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8.10 80년광주로 돌아간 이시대에 "거꾸로 희망이다?" by 파비 정부권 (3)
  2. 2009.02.08 아고라, 니들이 바로 언론이야 by 파비 정부권 (4)
  3. 2008.12.08 석궁테러사건 변호사, 기자와 공동취재하다 by 파비 정부권 (23)
원래 쓰려고 했던 제목은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사IN에서 만들어낸 책, 거꾸로 희망이다>, 이렇게 제목을 잡으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알라딘에서 보내준 이 책을 읽는 동안에 30년 전에나 일어났을 사태가 2009년 오늘에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물론 그 목격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했습니다. 현장에 있지 않아도 현장의 비참함이, 참혹함이, 전쟁 같은 공포가 먹구름처럼 제 가슴을 뒤덮었습니다.
 
거꾸로, 희망이다 - 10점
김수행 외 지음/시사IN북


80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아직은 방송사 언론들이 완전히 죽지 않아서 경찰의 폭력 장면을 여과 없이 볼 수 있다는 것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폭력이었습니다. 국가에 의해서 자행되는 무자비한 폭력, 이 폭력은 합법인지 불법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쌍용차 노조가 진압된 후(모두들 협상 타결로 대타협을 했다고 하지만 제 눈엔 진압입니다) 노조 간부들은 수십 명이 구속 됐습니다. 그러나 무기를 들고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이 포착된 경찰 중 구속된 자가 있다는 기사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엊그제 어떤 진보 인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명박 정권이 민주주의를 역진 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파쇼라고 부르기엔 좀 그렇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그는 제가 속한 진보신당의 지역당 위원장입니다. 그에게 이런 말을 가끔 들은 바가 있긴 했었지만, (평소 그를 존경스럽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이날은 도저히 그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이 파쇼가 아니면 도대체 어떤 때를 파쇼라고 불러야 할까? 그렇게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80년 광주의 봄처럼 꼭 대검과 총으로 시민을 살육해야만 파쇼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나 쌍용차 공장 지붕에서 벌어진 사태는 경찰들이 대검과 총만 안 찼다 뿐이지 80년 광주의 상황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육이 전개되고 있을 때 저는 고등학생이었지만, 우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학교에 잘 다녔고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그렇지 않았던 분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평택에서는 전쟁의 광풍이 휩쓸고 수많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평온하게 살아갑니다. 그리고 정권은 평택의 쌍용차 노조는 폭도일 뿐이며, 이 폭도들을 진압한 것은 국가의 안녕을 위해서 당연한 것이었고, 이제 대한민국은 평온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시나리오는 80년 광주항쟁 때나 2009년 평택 쌍용차사태나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진@김주완 김훤주의 지역세서 세상보기


대한민국은 이명박 씨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후 절망적인 상태로 치닫고 있습니다. 이명박 씨가 스스로 자랑했던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747?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그런 따위는 미국의 보잉사 공장에서나 찾을 일입니다. 이명박 씨가 한 일은 경제를 살린 것이 아니라 경제를 시궁창에 쳐 박은 일입니다. 시사IN이 펴낸 책 《거꾸로 희망이다》에서 김수행 교수는 한국 경제의 현실을 공황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공황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자본주의에 공황은 흑사병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케인스가 등장하기 전에 이 공황은 10년을 주기로 발생했습니다. 양차 세계대전도 실은 이 공황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니, 직접적인 계기였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선진 제국들은 자본주의를 수정해서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는 수정자본주의(혹은 수정사회주의) 정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10 년을 주기로 일어나던 공황을 이연시키거나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 무시무시한 공황에 한국 경제가 빠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만 공황에 빠진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도 공황에 빠진 것입니다. 《거꾸로 희망이다》는 공황에 빠진 한국의 민주주의를 걱정하는 책입니다. 경제가 공황에 빠진 것은 국민이 합심해서 열심히 일하면 헤쳐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황에 빠진 민주주의는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국민이 합심하고 싶어도 합심하지 못하도록 정권이 방해하는 것이 예사입니다.

쌍용차사태에서 우리는 그걸 보았습니다. 대화와 타협으로 상생의 길을 찾도록 이끌어야 할 정부가 앞장서서 대화와 타협에 폭력을 가합니다. 정부와 자본이 책임져야 할 경제공황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면서 "너희들이 죽지 않으면 회사를 살릴 수 없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참으로 비통함을 느낍니다. 많은 국민들 중에 이런 이데올로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도 있겠지만, 도대체 그 죽어야 할 사람들에게 살아나는 경제가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이토록 절망적인 민주주의가 공황에 처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 우리나라의 대표적 지성인 여섯 사람을 또 다른 여섯 사람의 지성인들이 인터뷰하고, 강연하고, 질문하는 형식으로 만들어 낸 책이 바로 《거꾸로 희망이다》입니다. 제일 먼저 이문재 시인이 녹색평론 대표 김종철 교수에게 '생태적 상상력'을 묻습니다. 그 다음 딴지일보 총수 김어준이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에게 '위기의 심리'에 대해 질문합니다. 

정치경제학 전문가인 김수행 교수와 정태인 교수가 '자본의 미래'를, 우석훈 교수가 조한혜정 교수에게 '문화적 상상력'에 대해 묻습니다. 시민운동가 하승창이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와 함께 '대안경제'에 대한 해법을 상상해봅니다. 정해구 교수는 서중석 교수와 함께 '역사의 위기'에 대하여 토론을 벌이고 "역사는 후퇴하는 게 아니라 에돌아갈 뿐"이라는 결론을 끌어냅니다. 책은 대화체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 여섯 차례에 걸쳐 진행했던 강연회를 책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런 만큼 딱딱하지 않습니다. 편안합니다. 연사로 등장하는 열두 사람의 주장도 간결하고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절망적인 현실에서도 이 책의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거꾸로 희망이다!"에 대한 희망이 진실로 느껴지는 듯합니다. 이 글의 초두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책을 읽는 중에 쌍용차 무력 진압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무자비한 폭력에 거의 백기투항하다시피 한 노조와 협상을 벌여 대타협이란 것이 이루어졌습니다.  

분노와 절망으로 숨조차 쉬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인 내게 이 책의 제목은 정말 사치스러웠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거꾸로 희망'이란 말이야!" 정말이지 책을 집어던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숨을 가다듬고 책을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역시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책의 연사들 덕분입니다. 게다가 이 책이 진실로 "거꾸로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살인진압규탄 농성중인 강기갑 의원에게 떠나기를 요구하는 사진속 여인들의 뒷모습에서 측은함보다는 비정함을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아직도 무엇이 희망이라는 것인지에 대해선 정확하게 모르겠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사실은 그렇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희망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 글 앞에 포스팅했던 <쌍용차아내모임, "제발 그들을 죽이도록 내버려 두세요">에서 보았듯이 산 자의 아내들이 쌍용차 정문에서 돗자리를 깔고 살인진압을 규탄하며 농성을 하고 있는 강기갑 의원을 찾아가 떠나기를 강요하는 것이 이 시대의 현실입니다. 

나는 그녀들, 산 자의 아내들의 비정한 모습에서 인간의 이기심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가 하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희망"이 있다는 열두 연사들의 열띤 웅변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심쩍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희망이 있는 것일까? 책 속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청중의 한 분이 김종철 교수에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혹시 최근 신문과 방송에서 가장 히트치고 있는 광고가 뭔지 아십니까?" "아니요 잘 모릅니다." "죽었을 때 매장해주는 거. 상호부조회사." "네, 주로 케이블TV에서…."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마을 공동체가 모두 모여 장례를 치르고 매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매장을 책임져주는 공동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모두 개인의 일입니다. 이제 사람은 돈이 없으면 자유롭게 죽을 자유마저도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정말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책의 연사들은 그렇다고 답합니다. "거꾸로 희망이다!"라고 말합니다. 아직 나는 그 말이 실감나게 가슴에 와 닿지는 않지만, 믿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볼 작정입니다. 차분하게 숨을 가다듬고… "정말 거꾸로 희망일까!", 해답을 찾아보기 위하여. 여러분도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파비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한 아고리언이 언론을 향해 불만을 늘어놓았습니다.

언론인 양반들, 발등에 불 떨어지니까 뜨겁습니까?
“도대체 당신들은 뭐하는 겁니까? 이제 당신들이 직접 매를 맞으니 아파서 이렇게 거리로 나온 거 아닙니까? 우리가, 촛불이 아파할 때 당신들은 무얼 했지요? 우리가 그토록 당신들에게 손짓할 때 당신들은 구경만 했지요. 별로 한 게 없지요. 그런데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우리더러 거꾸로 손을 내미네요. 제발 언론의 자유를 스스로 차버리는 짓은 하지 마세요.”

용산참사 규탄집회장으로 행진하는 부산아고라와 미디어행동. 사진 왼쪽 맨 앞, 기자협회 곽?? 기자.

부산아고라 여성회원. 나중에 미디어행동과의 회합에 합석해서 아고리언 줄 알게 됐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충 제 기억이 맞는다면 이런 식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이 불평은 서울에서 내려온 언론인(미디어행동)들과 부산의 아고리언들이 함께한 술자리에서 나온 친근한 불만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있던 다른 언론인들은 그 불평에 매우 기꺼워하고 격려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는 조중동 기자는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아고리언의 불만도 번지수를 제대로 찾았던 셈입니다. 만약 조중동 기자에게 그런 말을 했다면 마치 돼지나 소를 잡고 대화를 거는 거나 마찬가지 부질없는 짓이었을 테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터져 나온 불만은 반갑고 고마운 연대의 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항상 늘 그렇듯이 불만이 있으면 반드시 반격이 있게 마련입니다. 부산의 이름 모를 어느 식당을 떠나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아고리언들과 헤어지는 마지막 인사를 미디어행동의 몇 분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언론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아고라가 바로 언론이다!
“화기애애한 자리라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제 헤어질 시간이고 말을 해야 할 것 같아 한마디 하겠다. 아까 어느 아고리언 분이 언론인을 질책하는 말씀을 하셨는데, 당연히 들어야 할 말이고 고마운 말이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해 주기 바란다.

도대체 누가 언론인인가? 여기 있는 언론노조 사람들이 언론인인가? 여기 MBC, SBS 기자가 언론인인가? 아니다. 여러분들이 언론인이다. 아고라가 언론이다. 그러므로 언론의 자유는 여러분들이 쟁취해야하는 것이다. ‘니네들 잘해라. 우리는 구경꾼이다.’ 그런 생각은 이제 벗었으면 한다. 아고라, 바로 여러분이 언론인 아닌가?”

미디어행동 집행위원장 신학림 전 언론노조 위원장과 홍보물 박스를 들고 있는 부산블로거 커서.

부산 서면에 휘날리는 미디어행동 깃발


역시 내 기억에 의존한 말로서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평소 메모하기를 즐겨하지만, 이때는 메모를 못했습니다. 평소 존경하던 신학림 위원장, 최상재 언론노조 위원장에다 고명하신 천주교 언론지키기운동의 이필모 선생님, 그리고 몇 분의 이름을 대면 알만하신 분들과 한자리에서 술을 마시다 보니 좀 많이 마셨나봅니다.

그러나 나는 술이 확 깨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너무나 훌륭한, 명언이었습니다. ‘그래, 그렇지. 바로 아고리언들이 언론인이지. 그리고 블로거들도 언론인임이 마땅하고. 그렇고말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보니 언론의 자유는 소위 언론으로 밥벌어먹고 사는 사람들 핑계 댈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일임에 틀림없는 일이야.’

교수들이야 늘 차갑게 비판하는 걸 즐겨하는 사람들인데, 이날의 차가운 비평은 참으로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므로 모두들 박수를 열렬히 쳤음은 물론입니다.

미디어행동, 재치와 위트가 넘치는 사람들
부산 아고리언과 헤어져 해운대에 자리 잡은 숙소에 들었습니다. 시간이 늦은 관계로 나도 거기에 꼽사리끼어 하룻밤 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지만. 언제 이들과 어울릴 기회가 자주 있겠습니까?

아직 10시도 되지 않았습니다. 방 한가운데 신문지를 깔아 술상을 만들었습니다. 소주와 맥주가 대령했습니다. 국민이 언론의 주인이든 어떻든 그들은 역시 언론으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화마다 재치와 위트가 넘쳤습니다. 마치 능글맞은 블랙코미디를 보는 것 같은 밤이었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 커다란 양푼에 맥주를 장약 삼아 소주를 뇌관으로 심어 폭탄주를 만들어 돌리며 지는 밤을 밝혔습니다.

부족한 장약과 뇌관을 조달하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그 자리에서 가장 어린(아니 젊은) 유민권 변호사(언론개혁시민연대 자문변호사)가 종종걸음으로 수고를 했습니다. 그는 올해 삼십하고 1년을 더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처럼 보였습니다. 모두들 운송단가가 비싸게 치이는 술을 먹는다고 농담을 던졌습니다.

부산 서면, 용산참사 규탄집회장의 시민들

가운데가 최상재 언론노조 위원장. 초를 다투는 언론인들답게 약속된 12시 반, 어김없이 땡!

나는 유변호사에게서 그의 변호사란 직업보다는 그 젊음이 부럽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아직 나도 젊지만, 그는 나보다 더 젊습니다. 그 젊음으로 언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 이렇게 열렬히 나서는 그를 보는 것이 한없이 부러웠습니다. 그의 동안(童顔)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40대가 될 무렵이면 이 나라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때 우리는 희망을 논할 수 있을까? 그때쯤이면 우리 아이들도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할 테지. 그 아이들에게 세상은 가슴 설레는 미래가 될 수 있을까?”

내 결론은 희망적입니다. ‘미디어행동과 아고라, 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수많은 국민들이 있는 한… 역사의 수레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으리라….’

2009. 2. 8.  파비

ps; 미디어행동은 다음날 아침 일찍 대구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대절한 버스를 타고 떠났다. 그들은 이렇게 서울에서 김해로 부산으로 창원으로 다시 대구로 전국을 투어 중이라고 했다. 그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김해를 거쳐 그들이 타고 온 버스에 함께 타고 부산 서면으로 갔다.
ps2; 아, 참, 조중동 기자는 없었지만, 조중동과 싸우는 중앙일보 지국장 출신의 어른(신학림 기자 옆)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분은 중앙일보에서 쫓겨났고 지금은 전국신문판매노동조합 위원장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너무나 많은 사실을 그분에게서 들었는데요. 조중동, 정말 흡혈귀더군요. 신문판매노조 홈페이지 주소가 npnet.or.kr이랍니다. 관심 많이 가져주시고 가끔 들러주세요. 사실은 저도 아직 못 들렀는데, 오늘 들러보려구요.

Posted by 파비 정부권

시간은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아무리 슬픈 사연도 시간이란 처방은 자연스럽게 상처를 아물게 한다. 그런데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고도 불리게 하는 이런 습성은 이처럼 순기능만 하는 건 아니다. 종종 바람직하지 못한 다른 용도로 이용되기도 한다. 주로 세속적인 정치인들에게 활용되는 이 속성은 냄비근성이라는 비아냥조의 대접을 받는다.

석궁테러, 한 대학교수가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석궁으로 쏘아 상해를 입혔다고 해서 떠들썩한 사건이 있었다. 2007년 1월의 일이니 벌써 2년의 세월이 흘렀다. 석궁에 맞았다는 판사는 피를 흘리며 병원에 실려 갔다고 했으니 혹시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를 받았던 기억이 아련하다. 이 사건 역시 망각의 늪 속에 깊이 빠졌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신문기자와 공동취재를 가다

며칠 전,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기획취재부장)가 물었다.

“부권씨, 혹시 김명호 교수 사건 알아요?”

“아뇨. 모르겠는데요.”

“아, 그러면 석궁사건이라고 들어 봤죠?

“아, 예, 기억이 나는 것 같습니다.”

“창원에 박훈 변호사가 그 사건 변호를 맡았는데, 이게 애매한 게 참 많은 사건이거든요. 내가 낼 모래 취재를 갈 건데, 같이 안 갈랍니까? 이런 사건들은 신문기자하고 블로거가 공동으로 취재를 해서 세상에 많이 알려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혹시 함께 갈만한 블로거 생각나는 사람 없습니까?”

오늘자 경남도민일보에 실린 경남도민일보 기사

그리고 어제 김주완 기자와 함께 박훈 변호사 사무실에 갔다. 우선 사무실 분위기는 말쑥하고 단아한 느낌이었다. 일반 변호사 사무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따로 변호사실이 마련되어 있지도 않았다. 직원들과 함께 사무실을 쓰고 있었다. 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 출신답게 권위의식 같은 건 따지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변호사실이 있으면 조용히 취재하기에 좋았겠지만, 다행히 그날은 일요일이라 다른 직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석궁사건 담당 변호사는 소탈하고 서민적인 인상이었다 

인상이 매우 편안했다. 말투도 서글서글한 것이 상대를 편안하게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변호사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호사들은 말투나 인상에서부터 매우 칼날 같은 인상을 풍긴다는 게 내 선입견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질문하는 기자 앞에 앉은 변호사가 마치 취조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착각도 들었지만, 인터뷰는 매우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

박훈 변호사는 고대법대를 졸업하고 한때 동양매직에서 영업사원으로 뛰기도 했다. 대리점을 개설하고 판매를 촉진하는 것이 주로 그가 하는 일이었다. 실적이 매우 좋았다. 회사 전체로 보아서도 최고 실력 있는 영업사원이었다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김기자가 질문하자,

“에이, 뭐. 나는 한 번도 밀어내기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실적이 좋긴 좋았으니까….”

밀어내기란 영업이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대리점에 상품을 떠넘기는 매출방식이다. 가매출로 불리기도 한다. 심한 경우에는 회사 창고에 물건은 그대로 놔두고 송장만 끊어서 대리점에 안기는 편법도 한다고 한다. 대리점으로서는 골치 아픈 일이지만, 거역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나도 직장생활 할 때 이런 일은 무시로 보아온 터였으므로 별로 신기한 일은 아니었다. 아뭏든 밀어내기를 안 하고도 실적이 좋았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그의 능력이나 열성이 탁월했다는 걸 은근히 강조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며 강직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그가 금속노조 법률원에서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나선 것부터 그렇지만, 그곳에서 그는 100만원, 많이 받아도 300만원이 넘지 않는 수입으로 8년을 버텨왔다. 그에게 책정된 명목상 임금은 500만원이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이제 금속노조 법률원에서 독립해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지만, 여전히 그의 주 수임대상은 노동사건이다.

“부권씨는 뭐 궁금한 거 없어요? 질문할 거 있으면 지금 물어 보시죠.”

아무도 맡지 않는 사건을 수임한 운동권 출신 변호사

김주완 기자가 내게도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이미 김주완 기자의 질문에서 모든 게 나왔다. 그는 취재 전부터 치밀하게 공부를 하고 온 듯했다. 택시를 타고 박훈 변호사 사무실로 가는 내내 취재자료를 복사해서 줄을 그어가며 읽고 있었다. 박훈 변호사도 대단하지만, 그를 취재하러 가는 기자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있는 권력 고법 부장과 싸우는 변호사도 대단하지만, 이 사건의 내막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기자의 싸움도 만만하지 않았다.

취재하러 가는 택시 안에서 취재자료를 미리 훑어보는 김주완 기자.

“저야 뭐 특별하게 물어볼 게 없는데…, 학교 다닐 때 학생운동 한다고 공부도 안 하시고, 졸업하시고는 영업사원으로 몇 년 뛰어다니시다가 갑자기 사법시험 공부 한 2년 해서 그렇게 철커덕 붙는 걸 보면 머리가 대게(‘대단히’의 경상도말) 좋으신가 봐요?”

“하하…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법대를 나왔지만, 사실 학교 다닐 땐 공부할 시간도 없었죠. 엉뚱한 데 쫓아다니느라고요. 그렇지만 법이란 게 그래요. 결국 법이란 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사회과학이거든요. 법 공부는 안 해도 사회과학 공부는 많이 했죠. 정의,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 삶인가? 결국 그런 이야기니까 별로 어려운 게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사회에 대한 애정이나 통찰력이 있으면 되는 거지요.”

어려운 게 아니라는 그의 말은 1%도 수긍할 수 없었지만, 법은 곧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며 그래야 한다는 그의 답변은 정말 훌륭한 철학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어떻게 금속노조 법률원에서 8년을 버텼으며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석궁테러사건 김명호 교수의 변론을 맡았는지 이해가 가는 답변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엉뚱하긴 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훌륭한 질문을 한 꼴이 되었다고 자랑을 해도 별로 욕먹을 거 같지는 않다.

탄광촌에서 자란 어린 시절

박훈 변호사의 부친은 전남 나주 출신으로 탄광 일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다고 했다. 그러다 문경 탄광촌에서 어머니를 만나 결혼했고 태백의 광산촌에서 형이 태어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보령에는 성주탄광이 있었다. 그러다 8살 때 전남 화순에 있는 탄광촌으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나머지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화순은 지금은 광주의 베드타운이 되어있는 것처럼 당시에도 광주와 매우 밀접한 곳이었다.

광주항쟁 당시 그의 동네는 시민군의 무기조달처였다고 했다. 만여 명이 넘는 광부들이 일하는 화순탄광에는 다이너마이트와 예비군 훈련용 칼빈 소총이 있었다. 어린 시절 무기와 사람을 싣고 떠나는 군용트럭을 보았다. 유언비어도 난무했고 전쟁의 공포도 느꼈다. 너무 어려서 실체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던 그는 대학에 진학하고 그해 3월 8일, 처음 열린 학내집회에 주저 없이 참여했다. 누구의 권유도 없었다. 완전한 자의였다. 당시는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총학생회가 막 태동하던 시기였다.

그가 사람에게, 특히 고난과 역경 속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애정을 갖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그의 어머니 고향이 문경 탄광촌이란 사실에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반가웠다. 나 역시 문경 탄광촌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나왔다. 그곳은 나에게 영원한 노스탤지어이기도 하다.

어쨌든 김명호 교수가 박훈 변호사를 선택한 것은 피고의 입장에선 참 잘 한 일이었던 것 같다. 물론 아무도 맡아주지 않았던 탓도 있겠지만, 그는 이 사건에 가장 적합한 변호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편 김명호 교수나 그의 가족들이 어떻게 서울에서 창원에 있는 변호사를 알고 찾았을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다.

고지식하고 타협을 모르는 피고인과 강직한 성품의 변호사의 만남

그러나 그 점에 대해 따로 물어보지 못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물어보아야겠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 김명호 교수에겐 자신을 변호해줄 변호사보다 동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부당한 사법부의 폭력에 저항하여 손을 맞잡고 함께 싸워줄 동지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미 판사들이 모인 회의에서 엄단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재판을 진행하는 이 부조리하고 부당한 엉터리 재판에 맞서 싸워줄 용감한 변호사는 대한민국에 박훈 밖에 없다는 판단을 김명호 교수나 그의 측근들은 했을 것이다.

재판은 끝났다. 대법원 판결도 나왔다. 징역 4년 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박훈 변호사와 김명호 교수에게는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다시 민사소송이 진행 중이다. 부당한 재판으로 인해 입은 피해에 대해 손해를 배상하라는 청구를 해놓은 상태다. 처음에 10 원을 청구했지만, 이 금액으로 재판을 진행하면 소액심판 사건으로 떨어지게 되므로 다시 1억5천만 원으로 소송가액을 조정해서 합의부 재판으로 옮겼다.

박훈 변호사는 확신하고 있었다. 


박훈 변호사(왼쪽) 사무실에서 노트북을 놓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사건은 조작이 명백해요. 아니 자기들이 정당하면 왜 혈흔 감정에 응하지 않는 겁니까? 기각한 판사 말로는 피해자인 부장판사의 혈액을 채취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거 아주 쉬워요. 명령하면 되지요. 그리고 응할 의무가 있는 거에요.”

재판부는 별 설명 없이 피고 측이 요구하는 증거물에 묻어있는 혈흔이 누구의 것이지를 감정하자는 요구를 기각했다. 이미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는 당시 제출된 피해자의 피가 묻어있다는 옷가지에 묻어있는 혈흔에서 유전자 감식 결과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 혈흔이 누구의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어떤 남자의 혈흔이라고만 나와 있다. 이게 누구 것인지 감정하자는 요구를 재판부는 아무 이유 없이 거부하는 것이다.

“석궁테러? 재판부가 저지른 사법테러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재판을 대한민국 사법부가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더욱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피해자(서울고법 부장판사)의 와이셔츠에는 혈흔이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겉옷과 내의에 선명하게 묻어있는 피가 가운데 입는 와이셔츠에는 한 방울도 흔적이 나오지 않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풀린다고 해도 또 다른 의문들은 계속 남는 것이지만, 도대체 이 가장 기본적인 의문에 대해 해명할 의지가 없는 재판부를 보면 기가 막힌다고 했다. 대명 천지에 이런 재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가장 유력한 증거를 재판부가 스스로 기피하는 것인지 그 속내는 재판부 외에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 재판을 보면 경찰에서 확보한 흉기로 사용된 부러진 석궁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사라졌고, 국과수에서 조사하고 유전자형을 확보하고 있는 혈흔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재판부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희대의 미스터리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종종 벌어졌던 역모사건을 다루는 국청에서나 벌어졌음직한 무모함이 대한민국 법정에서 벌어진 것이다.

“대법원까지 형사재판이 모두 끝났지만,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겁니다.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면서도 민사재판을 걸고 계속 싸우는 것은 역사에 기록을 남기기 위함이에요. 언젠가는 세상이 변할 겁니다. 사법부도 언젠가는 상식 앞에 손을 드는 날이 있을 겁니다. 그때를 위해서 기록을 만들어놓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당부의 말을 해달라는 기자에게 박변호사는 말했다.

언론이 조명 안 해주어도 진실은 끝까지 밝힌다

“당부가 뭐 있겠어요. 언론이란 게 끈질기게 보도하고 하는 것도 아니니까…. 아무리 큰 사건도 두 달이면, 뭐 끝나고 말잖아요? 언론의 조명 못 받아도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하는 사건이 많지요. 이 사건도 그 중에 하나에요.”

박훈 변호사는 언론에 대한 신뢰가 그다지 많지 않은 듯했다. 언론 역시 망각의 늪에서 별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시류에 영합하고 선정적인 기사에 매달리는 것은 언론의 명백한 한계다. 진실을 끝없이 파헤치고 밝혀내고자 하는 의지가 언론에 부족하다고 비판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언론도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상품일 수밖에 없다는 변명으로 회피하기엔 너무나 빈약한 변명이 아닌가. 

끝으로 박 변호사는 김명호 교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고지식한 분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고지식한 분이죠. 이 말은 어떤 경우에도 타협이나 굴복을 안 할 사람이란 뜻이에요. 억지를 부린다고요? 그런 게 절대 아니에요. 생각해보세요. 아들이 군대 가서 죽었는데, 어떻게 죽었다는 건지 아무도 모른다고 해보세요.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그냥 있겠어요? 바로 그런 거죠. 아주 간단하게 진실을 밝힐 수 있는데 재판부가 그걸 거부했어요. 이건 절대 용납이 안 되죠. 아마 이 양반, 끝까지 갈 거에요. 나도 마찬가지고….”

나는 김명호 교수가 사건 당일 왜 석궁을 들고 판사 집에 찾아갔었는지에 대해서도 묻고 싶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리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또 이 사건에서 그건 쟁점도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나 상식적인 의문, “왜 사법부는 혈흔감정을 거부하는 걸까? 왜 스스로 의혹을 사는 행동을 할까?”

사무실을 내려와 우리는 경창상가의 돼지국밥집에서 따뜻한 국밥 한 그릇씩을 먹었다. 그리고 곧바로 헤어져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을 어루만지며 그가 하는 진실작업이 성공하길 빌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왜? 무엇 때문에 혈흔 감정을 하지 않겠다는 것일까? 법원이 마음만 먹으면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일을…. 왜? 무엇 때문에 세인의 의혹을 감수하면서까지 상식을 포기하는 무리수를 두는 것일까?”

민사소송(재판부의 불법부당한 재판으로 인한 손해에 대한 배상 청구)에서 다시 혈흔감정을 신청해 놓았다고 하니 법원의 대응을 유심히 지켜볼 일이다. 이번에도 거부할까?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을 이번에도 거부한다면 이 재판은 명백히 조선시대의 국청보다 못하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도 추위는 여전히 매서웠다.

2008. 12. 8. 파비

습지와 인간
카테고리 여행/기행
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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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