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2.01.06 학교폭력, 처벌이 능사는 아니지만 필수다 by 파비 정부권 (2)
  2. 2011.12.29 학교폭력 가해자 신상털기, 왜 생길까? by 파비 정부권 (7)
  3. 2008.10.29 초등학생 체벌사태를 보며 드는 잔혹한 추억 by 파비 정부권 (15)

학교폭력사태가 생길 때마다 하는 얘기들이 있습니다. “처벌이 능사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렇습니다. “처벌이 능사는 아닐 테지만 문제는 처벌조차도 하지 않아서 생기는 부작용이다.”

오늘 6일자 경남도민일보를 보니 예의 ‘처벌이 능사는 아니’란 논조의 기사들이 네 곳(두 개는 폭력근절 대책마련 기사였으나 상대적으로 왜소했다)에나 배치됐습니다. 우선 제 심정부터 말씀드리자면 한마디로 짜증납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데?”

동급생들의 폭력에 견디다 못한 대구의 한 중학생이 하늘나라로 떠난 지 꼭 18일이 됐습니다. 이러한 때에 “처벌이 능사는 아니다” 따위의 기사를 싣는 것은 억울하게 죽은 이에 대한 예의도 아닐뿐더러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효과만 내고 말 것입니다.

물론 ‘처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은 ‘우선 선도가 중요하다’는 의미를 깔고 있기는 합니다. 도민일보는 4면 ‘폭력학생 처벌만이 능사 아냐’란 기사에서 창원지법 천호종 판사의 재판진행을 미담사례로 들면서 ‘전문가들’이란 익명을 빌어 “처벌이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란 말은 지극히 옳은 말입니다. 처벌 외에도 다각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다른 대책 이전에 처벌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의 ‘처벌만이 능사는 아니’란 말에는 처벌을 지양하고 선도로 해결하자는 뜻으로 읽힙니다.

지극히 낭만적인 이런 주장이야말로 학교폭력을 줄이기는커녕 조장하고 악화시키는 악적이란 사실을 이들은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선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데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예방적 조치에도 폭력사건이 생겼다면 처벌로 정의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천 판사는 “9명(여4, 남5)이 집단으로 아무 이유 없이 한 여학생을 야산으로 끌고 가 기절할 정도로 때리고 담뱃불로 지지는 등 폭력을 행사하고 돈까지 빼앗았음에도 가해학생 처벌은 풍선효과 같은 역효과만 일어나므로 화해권고제도를 활용해 불처분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일견 천 판사의 재판행위가 미덕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가해학생들이 재판정에서 피해학생과 그 부모에게 용서를 빌고 직접 쓴 편지를 낭독하게 했다고 하니 실로 고귀한 판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으슥한 야산에서 “부모님께 일러봐. 경찰에 고소해봐. 여기가 바로 네 무덤이야” 하며 으르던 아이들이 판사 앞에서 잘못을 빌고 참회의 편지를 써서 읽었다고 진정으로 반성했다고 생각한다면 천 판사야말로 참으로 순진무구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법정 밖으로 돌아나오는 이들의 입가에는 비릿한 승리의 미소가 흘러나오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학교폭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같은 기성세대들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도 어김없이 학교폭력은 존재했습니다. 그때도 결코 지금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때는 요즘과 달리 폭력이 당연시되던 시절이란 것만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한해 선배들에게 이른바 ‘줄빠따’란 것도 맞으며 자랐습니다. 시내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창문 밖으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위력을 과시하는 학생들을 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의 몇 년은 어른들에겐 수십 년에 해당하는 엄청나게 긴 세월입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을 보면서 “아, 조금만 참으면 될 텐데” 하며 안타까워하는 사람을 보았지만 그들은 바로 이점을 모르는 것입니다. 중학생에게 1년은 10년과 같은 것입니다.

천 판사의 재판은 이미 1년 전에 일어난 일로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 이후 학교폭력이 전 사회문제가 되기 이전에 선도를 목적으로 진행된 것이기는 합니다. 만약 요즘 같은 시기를 경험하고 난 이후였어도 천 판사가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지는 의문입니다.

도민일보 11면 칼럼 란에 쓴 윤병렬(사천중학교) 교사의 ‘누가 학교폭력․왕따 괴물을 만들었을까?’란 글에선 더 큰 비애가 느껴집니다. 실적위주의 교사행정이 교사가 진심으로 학생에게 관심을 갖고 지도하는데 큰 한계로 작용한다는 변명은 나름 이유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학교폭력사태의 원인이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으며 공동체의 붕괴가 가장 큰 원인이다. 사회적양극화, 학벌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가 만들어낸 괴물이 바로 학교폭력과 왕따다”라고 진단하는 데에선 경악을 넘어 분노까지 치밉니다.

공동체의 붕괴나 사회적 양극화, 학벌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는 우리 모두가 지양해야할 폐단이란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사라지면 학교폭력도 사라질까요? “선생답게 참 답답한 말씀만 하신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인성보다는 성적을 우선시하는 경쟁지상주의 교육 때문”이라거나 “공문을 중심으로 하는 실적 쌓기 위주의 학교풍토”에 대한 지적은 매우 의미있는 말씀이긴 합니다만, 대체적으로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으며 대화와 소통이 절실하다” 따위의 추상적 결론만 얘기할 뿐입니다. 

폭력에 관해 정말 할 말이 많은 저로서는 더 할 얘기가 많습니다만, 마지막으로 제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처벌이 능사만은 아니지만 처벌은 가장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야 할 필수적인 조치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형사적 처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강력한 형사적 처벌 외에 가해학생의 부모와 교사, 학교가 연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지도록 손배소송을 반드시 해서 폭력을 행사하면 경제적 손해 등 최악의 결과를 맛보게 된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윤 교사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난 것은 대전의 모 교사가 1년 동안 동급생을 폭행한 자기 반 반장이 “선생님, 쟤 때려도 되죠?” 했을 때 피식 웃으며(이건 제 상상입니다만) 넘기고 말았다는 어처구니없는 교사가 떠올랐습니다.

사건이 불거지고 난 다음 “왜 알면서도 모른 척 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 교사가 그랬다죠? “별로 그렇게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교사의 답변에 가장 큰 진실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교사는 솔직하게 말했을 것입니다.

“때리고 그러는 건 알았지만 그게 무슨 큰 문제죠? 그럴 수도 있는 거죠.”

ps; 윤병렬 교사는 '누가 학교폭력·왕따 괴물을 만들었을까?'의 마지막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교폭력 괴물을 만들어내는 최소 단위는 가정입니다. 가정교육을 통해 좀 더 능동적이고 강한 아이, 자존감 높은 아이로 키워나가야, 괴물을 만났을 때 무서워하지 않고 힘껏 싸워나갈 수 있습니다."
옳고 훌륭하신 말씀이긴 합니다만, 교사로서 지금 이 순간에 꼭 해야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자살한 대구의 중학생은 피동적이고 자신감이 없어서 두려움에 떨다가 하늘나라로 도피한 것일까요? 먼저 간 그 아이가 들으면 얼마나 섭섭할까요?

Posted by 파비 정부권

학교 선생이란 사람이 자기 반에서 벌어진 폭력사태에 대해 “가해자도 내 학생이고 피해자도 내 학생” 어쩌고 하면서 “경미하게 생각했다”고 하네요. 참 미치고 환장할 노릇. 이런 놈들 때문에 ‘제일 냄새나는 똥이 선생 똥’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오는 거 아닐까요?

하긴 뭐 선생이란 직업도 하고많은 기능직들 중에 하나일 뿐이니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겠다고 하는 데야 뭐라 하기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예의 이 선생이란 작자는 과연 월급 받는 만큼 일을 제대로 하기나 한 건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군요. 돈대로 일을 하긴 한 걸까요?

저로 말하자면 원래 선생이란 직업을 가진 자들을 별로 믿지 않습니다. 남들은 존경하는 은사 어쩌고 하는 말들을 하지만 저는 존경하는 선생은 고사하고 그저 괜찮은 선생 하나 기억에 담아두고 있지 않습니다. 너무 색안경 끼고 보는 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이 정도로 하지요. 오늘 주제는 선생이 아니고 이른바 신상털기입니다. 대구의 어느 중학생이 동급생들의 폭력에 못 이겨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습니다. 온 국민이 공분했는데요. 초등학생과 중학생 아이를 둔 저도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대전인가요? 어느 학교에서도 역시 1년에 걸친 상습적인 폭행이 밝혀졌는데요. 웃기는 것은 가해학생이 6개월 전쯤에 선생에게 “때려도 되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답니다. 선생 말로야 “가끔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일”이겠지만 피해학생 입장에서는 지옥이지요.

그런데 최근 학내폭력이 사회 문제가 되면서 다른 문제가 하나 불거졌습니다. 바로 신상털기입니다. 가해학생들의 사진과 이름, 기타 정보를 인터넷에 공개하는 겁니다. 저도 이걸 보고선 깜짝 놀랐습니다. 놀랍기도 하면서 한편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이래도 되나?’

▲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의 가해자라며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 모자이크는 필자가 했다.

심지어 어떤 네티즌은 “살인마의 사진을 공개한다”는 설명을 달기도 했습니다. 공개된 어린 중학생의 얼굴은 너무나 앳되게 보였지만 살인마라는 이 하나의 문구만이 그 학생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왜 이런 무모한 신상털기가 번지고 있는 것일까요?

신상털기를 하는 네티즌들의 심리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중엔 도저히 참기 어려운 분노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엔 무엇보다 무능하고 기능적인 학교 선생들의 ‘귀차니즘’과 폭력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강력한 처벌이 필요합니다. 미성년자라고 해서 봐주어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성년이 안 된 범죄자를 수용하는 소년원이란 곳도 있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경우엔 증거인멸의 가능성도 농후하므로 구속수사가 원칙입니다.

지금까지 무수한 학내폭력 사건이 있었음에도 오히려 가해자들은 버젓이 얼굴 들고 다니는데도 피해자들이 전학을 가는 등 전전긍긍해왔던 사실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은 일벌백계의 예에 따라 살인에 준하는 죄로 다스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게 정의입니다. 그래야 하늘에 간 피해자의 영혼도 억울함이 어느 정도나마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네티즌들이 직접 신상털기라는 사적인 처벌에 나서는 것이 아닐까요? 일종의 사회적인 복수심 같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신상털기는 나쁜 것입니다. 하지만 자제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파렴치하고 잔인한 폭력행위에 대해 강력한 단속과 처벌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 선도가 먼저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로 “선도가 능사는 아니다. 강력한 처벌이 먼저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학교뿐 아니라 어느 조직이든 폭력사태가 발생하면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해 정의를 바로 세우기보다는 쉬쉬 하면서 사건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합니다. 이른바 조직보위 논리를 내세우면서 말입니다.

심지어 피해자를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몰거나(고려대 의대생들의 집단성추행 사건에서 보듯이) 피해자가 원인을 제공했다는 식으로 물타기를 하기도 합니다. 전형적인 2차 가해 수법입니다. 이런 행위에 대해서도 손해배상 등 근절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합니다.

맨 앞에서 말한 “때린 놈도 내 학생이요, 맞은 놈도 내 학생이다”라는 말을 한 어느 선생의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보면 이렇습니다. “때린 놈은 내 사랑하는 제자요, 맞은 놈은 멍청한 학생이다.”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요. 단지 귀찮았을 뿐.

이제 다시는 폭력 가해자가 뻔뻔하게 얼굴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지 말았으면 합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최근 불거진 체벌 논란을 보니 초등학생 아이를 둘이나 가진 부모 입장에서 매우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두 눈이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그러나 옛날 군사독재 시절에는 늘 있었던 일이고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기도 했습니다.

유신과 5공시대, 대수롭지 않게 자행되었던 학교폭력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체벌이란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교육과정의 일부였습니다. 수업을 하다가 조는 학생을 향해 던지는 선생님의 분필 조각은 그래도 부드러운 경고에 해당합니다. 만약 학생이 분필을 그대로 맞지 않고 피했다면 이는 경고를 무시하는 것이 되고 도전으로 간주되기도 하지요. 

이럴 땐 거의 예외 없이 앞으로 불려나가게 됩니다.

“입 다물어.”

이 소리에 학생은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어금니를 꽉 깨물고 뺨을 45도 기울여 선생님이 때리기 좋으시도록 갖다 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잠시 후 넓적한 손바닥이 학생의 뺨에 불을 붙이게 되는 거지요. 시뻘겋게 부어오른 뺨을 어루만지며 들어오는 학생의 글썽거리는 두 눈에선 타오르는 분노가 눈물과 함께 녹아내리지요.

저는 머리를 빡빡 밀고 중학생 제복을 입는 순간부터 늘 이런 장면을 불안한 모습으로 책상에 앉아 지켜보며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언젠가 『말죽거리잔혹사』란 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습니다. 권상우의 빼어난 몸매가 화제가 되었던 영화였지요. 극장에서 볼 기회를 놓쳤던 우리 부부는 비디오 가게에서 비디오를 빌려다 집에서 보게 됐습니다.

우리시대 학교의 리얼한 이야기, 말죽거리잔혹사

오랜만에 함께 영화를 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마침 영화도 학창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켜주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다보니 마치 내가 옛날로 돌아간 듯 착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한마디로 리얼했습니다. 아마 그때 그 시절을 겪었던 분이라면 모두 공감했을 겁니다. 

그런데 영화를 한참 보는데 한 학생이 선생님에게 불려나가 맞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처음에 뺨을 한 대씩 때리며 욕설을 퍼붓던 선생님이 자기 분에 못이겨 더 세게 때리기 시작하고 학생은 결국 이를 피하다 손으로 막게 됩니다. 그러자 더욱 화가 난 선생님이 “이자식이, 막아?” 하면서 이번엔 주먹으로 학생의 옆구리와 배를 가격하기 시작합니다.

교무실에 불려가 교련선생님에게 맞는 장면/ 말죽거리잔혹사


다시 학생이 옆구리로 질러오는 선생님의 주먹을 막거나 피하게 되면 이번엔 어김없이 안면으로 주먹이 날아들고 다시 옆구리와 가슴으로 주먹은 춤을 추게 되지요. 이때 이를 지켜보던 저도 막 흥분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장면은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반 친구 중 한 녀석이 당하던 장면과 완전 흡사했기 때문입니다.

“라이트 훅, 레프트 훅, 안면 스트레이트.” 하고 외치면, 영화 속의 선생님은 마치 제 코치에 따르기라도 하는 듯이 시키는 대로 주먹을 날리고 있었지요. 학생은 급기야 교실의 한 귀퉁이, 코너로 몰렸고 몸을 웅크리고 안면 가드를 한 채 속수무책으로 맞고 있었습니다. 다음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완전 흥분상태에 몰입한 제가 외쳤던 것입니다.

“자, 이제 시계 풀고….”

그러자 영화 속의 선생님은 마치 제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듯 시계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다. 이 부분, 시계를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는 장면은 제가 보았던 실제 장면과는 차이가 좀 났습니다. 그때는 흥분한 선생님이 주먹질을 하는데 거추장스러운 시계를 풀어 교탁 위에 올려놓고 다시 달려들어 야수처럼 학생을 난타했던 것입니다. 그 장면만 빼고 나머지는 너무나 똑같았습니다.

우리시대의 폭력교사는 획일화된 시대가 만든 피해자이기도 했다  

함께 영화를 보던 아내가 멍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며 불쌍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그렇게 많이 맞았나.” 

갑자기 저는 좀 창피해졌지만, 사실은 내가 맞은 게 아니고 우리 동기가 맞는 걸 봤는데 영화 장면이 너무 똑같았다고 얼버무렸습니다. 그리고 혹시 저 영화 만든 감독이 우리 동기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영화감독은 저 보다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으므로 동기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학교폭력에 관한 비슷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음에는 틀림없었습니다. 

몇 년 전에 동기생들이 모교 강당에 모여 은사님들을 모시고 졸업 20주년 행사를 했습니다. 그때 이 선생님도 오셨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60을 바라보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오래 전 기억이 나시는 듯 저희들에게 술을 부어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야들아, 정말 미안하다. 그때 내가 지금 너희들 나이 정도나 됐을 텐데, 너무 열이 많았던 거 같다. 시대도 시대였고….”

말끝을 채 잇지 못하는 선생님을 보며 선생님이 정말 그때 일을 후회하고 계시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이 정이 참 많은 분이시란 사실을 우리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시대적 상황이 선생님을 그리 만든 탓도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그래서 충분히 이해하는데도 선생님은 굳이 20년이나 지난 일을 두고 사과를 하셨습니다. 

체벌 넘어선 학교폭력, 묵과해선 안 돼

물론 이번 어린이에게 가해진 체벌사태와 옛날 중고등학교 시절의 학교폭력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아직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엔 턱없이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폭력이었을 겁니다. 신체적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두고두고 어린 마음을 괴롭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더 걱정스러운 것은 어린 아이에게 무자비한 체벌을 가한 선생님입니다.  

아무리 9살짜리 초등학생이 미운 짓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상적 학교폭력에 시달리며 살아온 우리 세대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체벌의 수준을 넘어선 폭력입니다.  그 시절에도 초등학교 2학년에게 이런 폭력을 행사하진 않았습니다. 이런 정도의 자기 통제도 불가능한 선생님이라면 정신적 치료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70년대 말죽거리 고등학교에서나 벌어질 ‘잔혹사’가 21세기 대한민국의 초등학교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니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2008. 10. 29.  파비

습지와 인간
카테고리 시/에세이/기행
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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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