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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17 역전의 여왕이 슬픈 드라마인 이유 by 파비 정부권 (5)
역전의 여왕. 코믹한 드라마죠. 내조의 여왕을 재미있게 봤던 저 같은 사람에겐 딱 체질인 드라만데요. 그런데 왠지 이 드라마는 뭔가 슬픈 드라마라는 생각이 드네요. 코믹한데 왠지 코끝이 찡하고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슬픔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그런 것.

사실 이 드라마에서도 주인공인 황태희의 역할은 내조의 여왕에서와 비슷한 역할이란 생각이 드는데요. 겉보기에는 황태희 본인의 역전 드라마 같지만, 실은 황태희는 늘 남편과 집안 뒷바라지를 걱정하는 그런 여자지요. 실제로 황태희가 5년 만에 퀸즈에 컴백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에요.

딱히 남편만을 위해서였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집안 살림을 책임지기 위해 나섰던 거죠. 아줌마의 억척, 뭐 그런 거라고 할 수도 있겠죠.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비롯한 조연들은 모두 역전이 필요한 사람들이에요. 말하자면 모두 패배자들이죠.

▲ 특별기획팀. 확실히 이 팀은 시한부 6개월로 구성된 특별한 팀이다.


우선 특별기획팀 사람들이 모두 회사로부터 명퇴 대상자들로 분류돼 잘리기 일보직전의 사람들이었어요. 회사에서 기회를 한 번 더 준 거죠. 6개월 시한으로 특별기획팀에서 뭔가를 보여주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 

특별이란 사실은 좋은 쪽으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반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집합이다 뭐 그런 아주 좋지 않은 뜻이죠. 본래 사람들은 '특수' '특별' 이런 낱말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지만, 현실에서 특별이란 이처럼 낙오자들을 말하는 것이죠.

이마저도 원래 있던 것은 아니고 구용식 구조본부장이 자기 아버지인 회장님에게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발단이 되어 만들어졌던 것이죠. "이 사람들에게 회사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안 준 책임이 더 큰 거 아닌가요? 잘못은 회사가 저지르고 왜 이들에게 고통을 전가시키는 거죠?"

그러나 6개월 시한부 인생으로 회사에 남게 된 특별기획팀 사람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그들은 요즘 말로 찌질이들일 뿐이에요. 오로지 황태희만이 동분서주 바쁘군요. 황태희는 5년이나 전업주부로 썩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탁월한 감각이 시들지 않았어요.

"조사없이 발언 없다!"는 유명한 경구는 그녀에게 그대로 딱이에요. 동네 아줌마들 모아놓고 공짜로 팩해주면서면 갖은 정보, 자료 다 만들어내는 그녀지요. 그녀의 기획안은 바로 현장에서 나온 것이에요. 현장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담긴 기획안을 누가 이길 수 있겠어요?

아, 그러나 여기에 우리의 봉준수가 끼어드는군요. 황태희의 남편이라는 그의 위치는 스파이로는 가장 훌륭한 조건을 갖추었어요. 약아 빠진 한 상무가 봉준수를 다시 복직시킬 때는 이런 계산이 있었던 것이죠. 그녀는 누구보다 뛰어난 황태희의 탁월한 능력과 재능을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상무는 왜 황태희를 회사에서 내쫓았을까요? 물론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대로 황태희가 결혼했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커리어우먼으로 성공할 수 있는 여자가 결혼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정리해고 할 때 명퇴 1순위도 단연 결혼한 유부녀를 꼽았을 정도지요.

그런 한 상무가 정리해고 대상에 포함돼 희망퇴직서를 쓰고 나갔던 봉준수를 왜 다시 끌어들였을까요? 그녀는 봉준수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황태희를 견제할 스파이 봉준수가 필요했던 것이었군요. 봉준수의 1차 임무는 황태희가 기획한 기획서를 빼돌리는 것이었어요.

▲ 봉준수에게 황태희의 기획안을 훔치라고 지시하는 한 상무와 봉준수.


참으로 비열한 직장  상사로군요. 여기까지는 모두들 아시는 이야기일 테니 더 이상 언급을 할 필요가 없겠지요. 하긴 더 늘어놔봐야 보는 사람 눈만 버릴 뿐이지요. 그러나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무한한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어요. 한심한 봉준수를 보면서….

그는 어쩌면 이 시대 남자들의 진짜 모습을 좀 웃기게 보여주는 것일 뿐이란 생각이 들었거든요.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그러나 이미 그 가부장제가 파괴되고 있는 과도기를 살고 있는 남자의 모습. 그러니까 이런 거죠. 이 시대 남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뭔가 가족을 위해 부양의무를 다하는 것이죠.

좋은 직장을 얻고, 승진을 하고, 더 많은 연봉을 받아야 하는 것도 남자에겐 이 가부장제와 무관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들었던 겁니다. 특히 봉준수를 보면서. 그래야만 가족들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고 자기 존재가 확인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냥 와이프가 똑똑하면 똑똑한 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오히려 기쁨으로 생각하고 살면 될 일이지만, 남자들에게 그건 못할 일이죠. 이 드라마도 결국 그렇게 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황태희의 역전이 아니라 바보 같은 남편 봉준수를 온달장군으로 만드는 평강공주 같은 그런 역할….

아, 물론 황태희와 평강은 확실히 다른 캐릭터죠. 그러나 저는 황태희로부터 자극 받은 봉준수가 훌륭한 직장인으로 거듭난다는 설정이 이 드라마의 주제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떻든 저는 한심한 봉준수를 보면서 과도기를 살고 있는 불쌍한 봉준수를 보았다고 말하고 싶네요.

▲ 목 부장. 그는 간암 판정을 받은 시한부 6개월 인생이다.


거기다 불쌍한 그 봉준수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역전의 여왕이 슬픈 드라마인 이유" 따위의 제목을 달았던 것이에요. 이유가 어떻든 간에 이 드라마는 슬픈 드라마인 것만은 분명해요. 이유 없이 잘리고, 유부녀라고 잘리고, 무능하다는 딱지 받아 잘리고….
 
간암 판정 받아 6개월 시한부 인생으로 살고 있는 목 부장을 보며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정말 문제겠죠? 그 목 부장을 비롯한 특별기획팀 직원들을 모아놓고 구 본부장이 이렇게 말하죠. "6개월 시한부라고 해서 꼭 6개월 동안 회사 다닐 수 있다 그런 이야기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냐고요? 그런 말이죠. 6개월 시한부지만, 두 달 뒤에 잘릴 수도 있고, 한 달 뒤에 잘릴 수도 있고, 아니면 내일 당장 잘릴 수도 있다 그런 말이죠. 진짜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목 부장이 이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냥 아무 말도 안 들렸을까요?

그의 간암 판정이 오진이었으면 좋겠지만, 그러면 진짜 코미디 되는 거니까…. 이 드라마의 마지막은 특별기획팀 직원들이 모두 목 부장의 빈소에서 슬피 우는 걸로 끝나겠네요. 에휴~ 암튼^^ 봉준수가 그냥 떡볶이 가게를 내 평화롭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뜻대로 되는 일은 잘 없군요.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