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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0.16 대왕의 꿈, 화형장면은 명예살인 미화 by 파비 정부권 (9)

김유신의 누이 화형식 장면을 보면서 저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아랍세계의 명예살인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김유신과 뒤에 김춘추와 결혼해 문무대왕의 어머니가 된 그의 누이 문희에 대한 고사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너무나 유명하지요.

김유신은 왜 누이를 화형에 처하려 했을까요?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김유신이 고심 끝에 결단을 내린 것으로 나옵니다. 흔히 하는 말로 고뇌에 찬 결단입니다. 김춘추를 살릴 것이냐, 김문희를 살릴 것이냐의 기로에서 김춘추를 선택한 것이죠. 왜?

김유신이기 때문입니다. 김유신은 삼국통일을 일구어낸 신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입니다. 삼국통일이 진정한 삼국통일인가에 대해선 저로선 수긍하기 어려운 바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어쨌든 김유신은 민족통일의 대업을 일군 영웅입니다.

따라서 드라마는 김유신으로 하여금 천륜에 따른 인정보다는 대의에 따른 결단을 내리도록 설정을 한 것입니다. 그럼 왜 김유신은 동생 문희를 화형에 처하려 한 것일까요? 드라마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사와는 좀 다른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사진. 어느 블로그에서 떠서 자른 자료사진임.

김유신은 김춘추와 삼국일통의 대업을 이루기로 약속합니다. 김유신에게 이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선 김춘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김유신은 아마도 김춘추야말로 자손이 귀한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좌에 앉을 유일한 인물이고 또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김춘추가 자기 동생과 간통을 했습니다. 이는 물론 김춘추의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문희가 미리부터 작심하고 김춘추에게 접근해 일을 벌인 것입니다. 하룻밤 풋사랑이었지만 문희는 임신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이를 알게 된 김유신과 가족들은 누구의 아이냐고 따집니다. 그러나 김춘추의 안위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문희는 절대 입을 열지 않습니다. 외조부 숙흘종은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손녀를 사려둘 수 없다고 펄펄 뜁니다.

문희를 임신시킨 상대가 김춘추임을 눈치 챈 김유신은 고민에 빠집니다. 누군가 하나는 죽여 사태를 봉합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죽일 수도 없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함께 지고 나갈 필생의 동지 김춘추를 죽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김유신은 대의를 택했습니다. 동생 문희를 죽이기로……. 그러나 결국 김유신이 내세운 화형의 이유도 외조부 숙흘종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으므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몇 년 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우리는 신라의 개방된 성문화를 접하고 매우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지나친 면도 없지 않았으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고리타분하고 폐쇄적인 성문화와는 다른 적극적인 성 관념을 우리 조상들이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아마도 많은 이들이 고무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조선시대에도 없었던 부녀자 화형식이라니요?

고사에선 그래도 김유신이 김춘추와 사돈을 맺을 계략으로 꾸민 일이라 귀엽게 봐주고 넘어갔지만, 이 드라마가 만든 설정은 그야말로 야만적이며 끔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문희를 화형에 처하는 것은 오늘날도 횡행하고 있는 이슬람세계에서의 명예살인과 하등 다르지 않습니다.

김유신의 신라군이 쳐들어오자 아내와 자식들을 직접 칼로 쳐서 죽이고 황산벌로 향한 계백장군의 이야기를 매우 감동적으로 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저는 계백장군의 위인전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계백이 왜 훌륭한 사람일까?

그가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의 5만 대군을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대목이 감동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뻔히 질 걸 알았다면 아내와 가족을 죽이고 전장으로 향할 것이 아니라 적당한 은신처를 골라 가족들을 피신시켰어야 옳은 일이 아닌가. 부여에서 멀리 떨어진 벽지로 보낸다면 설사 자신이 죽는다하더라도 가족들은 살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누가 계백에게 아내와 자식들의 목숨을 빼앗을 권리를 주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니 그저 한숨만 나왔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고사대로 문희는 죽지 않았습니다. 아직 공주 시절의 선덕여왕이 나타났고 이어 김춘추가 나타나 자신이 문희와 통간한 장본인이라고 고백함으로써 화형은 중지됩니다.

그러나 아무튼, 이 드라마가 화형식을 미화시킴으로써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구실로 자행하는 명예살인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잘못을 저지른 혐의는 그대로입니다. 

차라리 고사에 나온 대로 김유신이 김춘추와 사돈을 맺기 위해 쇼를 벌인 것 정도로 만들었다면 몰라도, 이 드라마에서처럼 삼국통일 대업의 동지인 김춘추를 구하기 위해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죄를 씌워 여동생을 화형에 처하려 했다는 김유신의 행동은 지독한 난센스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사실은, 난센스가 아니라 최악의 범죄행위라고 해야 옳겠지요.

ps;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화형쇼” “실감나는 눈물 펑펑 오열 연기” 따위의 연예기사 제목들이 나오는데요. “눈물 펑펑 오열 연기”는 인정해주더라도 “화형쇼” 대목에선 이 기자분들이 드라마는 제대로 보기는 보고 기사를 쓰는지 그게 의심스럽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긴 그분들도 다 먹고살아야 하니까요.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