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한나라당을 말함)로 들어간다”던
사진=레디앙/청와대
나는
나는
그러나 나는 그보다는
바야흐로 중도의 시대다. 중도우파, 중도좌파, 그러더니 드디어 중도실용주의까지 나왔다. 좌파면 좌파고 우파면 우파지 중도는 무언가. 실용주의면 실용주의지 중도실용주의는 또 무언가. 그래서 우선 중도란 말이 무슨 뜻인지 사전적 의미부터 살펴보았지만, 명쾌한 답이 없다.
中道. 간단하게 직역하면 길의 한가운데란 뜻이다. 이리 치우치지도 아니하고 저리 치우치지도 아니한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세상에 중도란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엄마와 아빠를 동시에 사랑하는 아이에게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면 틀림없이 거의 대부분 둘 다 똑같이 사랑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만약 중도를 하겠다면 그 아이의 마음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그 아이처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부모를 가지는 것이다. 아이와 그 아이의 부모가 소속된 가족이란 사회는 철저한 공동체사회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확실하게 공유제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사실은 역설적이지만 이들에겐 중도란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공동체사회에서는 중도란 필요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면, 그렇다면 중도는 어떤 사회에서 필요하고 있을 수 있는가? 아마 그런 게 있다면 바로 치열한 계급계층 간의 갈등이 존재하는 사회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그런 사회다.
그럼 여기서는 과연 중도란 것이 실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미 선험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중도란 모두가 옳다고도 말할 수 있고 모두가 틀렸다고도 말할 수 있는 매우 유연한 입장에 설 수는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로부터도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또, 중도란 경우에 따라서는 이쪽 편을 들었다가 상황이 불리해지면 반대편에 서겠다는 회색분자적 태도를 천명하는 것이기도 해서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사상이기도 하다. 정치세력들이 박쥐처럼 교활할 수는 있겠지만, 역시 영악한 인간은 박쥐처럼 무모하게 낮과 밤을 넘나들지는 않는다.
그래서 당연히 아직 어떤 중도적인 정치세력도 존재했던 역사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정치인들이 입으로는 중도를 말하지만 사실은 철저하게 어느 한 편을 들어야만 자신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제의 세계에서 중도란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하등 틀렸다고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중도란 이 애매하고 기괴한 용어가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황석영도 이명박에게 바칠 선물로 이 헌사를 택했을 것이다.
아마 중도실용주의는
그러나 답답한 것은 그가 있지도 않은 중도란 말을 남용한다거나, 이명박 같은 수구파쇼에게 중도란 헌사를 바쳐 국민을 헛갈리게 한다거나 하는 따위가 아니다. 그는 곧 70을 바라보는 나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60이면 듣기만 하여도 이치를 깨닫고 70이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도리어
도대체 이명박에게 중도실용주의라니… 촛불시위대에 물대포를 쏘고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특공대로 짓밟는 것이 중도란 말인가. 부자들에겐 세금감면이란 특혜를 베풀면서 서민들에겐 복지를 축소시키고 오히려 세금을 올리는 것이 실용주의란 말인가. 게다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중도와 실용주의의 조합이라니…
이명박을 반대하든 찬미하든 그의 자유이겠으나 정신만은 똑바로 차려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지식인으로서의 공든탑만은 지키기를 바란다. 도대체 노벨상 후보로 거론된다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지성이 이런 정도로 무식하다면 국민으로서도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나.
그러나 중도라는 이 애매하면서도 기만적인 용어를 하루빨리 퇴출시켰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나로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