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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0.15 아이리스, 감동속에 숨겨진 불편한 막장 by 파비 정부권 (72)
<아이리스>. 최고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미니시리즈다. TV 드라마답지 않은 빠른 전개와 스케일, 초호화 캐스팅으로 대변되는 화려함, 무엇 하나 나무랄 곳이 없을 듯이 멋진 드라마다. 정말 누구 말처럼 월화드라마에 편성되지 않고 수목드라마에 편성한 것은 <선덕여왕>으로서는 행운이다. 물론 <아이리스>도 마찬가지 이유로 수목드라마 시간대를 선택했겠지만. 

이미지=아이리스 홈페이지


아이리스 첫 편을 본 소감은? 최고가 될 것 같은 예감 

이병헌은 역시 멋졌다. 멋진 연기와 매력적인 목소리는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오히려 꽤 길었던 공백으로 인해 그에 대한 환상이 더 깊었을지 모른다. 그의 우수에 젖은 눈망울과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목소리는 실로 사람을 환상으로 이끄는 마력이 있다. 정준호는 어떤가? 여기에 김승우까지. 이들 중 한명만 나와도 대단할 텐데 한꺼번에 나왔다. 또 김영철은? 김영철은 잠깐 나왔지만, 역시 베테랑이다.

나는 김영철을 가장 좋아한다. 태조 왕건에서 보여준 궁예의 카리스마는 아직도 살아있다. 내가 본 역대 왕 중에 최고였다. <아이리스>는 이병헌, 정준호, 김승우, 김영철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대박 드라마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런데 여기에 김태희까지 끼어들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김태희가 출연한 첫 회를 불안한 마음으로 보았음을 안다. 그러나 그 마음도 실은 김태희에 대한 넘치는 기대와 사랑 때문 아닐까.  

그러나 놀랍게도 김태희는 획기적인 변신을 선보였다. 내가 보아도 놀랍다. 더 이상 어눌한 발성,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 따위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성싶다. 하나만 보고 열을 알기는 어렵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체로 하나를 보면 나머지 열은 알 수가 있는 법이니, 20회가 마무리될 때까지 김태희의 활약을 기대해도 후회가 없으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아이리스> 첫 회는 대성공이었다. 마지막 끝날 때까지 한 순간도 내 시선을 다른 곳에 빼앗기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 정도로. <선덕여왕>과 더불어 누가 최강자인지 샅바를 잡을 만한 프로가 될 것임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는 드라마를 보는 첫 순간부터 불편한 감정에 휩싸였다. 무엇이 나를 불편하게 했을까? 이토록 찬사만이 넘치는 훌륭한 드라마에.

나를 불편하게 만든 딱 한 가지, 요인 암살 대상이 왜 하필 북한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이어야 하나?  

나를 불편하게 한 것은 NSS 부국장 백산(김영철)이 김현준(이병헌)에게 지시하는 장면이었다. 백산과 김현준이 접선한 곳은 헝가리였다. 직접 부국장이 나타난 것에 크게 놀란 김현준에게 백산은 “혹시 유럽으로의 소풍이란 말 들어봤나?” 하고 물어본다. 답을 기다리지 않고 백산은 계속해서 말한다. 김현준에게 답변을 바라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1989년 당시 공산권이었던 헝가리가 일시적으로 국경을 개방하여 수천 명의 동독인을 서쪽으로 망명시킨 사건이야. 그 일은 후로 베를린장벽 붕괴 단초가 됐고 냉전시대는 그렇게 끝이 났어.” 왜 계획에도 없이 나타나서 사람을 놀라게 한 NSS 부국장 백산이―기밀을 생명으로 하는 첩보조직의 특성상 각본 없이 부국장이 나타난 것은 충분히 놀랄 일이다―뜬금없이 <유럽소풍> 이야기를 꺼낸 것일까?

“너, 단독임무가 있어.” <유럽소풍>은 단독임무 지시를 내리기 전에 보낸 하나의 암시였다. “너의 임무가 성공한다면 이곳 헝가리가 독일 통일에 큰 역할을 한 것처럼 너의 성공도 한반도 통일에 큰 영향을 주게 될 거야.” 김현준이 백산에게 받은 한반도 통일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는 그 임무란 것은 대체 무엇일까?  얼마나 중요한 임무이기에 <유럽소풍>까지 들먹이며 단독임무를 부여한 것일까?

잠시 후, 검은 선글라스에 두 눈을 감춘 김현준이 택시를 타고 부다페스트 영웅광장에 나타나 근처 건물로 올라간다. 적당한 방을 잡은 김현준은 창문을 열어 주변을 살피며 생각한다. “암살 대상은 누굽니까?” “윤성철.” “북한 최고인민회의 위원장 말입니까?” “어.”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어째서 북한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을 암살하는 것이 <유럽소풍>에 버금가는 통일의 단초가 될 것이라는 것인지.

이미지=아이리스 홈페이지


<유럽소풍>과 요인 암살의 평면적 비교, 아무리 드라마라지만 설정이 지나치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유럽소풍> 20주년이다. Pan-European Picnic. 여름 휴가철을 이용하여 친척을 만난다는 명분으로 부다페스트 일원에 모여든 동독인들은 헝가리 당국이 묵인하는 가운데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후 한 달 만에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은 완전 개방됐고 다른 동구 국가들을 통해 서독으로 가려는 동독인들의 대열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그해 11월, 동독 호네커 국가평의회 의장이 실각하고 마침내 베를린 장벽은 붕괴됐다.

<유럽소풍>은 역사적 대사건의 서막이었다. 그런데 독일 통일의 단초가 되었다는 <유럽소풍>과 북한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을 암살하는 것이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것일까? <유럽소풍>이 동독을 탈출해 서독으로 가고자 하는 동독 인민들을 위한 헝가리 정부의 휴머니즘의 결과적 조처였다고 한다면, 윤성철 북한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을 암살하는 것도 그에 준하는 휴머니즘이란 것인가?

북한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이면 북한 권력서열 2인자다. 우리나라처럼 허수아비 3부요인에 불과한 국회의장과는 달리 권력의 실질적 핵심이다. 만약, 요인 암살의 배후가 대한민국으로 밝혀진다면 전쟁은 필연이다. 1968년 소위 북한의 특수부대 124군부대가 청와대 인근까지 숨어들어온 사건이 있었다. 당연히 그들의 목표는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다.

이때 이들의 작전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1) 박정희는 독재자였으므로 남한에는 민주주의가 달성된다. 2) 2차 한국전쟁이 발발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한다. 답은 무엇일까? 정신이 어떻게 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당연히 2번이 답임을 알 것이다. 설령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1번은 결코 답이 되기 어렵다. 오히려 반공반북을 기치로 하는 독재는 더욱 강화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영화 <쉬리>와 닮은꼴, 그러나 다른 점은?
<쉬리>는 살려서 평화를 얻는 반면 <아이리스>는 죽여서 평화를 얻는다는 것  

멋진 드라마의 첫 장면이 동족을, 그것도 전쟁위험을 감수하면서 북한 권력 2인자를 암살하는 것이었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게다가 이 암살행위를 한반도 통일의 단초를 여는 역사적인 행동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압제를 피해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인들에게 휴머니즘적 차원에서 길을 열어준 헝가리 정부의 <유럽소풍>에 이 비열한 살인을 견주었다. 이게 과연 온당한 일일까?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정권은 악의 세력이므로 얼마든지 죽여도 상관없다고 하면 할말 없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공영방송의 드라마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리며 수많은 사람이 보게 될 것이 확실한 드라마에서 이러는 건 정말 곤란하다. 물론 앞으로 왜 윤성철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을 죽여야 했는지 그 이유는 밝혀지게 될 것이다. 

<아이리스> 홈페이지에서 밝힌 드라마 제작의도를 통해 짐작해보면 윤성철은 한국전쟁을 획책하는 북한 군부세력의 핵심이다. 그를 제거해야만 한반도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 전쟁 없는 평화적 통일은 모두의 염원이다. 그러나 이를 방해하는 세력, 전쟁을 통해 적화통일을 달성하려는 세력이 북한 군부를 장악하고 있다. 그 사령탑을 제거하는 것, 이게 이 드라마의 줄거리란 얘기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영화 <쉬리>, <아이리스>는 <쉬리>와 닮았다. <쉬리>는 북한에서 남파된 특수부대원들이 남북통일을 추진하던 남한과 북한의 요인들을 한꺼번에 암살하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는 것이 줄거리였다. 이번엔 반대다. 평화에 걸림돌이 되는 북한 군부세력의 핵심을 죽이는 것이다.

이미지=아이리스 홈페이지


옥에 묻은 티가 너무 크다. 그러나 양심을 닫고 보면 오랜만에 재밌는 드라마  

한때 <너는 내 운명> <아내의 유혹> 등 반사회적 내용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막장드라마란 오명을 뒤집어쓰며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그러나 <아이리스>의 기본 포맷이라 할 수 있는 북한 요인 암살, 이 시나리오는 과연 막장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평화통일을 부르짖으며 한편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북한 요인을 암살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오랜만에 만나는 멋진 드라마에 아쉬운 옥에 티다. 그런데 티라고 하기엔 그 크기가 너무 크다. 그러나 거추장스러운 양심 따위는 장롱 깊숙이 묻어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본다면 <아이리스>는 정말 재미있는 드라마임에 틀림없다. 빠른 전개와 박진감 넘치는 서스펜스, 이병헌, 정준호, 김승우, 김영철, 그 외에도 계속 만나게 될 한국 최고의 배우들.    

이것만으로도 가슴 떨릴 이유는 충분하지 않겠는가. 한 동안 사람 사는 재미가 있겠다.

ps; 여러 분들이 앞서 나간 판단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셨습니다. 듣고 보니 옳으신 말씀들입니다. 김영철이 NSS 부국장이라는 것만 생각했지, 아이리스 수장이란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리스가 전쟁을 부추겨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비밀조직(군산복합체의 지하조직 같은?) 이란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제작의도 기타 등등을 간단하게 살피긴 했지만, 거기까지 미리 설명해주진 않더군요. 그리하여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제가 섣부른 판단을 한 것이 맞다면 그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고 저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래야 스토리도 탄탄해지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통일을 위해 북한 최고위 인사를 암살하라. 그건 헝가리 <유럽소풍>처럼 독일통일의 단초가 될 거다." 라는 주장이 억지라고 생각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지시에 맹동하는 냉혈 킬러라지만 대학에 가서 이라크전쟁, 월남전쟁의 의미까지도 공부했던 김현준이 그 말을 곧이 듣는다는 것 자체도 이해가 안 됐습니다.

차라리 그냥 "쟤는 북한 권력 2인자야. 가서 죽여. 대한민국 발전에 걸림돌이야." 이랬다면 훨씬 솔직하고 좋았겠다, 드라마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고요. 그래서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이 글을 썼던 것입니다. 너그러운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아이리스의 실체가 밝혀지고 진실이 드러나서 저의 섣부른 판단이 사실이 되면, 그때 사과 겸 리뷰를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아이리스>는 매우 기대되는 작품입니다. 막장이란 부분은 옥에 묻은 작은 티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티가 아닐 수도 있겠군요. 아무튼…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