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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2.02 영암사지에 사자가 엉덩이를 까고 선 까닭 by 파비 정부권 (10)

합천 하면 떠오르는 것은 해인사입니다. 둘을 붙여서 흔히 합천해인사라고도 부릅니다. 뭘 모르는, 그러나 이제 막 무언가를 알기 시작한 아이들은 해인사 일주문 앞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묻기도 합니다. “왜 ‘합천해인사’가 아니고 ‘가야산해인사’라고 적혀 있지요?”

하지만 영암사지를 둘러본 이들이라면 아마도 합천을 말할 땐 오래된 절터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겁니다. 저 또한 절터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사실을 영암사지를 보기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영암사지를 병풍처럼 받치고 있는 모산재 때문일까요?

영암사지와 모산재의 절묘한 어우러짐은 한 폭의 그림처럼 포근하고 아늑한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천생연분이 따로 없다싶습니다. 폐사지, 절은 망하고 터만 남은 곳이 이렇듯 평온과 위안을 줄 수 있다니 대자대비 부처님의 법력일까, 대자연의 신비일까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 영암사터 쌍사자석등. 뒤편으로 모산재가 보인다. @사진=김천령의 바람흔적

이 절터에 가면 가장 눈에 띄는 게 있습니다. 장난기가 한껏 발동한 두 마리 강아지가 떠받들고 있는 모양의 석등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강아지는 강아지가 아니고 사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때 드는 궁금증 하나.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이 석등에 어떻게 우리나라에는 살지도 않는 사자를 만들어 넣을 생각을 했을까? 언젠가 경주 흥덕왕릉에서도 사자상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칼을 든 무인상도 있었는데 전형적인 아랍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이 흥덕왕릉이 지어진 시기와 비슷한 연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본다면, 혹시 아랍인 무사들이 데리고 온 사자가 이곳 영암사지까지 와서 석등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헤벌쭉하니 입을 벌린 채 이빨을 다 드러내고 웃고 있는 흥덕왕릉 사자상의 천진한 모습과 통통하게 살이 오른 엉덩이를 까고 하늘 향해 두 팔 벌려 화사석을 떠받들고 있는 네발 달린 짐승 같지 않은 장난기어린 영암사지 사자의 해학적인 모습을 보노라면 영 불가능한 상상도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학자들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세 개의 쌍사자석등 중에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을 최고로 치는 모양입니다.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이 국보 제103호이고 법주사 쌍사자석등이 국보 제5호, 그리고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이 보물 제353호라고 하니 국가가 공인한 격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에 비해 영암사지의 그것이 조각기법이 정교하지 못하고 두리뭉실해보이긴 합니다. 오랜 세월의 풍파에 닳고닳아 그렇다고 하기도 합니다만 ‘한국문화유산답사회’의 <가야산과 덕유산> 편이 말하는 것처럼 “애초부터 그랬”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이 석등을 조각한 장인에겐 섬세한 정교함보다는 장난스런 해학을 통해 ‘팽팽한 긴장감’이나 ‘강인함’을 녹여내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전문가들의 의견에 반하여 영암사지 쌍사자석등이야말로 최고라고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 금당터 앞에 앞으로 삐죽 튀어나오게 쌓은 석축은 오로지 쌍사자석등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특별히 안배한 장치처럼 보인다. @사진=김천령의 바람흔적

아무튼 영암사지는 이 쌍사자석등으로 인하여 비로소 염암사지가 됩니다. 쌍사자석등은 ‘불꽃처럼 솟아있는’ 황매산 모산재의 품안에서 번창했던 옛적 영암사의 영광을 들려주는 듯합니다. 사라진 절터에서 허허로움, 쓸쓸함, 무상함 대신에 지나간 시절의 짙은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문화적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대하기로야 황룡사지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남은 자취만으로도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대화가 있다는 점에서 영암사지야말로 절터 중에 절터입니다. 그 핵심에 쌍사자석등이 있습니다.

마지막 하나의 팁. 불꽃처럼 솟아있는 모산재를 등에 업고 쌍사자석등 옆에 서서 아래를 굽어보면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 벌판을 볼 수 있습니다. 저 멀리 굽이쳐 흐르는 산맥의 줄기들이 벌판에 밀려나는 물결처럼 일렁이는 모습이 아련하기 그지없습니다.

구불구불 산책로를 따라 살살 내려오다 보면 계곡물이 흐르는 귀퉁이에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가 부침개와 두부무침에 막걸리를 팝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습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