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태후'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9.13 선덕여왕과 천추태후로 살펴보는 근친혼 by 파비 정부권 (54)
  2. 2009.06.15 천추태후, 강조의 변이 삼각관계 때문? by 파비 정부권 (1)
  3. 2009.06.11 선덕여왕도 색공을 받았을까? by 파비 정부권 (84)

우리는 선덕여왕을 통해 신라가 얼마나 성적으로 개방된 사회인가 하는 걸 알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라민 전체에 해당되는 건 아니고 골족, 즉 성골과 진골귀족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개방적인 성풍속은 이미 오래전부터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처용가를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처용가는 개방적인 성풍속과는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사실은 아내의 외도를 눈 감아주는 마음 넓은 처용에 대한 이야기지요. 이에 감복한 도깨비(역신)가 은혜를 갚는 뜻에서 처용의 그림이 붙어있는 집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는 룰을 세웁니다. 그러나 어떻든 이런 처용의 관용은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대목입니다.

신라에 이어 등장한 고려왕조도 성풍속이 개방적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어쩌면 족내혼에 관해선 신라보다 더 발달했을지도 모릅니다. 고려왕실의 족내혼은 왕씨 정권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려 4대 임금 광종은 족내혼을 권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지방 호족세력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근친혼을 통한 결속은 필수였을 것입니다. 

엊그제 <선덕여왕>에서 비담과 덕만공주의 혼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성공하지 못한 문노의 계책이었지만, 족내혼에 관한 좋은 예시가 될 수 있겠습니다. 비담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진지왕과 도화녀의 아들인 비형과 실존인물 비담의 합성모델로 진지왕과 미실 사이에서 난 아들입니다. 즉 진평왕과는 사촌지간이란 얘기죠. 덕만공주에게는 5촌 당숙이 됩니다.  

우리나라 민법에는 8촌 이내의 친족은 결혼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4촌 이내의 친족이 아니면 결혼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본법으로 말하면 지금이라도 덕만과 비담은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불법입니다. 2005년 이전에는 동성동본간 결혼도 불법이었습니다. 이런 법외혼 관계는 부정기적인 정부의 특별법을 통해 구제받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이 민법규정(동성동본 금혼법)에 대해 위헌심판제청이 일어나자 유림에서는 "동성동본금혼제는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단군건국초부터 전래되면서 관습화된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으로서 전통문화의 하나" 라고 주장했지만, 최근 드라마 천추태후나 선덕여왕을 보면 이런 주장들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어쨌든 고려시대까지도 근친혼은 불법이 아니었으며 위에서 말한대로 권장되기까지 했습니다. 신라시대는 1부1처제 사회였습니다. 물론 고려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왕은 달랐을 것입니다. 왕은 나라를 통치하지만 한편 자손을 번창시켜 왕실을 안정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왕들은 여러 명의 부인을 두는 것입니다. 미실의 경우에 색공을 드는 여인이란 특수한 신분을 빼면 그녀도 1부1처제의 원칙에서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만약 미실이 그녀의 계책대로 황후에 올랐다면 어땠을까? 이건 좀 복잡한 문제입니다. 그랬다면 세종과는 이혼해야 되겠지요. 아무리 미실이지만 두 사람과 결혼관계를 유지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상대는 일국의 황제입니다. 미실과 설원공의 관계는 단지 연인관계일 뿐입니다. 미실과 설원공의 사이에서 난 보종은 실제 친자관계를 인정하여 미실의 아들로 인정 받습니다만, 설원공은 그저 연인일 뿐입니다. 세종이 묵인하고 있을 뿐이죠. 기분 나쁘면 이혼할 수도 있겠으나, 이사부 장군의 아들 세종은 감정보다는 권력을 택했습니다.

어쩌면 미실보다 세종이 더 무서운 사람입니다. 아니라구요? 멍청해서 그렇다구요? 음,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렇습니다. 하긴 드라마에서 세종과 하종 부자는 좀 멍청하게 그려지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욕심은 배밖에 나와 왕이 되고 싶어 안달입니다. 다 미실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하여간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대체로 멍청합니다.

일본의 경우에도 왕족은 철저하게 족내혼을 통해 혈통을 보존합니다. 현 아키히또 일왕이 역사상 최초로 왕족 외의 여자와 결혼했다고 해서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다는 사실은 앞서 제 블로그에서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이같은 족내혼 또는 근친혼은 최근 들어,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2000년대 들어 TV사극에 자주 등장합니다.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그리고 가장 최근엔 천추태후, 이 천추태후는 그야말로 근친혼을 다룬 드라마라 할 만큼 본격적이고 노골적이었습니다. 사촌형제들이 결혼을 하거나 숙질 간에 혼인을 하는 예는 허다한 일에 속합니다. 심지어 자매가 동시에 왕후로 간택되어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경종에게 시집 간 천추태후와 헌정왕후가 그렇습니다. 

경종과 이들 두 자매는 사촌지간입니다. 경종이 죽자 헌정왕후는 숙부인 왕욱과 연애를 하게 되고 그 사이에서 아들을 얻게 되는데 이가 곧 대량원군입니다. 그리고 이 대량원군이 강조의 정변으로 실각한 목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데 바로 현종입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이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왕욱과 헌정왕후는 결혼한 사실이 없습니다. 그들 두 사람은 연인었지만, 부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왕실은 그들 사이에서 난 아들을 왕족으로 인정하여 대량원군이란 칭호를 내리고 마침내는 왕좌에까지 앉혔습니다. 법도보다는 혈통을 중시한 것입니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법도 위에 신국의 도가 있다." 김대문의 조부인 예원공은 유학에 심취하여 근친간 결혼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의 모친이 타이르며 한 말입니다. 신국의 도. 도대체 이 신국의 도란 무엇일까요? 예원의 모친이 말한 바처럼 인간의 도리보다 위에 두었다는 것은 국가의 존망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제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 <천추태후>에서는 목종이 물러나고 현종이 등극했습니다. 그리고 현종이 결혼을 하게 되는데요. 선대왕인 성종의 딸과 혼인을 합니다. 성종으로 말하자면 현종의 어미인 헌정왕후의 오라비이니 성종의 딸은 모계로 보면 4촌지간입니다. 그러나 현종의 아비 왕욱은 성종과 헌정왕후의 숙부가 되니 부계로는 5촌 당숙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국혼으로 다시 실권을 잡은 성종대의 경주 유학파들은 여세를 몰아 천추태후를 탄핵하며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 사유가 장히 헛갈립니다. 천추태후가 사통을 하였다고 하지만 그들이 세운 현종 임금 역시 천추태후의 동생인 헌정왕후가 사통을 하여 낳은 혼외 자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현종은 결코 왕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지요. 

드라마가 역사를 각색하다 보니 일어난 혼선이라고 보여집니다.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역도로 몰아 처단하는 것으로 끝냈다면 간단한 것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어쨌든 고려시대에도 신라의 신국의 도와는 좀 다르겠지만 그 비슷한 사상이 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근친혼도 결국 역사의 산물이었다, 이런 말입니다.

천 년도 훨씬 전의 일을 이해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당시에는 친형제 자매가 아니고선 혈족이란 유대감도 별로 없었을지 모릅니다. 삼촌이니 사촌이니 하는 개념조차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개념들보다는 신국의 도가 우선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대체 그 신국의 도란 무엇이었을까요?  

근친혼에 '도'라는 거창한 의미까지 부여한 걸 보면 어떤 특별하고 심오한 사상이 숨어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만.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KBS사극 『천추태후』가 드디어 막판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습니다. 영원히 천추태후의 심복으로 맹목적 충성을 다할 것처럼 보였던 강조와 천추태후 사이에 이상기류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공공연히 정인임을 강조하며 궁궐에서 부적절한 관계―물론 어디까지나 요즘의 시각으로―를 시작하자 강조의 눈에서 불이 튀기 시작한 것입니다.


단 한 번도 천추태후의 명을 거역한 적이 없던 강조는 김치양으로 인해 태후와 각을 세우게 됩니다. 태후 또한 그런 강조를 절대 용인할 수 없다며 섭섭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이미 태후는 김치양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버린 상태입니다. 사랑에 눈을 뜨게 되면 도리어 눈이 멀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열여섯 어린 나이에 경종과 결혼하고 일찌기 과부가 된 태후에게 김치양과의 사랑은 절실한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처음으로 남녀 간의 정을 알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MBC드라마『선덕여왕』에서도 보고 있지만, 당시는 성풍속이 매우 개방적인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고려속요 등에 묘사된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드라마에서 김치양과 강조는 각색이 심한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왜곡된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실제 인물이면서도 거의 가공의 인물인 것처럼 시청자들에게 보여 지고 있습니다. 특히 김치양은 마의태자의 손자이며 신라의 부흥을 위해 복수의 칼을 가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실상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패서지역 일대의 호족이었으며 천추태후의 외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애정행각도 근친간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강조는 어떻습니까? 사실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강조입니다. 아시다시피 강조는 《강조의 정변》이란 매우 중대한 역사적 사건의 중심인물입니다.


강조의 신변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려진 기록은 없습니다. 일설에는 그가 황해도 신천지방 호족 출신이며 태조왕건의 왕비인 신주원부인(신주는 신천의 옛 이름)의 집안 동생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쨌든 드라마에서처럼 발해유민이며 어린 시절의 황보수를 만나 천추태후의 가신이 되었다는 것은 극을 전개시키기 위한 허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강조가 누구입니까? 그는 1009년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등극시킨 인물입니다. 우리가 국사책에서 ‘강조의 변’이라 배운 역사적 사건을 일으킨 인물입니다. 김치양 일파가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사이에서 난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옹립하려하자 목종은 서북면 도순검사로 나가있던 강조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군사를 이끌고 온 강조는 거꾸로 목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옹립한 다음 김치양 부자를 죽였으며 천추태후는 귀양 보냅니다. 결국 양국공으로 폐했던 목종을 죽이고 왕실의 부패를 척결하고 관제를 개편하여 명실상부한 권력의 1인자가 됩니다. 이에 거란은 이듬해 강조를 벌한다는 구실로 40만 대군으로 두 번째로 고려에 침입하게 되지요.


강조는 거란의 대군을 맞아 용감하게 싸웠으나 패하여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거란의 성종은 강조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면 목숨을 살려주겠노라고 하였으나 강조는 이를 거부하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를 두고 보면 임경업 장군이나 삼학사에 뒤질 바 없는 충절입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역사는 강조를 역도로 폄하하고 있습니다.


왕을 죽였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뛰어난 자질과 나라를 향한 충성심을 가졌다 하더라도 왕을 죽인 자는 역적이기 때문입니다. 왕과 충신들을 난도질하고 정권을 찬탈한 조선왕조도 역시 정국이 안정된 후에는 같은 태도를 취하였으니 아이러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선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량원군을 주축으로 하는 세력들이 역모를 일으켰으며 이에 천추태후(혹은 목종)가 강조에게 구원병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강조는 김치양 세력(천추태후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세력)과 대량원군 세력(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신라계)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고 마침내 경주세력의 편에 서게 됩니다. 이유는 막강한 실권을 휘두르던 김치양을 도와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저는 후자의 해석이 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종이 죽고 난 이후 성종과 목종 대를 거치면서 패서지역과 경주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세력 간에 심각한 권력투쟁이 벌어졌다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역사적 정황들로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경주세력(신라계)은 유학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성종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목종이 등극하면서 천추태후가 실권을 잡자 나라는 급변했습니다. 패서인들은 북벌을 중시했으며 그 결과 서경을 우대하고 경주를 낙랑군으로 강등하는 조처를 취했습니다. 나라의 요직을 패서인들이 독점하고 경주세력은 소외되었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계들이 대량원군을 중심으로 모반을 꾀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대량원군은 태조왕건의 손자이며 경주원군의 아들입니다. 또한 경주원군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조카가 되니 현종이후로 고려는 신라의 외척에 의해 왕통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무신정권이 등장할 때까지 신라계가 정권의 중심에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입니다. 삼국사기를 지은 사람도 신라계인 김부식이었지요.


유학을 중시한 신라계들은 고려가 중국화해야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 때문인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는 사대적인 요소가 많다는 비판을 많이 받습니다. 그래서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 그건 그렇고, 그런데 우리가 대충 알고 있는 역사와 드라마는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저는 처음에 이 드라마를 보면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천추태후를 짝사랑하는 순진한 ‘꼬봉’ 강조를 보면서 ‘저자가 앞으로 어떻게 정변을 일으키고, 왕을 죽이고, 새 왕을 등극시킨다는 것인지’―물론 제가 할 걱정은 아닌 줄 압니다만―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걱정되던 강조가 드디어 몸을 일으켰습니다.


모든 대신들이 천추태후에게 떨면서 몸을 낮추는데 유독 강조만이 뻣뻣하게 김치양을 내칠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자 태후는 강조를 따로 불러 달랩니다. “내가 그대를 그리 보지 않았건만 대체 왜 이러는 것이오?” 그러면서 덧붙입니다. “내가 그대가 왜 그러는지 속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오. 그러나 그 이유를 말하지는 않겠소. 만약 그리한다면, 그대와 나는 영원히 멀어질 것 같기 때문이오.”


그냥 대충 어제 본 드라마의 대사를 옮긴 것이지만, 크게 틀리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이 말을 듣고 천추궁을 뛰쳐나오는(!) 강조의 악 다문 입술이 제가 보기엔 이빨을 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강조의 정변을 예고하는 대목이지요. 그러나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서글퍼지더군요. 두 가지 이유에서 말입니다.


하나는, 천추태후가 기껏, 결국은 이렇게 허망하게 애정행각이나 벌이다가 쫓겨나게 되는 허접한 여인이었던가, 원래의 기획 의도는 강성한 고려제국을 꿈꾸며 북벌을 주도하던 여걸 천추태후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역사의 기록을 무시할 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의 기록이란 어디까지나 승자의 역사입니다.


승자의 역사란 그들의 입장으로 오도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므로 늘 행간을 잘 짚어 읽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제 드라마에서, 대신들이 김치양과의 관계를 단절할 것을 주청하자 천추태후는 이렇게 추궁했습니다. “왜 남자들은 되고 여자들은 안 된단 말인가? 그대들은 몇 명씩의 축첩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나는 안 된단 말인가?”


저는 이 대사를 들으며 천추태후가 무슨 여성단체 대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니 아주 지극히 온당한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 시대에 천추태후가 그런 말을 했을까?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사별한 태후가 새로운 정인을 가지는 것이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을 퇴위시키고 현종을 즉위시킨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천추태후의 사생활을 비판한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들은 태후와 정적관계이며 유학을 중시하는 경주세력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후일 ‘부적절한 관계’의 씨앗인 대량원군을 왕으로 추대합니다. 


대량원군은 경종의 비인 헌정왕후가 경종 사후에 경주원군과 사통―사통이란 쉽게 말하자면, 간통이죠―하여 낳은 아들인데 왕으로 추대되어 현종이 되고 이후 고려의 왕통은 그의 자손들이 잇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어제 방영된 천추태후의 대사는 아주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태후의 행실이 부정하다고 생각했다면, 대량원군도 절대 왕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강조가 결국 정변을 일으키는 이유가 김치양과의 삼각관계 때문이란 뉘앙스 때문입니다. 강조가 천추궁을 나오면서 악 다문 입술에서, 불을 튀기는 눈빛에서 타오르는 질투심으로 인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껏 드라마를 보면서도 ‘이’ 강조가 ‘그’ 강조가 맞는지 미심쩍어했지만, 어제 비로소 ‘이’ 강조가 ‘그’ 강조임을 알았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천추태후와 김치양, 강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 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강조를 집어넣어 삼각관계를 만들었어야 했다는 고충도 이해는 갑니다. 그리하지 않았다면, 마지막에 가서야 느닷없이 강조가 칼을 들고 나타나야 되는 부자연스러움이 생기겠지요. 또는 심복이었던 강조에게 태후가 당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불가피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떻든 고려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인 천추태후와 강조, 이 두 사람의 원래 모습이 크게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원래 모습이 어떤 것인지는 우리 모두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애초에 드라마의 기획의도가 만들려고 했던 그런 모습으로―극을 전개시켜 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천추태후도 좋아하고 강조도 좋아하는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겨우 삼각관계로 인한 애정행각 때문에 두 사람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요즘 선덕여왕이 화제다. 더불어 화랑세기에 대한 관심도 대단하다.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를 베껴 썼다고 주장되는(!) 필사본 화랑세기는 그러나 위작논란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부끄러운(?) 조상의 역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라거나 “현재의 시선으로 당시를 재단하는 오류”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미실이란 여인은 거의 모든 풍월주들과 인연을 맺고 있다. 아비가 2세 풍월주였던 그녀는 5세 풍월주 사다함과도 연인사이였을 뿐 아니라 6세 풍월주 세종의 부인이며 동시에 7세 풍월주인 설원랑과도 부부의 연을 맺었다. 세종과의 사이에서 난 하종이 11세 풍월주이고 설원랑과의 사이에서 난 보종은 16세 풍월주가 되었다. 또한 32세 풍월주는 그녀의 원손이다.  


그 외에도 미실은 진흥왕, 동륜태자, 진지왕, 진평왕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신라의 왕들과 관계를 맺고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미실이 매우 문란한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그때의 성풍속이 그러했고 나아가 이를 권장(?)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미실은 색공(色供)을 하는(또는 해야 하는) 신분의 여자였으니 아주 합당한 일이었을 것이다.  


미실의 실제 남편인 세종은 이사부 장군과 왕비의 사이에서 난 자식으로 진흥왕과 어머니가 같다. 미실 또한 진흥왕비의 조카라고 하니 그 관계도를 그려보면 매우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에서 미실을 가운데 두고 미실의 남편이거나 자식들인 진골귀족들이 모여 미실의 혼사문제를 논하는 장면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런 근친상간은 신라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선덕여왕보다 조금 빨리 시작한 천추태후를 보자. 거기도 선덕여왕 못지않은 복잡한 성풍속이 우리를 어지럽게 한다. 천추태후는 태조왕건의 손녀로서 자기와 배다른 오라비인 경종에게 시집을 간다. 그것도 친동생과 함께 경종의 비가 되는 것이다.


경종이 죽자 천추태후의 여동생이며 경종의 왕비였던 헌정왕후는 태조왕건의 아들인 왕욱(경주원군)과 사랑을 하여 아들을 낳게 되는데 이가 곧 대량원군으로 나중에 고려 제8대왕 현종이 된다. 태조왕건 이후 목종에 이르기까지 안정을 찾지 못하던 왕위세습은 현종 조에 안정을 찾아 이후 모든 고려왕들은 현종의 자손들로 채워진다.


그런데 이 현종이 우리시대의 시선으로 말하자면, 불륜의 씨앗인 것이다. 그럼에도 왕족의 혈통이라 하여 원군(태자)의 칭호를 내리고 나중에 왕위에 오르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사부 장군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왕비의 자식이라 하여 전군(태자-왕자-전군으로 이어지는 왕족의 호칭)에 봉해진 세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물론 태종이라 불리는 장군 이사부도 내물왕의 4대손이니 김씨로서 왕족이다.


자, 그런데 내가 오늘 주목하는 대목은 이렇게 신라와 고려를 거쳐 유행했던 복잡한 성풍속도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좀 어지럽긴 하지만, 이해할만 하다. 저 유명한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도 자기가 꿈꾸었던 이데아를 지탱해줄 주요한 장치는 바로 부인공유제라고 하지 않았던가. 통치계급인 철인들의 이기심을 막을 장치로서…


물론 신라 성골-진골 귀족들의 성풍속이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을 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만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구석기시대―사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구석기시대이며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극히 미미한 일부분에 불과하다―로부터 내려온 전통을 이은 것이든 아니면 골품제를 유지하는 수단이었든 말이다.


여기서 내가 궁금했던 것은 색공(色供)이란 제도에 대해서다. 나는 처음에 드라마가 시작될 때 미실이 색공술을 펼친다고 해서 무협지에 등장하는 여마두 정도를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색공이란 왕이나 왕족의 세대세습을 위해 색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색이란 애매모호한 표현은 다름 아닌 섹스를 말함이다.


미실이 바로 색공을 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진흥왕부터 그의 아들인 동륜태자와 진지왕, 그리고 진흥왕의 손자인 진평왕 대에까지 색공을 했다. 그뿐 아니라 진흥왕의 씨 다른 형제인 세종의 정실부인이었으며 자기의 외가 쪽 5촌 아저씨뻘 되는 설원과도 교제하여 아이를 낳았다. 그럼 색공은 여자만 하는 것이었을까? 선덕여왕은 어땠을까?


선덕여왕의 남자관계에 대해서 알아내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신라 말의 진성여왕은 매우 문란하여 황음을 하다 결국 나라를 망쳤다는 기록들이 많지만, 현명한 군주로서 추앙받는 선덕여왕에게 스캔들(?)과 관련한 자료는 찾을 수가 없는 것이 정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음지식-문화원형>편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용수와 용춘은 진지왕의 자식들인데―선덕여왕에게는 숙부뻘이다―선덕여왕을 받들도록 했다. 처음에 용춘이 진평왕의 명으로 선덕을 받들었으나 자식이 없어 물러나고 용수가 받들었다. 역시 자식이 없어 물러났다. 선덕이 왕위에 오르자 용춘이 다시 선덕여왕의 지아비가 되었으나 역시 자식이 없어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글쎄… 확실하지는 않지만, 선덕여왕도 색공을 받았던 것이 아닐까? 물론 여왕에게 색공을 했던 남자들은 모두 성골이거나 진골 귀족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야 왕실의 혈통이 보존되니까… 여기까지다. 더 이상은 알 수 없다. 더 알고 싶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미루어 짐작건대, 그때처럼 개방적인 시대라면 남자왕족이 색공을 받았다면 여자왕족도 틀림없이 색공을 받았으리라 생각된다. 색공이란 제도가 있기는 있었다는 전제하에…
  그런데 과연 드라마에서 그런 내용을 다룰까? 그러지는 않을 것 같다. 요즘 시대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므로.

아 참,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용수와 용춘은 모두 선덕여왕의 언니인 천명공주의 남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천명과 용수(공식적으로는 용춘)의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태종무열왕 김춘추다. 그러고 보면 진평왕의 공주들은 실로 대단한 스캔들의 소유자들이었다. 선덕여왕의 동생인 선화공주는 백제 무왕과 결혼하여 의자왕을 낳지 않았던가.   

생각할수록 흥미진진하다. 과연 이 복잡한 관계를 MBC 드라마는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흐흐흐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