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원랑'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9.07.23 선덕여왕, 미실은 몇 번 결혼 했을까? by 파비 정부권 (9)
  2. 2009.07.11 선덕여왕, 미실의 출신성분은 무엇이었을까? by 파비 정부권 (8)
어제는 제가 음주회동이 있어서 《선덕여왕》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니지, 자정이 넘었으니 그 오늘도 이제 어제가 되었군요. 아무튼 역시 또 음주 회동이 있었지만, 과음을 자제하고 맑은 정신으로 들어와 거금 1000원을 결재하고 보았습니다. 물론 500원짜리도 있습니다만, 선덕여왕만큼은 1000원을 내고 보는 편입니다. 화질 차이가 많이 나거든요.


그런데 《선덕여왕》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지 싶은 그런 사소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동안 《선덕여왕》을 보면서 신라의 색공 풍습에 관한 문제라든지,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대단히 문란해 보이는 당시의 혼인제도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몇 차례 포스팅을 하면서 여러 서적들을 살펴보았던 제가 좀 예민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했던 생각은 《선덕여왕》 제작진이 좀 오버한다는 것입니다. 자, 제가 오버한다고 생각한 장면은 이겁니다. 미실이 위천제를 올리고 하늘의 계시를 핑계로 가야세력을 궁지에 몰아넣는데 성공합니다. 봇짐을 메고 줄줄이 쫓겨나는 가야인들이 마치 재개발에 밀려 터전을 잃고 쫓겨나는 철거민들과 흡사하다는 생각도 들었었지요.

그러고 나서 미실이 어떻게 합니까? 자기 측근들을 모아놓고 다음 계책을 이야기합니다. 채찍으로 상처를 주었으니 이제 약을 발라줄 차례라는 거지요. 그 약이란 다름 아닌 김서현의 가문과 자기네 가문이 혼사를 통해 동맹을 맺자는 것이었지요. 그러자 듣고 있던 하종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외칩니다. "어머니, 또요? … 아이, 정말…" 

하종의 짜증스러운 말의 의미를 눈치 챈 세종 또한 얼굴색이 변합니다. 정말 해도 너무한다는 원망이 얼굴 가득하더군요. 그렇다고 큰 소리 칠 수도 없고…. 제일 불쌍한 사람은 역시 설원공이더군요. 그의 얼굴에도 원망과 불만이 가득했지만 세종 부자처럼 내놓고 말도 못합니다. 그런데 더 웃기는 건 그 다음 미실의 반응입니다.

미실은 측근들의 불만에, 사실 측근들이라고 해봐야 남편들과 아들들과 친동생이었지만, 내심 스스로도 무안했던지 헛기침을 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며 난처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 말고…" 그러나 저는 미실이 얼굴을 살짝 비틀어 숙인 자세로 찡그리며 "나 말고… 자식들 중에서… 아니면, 하종의 여식은 어떨까?" 할 때, 정말 큰 소리로 웃을 뻔 했습니다.

《선덕여왕》이 재미있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소재가 신선하고, 박진감 넘치는 시나리오가 탄탄하고, 연기자들의 연기가 훌륭합니다. 《선덕여왕》만큼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드라마도 흔하지 않습니다. 《대장금》의 인기를 넘어서는 드라마가 아직 없었다고 하지만, 그 《대장금》도 이처럼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지는 못햇습니다.

또, 《선덕여왕》에 재미를 더해주는 것은 코미디적인 요소입니다. 사극이 자칫 빠질 수 있는 심각하고 어두운 면을 이 코미디적인 요소들이 잘 어루만져주고 있는 것이지요. 죽방거사의 역할은 감초의 수준을 넘어 《선덕여왕》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중요한 장치입니다. 그가 있어서 주인공들이 더 빛나는 거지요.

그리고 미실도 가끔 코미디 같은 대사나 행동을 하더군요. 지난주에는 유신을 불러다놓고 하늘의 뜻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하지요. 뇌쇄적인 윙크까지 섞어서 말입니다.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은 필요하답니다." 아마 오늘, 아니 어제였군요. 미실과 측근들이 모여 벌인 해프닝도 결국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활력소를 위한 코믹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확실히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미실은 다행히 정략결혼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고 밝힘으로써 측근들을 안심시켰지만, 이것은 난센스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신라는 모계사회도 아니고 다부다처사회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때도 분명히 부계전승사회였고, 일부일처제가 지켜지는 사회였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다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실은 단 한 번 혼인했으며 남편은 세종 한사람뿐이었습니다. 지금 드라마에서는 마치 설원이 미실의 남편인 것처럼 비쳐지지만, 그는 남편이 아니라 정부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세종이 받는 대접과 설원이 받는 대접은 다른 것입니다. 물론 세종은 진골이며 설원은 두품도 없는 천한 신분이지만서도…

그럼 미실이 3대에 걸쳐 왕들에게 바쳤다는 색공은 무엇일까? 그건 그냥 색공입니다. 미실이 진흥왕에게 색공을 바쳤다고 해서 그녀가 진흥왕비가 아닌 것이며, 진지왕비도 아닌 것이고, 진평왕비도 아닌 것입니다. 다만, 왕실의 자손을 번창시키기 위해서 색공을 바치기로 된 진골 가문의 한 여인에 불과한 것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드라마에서 보여준 '미실의 혼사'는 실은 난센스였던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물론 세종이 죽은 후라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당시는 여자의 재혼을 금하는 어떠한 법이나 관습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게다가 미실이 굳이 김서현과 관계를 맺고 싶었다면 혼사가 아니라도 설원과 그랬던 것처럼 은밀하게 정을 통하면 될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미실은 공식적인 정략결혼을 통해 양 가문의 동맹관계를 맺고 싶었던 것이므로 미실이 아니라 자손들 중에서 누군가 하나를 골라 유신과 혼인시킬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하여튼, 비록 난센스라고 제가 비토를 하긴 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이는 자칫 심각하고 무겁고 어두운 사극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장치쯤으로 이해를 하면 그만입니다.

실은 이렇게 비토를 하는 것도 《선덕여왕》을 보는 재미중의 하나입니다. 아무튼 선덕여왕은 매우 재미있는 드라마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보니 드디어 덕만의 정체가 탄로 났군요. 아니 탄로가 난 것이 아니라 본래의 신분을 되찾은 것이지요. 축하를 해야 할 일이겠지만, 대략 예고편을 보니 앞날이 더 험해질 것 같은 예감입니다.

하여간 여러분, 미실은 오직 한번밖에 결혼하지 않았답니다. 남편도 세종 한사람뿐이랍니다. 비록 정부가 여럿 있었으며 세 명의 왕과 한 명의 태자에게 색공을 바치긴 했을지언정 일부종사(?) 했다는 사실,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역시 남자들도 결혼은 한번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의 혼인에 얽힌 고사를 보십시오. 

왜 김유신은 춘추와 사통한 문희를 묶어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을 지펴 연기를 피우는 연기를 했을까요? 김춘추가 이미 결혼했으므로 문희를 아내로 맞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연기는 선덕여왕에게로 날아갔고 결국 여왕의 묵인으로 김춘추는 문희를 정식 아내로 맞이하는 전례없는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신라사회에서는 남자들도 여자와 마찬가지로 결혼은 한번밖에 할 수 없었다는 역사적 기록인 것입니다. 물론 정식 부인은 한명밖에 둘 수 없었지만, 미실과 마찬가지로 정부(첩)는 여럿 둘 수 있었겠지요. 어디까지나 재력과 권력을 가진 귀족들에 한해서만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것도 부익부 빈익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오늘 새삼스럽게 난센스 이야기 하다 보니 제가 난센스에 빠지는 기분입니다. 흐흐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요사이  MBC드라마 《선덕여왕》으로 인해 신라의 풍속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다. 특히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화랑들의 이야기로 세상이 뜨거운 것 같다. 화랑세기는 그 위작 논란에도 불구하고 신라사회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화랑도에 대한 언급이 있긴 하지만, 이처럼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특히 미실이란 여인은 화랑세기가 아니고서는 만나볼 수가 없다. 화랑세기는 사실상 미실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김대문이 화랑세기를 저술할 때는, 그가 서문이나 후기에서 밝힌 것처럼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들의 세계(世系)를 밝히고자 함이었다. 그들의 계보를 통해 우리는 화랑의 실체를 접할 수 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김대문의 집안은 세습 화랑의 집안이었다. 이 가문은 540년 화랑도가 시작한 이래 681년 폐지될 때까지 1세 풍월주 위화랑부터 시작해서 4세 이화랑, 12세 보리공, 20세 예원공, 28세 오기공 등 모두 5대에 걸쳐 풍월주를 세습했다. 나머지 풍월주들도 대부분 부자가 세습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김대문의 가문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32대에 걸친 풍월주들의 전기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미실이다. 그녀는 5세 풍월주 사다함부터 시작해서 16세 풍월주 보종공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풍월주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도대체 그녀는 어떤 신분의 인물이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래서 나는 「선덕여왕, 근친혼의 이유는 무엇일까?」
(http://go.idomin.com/268) 라는 글을 통해 미실은 분명 김씨족임이 자명하다고 호언한 바 있다. 신라는 골품제를 근간으로 하는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골품도 없는 여인이 화랑들을 발 아래 두고 국왕까지도 좌지우지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랑세기에서도 미실의 세계에 대하여 자세한 언급은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화랑세기의 목적이 풍월주들의 세계와 세보를 기록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한편 미실에 대한 궁금증을 더욱 유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여러 독자가 댓글을 통해 내 글에 반론을 제기했다. 미실은 김씨족이 아니라 박씨라는 것이다.(인터넷을 검색해보았더니 또한 모든 네티즌들, 뿐아니라 위키백과에서도 미실을 박미실이라고 표기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 나의 관심사는 미실이 김씨족인가 박씨족인가 하는 것은 아니었다. 신라라는 신분제 사회의 특성상 진골귀족 신분이 아니고서 화백회의나 중앙정치를 주무를 수 없다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드라마에서처럼 실제 미실의 역할이 그러했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김씨족일 거라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골품제도는 법흥왕 7년(520년) 율령이 반포되면서 정립된 제도라고 말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골품제는 이미 사회적 관습으로 정착되어 있었을 것이다. 법흥왕에 의해 골품을 받은 귀족들은 원래 왕족이었던 박씨족 일부와 김씨족, 그리고 가야의 왕족, 보덕국왕 안승의 후예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박씨족 일부도 진골의 골품을 받았지만, 그들이 신라가 융성했던 중고시대나 중대에 중앙 정계에서 활발하게 활약했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게다가 내물왕 이후 김씨족들이 왕권을 확실히 장악한 이후에 박씨족들은 6부 중 하나인 모량부에 이주해 살면서 가끔 왕비를 배출한 것 외에는 이렇다 할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고로 화랑세기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미실이나 미생의 역할로 보아 틀림없이 이들의 조상은 김씨족일 거라는 생각은 지금도 확고하다. 그럼에도 여러 독자들이 미실은 박씨라는 주장을 하며 정정을 요구하였고, 심지어는 내물왕의 4대손이며 세종의 아비요 하종의 조부인 이사부조차도 박씨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어 부득이 다시 자료를 확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부나 거칠부가 김씨족인 것은 이미 사기에서 밝히고 있는 터라 더 이상 설명은 무의미할 듯하다. 그러므로 당연히 미실의 남편이며 아들인 세종과 하종도 김씨족인 것은 당연하다. 다만 미실에 대해서만 보다 더 확실한 조사가 필요할 것이지만, 아시다시피 그녀에 대한 기록은 화랑세기를 빼고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러나 미실의 부모에 대하여 화랑세기에 언급이 있으므로 그녀의 부계와 모계를 확인해 보면 그녀의 출신성분을 알아내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듯싶었다. 미실의 아비는 2세 풍월주 미진부이며 어미는 묘도궁주이다. 미진부의 아비는 아시공이며, 아시공의 아비는  선모이고, 선모의 아비는 장이이고, 장이의 아비는 복호공이다. 복호공은 내물왕의 아들이다. 

미실의 부계를 살펴보건대, 미실은 내물왕의 후손인 것이다. 내물왕은 신라의 김씨 왕조를 확립한 인물이다. 내물왕 이전에 미추가 김씨족으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르긴 했지만, 김씨족의 전제 왕권을 확립한 것은 내물왕이다. 그러므로 김씨 왕조의 사실상 시조는 내물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내물왕 이후 왕비들은 대부분 김씨족으로 채워졌는데, 이는 김씨족의 배타적 왕권을 확립하려는 결과였다. 이와 같은 근친혼으로 왕권의 지위는 더욱 초월적인 것으로 공고해졌다. 세기에 의하면, 아시공은 법흥왕이 미실의 조모인 옥진과의 사이에서 난 비대공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자 이에 반대해 지소태후와 더불어 진흥왕을 옹립하는데 역할을 한 인물이다. 

어쩌면 미실의 권력은 이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녀가 비록 세습적으로 색공을 하는 여인이었으며 미색이 출중하고 교태가 남다르다 해도 출신이 미천하고서는 권력에 다가서기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조부인 아시공은 당대의 실력자였으며, 아비는 진흥왕의 총애로 2세 풍월주를 거쳐 최고 관등인 대각간에까지 올랐다.    

그렇다면 미실의 모계는 어떨까? 미실의 어미는 묘도궁주이다. 묘도궁주는 영실공과 옥진궁주의 딸인데, 영실공은 수지공과 법흥의 누이 보현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성골이다. 또 미실의 조모인 옥진궁주는 누구인가. 그녀는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이다. 위화랑은 진골로서 이찬에 오른 인물이다. 위화랑 역시 옥진의 소생인 비대공을 반대해 진흥왕을 옹립했다.

이렇게 미실의 부계와 모계를 살펴보니 양쪽 모두 진골귀족 출신이다. 진골일 뿐 아니라 왕권에 가장 근접한 권력의 핵심들이었다. 미실의 권력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미실의 힘이 어느날 갑자기, 또는 드라마에서처럼 사다함의 매화로,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닌 것이다.
 
자, 그런데 아직 풀리지 않은 독자들의 궁금증이 하나 더 남아 있을 것이다. 바로 설원랑이다. 나는 앞서「선덕여왕, 근친혼의 이유는 무엇일까?」에서 미실 뿐 아니라 설원까지도 김씨족일 거라고 단정을 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 의도한 오류였다. 설원랑은 세기에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진골귀족이 아닌 풍월주다.

화랑의 대부분이 진골귀족으로 채워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진골귀족이라 하더라도 아무나 화랑에 뽑힐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권문세가의 자제여야 하고 인물이 출중하고 덕이 충만해야 한다. 그래야 선발의 기본조건을 갖추는 것이다. 그런데 설원은 어떠한가. 그는 진골귀족도 권문세가의 자제도 아니다.

더구나 그의 아비인 설생은 아비의 이름도 성도 모르는 미천한 출신이다. 다만 설생의 어미가 습비부촌의 설씨 가문의 자손이므로 어미의 성을 따라 설씨가 되었다고 한다. 설생은 용모가 출중했는데,그가 모시던 구리지가 전장으로 나간 틈에 구리지의 여인 금진낭주와 관계를 가져 설원을 낳았다고 한다.

금진낭주는 사다함의 어미이기도 하니 설원은 사다함과는 동모이부의 형제인 셈이다. 사다함은 구리지의 아들이며 내물왕의 7세손으로 진골귀족이다. 금진낭주 또한 위화랑의 딸로서 진골귀족이니 설원은 비록 아비가 출신을 모르는 미천한 사람이었다고는 하나 모계로 보면 역시 귀한 자손이며 미실에겐 외숙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부계계승사회인 신라에서 설원랑은 진골은 고사하고 두품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 그가 화랑이 되고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미실의 권력을 웅변해주는 대사건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드라마상에서처럼 설원이 지배집단의 화백회의에 참여하고 병부령의 지위에 올라 군권을 장악하는 것은 난센스라는 것이다.

그런 일은 미실의 권력이 아무리 태산처럼 높다 하더라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신라의 골품제를 뒤흔드는 일로서 체제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미실이라도 그런 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화랑은 골품제의 규정을 비교적 덜 받는 자치조직이었으므로 설원랑이 풍월주에 오르는 이변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관직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랬다면 6두품으로 뛰어난 문재를 자랑했던 설총이나 최치원이 비운의 삶을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골품제가 초기에는 왕권을 강화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주요한 도구로 기능했을지는 모르지만, 나라의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결국 신라를 패망으로 인도하는 결정적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

그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는 금언이 있는 것이 아닐까.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