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2.21 파스타, 갈매기, 청사포등대와 함께 한 아들 졸업식 by 파비 정부권
  2. 2008.10.27 10·26의 추억, 부마항쟁과 유신의 종말 by 파비 정부권 (5)
아들 졸업식날, 말로만 듣던 정통 이태리식당에서 파스타도 먹고, 
                     해운대에서 갈매기도 보고, 마지막으로 청사포도 구경하고…

2010년 2월 17일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졸업식이 있던 날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졸업이라니. 졸업식은 입학식을 하던 바로 그 장소에서 치러졌습니다. 6년 전 입학식이 있던 날에는 아들녀석이 왜 그리 안쓰럽던지, 부모 품을 떠나 혼자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 녀석을 보며 기쁨보다는 왠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었지요.


그러나 6년 후 같은 장소에서 치러지는 졸업식장에서는 이번엔 반대의 감정으로 인해 슬퍼졌답니다. 얄미울 정도로 천방지축이 된 아들녀석에 비해 제가 훨씬 초라하고 불쌍해보였기 때문입니다. 6년 전만 해도 세상 무서울 것이 없는 젊은이였던 제가 이제는 머리털도 많이 빠지고 몸에는 비계가 늘어 볼품 없는,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중년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지막 대학을 졸업할 때쯤이면 중년이 아니라 중늙은이가 되어 있겠지요. 인생무상이라더니, 남들은 다 기뻐서 웃고 떠들고 난린데 저는 왜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요? 확실히 감상적인 인물이라 남다른데가 있습니다. 흠흠~, 아무튼 아들녀석은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광안대교. 갈때는 아래층으로 올때는 위층으로 달린다.

아들은 이날 졸업식에서 과학탐구상이란 걸 받아 왔는데요. 자기 말로는 이게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주는 상이라고 자랑을 하더군요. 그런데 학교측에서 나누어준 유인물을 보니 모든 학생들에게 한 명도 빠짐없이 상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물어보았지요. "다른 애들도 다 상 받았다고 하던데?" 

"다른 애들은 대부분 행동발달상이고 과학탐구상은 두 명만 주는 거다." "그럼 국어탐구상 같은 것도 있을 거 아니냐? 수학탐구상도 있을 테고." 그러자 아들녀석은 기분 잡쳤다는 듯이 "에이, 몰라" 하면서 더이상 말을 안 하더군요. 그냥 잘했다, 수고했다 그러고 말 걸 하는 후회가 일었지만 '내가 뭐 예수님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닌데' 하고 생각하며 그냥 넘어갔습니다. 

졸업식장에는 아내의 대학선배도 참석했습니다. 마침 이날 휴가를 빼고 부산 센텀시티에 있는 어느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같이 보기 위해 전화했다가 합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위대한 침묵>이었는데 이날 딱 한 번만 상영하는 그야말로 희귀한 영화였답니다. 상영시작 시간은 오후 1시.

그런데 졸업식을 끝내고 반으로 들어간 아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졸업생들에게 일일이 졸업장을 나누어주는 통에―매우 고마운 일이었지만―졸업식도 평소에 비해 엄청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던 터라 기다리는 시간은 더욱 지루했습니다. 추운 날씨에 떨면서 아이들을 기다리던 부모들의 입에서 불평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청사포 등대(아들사진)


"뭔 할 말이 그렇게 많아?"
"아니 졸업식 하기 전에 미리 할말이나 필요한 일들은 다 끝냈어야지."
"와~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남을 배려하라고 가르치면서 왜 정작 자기들은 부모들 배려를 하나도 안 하는 거야? 이렇게 추운데 세워놓고서는."

모두들 일리 있는 말씀이었습니다만, 아이들과 헤어지는 선생님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닌 게지요. 그러나 당장 1시 전에 부산 수영 센텀시티에 도착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불만이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무튼 아이는 11시 45분께 나왔고, 부랴부랴 기념사진 몇 장 찍고, 곧바로 부산으로 내달렸습니다.

<위대한 침묵>은 유럽의 어느 수도원(트라피스트계 수도원이라고 했습니다)을 한 영화감독이 무려 16년을 기다려 찍은 영화라고 했습니다. 수도원 측이 영화 찍는 것을 허용하고 문을 열어주는데 16년이 걸렸다는 이야기지요. 사실 저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직접 영화를 봤다면, 정말 자세하게 소개하고 싶은 그런 영화였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부산 동서고가도로와 광안대교를 지나 센텀시티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1시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안해낸 방법이 그거였습니다. "차를 길에다 세우고 민이 엄마하고 나는 잽싸게 뛰어서 영화보러 가는 거야. 그럼 민이 아빠는 애들 데리고 다른데 가서 놀던지 하는 거지. 오케이?" 요약하면, 저더러 영화보지 말라는 이야기였지요.

나중에 장장 2시간 40분 동안 상영하는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저는 "아니 그게 바로 내가 봐야하는 영화였단 말이에요" 하고 장탄식을 하고 말았습니다. 영화는 2시간 40분 내내 대사가 한마디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닌데, 없었다고 무시해도 좋을 그런 수준이었답니다. 하얀 눈에 포위된 수도원에서 울려퍼지는 라틴 성가소리, 아~, 완전 내 스타일인데….

두 여자가 영화를 보러 간 사이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우리는 레스토랑에 가서 파스타를 먹기로 했습니다. 요즘 파스타가 유행이지요. MBC에서 하는 월화드라마 <파스타>, 정말 달콤하고 맛있는 드라마 덕에 저도 파스타가 스파게티인 것을 알았답니다. 아니 스파게티가 파스타의 일종인가요? 아무튼 너무 깊은 것은 따지지 말기로 하고요.
 

부산 해운대 풍경. 글라이더를 날리는 사람들과 장구(북인가?) 치는 사람들 모습이 참 아름답죠? (아들사진)


일단 해운대 달맞이고개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파스타를 파는 레스토랑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해운대로 내려와 몇바퀴를 돌았지만, 안 보이더군요. 그런데 아들녀석이 "앗, 방금 정통 이태리식당 지났다" 하고 외치는군요. 그래서 다시 한바퀴 돌았더니 역시 정통 이태리식당이 있긴 있네요. 그런데 이런~. 

무슨 호텔 3층에 있군요.(나중에 알고보니 시클라우드 호텔이었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러고 보니 "정통 이태리식당"이란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은 데 대한 후회도 밀려옵니다. 그 '정통'이란 용어에 주의를 했어야 하는데. 2층 식당 이름이 <VIPS>입니다. 슬쩍 곁눈질로 살펴보니 어린이용 특선 뭐뭐라 적어놓고 가격이 할인해서 8만 7천 원이랍니다. 어이쿠~. 

우리가 가는 식당은 3층 정통 이태리식당, 이름이 <벨라 치타>라고 되어 있습니다. 벨라 치타, 친숙한 이름이네요. 벨라 차오란 제가 특히 좋아하는 노래 제목과 이름이 비슷합니다. 벨라 차오는 '안녕, 예쁜 아가씨'란 뜻이라던데 벨라 치타는 무슨 뜻일까요? 어쨌든 이름 때문에 밀려들던 불안감도 눈녹듯 사라졌습니다. 들어서니 역시 분위기가 예사가 아니네요. 헐~ 내가 이런 델 다.  

벨라 치타. 창문 너머로 망망대해가 보인다. 감도와 조리개값을 높였다면 파란 태평양을 보여드리는 건데... 초보탓.


아무튼 오늘의 주인공은 아들녀석입니다. 녀석은 늘 정통 파스타를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심저어 저더러 파스타 재료를 사다주면 자기가 파스타를 만들어주겠다고 하던 녀석입니다. 파스타를 만들 때는 고급 와인을 써야 한다나요? 그래서 제가 그랬었죠. "야, 이놈아. 내 입에 들어갈 고급 와인도 없는데, 재료로 쓸 와인이 어디 있냐?"

아무튼 녀석은 이날 무척 기분이 좋았습니다. 녀석이 시킨 파스타는 모짜렐라 스파게티라고 부른 건데 메뉴판을 보니 이렇게 적혀 있더군요. '무슨 재료와 무슨 재료와 무슨재료 그리고 또 무슨 무슨 재료들로 맛을 내고 어쩌구 한 스파게티' 이름이 하도 길어서 저는 그게 무언지 몰랐는데 나중에 아들에게 물어보니 모짜렐라 스파게티였다고 하더군요.

역시 아이들은 스폰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금방 배우죠. 우린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하기 힘든 것들을 아이들은 금방 배웁니다. 문화를 흡수하는 힘이 우리보다 백배 천배는 뛰어나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었답니다, 슬픔과 함께. 아무튼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게 가격이 2만 1천원(부가세 별도)이었거든요. 순간 속으로 '후유~' 한숨을 내쉬며 호기롭게 아들에게 말했죠.

"야, 이거보다 더 맛있는 것도 많잖아. 꼭 이거 먹을래? 봉골레도 있네. 이건 어때?" 저도 요즘 연속극 <파스타>에서 공효진과 이선균에게 배운 게 좀 있는 터라 "봉골레는 어때?" 하면서 좀 아는 체도 하는 여유를 부려봤답니다. 흐흐~. 그러나 아들녀석은 뭔가 심오하게 아는 게 있다는 듯이 그러는군요. "아니, 이게 좋아. 이걸로 할래."

게다가 더 기분 좋은 일은 딸아이는 9900원짜리 피자를 시켰다는 겁니다. 저는 딸에게도 "얘, 너도 오빠처럼 파스타 먹어. 파스타 맛있잖아." 그러나 딸아이는 아직 파스타에 대한 신뢰를 할 수 없다는 듯이 자기가 잘 아는 피자를 먹겠다고 고집해서 결국 피자를 시켰습니다. 물론 저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고, 나중에 딸아이는 후회했습니다.

"아빠, 오빠야 파스타 정말 맛있더라. 담엔 나도 그거 먹을래." 

배가 부르니 녀석들이 많이 친해졌습니다.


뜻하지 않게(!) 정통 이태리식당에서 고급 파스타를 맛본 두 녀석은 기분도 좋아졌을 뿐 아니라 매우 친밀해졌습니다. 원래 서로 앙숙이라 이렇게 가까이 붙어 다정하게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가 쉽지 않은데 이날은 아주 자연스럽군요. 역시 민주주의나 평화 뭐 이런 게 달성되려면 먼저 배가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시면 해운대 백사정 멀리 끄트머리에 조선비치호텔이 보입니다. 제가 이곳 해운대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저 건물이 가장 큰 건물이었습니다. 해운대 어디서든 조선비치호텔과 동백섬이 선명하게 보였었지요. 그러나 이제 아닙니다. 주변의 웅장한 마천루들에 가려 조선비치와 동백섬은 너무나 초라해지고 말았더군요.

아래 오른쪽 사진의 거대한 건물들이 서있는 자리 오른편으로는 원래 송림이 있었습니다. 고교시절, 이 송림에 비둘기집을 만들어 달던 기억이 나는군요. 물론 선생님이 시켜서 했던 일이지만, 재미있었지요. 그런데 이제 송림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웅장한 건물들이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센텀시티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도시는 강남이나 분당보다도 더 대단하다는군요.

(아들사진) 이 글을 쓰는 중에 녀석이 나타나서 "내가 찍은 사진은 저작권 확실히 표기해라"고 해서... ㅎㅎㅎ


다시 두 여자를 내려주었던 곳으로 돌아오니 딱 시간이 맞습니다. 2시간 40분이 지났습니다. "영화는 재미있었어요?" "아, 정말 감동적인 영화였어요. 그런데 말이 한마디도 없어서 보통 사람들은 보기가 쉽지는 않을 거 같애. 우리도 잠깐 잠깐 졸았다고요. 아니 수도자들이 가만히 앉아 묵상하는 장면이 한참 나오는데 안 졸 수가 있어야지. 하하."

"하얗게 눈내린 수도원, 나무들, 조용한 라틴 성가, 오르간 소리, 기도소리, 아~." 이런, 사람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그게 바로 딱 내 취향인데. 아무튼 재미있었다니 다행입니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우리는 해운대를 몇바퀴 또 돌다가, "고마 경치 좋은 데 가서 밥 먹자" 결론 내리고 달맞이고개를 넘어 청사포로 갔습니다.

거기 유명한 밥집이 있다는군요. 아래 사진에 보시는 집입니다. 분위기는 벨라 치타와는 완전 딴판이었습니다. "그래 나한테는 역시 이런 집이 딱 어울리지." 마치 고향집에 온 느낌이 들더군요. 벨라 치타에서는 식탁에 뭘 흘리기라도 할까 조심조심 해야 했었지만, 여기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아, 역시 자유는 좋은 것이여. 흐흐~  

커다란 소나무를 앞에 둔 집이 우리가 장어구이를 먹은 수민이네.


자, 이상으로 아들 졸업식날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여기서 배불리 먹고 마시고 그리고 모두들 집으로 갔습니다. 물론 저는 소주를 한 잔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게 더 정직한 표현이겠죠? 어쨌든 두 여자는 술을 마시지 않는 제 모습이 무척 좋아보였나 봅니다. "민이 아빠 술 안 마시는 꼴을 보니 오늘 내가 기분이 엄청 좋다." "??? !!!"

(아들사진)


아래 사진들은 배가 불러 기분 좋은 녀석들이 어른들이 장어구이를 안주로 소주를 먹고 있을 동안에 식당 앞 바닷가에 나가 풍경을 찍은 사진들입니다. 물론 아들녀석이 찍었습니다. 장비는 캐논 450d. 한 번쯤 가볼만한 곳이었습니다. 주변에 횟집도 많았습니다. 저녁 노을이 질 무렵의 조용한 풍광이 참 마음에 드는 곳이었습니다. 

청사포란 이름도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럼 이만…, 안녕히.

(아들사진) 맨아래 숯불은 식탁 밑에 있던 것임. 발밑이 뜨뜻해서 깜짝 놀랐음. 이것도 아이가 찍었더군요. 기특하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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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제1동 | 벨라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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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곧 10·26사태 29주년이다. 한 사람이 비참하게 죽은 날을 무엇이 기념할 것이 있어서 이런 제목까지 달고 추억하겠냐마는 그래도 이맘때만 되면 아련한 기억이 향수와 함께 밀려드는 걸 어쩔 수 없다. 산골에서의 어린 시절 추억과 더불어 그곳을 마지막 떠나기 전에 일어났던 유신독재의 종말이라는 시대적 사건은 나에게 영원히 잊혀 질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

1979년 10월 27일,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매일 아침마다 3학년 교실에 문제풀이 시험지를 돌려야 하는 게 내 일이었다. 교무실에 가면 전날 밤에 등사된 문제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산골이라 고입을 앞둔 중학교 3학년이면서도 도시처럼 학원이나 과외 같은 걸 받을 수 없었던 사정을 고려한 선생님들의 배려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나는 문제지를 돌리기 위해 아침 일찍 등교했다. 그런데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나보다 먼저 온 녀석이 있었다. 기종이란 친구 녀석이 책상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반 부실장이기도 한 이 친구는 공부도 매우 잘하는 똑똑한 녀석이었다. 도가사상에 심취해서 늘 가방에 장자를 넣고 다니던 친구였다. 그래서 내가 “어이, 도사님.” 하며 놀리곤 했었다.

만주군 장교 시절 박정희/위키미디어

나보다 먼저 온 것도 의외였지만, 어깨를 흔들며 흐느끼는 친구를 보니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난처하다는 듯이 녀석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야 기종아, 도대체 왜 그러나.”

내가 물어보자 녀석은 더 슬프다는 듯이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어~어엉 어엉 엉~ 각하께~서 돌아~가~셨~다~.”

“뭐라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라.”

나는 이 친구가 정녕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장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통곡하며 우는 모습과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물었던 것이다.

“대통령 각하께서 어엉 엉~ 서거 하셨단다.”

순간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친구는 진정 각하의 서거가 애통해 우는 것 같았지만, 나는 전쟁을 생각했다. 국가원수가 죽었다는 슬픔보다 당장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먼저 나를 엄습했다.

잠시 후 교무실에 불려간 나는 급히 비상조회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모든 것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교단에 올라서신 교장선생님은 운동장에 집결한 학생들에게 슬픈 소식을 전했다. 이 자리에는 예외적으로 학교 육성회장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도 참석했다. 많은 학생들이 슬픔에 잠겨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눈물을 흘리는 저 많은 학생들은 모두 내 친구 기종이처럼 정말 애통해서 우는 것일까? 아니면 나처럼 전쟁의 불안으로 몸서리치는 공포에 떠는 아이들도 있는 것일까? 그날 아침은 학교 뿐 아니라 온 나라 온 천지가 비통한 슬픔으로 눈물바다가 된 것만 같았다.

1966년 각국 정상과 함께한 박정희 대통령/위키미디어공용


나는 10·26사태가 나기 불과 며칠 전에 부산에 다녀 온 적이 있다. 부산에 있는 모 고등학교에서 실시하는 특차모집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였다. 기차를 탔다. 차창 밖에서 달려드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밀려오는 낯설고 신기한 풍경들에 나는 마음을 흠뻑 빼앗겼다. 읍내에도 몇 번 가보지 못한 산골 소년에겐 시험을 치러 간다는 부담감조차 까맣게 잊을 만큼 화려한 외출이었다. 곧 있으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가는 대도시 부산이다.

그런데 부산역에 내린 나를 맨 먼저 반겨주는 것은 줄지어 늘어선 군인들과 탱크들이었다. 난생 처음 본 육중한 탱크는 철모르는 어린나이에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마음을 졸이며 버스를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여인숙을 잡고 저녁을 먹은 다음 내일 시험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러나 역시 부담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잠이 오지 않았다.

여인숙을 나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해운대 백사장을 돌아 동백섬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머리를 식혀주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에 이끌려 나는 계단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갯바위에 기대앉아 부서지는 파도를 지켜보고 있는 인어상도 보였다. 나도 그 모양으로 바위 한쪽을 차지하고 저 멀리 깜깜한 수평선 너머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부산에 진주한 계엄군/신동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환한 서치라이트 불빛이 나를 사로잡았다. 연이어 우레와 같은 함성이 들렸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무슨 일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절며 시키는 대로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은 몹시 가파르고 멀었다. 다 올라오니 내려올 땐 보지 못했던 철책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고 계단 입구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군인들이 나를 보며 말했다.

“너, 아직 어린 학생이구나. 몇 학년이냐? 이런데 들어오면 안 되는 거 모른단 말이냐?”

너무나 놀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대충 중학교 3학년이며, 입시를 위해 멀리 시골에서 왔고,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 것인지는 몰랐으며, 문이 열려있기에 내려가 본 것뿐이고, 내일 시험도 치러가야 하니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빌었던 것 같다. 다행히 그 군인은 마음씨가 좋아보여서 시골에서 온 어린 학생이라 예외적으로 한 번 봐줄 테니 어서 가서 자라고 했다.

놀란 가슴을 안고 여인숙에 돌아온 나는 부랴부랴 잠을 청하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 바로 가까운 곳에 있던 학교에 가서 시험을 쳤다. 그리고 나는 다음 해부터 3년간 그 학교를 다녔다. 나중에 그곳에 다시 가보았는데, 그곳은 늘 사람들이 붐비는 관광지였다. 그리고 인어상 주변에도 밤낮없이 사람들이 파도도 감상하고 사진도 찍으며 놀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는 부마항쟁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시내에 계엄군대가 진주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해운대 해수욕장과 동백섬 일원의 해안선에도 무장경계가 실시된 모양이었다. 산골로 돌아온 나는 다시 일상에 파묻혀 도시에서의 긴박했던 순간은 어느덧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10월 27일 아침에 느닷없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우리는 하교 길에 면사무소에 긴급히 마련된 분향소에 들러 다시 도무지 믿을 수 없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눈물을 흘렸다. 면사무소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모여든 동네 어른들로 붐비고 있었다. 비명에 죽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에 가기 전, 우리 마을에서 가까운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잠깐 잡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여느 지역에 비해 슬픔이 배는 더 했으리라.

국장이 끝나고 채 열흘이 가기 전에 바로 그 국민학교 교정에 봄에나 피어야 할 꽃이 피었다고 했다. 요즘은 기상이변으로 가끔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그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모두 하늘이 노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수군거렸다. 이 이야기는 신문기자에게도 전해져 세상에 알려졌다고 했다.

10·26이 나던 날과 다음날에도 나는 이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오갔다.


나도 그때는 하늘이 노해서 그런 것인 줄 알고 다시 한 번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순진하게도 산골에서 ‘유신교육의 해’ ‘근면 자조 협동’ 같은 선전문구를 건물 이마에 매단 학교에 다니고, 냇가에서 멱 감으며 놀다가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허옇게 고추를 내놓은 채 학교에서 배운 대로 일렬로 늘어서서 마치 비오는 날 승용차 와이퍼가 좌우로 힘차게 흔들리 듯 질서정연하게 손을 흔들던 산골소년도 이제는 안다.

하늘이 노해서 꽃이 핀 것이 아니라, 국민이 노해서 유신철권통치로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던 독재자가 비명에 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세월은 인간에게 망각이란 선물을 주어 슬픈 과거를 딛고 미래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지만, 또한 역사는 끊임없는 비판과 각성의 바늘을 주어 잘못된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열어준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몸을 흔드는 계절이 오면 나는 의례히 30여 년 전 그때를 기억한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기억의 편린을 더듬으며 기종이 녀석 생각도 한다. 그 친구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늘 장자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대통령의 죽음을 자기 부모의 일처럼 애통해하던 감성이 풍부하던 그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보니 다시금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2008. 10. 23.  파비

습지와 인간
카테고리 시/에세이/기행
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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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