 개개인의 40 대 선조는 몇명일까요~~?


    <답> 1조명이 넘습니다. 그것도 비슷한 시기에 말이죠.

    40대라 하면 대단한 것 처럼 보이는데, 1대를 평균 25년으로 치면 1000년 밖에 안됩니다.
    1000년전 한반도의 전체인구는 1천만에 훨씬 미달했습니다.
    이것은 조상의 중복이 그만큼 심했다는 반증입니다.

    • 파비 2009.09.14 0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위 세 분 <혼혈>은 한분이라고 보고 답글 답니다/ 그렇게 계산하시니 우리는 모두 한 자손이란 말이 맞는 거 같네요. 그럼 우리끼린 아무도 결혼 못하는 거네요. ㅎㅎ 이건 일단 농담이고요. 내 조상의 숫자에 대해선 한번도 생각 못해봤군요. 우리는 오로지 한명, 즉 십대를 올라가도 오로지 한명의 조상만 생각하도록 훈련되었던 탓일까요.

    • 혼혈확대 2009.09.14 09:54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죄송합니다.

      제가 3개를 썼는데 이름을 다르게 작성했군요 ㅎㅎ

  15. 답답한 2009.09.14 08: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물이라는소리가듣고싶으십니까?

    • 파비 2009.09.14 09:19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람도 모두 동물입니다. 결혼제도는 문명과 더불어 발생했죠. 아니면 결혼이 생기면서 문명이 생겼을 수 있고. 이 말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름이 발생할 수 있고 그러는 게 당연하다는 이야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제도들도 고작 2~3백년의 역사밖에 안된다는 점도 염두에 두시고요. 유림들이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근친혼을 찬성하는 게 아니라 근친의 범주를 명확히 시대에 맞게 해야한다는 말이겠지요. 그래서 민법도 개정된 것이겠고.

    • 문화인 2009.09.15 15:33  댓글주소  수정/삭제

      유교 광신도인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것이 무엇일까? 이성일 것이다. 온갖 법과 도덕, 제도도 인간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 이성을 발휘하여 고안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도덕이나 제도기 인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고 억압하고 괴롭힌다면, 이에 대해 의문을 품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 또한 이성을 지닌 인간의 특성일 것이다. 그러나 폭압적 질서에 대해 "도대체 왜?"라고 질문하면 "미풍양속이니까" 혹은 "신의 뜻이니까"라고 우기고, 비판자들을 "짐승" 혹은 "마귀"라고 부르며 핍박하는 것이 광신도들의 특징이다. 이들에게서 어떤 인간의 덕성을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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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BlogIcon 카일 2015.04.28 05:0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드라마로 역사를 배우니 이런 뻘소리가 나오네.
    <화랑세기>공부 좀 하고 와라!

요사이  MBC드라마 《선덕여왕》으로 인해 신라의 풍속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다. 특히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화랑들의 이야기로 세상이 뜨거운 것 같다. 화랑세기는 그 위작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라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화랑도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하지만, 이처럼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특히 미실이란 여인은 화랑세기가 아니고서는 만나볼 수가 없다. 화랑세기는 사실상 미실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저술할 때는, 그가 서문이나 후기에서 밝힌 것처럼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들의 세계(世系)를 밝히고자 함이었다. 그들의 계보를 통해 우리는 화랑의 실체를 접할 수 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대문의 집안은 세습 화랑의 집안이었다. 이 가문은 540년 화랑도가 시작한 이래 681년 폐지될 때까지 1세 풍월주 위화랑부터 시작해서 4세 이화랑, 12세 보리공, 20세 예원공, 28세 오기공 등 모두 5대에 걸쳐 풍월주를 세습했다. 나머지 풍월주들도 대부분 부자가 세습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김대문의 가문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32대에 걸친 풍월주들의 전기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미실이다. 그녀는 5세 풍월주 사다함부터 시작해서 16세 풍월주 보종공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풍월주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도대체 그녀는 어떤 신분의 인물이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래서 나는 「선덕여왕, 근친혼의 이유는 무엇일까?」
(http://go.idomin.com/268) 라는 글을 통해 미실은 분명 김씨족임이 자명하다고 호언한 바 있다. 신라는 골품제를 근간으로 하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골품도 없는 여인이 화랑들을 발 아래 두고 국왕까지도 좌지우지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랑세기에서도 미실의 세계에 대하여 자세한 언급은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화랑세기의 목적이 풍월주들의 세계와 세보를 기록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 미실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유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여러 독자가 댓글을 통해 내 글에 반론을 제기했다. 미실은 김씨족이 아니라 박씨라는 것이다.(인터넷을 검색해보았더니 또한 모든 네티즌들, 뿐아니라 위키백과에서도 미실을 박미실이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 나의 관심사는 미실이 김씨족인가 박씨족인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라라는 신분제 사회의 특성상 진골귀족 신분이 아니고서 화백회의나 중앙정치를 주무를 수 없다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드라마에서처럼 실제 미실의 역할이 그러했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김씨족일 거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골품제도는 법흥왕 7년(520년) 율령이 반포되면서 정립된 제도라고 말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골품제는 이미 사회적 관습으로 정착되어 있었을 것이다. 법흥왕에 의해 골품을 받은 귀족들은 원래 왕족이었던 박씨족 일부와 김씨족, 그리고 가야의 왕족, 보덕국왕 안승의 후예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박씨족 일부도 진골의 골품을 받았지만, 그들이 신라가 융성했던 중고시대나 중대에 중앙 정계에서 활발하게 활약했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게다가 내물왕 이후 김씨족들이 왕권을 확실히 장악한 이후에 박씨족들은 6부 중 하나인 모량부에 이주해 살면서 가끔 왕비를 배출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고로 화랑세기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미실이나 미생의 역할로 보아 틀림없이 이들의 조상은 김씨족일 거라는 생각은 지금도 확고하다. 그럼에도 여러 독자들이 미실은 박씨라는 주장을 하며 정정을 요구하였고, 심지어는 내물왕의 4대손이며 세종의 아비요 하종의 조부인 이사부조차도 박씨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어 부득이 다시 자료를 확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부나 거칠부가 김씨족인 것은 이미 사기에서 밝히고 있는 터라 더 이상 설명은 무의미할 듯하다. 그러므로 당연히 미실의 남편이며 아들인 세종과 하종도 김씨족인 것은 당연하다. 다만 미실에 대해서만 보다 더 확실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지만, 아시다시피 그녀에 대한 기록은 화랑세기를 빼고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러나 미실의 부모에 대하여 화랑세기에 언급이 있으므로 그녀의 부계와 모계를 확인해 보면 그녀의 출신성분을 알아내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듯싶었다. 미실의 아비는 2세 풍월주 미진부이며 어미는 묘도궁주이다. 미진부의 아비는 아시공이며, 아시공의 아비는  선모이고, 선모의 아비는 장이이고, 장이의 아비는 복호공이다. 복호공은 내물왕의 아들이다. 

미실의 부계를 살펴보건대, 미실은 내물왕의 후손인 것이다. 내물왕은 신라의 김씨 왕조를 확립한 인물이다. 내물왕 이전에 미추가 김씨족으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김씨족의 전제 왕권을 확립한 것은 내물왕이다. 그러므로 김씨 왕조의 사실상 시조는 내물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물왕 이후 왕비들은 대부분 김씨족으로 채워졌는데, 이는 김씨족의 배타적 왕권을 확립하려는 결과였다. 이와 같은 근친혼으로 왕권의 지위는 더욱 초월적인 것으로 공고해졌다. 세기에 의하면, 아시공은 법흥왕이 미실의 조모인 옥진과의 사이에서 난 비대공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해 지소태후와 더불어 진흥왕을 옹립하는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어쩌면 미실의 권력은 이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녀가 비록 세습적으로 색공을 하는 여인이었으며 미색이 출중하고 교태가 남다르다 해도 출신이 미천하고서는 권력에 다가서기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조부인 아시공은 당대의 실력자였으며, 아비는 진흥왕의 총애로 2세 풍월주를 거쳐 최고 관등인 대각간에까지 올랐다.    

그렇다면 미실의 모계는 어떨까? 미실의 어미는 묘도궁주이다. 묘도궁주는 영실공과 옥진궁주의 딸인데, 영실공은 수지공과 법흥의 누이 보현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성골이다. 또 미실의 조모인 옥진궁주는 누구인가. 그녀는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이다. 위화랑은 진골로서 이찬에 오른 인물이다. 위화랑 역시 옥진의 소생인 비대공을 반대해 진흥왕을 옹립했다.

이렇게 미실의 부계와 모계를 살펴보니 양쪽 모두 진골귀족 출신이다. 진골일 뿐 아니라 왕권에 가장 근접한 권력의 핵심들이었다. 미실의 권력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미실의 힘이 어느날 갑자기, 또는 드라마에서처럼 사다함의 매화로,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자, 그런데 아직 풀리지 않은 독자들의 궁금증이 하나 더 남아 있을 것이다. 바로 설원랑이다. 나는 앞서「선덕여왕, 근친혼의 이유는 무엇일까?」에서 미실 뿐 아니라 설원까지도 김씨족일 거라고 단정을 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의도한 오류였다. 설원랑은 세기에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진골귀족이 아닌 풍월주다.

화랑의 대부분이 진골귀족으로 채워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진골귀족이라 하더라도 아무나 화랑에 뽑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권문세가의 자제여야 하고 인물이 출중하고 덕이 충만해야 한다. 그래야 선발의 기본조건을 갖추는 것이다. 그런데 설원은 어떠한가. 그는 진골귀족도 권문세가의 자제도 아니다.

더구나 그의 아비인 설생은 아비의 이름도 성도 모르는 미천한 출신이다. 다만 설생의 어미가 습비부촌의 설씨 가문의 자손이므로 어미의 성을 따라 설씨가 되었다고 한다. 설생은 용모가 출중했는데,그가 모시던 구리지가 전장으로 나간 틈에 구리지의 여인 금진낭주와 관계를 가져 설원을 낳았다고 한다.

금진낭주는 사다함의 어미이기도 하니 설원은 사다함과는 동모이부의 형제인 셈이다.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이며 내물왕의 7세손으로 진골귀족이다. 금진낭주 또한 위화랑의 딸로서 진골귀족이니 설원은 비록 아비가 출신을 모르는 미천한 사람이었다고는 하나 모계로 보면 역시 귀한 자손이며 미실에겐 외숙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부계계승사회인 신라에서 설원랑은 진골은 고사하고 두품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 그가 화랑이 되고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미실의 권력을 웅변해주는 대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드라마상에서처럼 설원이 지배집단의 화백회의에 참여하고 병부령의 지위에 올라 군권을 장악하는 것은 난센스라는 것이다.

그런 일은 미실의 권력이 아무리 태산처럼 높다 하더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신라의 골품제를 뒤흔드는 일로서 체제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실이라도 그런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화랑은 골품제의 규정을 비교적 덜 받는 자치조직이었으므로 설원랑이 풍월주에 오르는 이변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관직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랬다면 6두품으로 뛰어난 문재를 자랑했던 설총이나 최치원이 비운의 삶을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골품제가 초기에는 왕권을 강화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주요한 도구로 기능했을지는 모르지만, 나라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결국 신라를 패망으로 인도하는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

그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는 금언이 있는 것이 아닐까.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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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27m.net BlogIcon 東氣號太 2009.07.11 11: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덕여왕을 처음부터 보지 못해 요즘 하나티비를 통해 다시 보고 있지만
    드라마적인 요소는 잘 구성되어 있으나, 역사적 배경이 궁금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 달그리메 2009.07.11 1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제가요~
    모르는 것은 찾아가면서 아주 열공을 하고 있습니다.^^

    저번에 경주에 갔을때 김유신 묘와 무열왕의 묘를 비교하면서 봤는데
    김유신 묘가 왕릉 같았고, 무열왕릉은 오히려 평범했거든요.
    묘를 보면서 조금 궁금했습니다. 물론 만드는 사람 마음이겠지만 무슨 이유라도 있는가 해서요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11 16:03  댓글주소  수정/삭제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데 김유신은 사후에 흥무대왕으로 추존됐지요. 신하로서 대왕에 추존된 사람은 김유신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걸로 알고 있네요. 그러나 역시 권력은 무상한 것이라서요. 김유신 일족의 세도도 결국 100년을 못 넘어가지요.

      삼국유사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오잖아요? 혜공왕 때니까 대충 700년대 후반, 김유신의 묘에 회오리 바람이 일며 홀연히 김유신과 40여명의 병사들이 나타나 말을 몰아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죽현릉은 미추왕의 묘다. 김유신이 미추왕을 향해 따졌다. "신이 신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삼한을 통일했다. 죽어서도 신라를 구할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어찌 신의 자손을 죄 없이 죽이는가? 서운하기 짝이 없다. 이 나라를 떠나고자 한다." 그러자 미추왕이 말하기를, "그대가 이 나라를 지키지 아니하면 백성은 어찌하란 말인가?" 이에 김유신과 병사들은 다시 돌아갔다고 하지요.

      김유신의 자손들이 어떻게 고초를 당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이런 설화가 있는 걸로 봐서 세월이 흐르면서 세도를 부리던 김유신가도 결국 토사구팽의 길을 걸은 듯... 그러나 김유신은 살아서도 상국의 영광을 누리고 죽어서는 대왕의 칭호까지 받았으니 그렇게 섭섭해하는 것은 매우 염치없는 짓이라고 생각되네요. 흐흐

  3. 2009.07.12 08: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12 15:05  댓글주소  수정/삭제

      역사책(세기와 유사)도 읽어보는 여유를 부리긴 했습니다만(제가 본래 역사책을 좋아한답니다. 제가 닉으로 쓰는 파비란 이름도 한니발과 대적했던 역사적 인물의 이름으로부터 딴 것이니까요), 신상문제란 그처럼 한가한 것은 아니고 좀 더 복잡한 문제랍니다.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12 15:07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참 그리고 요즘은 인터넷시대 아닙니까? 워낙 모든 정보가 공유되는 시대라... 그러나 아직 넘쳐나는 정보들도 신뢰성에는 문제가 많이 있답니다. 다음 위키백과사전의 박미실 정보가 하나의 예입니다. 미실이 박씨가 아니란 건 제가 본문에 말씀드린 바와 같고요. 미실은 부계도 모계도 모두 김씨입니다. 그러니까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더라도 신중하게 확인하는 게 필요할 거 같아요. 그래서 책이 필요한 거지요, 여전히. 그리고 추모제 다녀오시느라 수고하셨네요. 먼 길을...

  4. 가림토 2009.09.01 13: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설원랑은 진골은 고사하고 두품조차 받지 못했다.

    이렇게 서술하신 부분은 수정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설원의 증손자인 원효가 6두품 신분이었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의 아버지인 담내는 내말 벼슬에 있었으므로, 두품조차 받지 못했다는 것은 어떤 근거에 의한 것인가요?

    설원공의 지위를 보자면, 그의 아버지 설성을 구리지공은 급간 설우휘라는 6두품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서자로 입적시킵니다. 따라서 설원의 지위 역시 6두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설원이 벼슬자리에 있었따는 기록은 없고, 549년에 나서 606년 7월에 죽었다는 기록과, 579년 풍월주 자리를 문노에게 양위한 후 미실을 따라 영흥사에 들어가서 평생 그녀를 호위하다가 죽었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선덕여왕』에 드디어 칠숙이 등장했다. 소화와 함께 서라벌에 나타난 칠숙으로 인해 드라마 선덕여왕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안 그래도 내심 불안했었다. 칠숙이 소화를 구해 살아서 돌아온다는 소문은 진즉에 있었지만, 혹시나 했었다. 만약 칠숙과 소화가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면 과연 누가 덕만의 정체를 증명해줄 것인가.

나는 그게 걱정이었다. 진흥대제(드라마에서 자꾸 대제라고 호칭하니 나도 민족주의 내지는 애국주의적 대세에 편승해서 대제로 부르기로 한다. 경남도민일보의 김훤주 기자라면 이런 걸 무척 싫어할 텐데… 그래도 할 수 없다. 시류에 편승하는 수밖에…)의 신물인 작은 칼 정도로 진평왕이 자기 딸을 확신하기에는 너무 무리다.

무엇보다 가장 확실한 증거는 진평왕이 덕만을 떠넘긴 소화다. 소화의 증언이야말로 태산도 움직일 수 있는 명백한 증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소화를 어머니로 믿고 따르는 덕만을 보면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소화에 대한 감사와 신뢰는 바다를 메우고도 남을 것이다. 어쨌든 칠숙과 소화의 등장은 부질없는 내 짐 하나를 덜어주었다.

그런데 칠숙은 어떤 인물인가? 칠숙은 기록에 의하면 진평왕 말년에 석품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그도 역시 화랑이었으니 진골귀족이다. 화랑은 진골귀족의 자제들 중 용모가 수려하고 덕망이 높은 자 중에서 선발한다. 이처럼 화랑도가 내면적 정신 못지 않게 외모를 중시하는 것은 신라인들의 영육일체, 선미합일의 미적 관념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설이 대체적이다.

어떻든 이렇게 본다면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화랑들은 모두 같은 씨족들로서 형제자매들이다. 드라마에서 미실이나 설원공이 스스로를 천한 신분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진골귀족 내부에서의 역관계일 뿐이고 이들은 모두 신라 최고의 관등에 오를 수 있는 진골귀족들이다. 그러니 미실이나 설원공이 김씨인 것도 자명한 일이다.

만약 설원공(혹은 설원랑)이 김씨가 아닌 설씨라면 그는 화랑도 될 수 없었겠지만 병부령의 자리에도 오를 수 없다. 더구나 대등들만이 참여하는 화백회의에 참여한다는 것은 천지가 개벽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학교에서 이 화백회의가 매우 민주적인 제도라고 배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신라사회의 이처럼 독특한 골품제와 화백회의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그리고 이 골품제를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이 권장되었던 것은 아닐까? 드라마에서 만명부인은 공주의 신분을 버리고 김서현과 결혼해 김유신을 낳았다. 만명공주는 성골의 신분이었지만 골족이 아닌 가야 출신 김서현을 선택함으로써 귀족 신분을 잃게 된다.

김서현이 공을 세워 만명부인의 어머니인 진흥대제 황후의 배려로 다시 진골귀족의 신분을 얻게 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만명공주가 귀족신분을 잃게 된 이유는 바로 족외혼을 강행했기 때문이란 사실이다. 내가 알기로, 김유신 일가는 가야의 왕족으로 신라에 투항한 공을 인정받아 진골 작위를 받고 공주와 결혼하는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 

그렇다면 만명공주가 족외혼을 고집해 귀족의 작위를 잃었다는 것은 별로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렇든 저렇든(드라마가 옳든 내가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이 옳든)간에 신라는 언제부터인가 족내혼이 하나의 관습이요 제도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이다. 왜 그랬을까? 씨족사회도 아니고 부족사회도 아닌 국가 체제가 정비된 고대의 강국 신라에서….

언젠가 아키히토가 황태자이던 시절, 천황족 외부의 여인과 결혼한다고 해서 크게 화제를 몰고 왔던 적이 있다. 일본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커다란 사건이었다. 일본에서 천황이 생긴 이후 최초의 일이었다고 언론들이 대서특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들도 족내혼의 관습이 법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백제에서 건너간 일파가 일본을 정복하고 지배하면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족내혼을 선택했다느니 하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물론 역사적 기록이나 신뢰할 만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신라에 대해서도 비슷한 추론을 내세울 수도 있지 않을까? 

최근 발표된 연구 중에 신라 금관의 비밀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신라의 금관은 성인의 머리에는 도저히 쓸 수 없는 물건이었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의 둘레를 재어보았더니 너무 좁아 머리가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장식용이었을까? 그런데 어느 학자가 그 비밀의 동굴에 손을 집어넣었다. 비밀의 열쇠는 고대에 행해진 풍습에 있었다.  

신라 왕족들의 머리는 모두 길게 늘어진 모양이었다. 이는 북방 흉노족의 관습에 기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흉노족은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에 돌을 올려놓아 머리를 늘어뜨리는 관습이 있다는 것이다. 금관의 둘레가 좁아 성인의 머리가 들어가지 않는 것은 바로 흉노의 이런 관습 때문이란 것이다. 

편두 풍습으로 머리가 가늘고 길쭉해지면 충분히 금관을 쓸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하나의 가설이 만들어졌다. 신라의 왕족들은 흉노의 일파인 북방 선비족이라는 것이다. 김알지의 신화는 그의 후손이 왕위에 오르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함께 만들어졌다. 충분히 가능한 가설이다.

그 가설이 정당하다는 가정 하에 하나의 가설을 더 추가해보는 것도 그리 엉뚱해보이지는 않는다. 일본의 천황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신라를 장악한 경주 김씨들도 자신들만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족내혼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골품제도를 만들고 골족 내부의 의견을 통일하고 연대를 제고하는 기관으로 화백회의를 둔 것은 아닐까? 

죽은 줄 알았던 소화가 돌아왔다.


신라가 건국될 당시에는 왕은 하나의 상징적 존재로서 6부족이 세력균형을 이루는 연맹체였을 것이다. 이 6부족의 평화로운 연맹을 위해 6부족장이 아닌 인물을 왕으로 추대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혁거세거서간의 신화는 그래서 탄생했을 것이다. 남해차차웅의 사위로서 유리이사금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석탈해의 경우도 그렇다.

석씨 부족이 철기문화를 가진 강성한 군사력으로 왕위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학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사기나 유사를 인용한다면 이때도 평화로운 연맹체가 지향이었으며 왕권은 6부족이 인정하고 승복할 수 있는 덕망있는 사람이 맡았을 것이다. 그러나 석탈해가 계림에서 얻었다는 김알지는 누구였을까? 

그들이 북방에서 남하한 흉노족이었다면 정복민족으로서 정체성을 지키면서 피정복민들을 지배할 효과적인 수단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마도 골품제도는 그렇게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그 골품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족내혼은 필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명하기 힘든 또 다른 역사적 함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 김알지의 7세손인 미추이사금 때에 가서야 비로소 김씨가 왕위에 등극하느냐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가설을 풀어보았으나 이 부분에 대한 답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어떻든 이런 가설이 아니라면 그들의 근친혼을 설명할 길이 없다. 경주 김씨들은 원래 문란한 성전통을 가져서? 그건 아니지 않나.

경주 김씨가 정복민족이었다는 가설은, 그래서 골품제도를 만들고 족내혼을 했으며 나아가 다산을 위해 일부다처 또는 일처다부를 권장했다는 사실을 뒷바침할 수 있는 유력한 논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든 저렇든 칠숙이 돌아왔다. 그도 화랑이다. 그러므로 그도 설원이나 세종처럼 미실을 사랑할 수 있고 충성할 수 있다.

그런 줄 알았다. 안 그러면 아무리 칠숙랑이 우직하다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미실에 대한 사랑은 15년 세월을 만주를 거쳐 타클라마칸까지 유랑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었던 배경을 잘 설명해 준다. 사랑은 모든 것을 한다. 특히 남자들은 그렇다. 그런데 이 칠숙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소화를 바라보는 눈빛 말이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식으로 나가다가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가려고 그러는 거지? 작가의 의도가 도무지 짐작이 안 간다. 아무리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역사를 너무 걸레조각으로 만들면 시청자들의 반감을 사지 않을 수 없다. 칠숙이 소화를 사랑하게 되면 선덕여왕의 등극에 반발해 일으키게 될 반란은 어쩌란 말인가?

실로 귀추가 주목된다. 칠숙, 한 눈 팔지 말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를… 그리고 그건 법도에도 어긋나는 짓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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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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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duf 2009.07.08 12:4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설원공은 설씨입니다. 화랑세기를 읽은지 몇년되서 구체적인 기억은 없지만 진골귀족이 동네를 지나다가 용모가 뛰어난 평민아이를 보고 따라갑니다. 거기서 낭도의 아이를 낳은 미혼모(평민아이 엄마)를 만나 아이와 함께 거둬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그 마을의 촌장인 설씨(6두품) 집안으로 입적시켜 귀족을 만들어 주었죠. 그 설씨 또는 그의 아들 정도 될 것 같습니다. 화랑도 될 수 있었고 풍월주도 될 수 있었는데요. 돌싱이 된 공주와 혼인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신분이 딸려서 그의 위치를 상승시킬 수 있도록 풍월주로 만들어주었던가 했지요.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08 1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러니까 그게 설이 분분한데요. 설씨라는 사람도 일부 있지만, 김씨라는 게 최소한 이 드라마에선 맞는 것 같네요. 예를 들면 이사부가 이씨냐? 그는 김씨거든요. 거칠부는 그럼 거씨인가? 그도 김씨죠.

      게다가 6두품은 아찬 이상의 고급 벼슬에는 오를 수 없었답니다. 그러니까 병부령 벼슬은 절대 불가능하고 대등이 되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겠지요?

      설씨 중엔는 설총이란 훌륭한 분이 계시죠. 원효대사가 공주와 사랑을 하여 낳았다는... 그는 한글연구의 바탕이 되었던 이두를 창안한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어떤 높은 벼슬을 했다는 이야기가 없지요. 최치원 선생도 마찬가지로 6두품으로 전국을 유랑하며 세월을 보냈지요. 결국 이 골품제도 때문에 신라는 패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만...

      물론 설씨라는 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건 드라마 상에서는 해명 불가능한 거랍니다. 그럼 오늘날의 설원공은 없어야 되는 것이지요.

      경주에는 설씨 이외에 최씨, 이씨, 안씨, 손씨, 정씨 등 신라6성이 있는데요, 저는 그중 지백호의 후손이라고 통한답니다. 확실히는 알 수 없습니다. 2천년 넘는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하하~ 좋은 하루 되십시오.

    • duf 2009.07.08 12:47  댓글주소  수정/삭제

      화랑세기에 설원랑이라는 인물이 실제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사부는 성과 이름이 아닙니다. 중국식 이름과 순우리말 이름이 같이 쓰이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중국식 이름은 태종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왕족 맞습니다. 그리고 골품제도가 완전히 굳어진 것은 통일 후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설원랑은 혼인관계를 통해서 왕족과 맺어지며 신분이 높아졌다고 봐야 합니다.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08 13:23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럴 수도 있겠군요. 김유신처럼... 그래도 설씨 성을 가지고 대등이나 병부령이 되는 건 좀. 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거니까요. 김유신은 그래도 가야의 왕족이었으니까 그렇다 쳐도. 6두품이 두품 중 최고의 등급으로 양골과 함께 귀족계급을 형성했다고는 하나 그 한계가 너무 명확했거든요. 이게 나중에 신라 패망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고... 어쨌든 좋은 의견 잘 봤습니다.

    • Favicon of http://umean2me.egloos.com BlogIcon elly 2009.07.08 22:15  댓글주소  수정/삭제

      이사부는 박씨입니다. 박이사부 혹은 박태종이죠.
      그래서 미실의 남편으로 나오는 세종도 박세종이고, 그의 아들인 하종도 박씨입니다.

      그리고 알천랑도 김씨는 아닙니다. 알천랑은 현재 진주 소씨의 시조입니다. 알천랑이 소씨의 성을 하사받았다 하더라도 왕족인데 굳이 다른 성을 줄 이유는 없었겠죠. 그래서 알천랑은 박김석씨가 아니라도 신라를 구성한 국가들의 후손이고, 성씨가 소씨였을 수도 있습니다. (어머니가 진골이거나 성골이어서 진골로 화랑에 편입될 수 있었을 수도 있구요.)

      김씨가 왕족을 이룰 수 있었던 건, 혈통(내례부인 혹은 옥모의 혈통)상의 적통이거나, 다른 정치적인 이유였을 수 있습니다.

    • 가림토 2009.09.01 12:59  댓글주소  수정/삭제

      파비님....신라 6성 중 안씨는 없는데요? 배씨겠죠? ^^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9.01 13: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맞네요. 배씨가 맞네요. 죄송^^ 밤 늦게 졸면서 달다 보면 실수가 좀 있을 수도... 그래도 이건 좀 심한 실수군요. 남의 집 족보를 ㅎㅎ

  3. 강해산 2009.07.08 12:5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꼴깝을 떨어요 아주 ㅎㅎ 봤냐 니가? ㅋㅋ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08 1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내가 안 본거 너는 봤냐? ㅉㅉ 드라마를 보면서 드는 생각일 뿐이니, 니가 본 이야기를 하는 걸로 착각하지 말아주세요. 이러심 우리 모두 입 닫고 살아야 된답니당.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관습이나 제도들도 모두 기껏 삼백년도 안 된 것들이 대부분이니 우리가 아는 건 진짜 별로 없답니다.

  4. 낭만고양이 2009.07.08 1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실 근친혼은 동 ,서양을 막론하고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한 가장 좋은(확실한) 방법이라고들 생각해서
    그런걸껍니다 유럽의 금융계에서 유명한 집단은 지금도 자신의 부를 지키기 위해 근친혼을 한다고 합니다
    자신 친인척인 만큼 배신하거나 권력이나 부가 외부로 빠저나가지 않죠 이때문에 근친혼이 성행했다고 합니다
    가까운 예로 우리나라의 재벌들이 서로 서로 권력가나 다른 재벌들과 결혼하는 이유도 이와는 좀 성격이 다르지만 자기들의 부와 이에따르는 돈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혈연을 맺는 비슷한 이유겠지요.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08 13:26  댓글주소  수정/삭제

      일전에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언론개혁운동을 하는 신학림 기자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요, 이명박의 가계도를 그리면 삼성, 조선일보 등 정재계의 거의 모든 가문이 사돈의 팔촌으로 엮인다고 하더라고요. 신 기자가 그려주는 그림을 한참 따라 그리다가 너무 복잡해서 포기했답니다. 하하

  5. 광빨 2009.07.08 13: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왕관이 좁다고 그러는데 저는 정 반대로 알고 있습니다. 왕관이 커서 머리에 어떻게 썼을까?에 대한 의문~ 예전에 역사 스페셜에서 봤는데 이 왕관이라는 것이 머리에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왕이 죽으면 소위 말하는 왕관을 목까지 내기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사슴 뿔 같은걸로 머리를 감싸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편두의 관습은 신라가 아닌 고대 가야지역에서 행해졌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럴듯하게 본인의 추측으로 역사적 유물들을 본인의 입맛에 맞게 왜곡을 하시는군요~
    본인의 추측을 역사적 사실인양 말도 안되는 유물들을 가져다 껴 맞추기 하면서 본인의 말에 신빙성을 부여하시는거 쩝이네요~

    물론 신라 귀족사회에서 근친혼이 있는지 없는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신라 귀족이 김씨 하나만 있다는 전제로 글을 전개하시는 것도 좀 아닌거 같네요..

    일반인의 대충 때려 맞추기식 추측은 추측으로 끝나야지 이렇게 글을 올리시면 또다른 왜곡으로 다가 옵니다.
    자중하시길~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08 15:31  댓글주소  수정/삭제

      신라 금관은 아이 머리에나 들어갈 정도의 작은 크기랍니다. 그건 확실한 정보니까 착오가 없습니다. 신라 귀족사회에서 근친혼이 있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편두의 관습에 대해선 정설은 아니지만, 금관의 크기와 신라 왕릉에서 발굴된 미라를 근거로 편두의 관습이 있었다고 추측하는 논문이 나왔고 그 이유를 흉노의 편두관습에서 찾았다는 발표가 있었고 방송도 한번 탔을 겁니다.

      그리고 이글은 논문이 아니랍니다. 드라마 후기죠.

  6. 문용진 2009.07.08 14: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ㅎㅎ

    우선 이미 KBS 역사 스페셜에서 김알지의 근원이 이미 나왔었고요. 추사 김정희가 조선시대때 이미 추론하여 더이상 조사하지 않았다고 하는 부분까지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역사스페설을 참조하시면 어설프게 이야기 하는 것들과 말 안 섞으셔도 될거 같습니다.)

    어찌되었던 주인장님의 이론에 동감하고요. 씨족 사회는 원래 그렇습니다.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08 15:33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군요. 저도 언젠가 역사스페셜에서 본 것 같습니다. 이참에 역사스페셜 책으로 엮어져 나온 걸 한번 사서 읽어보고 싶네요. 물론 스페셜은 정사는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면의 진실을 파헤친 역작이라고 생각합니다.

  7. 이거 완전소설이네요 2009.07.08 14: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역사전공자로서 이런 소설은 정말 봐주기 힘들군요. 사실관계를 반대로 서술한 것도 있고요. 정확한 지식이 아니면 글을 쓰지 마시죠. 도대체 신라왕릉급 고분 어디서 두개골이 출토 됐다는 겁니까. 그리고 편두는 남방계 풍습입니다.신라 왕릉급 고분 이라는 말은 쓰지만 누구도 신라 왕릉이라고 말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왜냐고요 명확하게 이것이 신라왕릉이다라고 밝혀진 고분이 없으니까요. 추정만 할뿐이지 . 삼국시대의 고분중 피장자를 명확히 알수있는 유일한 왕릉은 백제 무녕왕릉입니다. 그외는 고분의 크기.양식.부장품등으로 왕릉급고분을 추정할 뿐입니다.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08 15:39  댓글주소  수정/삭제

      죄송합니다만, 저도 추론이라고 했고요. 제 글은 모두 확인할 수 없는 사실들입니다. 금관의 크기가 작다는 건 확실한 팩트지만 그 이유는 아직 누구도 밝혀내지 못했답니다. 역사전공자라시니 그런 정도는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고요. 다만 그 이유를 북방 선비족의 풍습에서 찾는 연구가 있었고, 그게 윗분이 댓글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역사스페셜에 방영된 일이 있는 것 같군요. 함 확인해 보시지요. 그리고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글의 주제는 드라마 후기랍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족내혼에 대해 궁금증을 가질 수 있고 그 원인을 찾아보는 것은 열렬한 시청자의 권리에 해당하죠.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고 소설을 소설로 보아야 하듯 블로그도 마찬가지랍니다. 이건 시사포스팅도 아니고요. 다만, 이렇게 논란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건 참 즐거운 일이지요. 이제 역사든 정치든 전문가들만의 영역이 아니게 된 거지요. 인터넷으로 인해서...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08 16: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님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왕릉이란 표현은 고분으로(사실 신라의 고분은 모두 주인을 알 수 없으므로 총이라고 부른다는군요) 고치고, 두개골 출토 부분도 고칩니다. 주제가 근친혼이고 금관이나 고분 이야기는 이를 뒷바침하기 위한 소재에 불과합니다만, 고증 없는 자료는 고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해서 수정합니다. 고맙습니다.

  8. 잘 보는이 2009.07.08 14:4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보고 갑니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도 그랬듯이 근친혼은 대체로 지배층의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죠. 신라의 근친혼이 심하다보니 같은 성씨가 왕과 왕비로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나라에 신라에서 올라온 표문을 보고 왕와 왕비의 성이 같아서 매우 놀랐다는 기록도 있지요. 신라에서는 이러한 것을 피하기 위해 편법으로 왕비의 성을 지어서 표문을 올렸습니다.

    한가지 이상한 것이 있는데 근친혼=성적 자유 사회 라는 도식이 성립하는지 궁금하군요. 근친혼은 단순히 왕실이 선택한 권력의 유지 수단이고 규율이 미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말하면 근친혼이 있었기 때문에 자유롭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움에 대한 인정이 근친혼까지 미쳤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것을 보고 성적으로 자유로웠다라는지 모르겠습니다(그렇다면 근친혼이 만발하였던 19세기 유럽은 성적으로 자유로운 시대인지요?). 자유 연예는 신라에서도 고려에서도 조선중기에서도 조선후기에서도 자유롭게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지배층들이 어느 정도 자유 연예를 했냐? 안했냐의 차이일 뿐이죠. 신라사회에서도 중매를 통한 결혼을 정식으로 여겼고 자유 연예의 결혼 같은 경우는 野合이라고 하여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괜히 김서현이 왕의 장인의 아들인 숙량흘이 김서현과 자신의 딸 만평의 결혼을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한 결합은 야합 즉, 자유 연예로 인한 결혼이었지 중매를 통한 결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08 15:45  댓글주소  수정/삭제

      어릴 적 기억이 나는군요. 의무적으로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을 읽다가 사촌간의 사랑 이야기가 나와서... 엥? 이게 무슨... 이 무슨 불경스러운 이야기, 얼굴이 화끈거렸던 기억이... 흐흐... 우리 모두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지요 ^-^

    • 잘 보는이 2009.07.08 16:14  댓글주소  수정/삭제

      요즘 너무 신라사회를 양성평등, 혹은 여성우위의 사회로 보고 그 증거를 근친혼으로 드는 경우가 많아서 단순히 한탄해 본 것입니다. 유사이래부터 현대이전까지는 부계사회, 남성위주사회이지 결코 영성평등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여성의 상대적 지위가 높냐 낮냐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08 16:37  댓글주소  수정/삭제

      옳으신 말씀입니다. 드라마에서 미실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걸로 나오지만, 결국 그녀가 원하는 것은 기껏 황후 자리였죠. 석기시대라면 모를까 그 이후는 남자, 즉 무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쥐고 흔드는 시대였던 게 맞죠. 그런데 요즘 남자들은 너무 급격하게 변해서 혼란스러울 거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9. 박현주 2009.07.08 16: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실이나 설원공이 김씨인 것도 자명한 일이다.

    =====>이 부분은 고치시는 게 어떠실지....본인 스스로 그냥 드라마 감상평이라고는 하시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부분들이 사실인량 적혀져 있어서 보기에 거슬리네요. 미실은 박씨이고, 설원랑의 성씨도 의견이 분분한데 '자명한 일이다.'라고 쓰시는 건 좀 아닌 듯 싶어 한마디 남깁니다.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08 16:44  댓글주소  수정/삭제

      "설원랑의 성씨가 설씨라는 주장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김씨인 것이 자명하다"란 생각엔 변동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미실이야 박씨든 김씨든 상관 없다고 생각되지만, 그들 박씨나 석씨도 왕통이니까요. 제 주장은 설씨로서는 절대 대등도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병부령조차도 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체제에 대한 반역이죠. 그럼 김유신은? 그는 가야의 왕족으로 특혜를 받았다는 게 일반적인 설이더군요. 설씨가 특혜를 받을 이유가 없지요.

  10. 고니 2009.07.08 1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왕조의 근친혼?? 글쓰신 분이 현대의 관점에서 과거를 그것도 1000년이 넘는 시대를 말 하시는듯 ~한반도의 국가기원을 기원전 4세기로 보는 것이 우리가 배운 바입니다.. 여기서 오류에 빠지기 쉬운것이 그 국가라는 것이 지금의 한 정부 체제하에 있는 그런 국가 형태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원전 4세기 .. 한반도 뿐만아니라 극동 아시아 특히 중국 대륙까지 ~~ 기본적인 사회 구성이 씨족 개념이었읍니다.. 씨족의 개념이 뭔가요? 한 핏줄이라는 것입니다. 씨족을 바탕으로 한 강한 씨족( 머리수가 많은 ^^*;;)이 주위의 다른 씨족을 통제( 착취 !!) 하는 형태의 부족으로 나아가 그 부족의 큰 형태 즉 그당시의 국가.. 이때쯤 통치하는부족의 편의를 위한 법( 법이라기보단 단순 규칙정도?) 를 공포하는 수준이겠져.. 2차는 담에 ㅋ~~ 넘 길다

  11. thfql 2009.07.08 16: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것 보다..울 나라 선조가 흉노족이라는 설이 있던데..다른 댓글에서 보기도 했고.. 그것 참. 그럴 듯 합니다. 여기서는 신라 왕족이 선비족이라고 나왔군요.. 어쨌든 연관이 있는 듯. 예전에 몽고쪽 유물 전시 보러 간 적이 있었는데 북방 민족에는 6가지 민족이 있는데.. 그 민족들이 말을 이용하고 문자가 어쩌고..한 여러 역사적 기록을 들여다 본 적이 있었는데.. 글고 몽고 반점.. 몽고인이랑 닮기도 하고.. 어쩌고.. 언어가 어쩌고.. 그런 것 크면서 조금씩 들어 본 적 있는데 몽고족들과 비슷한 혈연일지도... 울 나라 사람들 별로 좋아하지는 않겠군요.. 무튼 요즘 신기 신기..
    사극들을 보면서 엄청 역사에 흥미들을 느끼는 것 같고.. 저런 것 보면 근친혼이라고 비난이나 늘어놓던 사람들이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안 하더군요.. 자명고..만 봐도 외삼촌이랑 결혼할 수도 있고.. 여기는 복잡해서 일일이 말할 수 조차 없는.. 그냥 재밌기만 하니.. 다 그냥 넘기고 있는 중.. 그냥 사회가 그렇다니 별로 이상해 보이지도 않고..

  12. DARKJK 2009.07.08 17:3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릴때 머리를 압박해서 폭이 좁게하는 풍습은
    은근히 세계 곳곳에 많아요
    이집트도그랬고..
    아메리카남미쪽도 그랬고..
    지구반대편인데도 그런 풍습은 은근히 있더라구요
    특히 상위계급에서

  13. 정은희 2009.07.08 1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랑 같은 조상님의 후손 이시네요~
    저도 지.백자. 호자. 할아버지의 후손 경주 정가 양경공파(이건 조선시대 때 갈라진거겠죠..?) 72대손 이랍니다...
    조상님 함자를 참으로 오랫만에 발견하니 반가운 맘에 몇자 적고 갑니다.

  14. 지나가는 사람 2009.07.08 18: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우선 화랑세기의 위작 여부를 넘어 논하자면.... 화랑세기에 의하면 설원랑은 설씨가 맞습니다만... 설원랑은 원효대사의 조부입니다. (증조부던가?) 원효대사의 속가명은 성은 설 이름은 서당이었구요. 설원랑은 그 아버지가 진골귀족이 아니었습니다. 설원랑의 어머니는 금진이라고 하여 신라 진골 귀족이었는데 설원랑의 아버지는 미모로 유명한(?) 자로서 금진의 용양신(애첩과 비슷한 의미)였다고 합니다. 금진은 사다함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설원랑이 신분이 낮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에 기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설원과 사다함은 동모형제이지요. 화랑세기에 의하면, 신라에서 혈통의 고귀함을 결정하는 건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신분이 높으면, 그 아이들 역시 똑같은 특권을 누렸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세종의 어머니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딸인데, 법흥왕 계는 성골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지소태후 역시 성골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성골이었기 때문에 세종 역시 성골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아버지가 아들인 세종과 말할 때는 말을 엎드려 신하의 예로 대했다고 합니다. 반대로 현재 행방이 묘연하신 국선 문노의 경우 아버지는 진골귀족이나 어머니가 야국(일본 혹은 가야) 출신 평범한 여인이라 처음엔 진골귀족에도 못 꼈다 하지요. 워낙 무훈이 높고 신망이 높았고 진지왕 축출 때 공이 커서 미실이 진골귀족으로 끌어올렸다고 합니다.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09 12:1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군요.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저는 화랑세기를 기본으로 말한 건 아니고 당시의 골품제도를 바탕으로 골족이 아니고서는 아찬 이상의 관등에 오를 수가 없다는 걸 말씀드린 거랍니다. 설씨든 최씨든 또 우리같은 정씨는 두품 중 최고인 6두품이라도 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죠. 5두품 이하는 말할 것도 없고요. 설원이 대등으로서 화백회의에 참여하는 모습은 그가 진골귀족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그가 설씨라면 화백회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또는 반대로 "대등으로서 화백회의에 참여했다면 그는 김씨인 것이 자명하다" 이런 식으로 논지를 편 겁니다. 모계혈통이 신라대까지 유지되었다는 점을 들어보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만, 아직은 좀...

  15. 딩호 2009.07.08 21: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장 문제는...

    '화랑세기'가 진위인가가 문제이죠. -_-;
    백날 '화랑세기'를 기본으로 두고 해석해봤자...설득력은 없다는.~.~


    그냥 드라마로 봐야..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09 12:06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죠. 저도 화랑세기를 바탕으로 글을 쓴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드라마를 중심으로 말한 거지요. 만약 화랑세기나 사기, 유사를 빌어오면 복잡해진답니다. 우선 연대도 안 맞죠. 도저히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시공을 넘어 만나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완전 타임머신 되는 거죠. 아마 첫회에서 그런 자막이 뜬 걸로 아는데요. 연대가 수십년을 넘나드는 것은 드라마의 구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으니 이해를 바란다고... 언뜻 지나가는 거라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16. Favicon of http://www.unny.com BlogIcon ftd montreal 2009.07.09 0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확실히 칠수과 소화의 재등장은 드라마를 훨씬 복잡하게(재미있게) 만드는거 가타여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09 12:08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두 그리 생각해여~ 그런데 칠숙과 소화가 없으면 이야기가 안 풀릴 것 같기도 하고요. 꼬는 놈이 있으면 푸는 놈도 있어야 한다는 ^^-

  17. 쏘쏘 2009.07.09 1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신라 금관이 성인 머리가 들어가지 않는 크기인 이유는 그 용도가 머리에 쓰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금관을 보시면 머리에 쓰고 있을 수 없게 아주 얇은 두께로 제작되었고,
    왕 뿐만 아니라 다양한 왕족들의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
    현재 학계에서 가장 유력한 설은 신라 금관의 용도가 장례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죽은 시체의 얼굴 위에 씌우는 것입니다. 그 방법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머리에 쓰는게 아니라
    얼굴을 덮는 방법으로 사용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고분에서 출토될 당시 대게 얼굴 위를 감싸는 상태로 발굴 되었기때문입니다.

  18. 미실은 '박'씨입니다. 2009.07.09 13: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미실은 '박'씨로 알고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왕족과 왕비족이 있어요. 신라에서도 왕비족은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이지요. 미실은 '김'씨가 아니랍니다.

  19. 2009.07.09 1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 읽고 가요. 근데 일본황태자는 왕태자아닌가요..이거 어떤 데선 왕,왕족이라고하는데 다른데선 황족이라고하고..근데 그냥 왕족이 맞지않나싶어요. 왕태자랑..굳이 올려서 말할필요가..우리랑은 원수나 마찬가지니까요.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7.09 2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건 위에 있는 댓글에서 설명했는데... 하여간 지들이 천황이라고 하니까 그렇게 한번 불러준거에요. 왕이나 황이나 뭐가 다를 게 있나요? 영국은 국왕이라 부르고 독일은 황제라고 부르지만 영국국왕이 오히려 더 권위있어 보이지 않던가요? 그렇지만 감정이 다들 그렇다고 하시니깐 앞으로는 그냥 일왕이라고 부를 게요. 그리고 잘 읽고 가셨다니 고맙습니당.

  20. qkqlen 2009.07.12 08: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dm음 성골 진골 뭐 이런것 때문이지 않
    을까 ?!!

  21. 가림토 2009.09.01 13: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본문과 달렸던 댓글에 관한 내용을 종합해서 글 올리겠습니다.


    1. 미실의 성씨
    미실은 아버지가 미진부공이며 어머니는 법흥왕의 후궁인 묘도부인으로 둘 다 김씨입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미진부의 아버지는 아시공이며, 아시공의 아버지는 선모이고, 선모의 아버지는 장이이고, 장이의 아비는 복호다. 복호는 내물왕의 아들이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따라서 미실과 미생은 김씨가 되겠습니다.


    2. 근친혼에 관한 간단한 고찰
    화랑세기 제6세 풍월주 세종전에 나오는 말입니다.
    "미추대왕이 광명을 황후로 삼으면서 후세에 이르기를 '옥모의 인통이 아니면 황후로 삼지 말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세상에서 이 계통을 진골정통이라고 한다. 옥모부인은 곧 소문국 왕의 딸인 운모공주가 구도공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이다. 옛날부터 진골은 아니다."
    이 말은 위의 지적처럼 혈통과 재산권의 보호를 위해 근친혼을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김씨 최초의 왕인 미추왕이 후손들에게 령(현재 개념으로 말하면 불문율)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골정통은 어머니에서 딸에게로만 전해지는 혈통을 말하는데,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현재의 성씨의 전래와 똑같이 여자에게 적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짜피 같은 여자의 혈통으로 이어진다면 그 여자의 성씨는 아버지의 성을 따라 김씨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라 김씨왕계의 근친혼의 원인과 결과입니다.


    3. 신라 금관의 크기와 편두
    사실 신라 금관의 내경이 작아서 실제로는 쓰고 활동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입니다. 또한 실용물이 아니었음을 뒷받침해주는 사실은 금판이 너무 얇아서 실제 사용했다면, 이리저리 휘청거리다가 휘어지기도 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실용기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위에 누군가가 지적하셨던 것처럼 죽은자에게 씌워 보낸 부장품이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결국 데드마스크였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편두에 대한 언쟁이 위에 있는 것 같은데, 신라의 고분에서는 제대로 된 유골이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발굴된 인골 가운데 편두의 습성이 확인된 곳은 부산대학교에서 발굴한 김해 예안리의 인골에서 뿐입니다. 또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한전에 편두에 대한 기록이 언급되어 있으니, 편두의 습성을 가진 것은 변한 - 가야로 이어지는 계통이지 진한 - 신라로 이어지는 계통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확언하지만 신라에서 편두의 습관이 있었다는 기록과 고고학적인 근거는 모두 발견할 수 없습니다.


    4. 설원공의 성씨와 설원공의 지위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원효불속'의 내용을 보면
    "성사 원효는 속성이 설씨다. 그의 할아버지는 잉피공인데, 적대공이라고도 한다. 지금 적대연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고 하여 일연선사가 삼국유사를 집필하는 고려 후기까지 잉피공의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또한 화랑세기 설화랑전에는
    "(설원)공은 아들 다섯 명과 딸 일곱 명이 있다. 정궁부인인 준화낭주는 큰아들 웅, 작은 아들 잉피, 적녀인 정금낭주를 낳고는 죽었다(...중략). 잉피는...원효의 할아버지다."라고 하여, 설원이 원효의 증조할아버지인 것이 확인됩니다.
    위 두 기록을 근거로 살펴보면 속성이 설씨라고 하는 원효의 증조부가 설원이 되므로 설원의 성씨는 설씨가 분명합니다.

    다만, 화랑세기에 의하면 설원의 아버지는 설성인데, 설성의 아버지는 알 수 없고, 어머니가 신라6부의 고야촌장 호진공의 후손으로 설씨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만약 성씨를 알 수 없는 설원의 할아버지가 진골인 김씨일 수가 있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할머니가 구리지공(사다함의 아버지)에게 하는 말 중에 '좋은 낭도를 만나 설성을 낳았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진골 김씨의 경우 화랑이었지 낭도가 되는 경우가 없기 때문입니다.

    설원공의 지위를 보자면, 그의 아버지 설성을 구리지공은 급간 설우휘라는 6두품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서자로 입적시킵니다. 따라서 설원의 지위 역시 6두품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설원이 벼슬자리에 있었따는 기록은 없고, 549년에 나서 606년 7월에 죽었다는 기록과, 579년 풍월주 자리를 문노에게 양위한 후 미실을 따라 영흥사에 들어가서 평생 그녀를 호위하다가 죽었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따라서 설원이 병부령이라는 것은 드라마상의 설정일 뿐이지 그의 지위를 추정하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5. 김유신의 진골 신분 및 이사부, 알천랑의 성씨
    신라에는 합병한 왕국의 왕족을 진골귀족으로 편입시키는 관례가 있다. 예를 들면 김유신의 증조할아버지인 구형왕이 신라에 항복했을 때 진골귀족으로 편입시킨 바 있으며, 고구려 보장왕의 외손인 안승이 신라에 투항했을 때 역시 진골귀족으로 편입시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 김유신의 할머니인 만호태후가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결혼을 반대했던 것이 진골계층 내부에서도 서열이 존재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화랑도 내부에 발생한 파벌관계에서 만호태후는 진골정통으로써 한 파를 형성하고 있었고, 김서현은 가야파였기 때문에 그 계통을 달리하는 파벌로 인하여 만호태후는 김서현과 만명의 결혼에 적극 반대했다고 보여집니다.

    별담으로 elly님께서 이사부는 박씨라고 하셨는데 이사부의 계통에 대하여 삼국사기에 이사부장군은 내물왕 4세손으로 나오는 분이니, 내물왕이 박씨가 아닌 이상 이사부는 김씨가 맞겠죠?^^

    또 하나의 별담으로 역시 elly님께서 올리신 내용인데, 알천랑은 진주소씨의 시조라는 내용인데, 이기백 교수님의 글로 그 주장에 가름합니다.
    "1979년의 일인데, 진주 소씨 서울 종친회의 한 분이 종친회보를 가지고 연구실로 필자를 찾아왔었다. 그러면서 진주 소씨의 시조는 신라시대 상대등이던 알천인데, 회보에 알천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알천은 김씨이므로 소씨일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다른 구실을 들어 거절하여 보냈다. (중략) 그 뒤에 필자는 신라 말기에 김해 지방에서 활약하던 김율회가 때로는 소율회라고도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김(金)과 소(蘇)는 서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金은 음이 '김','금'이지만 그 뜻은 '쇠'이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알천의 성이 소인 것이 잘못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6. 선비족과 흉노족의 계통
    thfql님께서 쓰신 '울 나라 선조가 흉노족이라는 설이 있던데, 여기서는 신라 왕족이 선비족이라고 나왔군요'라는 댓글에 파비님께서 '선비도 흉노의 일파지요?'라고 하셨는데, 계통상의 착오가 있으신 듯 합니다. 결코 선비는 흉노의 일파가 아닙니다.

    위서(魏書)에는 선비가 동호족(東胡族)의 한 갈래로서 언어와 풍습은 오환과 같으며, 흉노족의 '묵특선우'에게 패해 요동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동호족은 세 갈래로 흩어지게 되는데, 하나는 흉노로 흡수되었고, 하나는 오환, 나머지는 선비입니다. 이후 서기 91년 후한의 부탁으로 남흉노, 정령, 선비는 북흉노의 정벌에 동원되는데, 이 싸움에서 선비는 북흉노를 멸망시켰고, 후한은 그 댓가로 북흉노가 유목하고 있던 토지를 선비에게 넘겨주면서 북흉노인 50여만 명을 선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 때 선비는 인구 100만 이상의 되는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라 김씨의 선조가 선비족이라는 학설이 가만히 고개를 들고 있는 지금, 신라의 문화가 흉노와 유사한 점이 있다면 서기 91년 선비에 편입된 흉노인들의 영향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9.01 13:16  댓글주소  수정/삭제

      잘 읽었습니다.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다만 궁금한 것은, 진주 소씨는 경주 김씨의 일파란 말이네요. 이기백 교수님 말씀처럼 김 또는 금을 소로도 발음한 그런 것일 거라는 가설이 맞다면요. 그 시조가 알천랑이고. 어쨌든 왕으로도 추대된 알천이 김씨인 것만은 틀림 없어 보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