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4.23 곽재우가 신선처럼 살다간 망우정에서 by 파비 정부권 (5)
  2. 2009.04.13 봄소풍서 만난 새하얀 딸기꽃, 이렇게 예쁘다니 by 파비 정부권
망우정(忘憂亭)

망우정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곽재우 장군이 말년에 은거하다 쓸쓸히 생을 마감한 곳이다. 곽재우는 1602년 경남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낙동강을 바라보는 자그마한 언덕 위에 기와집을 짓고 망우정이라 이름 지었다. 이때부터 자신의 호를 망우당이라 하고 세상과 절연한 채 낚시로 세월을 낚으며 신선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의 행적에 관하여 다소 신비화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를 들여다보면 정말 신선이든 도인이든 되지 않고서는 올바른 정신을 유지하며 살기는 힘들었을 것이란 짐작을 해본다.

1592년은 선조가 왕이 된지 24년이 되는 해였다. 역대 조선의 왕들 중에 선조처럼 무능할 뿐만 아니라 시기와 질투로 좁은 속내를 거침없이 드러낸 것으로 평가 받는 왕도 드물다. 

“말짱 도로묵”이란 말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는 선조의 품성이 어떠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전쟁이 일어나자 선조는 왕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피난생활의 곤궁함은 왕이라고 해서 피할 수는 없는 노릇. 매일 올라오는 밥상에는 입맛을 당기는 음식이라곤 구경하기 힘들었을 터이다. 

그런데 어느 날, 참으로 맛있는 생선이 반찬으로 올라왔다. 이름이 묵이라고 하는 고기였는데, 감격한 왕은 그날로 그 고기에다 은어란 이름을 하사했다. 뒷날 대궐로 돌아온 왕이 다시 그 고기를 찾아 먹어보았더니 의주행궁에서 먹던 그 맛이 아니라, 매우 실망한 왕은 이렇게 말했단다. “도로 묵이라 하라!” 그래서 ‘말짱 도로묵’이란 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후로  말짱 도로묵이란 “헛수고 말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선조는 이렇듯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성격이었던 데다가 의심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난세가 되면 영웅이 태어나게 마련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의령 사람 곽재우였다. 곽재우는 남명 조식의 문하생이었는데 조식의 제자들 중에 특히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이 많았다.
 

1789년(정조13년)에 지방유림들이 세운 추모비. 망우정 지붕 너머 낙동강은 세월따라 이리로 흐르다 저리로 흐르다 한다.


곽재우는 다른 장수들과 연합작전으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도 전남 담양 출신의 의병장 김덕령과 합동으로 왜적을 크게 물리친 의령 정암진 전투가 유명하다. 또 1594년에는 이순신, 김덕령과 함께 거제 장문포에서 합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특별히 김덕령과는 서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아주 절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런 김덕령 장군이 역모를 꾸몄다는 무고를 뒤집어쓰고 옥사하고 말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덕령은 감옥에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나와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왜군을 벌벌 떨게 하던 의병장의 마지막은 참혹했다. 김덕령 뿐만이 아니었다. 나중엔 이순신도 옥에 갇혀 사형 직전까지 갔다. 유성룡의 변호로 겨우 목숨을 건진 이순신은 백의종군했다.

김덕령, 이순신과 연합작전으로 큰 전과를 올리며 그들과 우의를 다지던 곽재우에겐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곽재우 장군도 한때 경상감사 김수로부터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던 적이 있다. 김수는 왜군을 피해 도망만 다니던 자였는데, 곽재우가 세곡을 훔쳤다고 거짓 고변을 한 것이다.

결국 초유사 김성일의 장계로 풀려나긴 했지만, 곽재우 장군이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을 모두 마다하고 이곳에 은거하게 된 연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럼 선조는 왜 이토록 전공이 특출한 장군이나 의병장들에게 모질었던 것일까? 후세 사람들은 이를 두고 선조의 소심한 의심병과 공을 세워 민심이 두터워지는 장군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들 말한다. 

의주행궁에서 돌아와 백성들에 의해 시커멓게 잿더미로 변한 경복궁을 바라보는 선조의 심사가 어떠했을까 생각해보면 한편 그럴 듯한 말이다. 그의 눈에는 무력을 갖추고 민심까지 얻은 장수들이 언제든 자신을 권좌에서 밀어낼지도 모르는 위험한 세력이었을 것이다. 말짱 도로묵의 변덕에다 소심한 의심병에 찌든 선조에겐 왜적보다 이들이 더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망우정 편액


   
망우(忘憂)란 근심·걱정을 잊는다는 뜻이다. 곽재우 장군에게 근심 걱정이 무엇이었을까?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의 내용이 선조의 미움을 사 합격이 취소되는 불운을 겪은 이후 출사의 뜻을 접었던 장군은 그러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공으로 무려 스물아홉 차례에 걸쳐 벼슬을 제수 받는다.

이중 열네 번은 고사하고 열다섯 번은 출사하였으나 이마저도 곧 사직하고 마침내는 이곳 망우정에 몸을 숨겼다. 여기서도 끝끝내 사정하는 광해군의 청을 못 이겨 두어 번 임지로 나갔으나 곧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곳 망우정에서 곽재우는 모든 곡기를 끊고 신선처럼 살았다고 한다.  

외손에게 상속된 이 집은 나중에 여현정으로도 불렀다.


곡기를 끊고 사람이 살 수가 있었을까. 물론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아련하긴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위인전에 묘사된 장군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른다. “어느 날 저녁 해가 질 무렵, 손과 발을 깨끗이 씻고 강을 바라보며 장군은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그리고 맑은 술을 한 잔 들이킨 다음 그 술을 다시 귀로 쏟으며 앉은 채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어린 마음에도 장군이 참으로 신비롭게 느껴졌었다. 붉은 옷을 입고 적진을 좌충우돌하던 신과도 같은 존재가 강변에 홀로 앉아 맑은 술잔을 들고 신선처럼 마지막을 장식하는 모습은 고고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오늘 망우정에 올라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은 어쩐지 처량하기만 하다. 

초라한 세칸 짜리 기와집 대청마루 위 편액에 선명한 忘憂亭(망우정), 근심과 걱정을 잊겠다는 저 뜻을 그저 의롭다거나 신비롭게만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떨쳐 일어선 장군들 중에 유독 이순신과 곽재우의 공이 제일”이라고 칭송했다. 그런 장군이 고향인 의령에서 꽤 떨어진 이곳에다 집을 짓고 말년을 보낸 뜻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고 고개를 갸웃거려보아도 짐작하기 어려우니 아직 나는 신선의 경지에 오르긴 틀렸나 보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이 꽃은 딸기꽃이랍니다. 저도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데 너무 예쁘군요. 딸기꽃이 이렇게 예쁘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새하얀 것이 꼭 분단장이라도 한 것 같습니다. 정말이지 이처럼 하얀 빛깔은 처음입니다. 딸기꽃은 그 새하얀 빛깔처럼 마음씨도 곱디 곱기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자동모드에서만 카메라 운용이 가능한 초보 사진사에게도 이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선물했으니 말입니다. 제가 보아도 참 예쁩니다. 
   

하얀 딸기꽃, 꽃이 떨어지면 거기엔 빨간 딸기가 자란다.


우리는 딸기의 그 상큼하고 달콤한 맛만 기억할 뿐 꽃의 노고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딸기의 그 붉은 아름다움만 칭송할 뿐 그처럼 하얗게 빛나는 헌신에 대해선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득 딸기밭에서 발견한 하이얀 빛깔의 딸기꽃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빨간색 딸기가 이렇듯 새하얀 꽃으로부터 왔다는 걸 왜 여태껏 모르고 살았을까요?
 

          
딸기꽃이 이토록 하얗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난 주말이었습니다. 경남여성회(회장 이경옥)는 의령의 한 딸기밭으로 봄소풍을 갔습니다. 물론 저도 따라갔으니까 이렇게 사진을 찍어왔겠지요. 글쎄, 남자라고는 저 말고 다른 어떤 분 해서 딱 두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흑이점이었던 셈이지요. 그러나 그 다른 흑일점과는 인사도 나누지 못했습니다. 온통 여자들 틈에 끼여서 긴장했던 탓인가 봅니다. 정말 불안하더군요. 이거 괜히 따라왔다는…. 

그러나 딸기가 지천으로 널린 딸기밭에 들어서니 긴장감도 봄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비닐하우스 안은 향긋하고 상큼한 딸기 특유의 향으로 가득했습니다. 입에 하나 소쿠리에 하나, 다시 입에 하나 소쿠리에 하나…. 밭에서 바로 따먹는 딸기의 맛과 향이라니… 그 싱그러운 맛을 어떻게 시장에서 사 먹는 딸기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 서너 살배기로 보이는 꼬마아이도 딸기를 따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딸 때는 신이 났는데 막상 바구니가 가득 차니 무거워서 울고 있는 걸까요? 

딸기가 주렁주렁 열린 딸기밭에는 하얀 딸기꽃도 지천으로 피어있었습니다. 꽃이 떨어지면 거기에 또다시 딸기가 열릴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또 이렇게 소쿠리를 들고 딸기를 따겠지요. 잘 익은 딸기를 빨리 따 주어야 새로 꽃에서 나온 어린 딸기들이 영양분을 충분히 받아 먹고 무럭무럭 자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빨갛게 익은 탐스러운 딸기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하얀 딸기꽃은 눈에 잘 안 들어오는 모양입니다. 

꽃은 애처로울 만치 너무나 자그마했습니다. 그러니 주렁주렁 매달린 빨간 딸기들 틈에서 그리 관심을 얻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가만히 앉아 그 자태를 한참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그 하얀 빛깔에서 솟아나오는 진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답니다. 그러고 나서는 아마도 이렇게 탄성을 내뱉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 꽃이 정말 예쁘구나. 어쩜 이리도 하얀 것에서 저리도 빨간 딸기가 나올 수 있는 것일까? ……!”  

바로 아래에 보이는 사진은 수박꽃입니다. 넝쿨 속에 숨어있는 어린 수박이 꼭 호박 같군요.
 
















딸기밭에서 딸기도 실컷 먹고 가져가기도 힘들 만큼 잔뜩 소쿠리며 봉다리에 딸기를 담아둔 사람들은 바로 옆 강변 제방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쑥도 캤습니다. 파릇파릇한 쑥들이 제법 토실토실합니다. 그리고 나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배가 불러진 사람들은 인근에 있는 충익사로 자리를 옮겨 즐거운 한때를 보냈습니다. 

바로 위 오른쪽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별미로 수제비를 만들어 점심에 보탰는데 솥에 수제비 뜯어 넣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수제비 뜯어넣는 일이 무척 재미있었던가 봅니다. 결국 수제비는 많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딸기밭에서 수확일을 하시는 아주머니들에게 드시

뒷편에 보이는 우리나라 최고수령 280년짜리 모과나무

라고 남겨두고 왔답니다.  

충익사는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맞아 백전백승의 전과를 올린 홍의장군 곽재우를 모신 사당입니다. 곽재우 장군은 선조임금이 그 공을 치하하여 수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자신의 호인 망우당을 딴 망우정에서 은거하다 1617년 돌아가셨습니다. 

곽재우 장군은 남명 조식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1585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지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 합격이 취소된 후 관직에 나갈 뜻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 장군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보다 먼저 달려 나갔고 또 임금이 내린 벼슬을 모두 사양했다고 하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좌안동 우함양’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낙동강 동쪽 안동의 퇴계선생과 더불어 낙동강 서쪽에는 함양에 남명선생이 있다는 것을 비유로 표현한 것입니다. 관념적이던 당시 사조와 비교해 실천적인 학풍을 중시한 것으로 평가 받는 남명의 제자들은 임진왜란을 맞아 가장 많은 의병장을 배출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것이 정인홍을 비롯한 남명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북인(동인의 파당)들이 전후에 집권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론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유적지 설명을 여성회 박은미 선생님이 해주셨는데 아이들은 열심히 듣는데 어른들은 그저 건성이군요.
충익사를 다 둘러보고 나서도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아직 버스가 오려면 한 시간도 더 기다려야 한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즉석에서 놀이를 만들어 신나게 놀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이 빙 둘러 서서 자기들끼리 무슨 강강수월래 비슷한 걸 하며 재미나게 놀기 시작하자, 아이들도 저희들끼리 닭싸움을 하며 잘도 놉니다. 요즘 애들도 닭싸움을 할 줄 아는군요.

그리고 나중에는 어른 아이들이 모두 모여 두 편으로 갈라 상대편 풍선 터트리기 시합도 하고 둘이서 풍선을 안고 이어달리기도 했습니다. 아래 보이는 사진은 처음에는 바닥에 신문지를 3장을 깔고 그 위에 팀원들이 올라갔다가 차츰 한 장씩 빼고 올라가는 게임입니다.
  














풍선게임을 하려고 모두들 풍선을 하나씩 불어 만들었는데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풍선이 이리저리 날아가고 아이들은 풍선을 쫓아 달리고 갑자기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 돌발상황이 즐거운가 봅니다. 어쩌면 이런 예기치 못한 돌연한 재미도 야외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자연이 주는 선물이겠지요.

마지막 게임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옷이든 손수건이든 양말이든 무엇이든 모두 벗어 줄을 길게 만드는 팀이 이기는 게임이었습니다. 물론 정해진 시간 내에 말입니다. 어느 팀이 협동심과 동료애가 더 뛰어난지를 겨루는 시합 같기도 했습니다. 길게 늘어져 가는 줄이 재미있었습니다. 참고로 아래 사진에서 그 기다란 줄을 넘어 가는 어린 친구는 양팀 어느 쪽과도 관련이 없는 아이입니다. 지나가기를 기다려 셔터를 눌렀건만 꼬리가 잡히고 말았군요.


















































이제 돌아갈 시간입니다. 사람들을 싣고 갈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출렁다리를 건너가야 합니다. 충익사에서 출렁다리 쪽으로 난 약 2백여 미터의 길에는 붉게 핀 꽃나무가 늘어서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었습니다. 오른편으로 흐르는 강줄기가 시원합니다. 그런데 출렁다리 앞에 오니 건너갈 일이 막막합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한 게 천길 낭떠러지(?)가 바로 이런 건가 봅니다. 그냥 출렁다리가 아니라 ‘공포의’ 출렁다리였습니다. 

저는 원래 고소공포증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망엘리베이터 타는 것도 크게 마음 먹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진퇴양난이군요.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다리 한가운데 서니 마치 다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멋진 사진을 남기기 위해 제일 먼저 다리에 올라온 저는 사람들이 다 지나갈 때가지 바람에 흔들리는 출렁다리에 남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맨 마지막 사진 다리 아래를 자세히 보시면 저 아래 무섭게 흘러가는 강물이 보인답니다.

그 사진에서 출렁다리 아래를 쳐다보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씩씩하게 걸어오시는 분이 또 다른 흑일점입니다. 매우 잘 생긴 젊은 분이었는데 총각인 줄 알았습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 그와는 대화를 한 번도 못해 보았으므로 이름도 성도 모릅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유적지 설명도 해주시고 행사도 진행하시던 그 선생님께서 저에게 소감이 어떠냐고 물어보며 마이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리 대답했답니다. 

“정말 좋은 시간이었고요. 좋은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잘 보살펴 주셔서 감사하고요, 앞으로도 잘 보살펴 주세요.” 이 글을 쓰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여성들은 놀 때도 참으로 생산적으로 노는구나. 딸기 따고, 쑥도 캐고 그리고 곽재우 장군의 호국의 현장 답사도 하고… 아이들에게 교육도 되고, 신나게 잘 놀고…” 뭐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하여튼 딸기꽃이 그렇게 예쁜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답니다. 게다가 그렇게 빛깔이 새하얄 줄은 더욱 몰랐지요. 정말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우리집 냉장고에는 아직도 딸기가 그득합니다. 저와 함께 이 글을 적고 있는 컴퓨터 모니터에서도 딸기 냄새가 흘러나오는 듯하군요. 역시 과일은 딸기가 최고입니다. 아 참, 딸기는 과일이 아니죠, 그럼 채소인가? 딸기가 과일입니까, 채소입니까? 갑자기 헛갈리네요. 빠알간 딸기향에 취했나 봅니다.         파비































【보너스 퀴즈】돌아오는 차 안에서 풀었던 퀴즈 중 몇 문제입니다. 맞추는 어린이에겐 당연히 상품이 증정되었고요. 시간 있으신 분은 한 번 풀어보세요.

1.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켰던 사람은 (       )장군이다.
2. 당시 곽재우 장군이 참여했던 전쟁은 1592년 일본군이 쳐들어온 (    )왜란이다.
3. 곽재우 장군의 호는 (       )이다.
4. 충익사는 경상남도 (    )군에 자리하고 있다.
5. 충익사 내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    )나무가 있다.
6. 주관식 문제 : 곽재우 장군을 왜 홍의 장군이라고 할까요? 
★ 그러고 보니 오늘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날이네요. 1592년 4월 13일.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