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2.12.01 친구가 특수절도죄로 구속된 이유 by 파비 정부권 (7)
  2. 2012.11.30 신나통 들고 죽겠다던 친구 20년만에 만나다 by 파비 정부권 (2)
  3. 2009.12.13 대림차와 지역노조 양쪽에서 눈총받는 천막농성 by 파비 정부권 (2)
  4. 2009.11.29 대림차, 어린아이에게 해고장 전달 울음바다 만들어 by 파비 정부권 (8)
  5. 2009.11.28 대림차노조, 대량 정리해고에 맞선 맛있는 파업 by 파비 정부권 (9)
  6. 2009.11.28 오마이뉴스 대림차 파업보도, 조중동 닮았나 by 파비 정부권 (4)

어제 20년 전 신나통 들고 죽겠다던 친구 이야기를 했다. 1989년 4월 1일, 노조민주화파업투쟁이 처절하게 깨지던 날 아침의 이야기였다. 그 친구를 엊그제 만났을 때 “야, 그때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냐? 너 그때 진짜 죽으려 그랬냐?” 하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진짜 죽으려고 그랬지. 그때 심정은 그랬다.”

그리고 어제 또 다른 친구를 만났다. 오늘은 그 친구의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 싶다. 노조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제일 먼저 구속된 것은 그 친구였다. 하지만 이 친구는 흔히들 적용되는 노동쟁의조정법,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국가보안법 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에게 적용된 죄목은 특수절도죄였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창원공단에는 노조민주화 바람이 한창 불었다. 우리가 노조민주화, 위원장 직선제 등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갔을 때 마침 우리 공장과 마주보고 있는 KS사도 함께 파업을 하고 있었다. 창원공단에서도 가장 큰 공장에 속했던 이 회사 역시 어용노조 퇴진, 민주노조 건설이 파업의 목표로서, 말하자면 우리는 동병상련의 관계였다.

게다가 당시는 연대의 기운이 드높았다. 앞서 글에서도 말했지만, 4월 1일 새벽 기습을 받고 50여분 만에 깨져 닭장차에 실려가던 우리를 구하기 위해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대오를 지어 달려왔었다. 이때는 간발의 차이로 실패했지만 이후에 이 경험은 구사대에게 점령당한 파업현장을 지역노동자들이 연대의 힘으로 재탈환하는 쾌거를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

그때 우리에게도 KS사 파업노동자들은 남이 아니라 동지였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함께 야간보초를 서던 파업노동자들 사이에는 공장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연대의 정이 뜨거웠다. 먹을 것을 상대편 울타리 너머로 넘겨주기도 하고 함께 투쟁가를 부르기도 했다. 모닥불의 빠알간 열기가 연대를 더욱 북돋워주었던 것일까.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파업투쟁이 깨지기 4, 5일 전이었던 것 같다. 예의 이 친구와 나는 공장을 순찰한다며 오토바이를 타고 한 바퀴 돌았다. 아마도 100CC FM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굳이 뒤에 타겠다고 우겨 함께 타게 되었던 것인데 오후 다섯 시가 거의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앞선 글에서도 말했다시피 나는 겁이 많다. 오토바이 뒤에 탔으면 그냥 운전자가 움직이는 대로 함께 움직이며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나는 운전자가 왼쪽으로 돌면서 몸을 왼쪽으로 기울이면 겁이 나서 반대로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또 오른쪽으로 기울이면 반대로 왼쪽으로 몸을 튼다.

이러니 친구가 운전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모래가 많이 깔려있던 아스팔트바닥에 미끄러지면서 넘어지고 말았는데 그 친구는 별로 안 다쳤지만 나는 팔과 다리에 타박상을 입고 무릎이 깨져 피까지 흘렀다. 추운 날씨에 차가운 바닥에 넘어지니 보통 아픈 것이 아니었다.

나를 부축해 노조사무실에 데려다 눕힌 친구는 걱정이 되었던지 밥까지 타다주며 미안하다고 했지만 사실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었다. 안쓰러운 표정으로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나간 친구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공장 바깥에 잠시 볼일 보러 나갔던 그는 공장주변에 잠복하고 있던 경찰에 체포됐던 것이다.

사정은 이랬다. 파업이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이 친구가 바로 길 건너편에서 함께 파업을 하고 있던 KS사 파업노동자들에게 우리 공장에서 시험용으로 쓰고 있던 오토바이 몇 대를 순찰용으로 쓰라고 빌려주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탐지하고 있던 경찰에 잠시 공장 바깥으로 나갔던 친구가 잡혔던 것.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 일로 인해 KS사 파업지도부 위원장이었던 김모 형님은 이후에 구속되었을 때 죄목 중에 노동쟁의조정법 위반, 폭력행위, 불법무기(화염병)제조 외에도 장물취득이란 죄목이 하나 추가되었는데, 양사 노민추 정당방위대끼리 이루어진 일로 이 형님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고 했다.

아무튼 우리공장 노조 파업투쟁의 구속 1호 죄목은 특수절도죄였다. 하긴 뭐 죄목이란 게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다. 나중에 나도 구속되었었지만 죄명이 모욕죄, 협박죄, 폭력죄 같은 것들이었다. 물론 국가보안법으로 엮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시절이 이미 빨간 고춧가루로 자백을 얻어내던 편리한 시절이 지나가고 있었으니.

3년 후쯤이던가? 내가 구속됐다 풀려난 후 먹고살 게 걱정이던 때에 이 친구는 내게 신문배달이라도 하며 먹고살라고 오토바이 두 대를 가져다주었다. 한 대는 에프엠이라 부르던 100CC짜리였고 한 대는 이름이 러브였는지 뭔지 기억에 잘 없긴 한데 50CC짜리였다. 이 두 대의 오토바이로 직원 한명 데리고 한겨레신문 배달하며 한동안 잘 먹고 잘 살았다.

어제 친구를 만났을 때 오랜 옛날이야기지만 미안하다고 말해줬다. “친구야, 사실 그 오토바이 타고 신문배달 하다가 차에 세 번 치였다. 한번은 새벽에 쓰레기차에, 한번은 유치원 봉고차에, 한번은 시내버스에. 그러곤 폐차시켰는데… 폐차시킬 때 너한테 말 안 해서 미안하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어제 참으로 오랜만에 20여 년 전 동지들과 술을 한잔 마셨다. 1989년 4월 1일을 함께 기억하고 있는 친구들. 그날 그 친구는 쇠파이프에 머리를 얻어터지고 기절하고야 말았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 다시금 날아드는 백골단 화이바에 얻어맞고는 한 번 더 기절.

글쎄, 나는 이친구가 첫 번째 기절한 것은 기억이 나는데 두 번째 기절한 것은 기억이 없다. 실은 닭장차(전투경찰버스)에 개처럼 끌려가 실리고선 나도 그놈에 백골단 화이바에 복날 개 맞듯이 얻어터지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시간이 아침 7시가 조금 못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닭장차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백골단 놈에게 얻어터지며 <5월>을 부르고 있을 때, 철창이 쳐진 창문 너머로 4열종대로 줄지어 달려오는 노동자들이 보였다. 나중에 듣기로 그들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세신실업 노조원들이었다.

아마도 6시 정각에 공격이 개시된 듯싶다. 술이 덜 깬 멍한 상태로 잠이 깬 것은 요란한 소음 때문이었다. ‘와장창’ 하면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 놀라 일어나 보니 정문 쪽에서 이십여 명의 정방대(정당방위대)원들이 정문과 본관 사이에 세워놓은 승용차 유리를 박살내면서 도망치고 있었다.

뒤이어 “와” 하는 함성소리와 함께 본관 정면 언덕에서 노란 화이바 수천 개가 일시에 솟아올랐는데, 실로 일견하기에 족히 수천은 되지 싶었다. 그때의 충격이란. 그때 심정을 솔직히 고백한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아아, 우린 이제 다 죽었구나!’ 겁이 덜컥 났던 것이다.

후퇴하던 정방대원들 중 십여 명은 우리가 머물고 있던 본관 건물 2층으로 올라왔지만 대부분은 밀려드는 구사대를 피해 본관을 지나쳐 공장 끝 담벼락 쪽으로 도망쳤다. 순식간에 공장은 구사대들에게 장악되고 좁디좁은 본관 2층 사장실에 40명이 고립되었다.

구사대들은 매우 질서정연했다. 그들은 정문과 본관 맞은편 언덕을 통해 양면 공격을 해왔다. 말하자면 퇴로는 남겨두었던 것인데, 파업노동자들을 양분시키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그 작전은 주효했다. 1백여 명 가까이 되었던 파업대오는 5분도 안 돼 40여명으로 고립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집중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각자 자그마한 포대 하나씩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엔 돌이 가득 담겨있었다. 두 줄로 늘어선 구사대들은 구령에 맞춰 일제히 돌을 던졌다. 1열이 던지면 물러나고 그 다음 열이 나서서 던지는 식으로. 불과 40평 남짓한 사장실은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세례에 난장판이 되었다.

이때 예의 이 친구가 사장실에 쌓아놓았던(아마 내 기억에 한 4, 50통쯤 됐을 거다) 신나통을 안고 사장책상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라이터를 켜들었다. “가까이 오면 다 죽는다!” 돌 던지면 다 죽는다고 그랬던가? 아무튼 뭐라 외쳤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는 두 명이 더 올라갔다. 신나통을 안고.

당시 공장장은 이모씨라는 서울상대 출신의 인사였는데 매우 강성의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사장이었던 조모씨는 서울법대 출신으로 그와는 동기동창이었지만 차분한 성격으로 말수도 적었던 데 비해 공장장은 매우 다혈질이었다. “뭐하는 거야? 새끼들아. 빨리 소방호스 빼다가 뿌려.”

쩌렁쩌렁한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쇠파이프를 달랑 들고 창가에 서서 나는 그 악귀 같은 소리를 들으며 몸서리를 쳤다. 엊그제 박근혜씨가 TV단독토론이란 걸 하면서 “악랄한”이란 표현을 썼는데, 정말이지 그 순간에 악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방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은 상상을 초월했다. 세상에 이런 강펀치도 없었다. 물세례에 한방 맞으면 그대로 2~3미터 뒤로 나동그라졌다. 사장실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물이 무릎 언저리까지 찼다. 그 와중에도 나는 신나 기름이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모양을 살피며 공포에 몸을 떨었다.

공장장이 외쳤다. “저 새끼들을 조준해서 뿌려.” 소방호스는 일제히 신나통을 들고 책상 위에 올라선 세 명을 향했고, “으아악” 비명을 지르면서도 세 친구는 물러서지 않았다. 쓰러지지 않으려 악을 쓰는 세 놈을 보면서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새끼들아, 신나통은 내려놓아. 우리 다 죽는단 말이야.’

나는 사실 겁이 많은 놈이다. 어쩌면 파업 10일 동안 야금야금 절반 이상이 새어나갈 때도 도망가지 못했던 것도 겁이 많아서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동지들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욕을 듣는 것이 두려워서. 그때도 그랬다. 친구 세 놈이 신나통을 들고 섰을 때 나는 와락 겁부터 먼저 났었다.

신나통을 들고 라이터를 켜들자 일순 돌을 던지는 구사대들이 손이 멈췄는데 아마 그들도 사람이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공장장의 악랄한 다그침이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뭐하는 거야, 새끼들아. 계속 던져.” 깨끗이 빗어 올리고 기름을 바른 그의 머리가 아침햇살을 받아 번쩍거렸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3월 파업이라 부르는 노조민주화투쟁은 막을 내렸다. 4월 1일 오전 6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6시 50분께 끝을 맺었고 우리는 줄줄이 굴비처럼 길게 늘어서서 닭장차에 올랐다. 그리고 새벽부터 잠도 못자고 나왔다며 투덜거리는 백골단 대원에게 개 맞듯이 맞으며 노래를 불렀다.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피피피.”

아, 그 전날 밤에 파업 10일 만에 좀 색다른 일이 있었다. 매우 무료하고 그래서 서서히 진이 빠지기 시작하던 시점에 반가운 친구들이 찾아왔다. 공작과의 최모 등 몇 명이었다. 노조민주화 파업투쟁에(원래 이들도 함께 했던 동지들이었다) 동참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술을 사들고 왔던 것이다.

소주에 맥주에 안주로는 새우깡. 쥐포도 몇 마리 있었던가? 캡틴큐에다 나폴레옹 뭐라 부르던 국산양주도 있었다. 우리는 매우 기뻤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아마도 이리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지들, 걱정하지 마쇼. 우리는 어차피 다 같은 동지 아니요. 당신들은 밖에서 우리는 안에서 함께 싸웁시다.”

밤늦게 그들이 돌아가고 우리는 행복한 잠에 취했지만, 새벽은 참혹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승리했다. “난로불 다 꺼. 이새끼들 전부다 신나통에 들어앉았다 나온 놈들 같다. 불날라.” 경찰간부의 그 한소리에 우리는 오들오들 떨며 조사를 받아야 했었다. 그리고 오후 1시쯤? 훈방.

창원 내동상가에서 대각선으로 마주보이는 체육공원까지 터덜터덜 내려온 우리는 잔디밭에 빙 둘러앉았고 연행되지 않았던 정방대원 중에 한 친구가 오토바이를 타고 급히 달려와서는 상황을 전하는 것이었다. “4월 6일부터 정상 출근한다고 공고 붙었다.”

4월 6일 아침 정문에서 다시 농성을 시작한 우리의 숫자가 3백, 4백으로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하자 공장장이 다시 뛰어내려왔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노조위원장의 명찰을 잡아떼며 이렇게 외쳤던 것인데 이게 노조민주화투쟁 승리의 단초가 될 줄 그가 알았으랴. 

“야 이새끼야. 니가 위원장이야? 위원장이 이런 것도 하나 해결 못해? 너는 새끼야, 위원장 자격이 없어.”

우리에게 어용으로 낙인 찍히고도 늠름하게 버티던 그 위원장은 이 한방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마 조합원들 앞에서 회사 공장장에게 “너는 위원장 자격 없다” 소리를 들으며 명찰을 떼이는 수모를 당하자 곧바로 자진사퇴를 결심하고 노민추에 전권을 주는 위임장을 써주고 말았던 것이다. 

음, 그렇게 신나통을 들었던 그 세 명 중 한명은 구속됐고(알고 보니 이른바 위장취업자였음), 한명은 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했으며, 한명은 노조위원장이 되었다. 어제 만난 친구가 바로 그 친구 중 한명이었다.

노조사무실을 접수하고 난 다음 노민추 위원 12명이 모여 누구를 위원장으로 추대할지 투표를 했는데 그 친구가 5표, 내가 4표, 최모라는 친구가 3표가 나왔던 것이다. 나중에 그 순서대로 위원장, 사무장, 부위원장을 했다.

아, 그러고 빠진 이야기가 하나 있다. 당시 구사대 측에서도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이 있었는데 총무과 직원이었던 그가 맡은 임무는 지붕을 뚫고 농성장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련한 이 사람이 지붕에 구멍을 뚫다 발을 헛디뎌 그만 아래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다행히 바닥이 물바다가 되어 있었으므로 떨어지는 충격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사자우리에 떨어진 격이 되었으니…. 분노에 평정심을 잃은 쇠파이프들이 그의 몸에 집중됐고 “살려주세요” 하고 비명을 지르던 그의 몸은 불과 1~2분 만에 개구리처럼 늘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저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큰 사단이 나도 났을 것이다. 그는 두 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있었다. 우리의 친구와는 달리 그는 회사에 큰 공을 세운 공신이었던 것이다. 이건 뭐 짐작이지만, 그는 총무과에서도 꽤 편한 보직을 받아 안락한 회사생활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 지난 옛날이야기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 덕에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외에도 무수한 이야기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지만 시간이 짧아 다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오늘 저녁 다시 만나 한잔 더 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건 하나의 여담이지만, 당시 동지들은 대부분 나이또래가 비슷한 친구들이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대림자동차 정리해고에 반대해 진보신당이 천막농성을 한 지가 벌써 한달이 넘었다. 11월 11일에 천막을 쳤으니 한달 하고도 3일이 지났다. 정권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정당이 직접 노조의 투쟁에 몸으로 개입한다는 건 쉬운 결정은 아니다. 그게 옳은 방법인지에 대한 많은 고민도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대림자동차 정문 앞 진보신당 천막농성장. 정리해고를 중단하라 만장기를 든 사람이 여영국 위원장.


나는 그 이유를 천막에서 많은 날들을 지새우며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물론 그 깨달음은 어디까지나 나의 주관이다. 그러나 그 주관이 객관에 비해 결코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주관이란 지역 노동진영의 대응이 너무 미미한 상태에서 노조의 연대를 견인하기 위해 천막농성이 불가피했다는 점이다. 

천막농성을 주도하고 있는 진보신당 여영국 위원장도 나와 생각이 같았다. 천막을 친지 딱 한 달 하고도 이틀이 지난 12월 12일 아침 문성현 전 민노당 대표가 진보신당 천막을 찾았을 때 여 위원장은 그렇게 말했다. "우리가 여기에 천막을 친 데는 나름 배경이 있습니다. 정당이 사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고민도 있었지만,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문성현 대표는 사실상 최초로 진보신당 천막을 찾은 민노당 인사다. 문 대표가 오기 일주일 전에 권영길 의원이 잠시 천막에 들어와 인사를 하고 갔지만, 매우 의례적이었다. 그는 마치 어쩔 수 없이 진보신당 천막에 들렀다는 듯이 부랴부랴 수고한다는 말만 던지고 떠났다. 수차례 권영길 의원실과 민노당에 관심을 호소했던 여 위원장으로선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권영길 의원이 움직인 데는 나름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오해할 만한 정황도 있었다. 효성이 직장폐쇄에 맞서 두 달 넘게 파업을 하고 대림차가 정리해고에 맞서 한 달 넘게 싸우는 동안 권 의원은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울산을 지역구로 두고 있는 조승수 의원이 대림차와 효성을 방문한 것이다.

대림차 농성장(좌)과 효성노조 농성장(중, 우)을 방문한 진보신당 조승수 국회의원.


여기에 자극 받은 듯 권 의원은 부랴부랴 금속노조 경남지부가 대림차 정문 앞에서 여는 집회에 참석했다. 조 의원이 대림차 농성장에 들어가 조합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이어 효성 노동조합에 설치된 농성장에 들른 다음 다시 대림차 정문에서 열리는 금속노조 집회장에 돌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권 의원이 온다는 얘기도 없었고, 진행표 순서에도 없었다. 

그런데 집회가 시작되기 불과 몇 분 전에 권 의원의 연설 일정이 맨 앞에 잡히고 조승수 의원의 연설은 뒤로 밀려났다. 그렇게 권 의원실과 민노당을 향해 관심과 더불어 연대를 요청했음에도 오지 않던 권 의원은 조승수 의원이 나타나자 실로 번개처럼 나타난 것이다. 물론 고마운 일이다. 어떤 이유였든 권 의원이 자기 지역구에서 벌어지는 정리해고 사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날 연설을 마친 권 의원은 준비가 없었던 듯 현장 방문을 생략한 채, 진보신당 천막을 그냥 지나친 것은 물론이고, 왔을 때처럼 부랴부랴 떠났다. 그리고 며칠 후, 잃어버린 숙제라도 하듯이 다시 대림차를 방문했고, 바람처럼 스쳐가듯 했지만 진보신당 천막에도 들러 격려도 했다. 나는 불만은 있지만―권 의원 정도의 위상에 불만이 없다면 이상한 일임이 분명하다―그래도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사실 권 의원의 관심이 부족한 것은 권 의원 만의 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일개 노조의 농성에 많은 역량을 투입하는 것을 민노당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창진 통합 문제에는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할 수 있어도, 자그마한 사업장의 투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 민노당 입장에선 바람직하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저마다 정당의 논리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를 두고 옳니 그리니 하는 것도 옳은 일이 아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관점의 문제다. 내 관점은 옳고 네 관점은 틀렸다고 말하면 그야말로 아집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섭섭함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모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으로 아직 섭섭할 만큼 기대를 품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금속노조 집회에 맨 우측부터 진보신당 경남도당 이승필 위원장, 민노당 권영길 의원,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이 앉아 있다.


그래서 이런저런 애증의 갈등을 섞어 문성현 전 민노당 대표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았던지, 여 위원장은 따로 귓속말로 문 대표에게 불필요한 말로 갈등을 일으키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문 대표의 말을 들으며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을 뿐이다. 

내가 처음 사회에 나왔을 때, 그때 나는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노동자였는데, 노조 사무장이었던 문 대표는 네루가 딸에게 쓴 편지를 모은 <세계사 편력>이란 책을 읽기를 권했던 인물이다. 주로 노조 사무실에 들러 박범신의 <풀잎처럼 눕다> 따위의 소설만 빌려 읽던 내게 <세계사 편력>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리고 이후에 나는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았고 그를 무척 존경했다.  

그런 그는 아직 민노당에 남아 있고, 나는 민노당을 떠났다. 함양에 가 있다던 그가 창원에 다시 나타난 이유는 아마도 들리는 소문처럼 창원시장 후보로 나서기 위해서일 것이다. 천막에 들른 이유도, 앞으로 자주 오겠다는 이유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그의 말은 대체로 옳았다. 아니 지극히 옳은 말들 뿐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직 첫 만남에서 나온 의전적인 언사들을 두고 이러니저러니 평을 하는 것은 속단일 수 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렇게도 지극히 옳은 말을 들으며 나는 속에서 밀려 올라오는 갈등의 목소리를 참기가 어려웠다.
 
"문 대표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이런 이야기를 들으신다면 어떤 생각을 하실지 궁금하네요. 이런 말씀을 들으시고도 통합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지 말입니다. 당장 다가온 지방선거에서 선거연합이라도 하자는 소리를 할 수 있을지 말입니다. 엊그제 STX엔진 지회장이 대림차 지회장을 찾아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진보신당이 대림차 정문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는 것은 그래도 이해를 해주겠다. 그런데 천막 옆에 진보신당 차는 왜 세워두는 것이냐. 그거 아주 보기 안 좋다. 그리고 여영국은 왜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민노당 보고 연대를 하자니 말자니 그딴 소리를 하는 거냐. 하려면 자기들만 잘하면 되지.'

저는 이 소리를 듣고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리는 다른 곳에서도 들었습니다. 바로 대림차 사장이 하는 소리와 똑같았습니다. 대림차 사장도 진보신당 이승필 위원장에게 말했답니다. '아니 왜 하필 여기 와서 천막농성을 하시는 겁니까? 그리고 그 진보신당 트럭은 왜 그 옆에다 세워두시는 겁니까?'

천막 옆에 세워진 진보신당 탑차.


아무튼 이게 현실입니다. 민노총이 민노당과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반분된 것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 갈라진 배경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모든 걸 무시하고 통합만 주장하거나, 전술적 연합을 제안하는 것은 정치적 쇼맨십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런 현실을 개선하는 것부터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은 결국 하지 않았다. 괜히 얼굴을 맞대고 앉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매우 비정치적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진심이든 의전이든 나름 예의를 차렸다면, 나도 응당 그에 합당한 행동을 하는 게 옳다. 그리고 여 위원장의 부탁도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존경받아 마땅한 대선배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로라도 내 심정을 밝히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여 다시 심중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밝히기로 했다. 그리고 글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보다 생각할 시간이 충분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기회도 그만큼 많아지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내친 김에 글 서두에 권영길 의원과 민노당에 대한 불만도 슬쩍 담았다.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분위기에서는 결코 양당의 화합적 미래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은 지독한 위선이란 사실이다. 그러나 진심을 담아 한마디만 더 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그래도 문 대표님. 자주 만나십시오. 우선은 대림에서 자주 만나십시오. 양당의 이해를 떠나 당장 정리해고 문제가 심각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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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7일, 정리해고에 맞서 파업 중이던 대림자동차 노조원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이날 오후 7시 회사 정문에서 집회를 열고 있던 조합원들에게 계속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집으로부터 해고통지서가 날아왔다는 소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직 자기가 정리해고 대상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고 있던 조합원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집에 혼자 있던 초등학생에게 해고통지서 전달, “네 아빠는 해고야!”

그리고 잠시 후, 술렁임은 분노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조합원이 일어서서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다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절규하듯 외쳤습니다. “이게 도대체 사람이 할 짓입니까? 이건 개, 돼지보다도 못한 놈들 아닙니까?” 그의 입에서는 개새끼 소리가 서슴없이 나왔습니다.

그도 해고통지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직접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내로부터 전화를 받을 때까지도 자기가 정리해고자 명단에 이름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아내가 해고통지서를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의 아내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보태야하기 때문에 집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해고통지서는 어린 아이들이 받았습니다. 집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더 어린 아이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회사 관리자들이 방문하여 초인종을 눌렀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무서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글쎄요, 왜 무서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아이들에게도 직감 같은 게 있었을까요?

그러자 대림차의 관리자들은 발로 문늘 쾅쾅 차며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우리는 너의 아빠 회사에서 나왔다. 어서 문 열고 회사에서 보내는 통지문을 받아라. 안 그러면 큰일 난다.” 겁이 난 아이들이 문을 열자 그들은 대뜸 봉투를 내밀며 “해고통지서다. 꼭 전달해야한다” 하고는 떠났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울고불고 난리가 났음은 물론입니다. 

울먹이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고, 엄마가 도착했을 때 집은 울음바다가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아내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합원이 ‘개새끼들’이라고 욕을 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순박한 대응일지도 모릅니다. 파업현장을 지키고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개새끼들이라고 욕을 하는 게 전부였지만, 그의 마음속에선 칼 가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면 제 귀가 너무 과격한 것일까요?
 

해고통지서에 무너진 세쌍둥이의 꿈

그러자 또 다른 조합원이 격앙된 얼굴로 자기 사연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세쌍둥이의 아빠였습니다. 이번에 세쌍둥이는 나란히 수능시험을 봤는데, 성적이 아주 좋아서 명문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집안의 기대가 크다고 합니다. 그런데 날벼락을 맞은 것입니다. 그는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눈앞이 캄캄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사연도 있었습니다. 한 조합원은 회사 사택을 금년 초에 분양받았습니다. 회사가 구조조정 안으로 회사 사택을 매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걸 샀습니다. 3600만 원에 샀는데, 3200만 원이 빚이라고 했습니다. 그 빚은 은행 담보대출이었고, 회사가 보증을 섰다고 했습니다. 그는 황당해했습니다. “난 받을 퇴직금도 한 푼 없을 거 같아요.”  

정말 황당하지 않습니까? 회사 사택을 분양받도록 해놓고선 정리해고라니. 빚을 내 회사의 구조조정 사택을 분양받은 사람을 해고해버리면 도대체 무슨 돈으로 빚을 갚으라는 말일까요? 설마 그의 퇴직금을 노리고 집장사를 한 것은 아니겠지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는 대한민국이 우리나라 맞습니까?  

다른 한 분의 사연도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그는 대림자동차에 입사한지가 27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는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입사 9년 만에 해고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9년 만에 복직했는데 그로부터 9년 만에 다시 해고됐습니다. “강산은 10년 마다 변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9년마다 세상이 변하네요.”

허탈하게 웃는 그의 얼굴엔 이미 깊은 주름이 패어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를 놀라게 한 것은, 아이들만 있는 집에 쳐들어가 문을 차며 해고통지서를 전달해 울음바다를 만든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병에 걸려 중환자실에 입원해있는 환자를 직접 찾아가 해고통지서를 떡하니 전달했다는 사실입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던 그 분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중환자실에도 전달된 해고통지서, 이러고도 기업 입장에서도 생각해보시라?

또 있습니다. 회사에서 일하다 다쳐 공상으로 치료를 하고 있던 종업원에게도 해고통지서는 어김없이 전달되었습니다. 회사를 위해 뼈 빠지게 일하다 다친 그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요? 회사 일을 하다 다친 그가 산재치료 대신 회사가 원하는 대로 공상처리해서 치료를 하던 중에 받은 해고통지서를 그는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대림자동차는 전체 종업원 665명 중에 293명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발표한 다음 꾸준하게 명퇴 압력을 가해 이날 현재 184명으로부터 이미 명퇴서를 받아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60명 1차 정리해고자 명단을 통보한 것입니다. 60명 중 58명은 노조원이며 1명은 관리자, 1명은 공상휴직자입니다. 조합원 중에는 중환자실 환자도 1명 있습니다.

제가 몇 차례 대림자동차 대량 정리해고와 관련한 글을 올렸더니 어떤 분이 댓글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기업의 입장에서도 생각을 해보시지. 참 이런 글을 읽으면… 할말 없음.” 저는 그분에게 정리해고를 직접 당한 당사자들의 심정을 들어보시고서도 역시 그런 생각이 드시는지 물어보고 싶군요. 지금도 같은 생각이신가요?

당장 죽어나가는 사람들에게 기업 입장에서도 한번 생각해보라고요? 

ps; 방금 대림자동차 정문에서 3주째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진보신당 경남투쟁단장 여영국씨의 말에 의하면, 한 조합원의 집에도 관리자들이 찾아와 해고통지서 수령하라며 문을 차고 하는 통에 집에 있던 여학생이 놀라 농성 중이던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울고불고 했다는군요. 내 참… 어이 상실입니다.

일부러 그러라고 시킨 것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한 나라의 사람들입니다. 정리해고자들의 마음을 아는지 지금 이곳은 오늘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하늘도 해고노동자들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Posted by 파비 정부권

제목이 좀 거시기 하군요. 맛있는 파업? 그런 것도 있었나? 이 글을 보시는 독자들 중에선 이렇게 화를 내시는 분도 있으시겠지요. "맛있는 파업이라니. 파업이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하는 것이다. 파업은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는 비장한 결의가 없이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뭐? 파업이 맛있다고?"

네, 맞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맛있는 파업도 있답니다. 아래 사진들을 감상하시고 난 다음 이야기를 계속 나누기로 하시죠.

대림자동차 노조지회장님이 숯불에 조개를 굽고 있습니다. 대림차 지회장님은 참 부지런 분이었습니다. 자기는 먹지도 않고 이렇게 지원 나온 외부 사업장 조합원들을 위해 고기를 굽고 술 부어 주고 청소하고 하느라 늘 바쁘셨습니다.


조개가 맛있게 보이시죠? 이 조개는 어느 조합원이 다이빙해서 잡아온 것이랍니다. 그러니 신선도야 두말 하면 잔소리겠죠?


큼지막한 키조개도 있고요, 전복도 구워 먹었답니다.


숯이 모자라면 이렇게 삽으로 보충합니다. 숯을 넣을 동안 들어낸 석쇠에 놓인 빠알~간 삼겹살이 살짝 보이시죠?  


이분들은 쌍용차 정리해고 노동자들입니다. 지원 방문 왔다가 이렇게 맛있는 거 많이 얻어먹고 간다고 좋아했답니다. ㅋㅋ


자, 삼겹살과 조개만 구워 먹으면 배탈이 날 수 있습니다. 이번엔 싱싱한 생선회 맛을 볼 차례입니다. 회를 뜨시는 분은 대림차 노조지회 상집간부입니다. 아마도 정리해고 1순위가 아닐까 싶네요. 그러나 이분, 회 뜨는 솜씨를 보니 정리해고 되도 살 길은 있을 거 같습니다. 횟집 열면 되겠어요. 아니면 트럭 하나 사서 생선 실고 다니며 회만 쳐서 팔아도…


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요? 알겠습니다. 그러나 아무튼 이분 회 치는 솜씨가 거의 프로급이었습니다. 그렇게 빠른 칼잡이를 저는 아직 본 적이 없습니다. 마산 어시장 생선회 골목의 아지매들도 그렇게 빠르지는 않았답니다. 다들 아시죠? 회 맛은 칼잡이의 칼질 속도에 비례한다는 사실….  

아무튼 대림 노조에는 생선회 칼잡이들뿐 아니라 바다 물 속에 들어가 조개며 전복을 따거나 돔이나 노래미 같은 생선을 잡아오는 진짜 어부 뺨치는 어부들이 참 많았습니다.  


잘 먹고 난 다음날 아침은 컵라면으로 때운 우리에게 반가운 소식이 왔습니다. 물메기탕을 끓였으니 먹으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메기탕, 식초 몇 방울 떨어뜨리니 시원한 맛이 한마디로 쥑인다~ 되겠습니다. 물메기탕을 먹기 전에 물메기 회무침을 만들어 먹었는데, 캬~ 그야말로 홍콩 가는 맛이었는데,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너무 맛있어서 사진 찍어야겠다는 생각도 잊어버렸다니까요.   

다음날은 충남 대전에서 발레오공조 노동자들이 지원 방문을 왔습니다. 발레오는 중국 상하이자동차가 쌍용차를 먹튀한 것과 똑같은 짓을 벌이고 있는 프랑스의 다국적 자본입니다. 발레오 노동자들은 전원 정리해고 당했습니다. 발레오 자본이 단물을 다 빨아먹고 난 다음 회사를 정리했기 때문입니다. 쌍차사태의 복사판이죠.

발레오 노동자들이 오자 이번엔 환영의 표시로 낙지와 꼴뚜기들이 숯불 위에 올랐습니다. 지글지글 하는 소리만 들어도 입안에 군침이 돌았습니다. 이런 거 못 먹어보셨죠? 이날은 특별히 50여 명의 발레오노동자들을 위해 대림자동차 노조지회가 나무를 이용해 술상까지 만들었습니다.
  

낙지가 열심히 익고 있습니다.


여기 낙지를 굽고 계신 분은 진보신당 경남도당 전 부위원장입니다.


자, 구경들 잘 하셨습니까? 어쨌든 <맛있는 파업>이 맞기는 맞죠?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아무리 생사의 갈림길에 선 파업의 현장이라지만 잘 먹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당장 10년, 20년을 일해 온 일터에서 쫓겨나야 하는 속마음까지도 맛이 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곳 천막농성장을 지키고 있는 저도 실은 그분들의 쓰라린 속마음까지야 어찌 알겠습니까. 직접 당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쌍용차 노조원들이 왜 그토록 처절하게 싸워야 했는지 그 속에 들어가 보지 않고서야 어찌 그 마음을 다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회사는 어제 정리해고를 단행했다고 하는군요. 우편물을 우선 각 가정으로 발송했다고 하던데 아직 결과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58명이라고 하지만, 293명의 정리해고 인원을 채우기 위한 작업은 계속 되겠지요. 다름 아닌 살인 작업 말입니다. 회사는 정리해고자 명단을 게시판에 공고하려고 했다가 철회했다고 합니다.

너무 비인간적이란 비난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저도 처음 그 소리를 듣고 누구 머리에서 나온 발상일까 매우 궁금했었답니다. 말하자면, 사형수 명단을 떡 하니 대로변에다 게시하는 것과 같은 짓이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기를 바랐는데, 철회했다니 아쉽군요. 악랄한 대림자본의 비인간적 면모를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입니다.  

노조지회장님은 무엇 때문에 그걸 막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놔두시지…
Posted by 파비 정부권
우선 이런 글을 쓰게 된 점에 대해 매우 유감입니다. 저는 오마이뉴스가 진보적인 언론으로서 그 기능을 착실히 해왔다고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사실에 대해 부정하지 않습니다.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의 말처럼 진보언론이란 도대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저의 생각이지만, 오로지 있다면 올바른 언론과 그렇지 못한 언론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어떻든 오마이뉴스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입장을 가지고는 있습니다.

대림자동차의 대량 정리해고와 이에 맞서는 노조의 파업에 대해 상세히 보도를 해주는 오마이뉴스에 대해선 매우 고맙기까지 합니다. 사실 이런 보도를 조중동이 제대로 해줄리 없습니다. 지방 방송사에서도 그저 일회성 보도로 그치는 실정에서 오마이뉴스가 집중적으로 살인적인 대량 정리해고 사태에 대해 보도를 해주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도 대단히 유익한 일입니다. 정리해고가 국민경제에 미치는 파장을 고려할 때 오마이뉴스의 태도는 정론이 갈 길이라 생각합니다.
 

진보신당 노동탄압저지 경남투쟁단 천막농성 돌입 기자회견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이 유감은 저로서는 매우 가슴 아픈 것입니다. 이 유감이 생기게 된 근저에는 종파의 뿌리 깊은 독소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신문기자도 인간이며 그 중에서도 지식인에 속합니다. 신문기자도 양심을 갖고 있으며 저마다 쫓는 신념이 있을 겁니다. 호불호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저는 어떤 신문기자가 어떤 사물에 대해 어떤 관점이나 어떤 노선을 가지고 기사를 작성하는 데 대해선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왜곡하거나 그리하여 진실을 호도하는 것에 대해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저는 전에 민중의소리에 대해서도 이런 뜻으로 유감을 표한 일이 있습니다. 민중의소리는 지난 국회의원 보궐선과와 관련하여 의도적으로 기사에서 사실관계를 삭제해서 보도하는 태도를 많이 보였습니다. 진보신당과 조승수 의원에 대한 이야깁니다. 민중의소리는 조승수 의원의 기사는 의도적으로 빼거나 왜곡하여 보도하기를 즐겨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조선일보의 행태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도 그와 똑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제 눈에는 그는 매우 종파적인 듯이 보입니다. 제가 그를 종파적인 기자라고 낙인찍는 것은, 그가 자기와 사상이나 신념이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과는 매우 친하게 지내면서 그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만을 골라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와 사상이나 신념이 비슷하지 않은 사람은 외면하거나 왜곡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진실인 것처럼 보입니다. 

대림자동차가 파업에 돌입하자 제일 먼저 동조 투쟁에 돌입한 것은 진보신당 경남투쟁단이었습니다. 11월 11일 오전 8시, 대림자동차 정문에 천막농성장을 설치하고 10시 30분에 무기한 천막농성 돌입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이 기자회견장에는 경남도민일보 등 지역 신문사와 MBC 등 방송사도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오마이뉴스 기자는 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오려고 했으나 조금 늦었을 수도 있습니다.

민생민주회의 대람차 정리해고 반대 기자회견. 기자회견의 주축은 민노당과 민노총이다.


그러나 기자회견이 끝나자 막 도착한 그는 11시 30분에 열리는 민생민주경남회의 기자회견장에만 참석하려는 것이었음을 누구나 알 수 있게끔 행동했습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조금 늦었더라도 왜 천막농성을 시작했는지, 기자회견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탓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도 그의 자유의 영역에 속하니까요. 하나의 정당이 3주일 동안이나 노상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고 있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탓할 수도 없습니다. 그건 조중동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러나 어제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를 보고선 도저히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사의 제목은 "대림자동차 정리해고에 왜 지역사회는 가만있나"였는데 기사를 읽어본 저는 실로 착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었습니다. 기사에서 말하는 지역사회란 창원시장과 시의회 등 관료사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가 지어낸 말도 아니며 민주노총과 민생민주경남회의가 보도자료를 통해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목만 보는 사람들로서는 마치 대림차의 정리해고에 민생민주회의를 제외한 지역사회 전체가 침묵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사회에는 진보신당을 비롯한 민노당, 민주당 등 정치세력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진정 그렇습니까? 앞에서도 말했지만 진보신당은 대림차 지회가 파업에 돌입하자마자 즉각 동조 무기한 천막농성에 들어갔습니다. 민노당과 민주당은 아직 별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지는 않지만, 조만간 그들도 투쟁에 동참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태클을 걸자면, 마치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것이 창원시장이나 시의회인 것처럼 호도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매우 불쾌합니다. 지역사회라고 하지 말고 그냥 "창원시장과 시의회는 왜 가만있나?" 라고 했다면 좋았을 걸 했다는 생각입니다. 민생민주회의와 민노총이 그런 식으로 보도자료를 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핑계일 뿐입니다. 사용하는 단어의 파장에 대해 고민하고 조정하는 것도 기자의 역할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님께서는 제가 제목에 "오마이뉴스 대림차 파업보도, 조중동 닮았나?"라고 적은 것을 과민반응이고 지나친 아전인수에 편협한 종파주의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종파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이 주로 종파적인 행동을 더 많이 하더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금속노조 경남지부 회의를 대림차 지회에서 하는데 대림차 지회 지도부가 진보신당과 친하다고 해서 아예 안 오는 분들도 일부 있다는 것입니다.

천막농성장을 만들고 있는 김창근 전 전국금속노조 위원장. 그는 진보신당 당원이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공장 정문에서 "개새끼들" 하며 화를 내는 어느 대림차 지회 간부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물론,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오해의 근저에는 오래된 종파의 뿌리가 독소처럼 퍼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혹시나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님께서도 그 독소의 독한 향기에 취하신 것은 아닌지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디까지나 근본은 종파란 뿌리의 탓이지 윤 기자님의 탓은 아니겠지만 말입니다.   

어려울 때는 모두 함께 해야 합니다. "어깨 걸고 나가자!"란 말을 말만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게 단결입니다. 말로는 단결을 외치면서 뒤에서는 종파질을 하는 것은 비겁한 짓입니다. 오마이뉴스가 스스로 진보언론이라고 자처한다면, 기사 하나하나에도 배려하는 세심함으로 그런 실천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언론일 뿐 그런 일을 할 수도 할 마음도 없다!" 라고 하면 더 이상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그것도 옳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렇게 오마이뉴스가 듣기에는 심히 거북한 글을 쓰게 된 애초의 이유는 "지역사회가 왜 가만있느냐"는 제목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지만, 종파 문제까지 비약하는 실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아무쪼록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님의 넓으신 아량으로 베풀어주시는 이해를 바라마지않습니다. 아울러 앞으로도 보다 폭넓은 관심과 취재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이런 글을 써올릴 수 있는 것도 오마이뉴스가 비판을 생명처럼 여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란 점을 강조드립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