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6.20 '전우' 반공드라마일까, 반전드라마일까? by 파비 정부권 (4)
  2. 2009.06.21 민간인학살, 나찌의 유태인학살보다 더 나빠 by 파비 정부권 (31)
  3. 2008.10.04 개천절에 무학산을 정복하다 by 파비 정부권 (2)
<전우>, 반공이냐, 반전이냐!
제작자, "참혹한 전쟁 통해 반전과 평화의 소중함 알려"

일각에선, "반공드라마 부활로 과거회귀 노린다" 의혹















<전우>, 오랜만에 만나는 전쟁영화다. 전쟁영화는 재미있다. 참혹한 전쟁을 다룬 영화를 재미있다고 하는 것이 잔인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는 장르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서 그런지 대개의 대작 영화들도 주로 이 전쟁을 다룬 영화가 많았다.

우선 가장 최근에 나온 영화 중 기억나는 것은 <진주만>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있고, 전쟁영화의 교범이라 해도 크게 지나치지 않은 <지옥의 묵시록>도 있다. 이외에도 2차대전을 다룬 영화들, <콰이강의 다리>, <노르망디 상륙작전> 같은 영화들이 모두 전쟁영화다.

그럼 몇 년 전 국민드라마로 각인되며 커다란 인기를 누렸던 <불멸의 이순신>은 어떨까? 사극이지만 이것도 역시 전쟁드라마 아닐까? 모르겠다. <불멸의 이순신>을 보고 전쟁드라마라고 부르는 사람은 별로, 아니 한 사람도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럼 이 드라마는 전쟁드라마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역시 전쟁드라마다.


굳이 글머리에 미리 이런 사족을 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전우>가 방영되기 전부터 일부 사람들은 이 드라마의 방영의도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거부감을 나타냈다. KBS가 정부의 의도에 따라 민감한 시기에 반공드라마를 제작해 방영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시청자게시판에 올라온 한 의견을 살펴보자.

"천안함 사건 이후 정부의 믿음이 안가는 대응으로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사고 있는 시점에서 반공사상 고취용으로 이런 드라마를 만든 것이 참 어이가 없다. KBS가 무슨 목적으로 현시점에 이런 드라마를 제작했을까? 깊게 생각하게 하는 부문이네…."                                         

그러나 이런 식의 비판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이 드라마와 천안함은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천암함 사건이 나기 전에 이 드라마는 거의 완성단계에 들어갔을 것이다. <전우>는 철저하게 사전제작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아마도 이명박 정부와도 별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6·25동란, 6·25사변 또는 일각(북한을 비롯한)에서 말하는 것처럼 민족해방전쟁, 이름이 그 무엇이든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지 60년이 되었다. 60이란 숫자는 우리나라 사람에겐 대단히 의미가 큰 숫자다. 한 갑자가 흘러 새로운 갑자(세상)가 시작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게 본다면, 이 시점에 한국전쟁을 다룬 드라마가 안 나오는 게 도리어 이상한 일이다.

문제는 방영되는 드라마의 제목이 <전우>라는 데 있는 것 같다. <전우>는 1975년에 방영되어 크게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가 전두환 정권 때인 1983년에 다시 리바이벌 돼 방영되었지만, 원작만한 인기를 끌지는 못했던 것 같다. 1975년이란 시대상황과 1983년이란 시대상황이 가져다주는 차이 때문이었을까?  

유신과 5공이라는 엄혹한 시대적 조건은 비슷했지만, 이미 국민들의 의식수준이나 생활방식이 달라졌던 것이다. 만약 지금 70년대의 <월튼네 사람들>이나 80년대의 <전원일기>와 같은 드라마를 방영한다고 하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까? 모르긴 몰라도 낮은 시청률에 고전하다 중도하차란 운명을 맞게 될 것이 분명하다.  

원작 <전우>는 철저한 반공드라마였다. 인민군은 뿔 달린 도깨비이며, 사람의 피를 빨아 먹는 괴물이다. 이에 비해 국군은 인민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간직한 구원자다. 그러니까 <전우>는 반공 혹은 멸공에 입각한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정권안보 무기였다. 아마도 그래서 신작 <전우>에 대한 거부반응이 먼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같은 시기에 방영되는 MBC의 <로드 넘버원>에 대해선 별다른 비토가 없는 것을 보아도 1975년의 <전우>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전우>에 대한 거부반응이 나왔다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천암함 사태나 이명박 정권의 반북정책을 예로 들면서 마치 이 드라마를 정권홍보 드라마 정도로 격하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전우>는 기획의도에서 이렇게 밝혔다.

6·25는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민족 최대의 비극이다.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비극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이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많은 이에게 전쟁의 참상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6·25전쟁이 발발한 지 꼭 60주년을 맞는 2010년 오늘, 드라마 <전우>를 기획하는 가장 큰 이유다.

그리고 아울러 <전우>는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라는 의도가 있음도 추가로 밝혔다.

전쟁터는 난장판이다. 돌격명령을 받고 달려가는 병사의 머릿속이 충성심으로 꽉 차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어서 달려가" 라는 고참과 간부들의 고함소리와 떨어지는 포탄과 총성. 그 속에서 병사는 그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달려 나갈 뿐이다. ………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꿈도, 이상도, 명예와 도덕도, 전장엔 존재하지 않는다. 블랙홀처럼 전장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오직 살고 싶다는 본능, 내가 살려면 남을 죽여야 한다는 본능만이 존재할 뿐이다. 바로 그런 전쟁의 참상을 통해 우리는 반전과 평화라는 인류 최고의 가치를 보여주고자 한다. 시커먼 구정물을 보아야만 작은 옹달샘의 깨끗함을 깨닫듯이, 드라마 <전우>는 참혹한 전쟁의 모습을 통해 반전과 평화의 소중함을 말할 것이다.

우선 1부를 본 소감을 말한다면 일각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반공드라마의 혐의는 크게 보이지 않는다. 몇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예를 들어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장면. 인민군과 중공군이 뒤섞여 깃발을 세우고 돌격해오는 모습은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중공군과 인민군이 부대의 편제도 무시하고 뒤섞여 돌격하는 장면도 우습지만, 총을 든 전장에서 깃발을 들고 돌진하는 장면도 난센스 중의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중공군이 쓰는 함화공작이란 전술은 북한군에서도 채용해 쓰고 있는데, 밤이 새도록 함성과 횃불, 북 등으로 심리전을 한 다음 동이 트기 전에 총공세를 하는 것이다.

함화공작까지는 잘 표현했지만, 양국의 군대가 뒤섞여 깃발을 들고 진격하는 장면은 실로 코미디였다. 임진왜란도 아닌데 말이다. 어쩌면 이것도 과거 우리가 배웠던 소위 중공군의 인해전술로부터 얻은 상상력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정도는 작은 옥에 티로 크게 걸고넘어질 만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제작자의 입장에선 그렇게 전투장면을 만드는 것이 더 멋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고증도 필요하고 리얼리티도 중요하지만, 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선 스타일이란 것도 있지 않겠는가. 재미가 있어야 하는 것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어쨌든 우리가 할 일은 좀 더 지켜보는 것이다. 

기획의도의 말처럼 "시커먼 구정물을 통해 작은 옹달샘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그런 드라마인지, 아니면 처음에 일부에서 의심했던 것처럼 "시커먼 구정물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그런 드라마가 될지.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세상은 변했다. 그리고 드라마 제작자도 그걸 충분히 알고 있다.

1975년 식 <전우>는 웃음거리만 될 뿐이란 사실을 말이다. 돈 안 되는 일을 80억이나 들여 할 리가 없는 것이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6월 20일 오후 1시, 경남도민일보 3층 강당에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마산유족회> 창립총회가 열렸습니다. 저도 그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유족은 아닙니다. 우리 가족 뿐 아니라 친족 누구도 학살에 희생된 사람은 없습니다. 참 다행한 일입니다. 창립총회 토의발언을 하시면서도 눈물을 적시는 어르신들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치수 회장의 취임사는 민간인학살에 대한 정부태도 성토와 유족들의 결의촉구가 돼버렸다. 오른쪽은 김주완 부장.


우리 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십니다. 전쟁이 나던 해 열여덟 살이셨던 아버지는 부산의 어떤 거리에서 술을 마시다 잡혀갔다고 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군사 훈련장이었는데, 그곳에서 특수훈련을 받고 전쟁에 투입됐다고 했습니다. 공도 많이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은성무공훈장을 세 개나 받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 그 훈장들을 마당에서 석유를 부어놓고 불을 지르셨습니다만, 최근에 다시 받아다 집 거실에 걸어두고 계십니다. 다리에 총상이 선명하도록 처절하게 싸우셨건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한창 공부할 젊은 나이에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교또중학교를 졸업하고 해방을 맞아 귀국했을 때 조종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모든 걸 앗아갔습니다. 전쟁이 끝나고도 10년 가까이 군에 남아있다 제대했지만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도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석회석광산, 탄광 등지에서 발파감독으로 오래 일하셨지요. 제 어릴 적 아버지의 기억은 살기어린 눈빛과 술과 그리고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훈장을 태우던 힘없는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전쟁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를 몸소 느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식들을 앉혀놓고 자기 무용담을 늘어놓는 모습이 어느 날부터인가 푸념처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숱하게 사람을 죽이면서 얻어낸 “이거 하나면 사람 목숨 세 개와 바꾼다”던 훈장은 삶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 훈장으로 얻은 것은 피폐한 생활과 살기등등한 성격, 평생을 가도 가슴속에 쌓여있는 분노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가 매우 불쌍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피해자로서 말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저도 매우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매우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전투와 상관없이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적군이 아니라 아군이나 경찰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모두 민간인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서 집단총살 당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배에 태워져 마산 앞바다에서 수장됐습니다.


그중 아홉 구의 시신이 마산 구산면에 떠내려 온 것을 마을사람들이 거두어 묻어주었다고 합니다. 곧 그곳에서 유골 발굴 작업이 벌어질 거라고 합니다.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쌀을 준다는 꼬임에 넘어가 죽음을 당한 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보도연맹 가입자를 늘려 실적을 쌓으려는 천인공노할 만행의 희생자들입니다.


4․19혁명으로 세상이 바뀌자 마산에서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유족회가 발족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등장한 박정희 쿠데타정권은 유족회를 강제해산시켰습니다. 이때 노현섭씨 등 지도부는 구속되어 15년을 감옥에서 썩어야했습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48년 만에 유족회가 다시 창립하게 된 것입니다.

학살자 가족들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한이 맺힌다.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


이미 6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사건을 정확하게 밝혀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유골을 발굴하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1960년에 했어도 어려운 일을 2009년에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다 정부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도 없애겠다고 합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2월 진실규명 결정문을 통해 '1950년 7월 5일부터 9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국군과 경찰, 형무관들에 의해 마산형무소 재소자와 예비검속된 보도연맹원 등 최소한 717명이 인근 산골짜기에서 총살되거나 구산면 원전 앞바다에서 집단수장됐으며, 그들 중 358명의 구체적인 신원을 확인했다'(김주완 기자)고 밝혔다고 합니다.


창립총회에서 마산유족회 회장으로 선출된 노치수 회장에 의하면 과거사위원회가 밝힌 숫자는 극히 일부이며 자신들이 확인한 숫자만 해도 1676명이고 신고를 하지 않고 있는 수백 명을 포함하면 최소한 2000명이 넘게 학살당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럼에도 이 정도라도 밝혀낸 것은 과거사위원회의 공적입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그런 과거사위원회가 불편한 모양입니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원혼을 달래고 유족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과거에 국가가 저지른 범죄행위를 반드시 밝혀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교훈으로 삼아야합니다. 그런데 현 정부는 그게 싫은 것입니다.


‘그게 싫다는 것’은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한 유족은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니면 누구도 우리 한을 풀어주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절대로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제 나이가 육십 넷입니다. 여기 저보다 나이 더 많으신 분들도 많고요. 우리 죽고 나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랬습니다. 거기 모인 분들은 모두 머리가 허연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습니다. 안경을 벗고 눈물을 훔치는 어르신을 보니 저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유족도 아닌 제가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부끄러워 먼 산을 쳐다보았지만, 가슴속에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분들을 보면서 홀로코스트가 생각났습니다.

산청군 시천면 민간인학살 현장. 발굴팀장 경남대 이상길 교수는 마산유족회 자문위원이다. @김주완

잠시 후에 죽게 될 줄도 모르고 줄을 서서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유태인들, 그 유태인들을 학살한 히틀러의 나찌정권과 우리나라가 무엇이 다릅니까? 그래도 나찌정권은 제 민족을 학살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기 동포를, 바로 얼마 전까지도 한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던 이웃을 집단으로 학살한 것입니다.


이게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내내 분노와 슬픔으로 뒤범벅이 된 노인들의 붉어진 얼굴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곧 마산시 구산면 바닷가에서 유골 발굴 작업이 이루어질 거라고 합니다. 10월 26일에는 위령제도 연다고 합니다. 저는 민간인학살 유족회원은 아니지만 그때도 꼭 참석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미력한 힘이나마 그분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고자 합니다. 왜 정부는 제 나라 국민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재판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국가범죄행위에 대하여 배상은 고사하고 한마디 사과도 안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혹시나 그런 학살행위에 대해 찬동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기나 자기 가족이 그런 처지에 놓인다면 무어라고 할지 그게 궁금합니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개천절에 무학산 등산을 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아니 사실은 평소에 거의 하지 않던 등산을 했습니다.

물론 개천절 기념 등반 이런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제 아내의 대학 과선배(1년 선배고 저는 처형이라고 부릅니다)가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 처형은 진해 웅진씽크빅 지국의 장님이십니다. 원래 부산에서 지사장으로 있었는데, 집에 어르신이 몸이 안 좋으셔서 일부러 지국장으로 좌천해서 낙향(?)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진짜로 좌천된 것인지도 모르지만, 효심이 갸륵해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개천절이라 함은 하늘이 열렸다 이런 뜻이겠지요. 단군께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신시를 여신 날이라지요. 그 높고 큰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만, 우리 같은 백성들이야 하루 쉴 수 있어 좋고 특히 이번엔 3일 달아서 쉴 수 있으니 더욱 좋지요. 그래서 바빠서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처형이 일부러 시간 내서 산에 가자고 할 수도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말이지요.

저 멀리 마창대교가 보입니다. 안개만 아니었다면 거제도도 환히 보일 것만 같습니다.



우선 우리 집 뒤 만날고개로 해서 대곡산 정상으로 올랐습니다. 가파른 산길이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숨은 턱에 차고 다리는 후들거리는데 뉘집 아이들인지 떼로 몰려 히히낙락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도 막 뛰어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강아지도 뛰어가고 아이들도 저리 잘도 올라가는데 어른인 내가 비실거린대서야 될 일이겠습니까? 물을 반병이나 비우고 힘을 냈습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가 아니겠습니까?

드디어 대곡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저 멀리 바다 너머로 거제도인 듯 보이는 육지가 기다랗게 널려 있었는데, 안개가 자욱한 날씨 탓에 그리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정상표지석에는 516m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렇게 높이 올라와 보기는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대곡산 정상. 여기까지가 힘들고 이후부터는 능선행입니다.



어릴 때 산골에 살 때는 산에서 뛰어노는 게 일이었지요. 이즈음엔 한 시간만 뛰어다니면 머루가 쌀푸대에 한가득 담기고 했습니다. 그러면 겨울에 우리 아버지는 머루주에 붉어진 얼굴로 두만강 푸른물에를 부르시곤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버지도 운동 삼아 산에 오르시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그 얘길 했더니 처형이 그러시는군요.

은성무공훈장

"전쟁을 겪으신 분들이야 어디 산에 재미삼아 오를 생각이 나겠어? 산에서 생과 사를 넘나들며 생존투쟁을 하셨을 텐데, 지긋지긋하실 테지. 우리 아버지도 산에 올라가는 사람들 보고 미친놈들이라고 그러셔." 

그러고 보니 그 말씀이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산봉우리 하나를 지키기 위해 한 달을 넘게 오줌을 받아 마셔가며 버티던 쓰라린 전쟁의 기억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덕에 을지무공훈장 등을 세 개나 받으셨지요. 그러나 나라에선 전쟁터에 나가 목숨 바쳐 충성했다고 그리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릴 때 홧김에 모두 불살라 버렸답니다. 작년에 필요해서 다시 찾아오시긴 했지만…. 그런 분들에겐 처형 말씀처럼 산이란 존재가 지긋지긋할 수도 있겠군요. 

어쨌든 우리는 대곡산 정상에서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누어 마시고 다시 힘을 내어 무학산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무학산 정상까지는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올라가는 길입니다. 역시 산은 능선을 타는 맛이 일품입니다. 익어가는 억새풀과 함께 산 아래를 굽어보며 걷는 기분은 정말 천상을 걷는 기분입니다. 억새를 보더니 갑자기 처형이 물어보는군요. 

“부권씨는 으악새가 무슨 뜻인지 알어?”

구름과 맞닿은 억새



저야 물론 으악새란 가을이 오는 것을 구성진 울음소리로 알려주는 어떤 구슬픈 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억새풀이라고 가르쳐 주는군요. 역시 사전에 찾아보니 억새의 경기방언입니다. 새가 맞다, 아니다 억새의 방언이다 아직 논란이 많은데, 막상 ‘짝사랑’의 노랫말을 지은 박영호 선생이 월북 후 북조선연극인동맹 위원장을 하다 돌아가셨으므로 알 길은 없습니다.

일제 말 친일작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가 이북 출신(강원도 통천)이란 점을 들어 왜가리의 이북 방언이란 설도 있지만 억새의 방언이란 설이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눈을 감으니 가을바람에 부대끼는 억새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아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젖은 이지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포즈 잡는다고 웃고 있지만 사실은 울고 싶은 모양입니다. 태극기 날리는 정상이 바로 뒤에 보입니다.



목이 메거나 말거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우리는 정상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이제 고지가 바로 저기입니다. 정상에 나부끼는 태극기를 보노라니 아닌 게 아니라 목이 메는군요. 이제 고생 끝입니다.

761.4m. 정상에 올라서니 젊은 학생들이 반겨주는군요. 수고했다고 막걸리도 한 잔 권합니다. 제 아내와 처형은 맛있게 한 잔씩 얻어 걸쳤습니다. 그러나 저한테는 아무도 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남자들이란 세상 밖에 나와서도 이렇게 괄시만 받고 살아야 하다니 참 처량도 합니다.    


무학산 정상에서 만난 친절한 학생들과 무학산을 정복한 투여사



정상에서 바라보니 마산은 물론이고 창원 시가지도 바로 손에 잡힐 듯 다가와 있습니다. 제가 살던 가음정과 상남동도 보이는군요. 정말 시원합니다. 이 동네에서 산지도 (좀 부풀려서!) 어언 3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무학산 정상에는 처음 올라서 봅니다. 제가 스물 몇 살 때 마창노련 전진대회 한다고 딱 한 번 올라와 본 적이 있지만, 그때도 서마지기 고개에서 막걸리만 마시다 내려갔습니다. 

역시 사람들에겐 누구나 정복자의 야심 같은 게 숨어있는 것일까요? ‘인자仁者’는 ‘요산樂山’ 해야 한다는 개똥철학을 모시고 사는 저도 산 정상을 정복하고 보니 그 희열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앞으로 자주 산을 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산을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산에 올라 저 자신을 정복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2009. 10. 4.  파비


서마지기 고개에서 지하여장군의 머리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산하는 길이 너무 가팔라서 올라가기보다 힘들었습니다. 다음엔 다른 하산 코스를 골라야겠습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