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0.08.08 '김탁구' 구일중과 서인숙, 불륜의 차이 by 파비 정부권 (9)
  2. 2010.03.12 추노, 대길이 흘린 눈물에 담긴 의미 by 파비 정부권 (26)
  3. 2008.11.02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 by 파비 정부권
제가 구일중을 위한 변명으로 <구일중은 과연 나쁜 아버지인가?>를 썼더니, 많은 분들이 비판적인 의견을 보내주셨습니다. 주로 서인숙에 대한 비판이 너무 편파적이란 의견이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서인숙의 불륜과 구일중의 불륜이 뭐가 다르냐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구일중이 먼저 김미순과 불륜관계를 가졌으니 서인숙이 한승재와 불륜관계를 갖는 게 무에 그리 대수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불륜을 만든 것은 구일중입니다. 그러니 원인제공을 한 것은 구일중이므로 서인숙은 그보다 잘못이 적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다음뷰 통계를 살펴보았더니 주로 제 블로그 글(<구일중은 과연 나쁜 아버지인가?>)을 보신 분들은 여성들이 70%로 압도적이었습니다. 연령대를 보니 3~40대가 60%에 달했습니다. 즉, 3~40대 여성층이 주로 제 블로그를 보셨다는 얘기입니다. 비판적 의견이 주로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성들이 보는 서인숙과 구일중의 불륜에 대한 시각차 
 
 
또 다른 한편 생각해 보면 이 연령대는 1965년에 일어난 구일중과 서인숙 그리고 김미순과 한승재의 얽히고 섥힌 불륜관계의 배경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한 분들이기에 비판 의견이 많은 만큼 이해의 폭도 넓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3~40대의 여성들이란 소위 386세대로 불리던 소위 진보적인 계층으로서 가족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구일중에 대한 변호를 그리 고운 시선으로 볼 수만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 부분, 부모의 불륜관계로부터 김탁구와 구마준의 갈등관계를 만들어내려던 시도는 실수입니다. 

좀 더 다른 방법을 고안했어야 한다는 것은, 지금 애매하게도 서인숙과 한승재의 범죄행각에 대한 비난의 칼날이 무뎌지고 있다는 데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구일중의 어머니를 (미필적 고의로) 살해했으며, 김미순, 김탁구의 살인미수사건과 아동 약취유인 혹은 인신매매의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까지 합니다. 

이 모든 부조리의 배경에는 구일중이 김미순과 벌인 불륜이 있습니다. 자, 구일중은 그럼 왜 김미순과 불륜을 저질렀을까요? 사실 1960년대에 구일중 같은 재벌이 저지르는 이런 따위의 행각들을 불륜이라고 하는 경우는 현실적으로 없습니다. 우리는 자주 TV 뉴스 화면에서 모 재벌 회장의 불륜의 자식들이 활약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그들의 아버지가 저지른 불륜행각에 대해 분노한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요? 저도 곰곰 생각해 보니 그런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알게모르게 그 때 그 사람들의 사생활 방식에 대해 그저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정도로 용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일중의 불륜으로 인해 서인숙의 범죄행각이 희석돼

구일중 회장이 그 모 재벌 회장님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모 재벌 회장님은 저 멀리 우리 손이 닿을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있는 데 반해 구일중은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같이 숨 쉬며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 재벌 회장의 불륜은 당연한 것처럼 여기면서도 구일중은 용서하기가 어려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시대적 배경 기타 등등 감안할 수 있는 요소들을 빼버리고 오늘날을 사는 우리의 시각으로만 보자면 구일중의 불륜이나 서인숙의 불륜은 하등 차이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서인숙의 경우엔 남편의 바람에 맞서 맞바람을 피운 것이므로 원인제공자 구일중에 비해 선처의 여지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껏 드라마를 눈여겨보신 분들이라면, 이것도 물론 어디까지나 저의 주관적 견해에 불과하긴 합니다만, 구일중과 서인숙의 불륜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 때문에 구일중의 불륜이 매우 괘씸하면서도 구일중을 위한 변명과 서인숙을 향한 매서운 비난을 앞서 포스트에서 했던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구일중과 서인숙이 저지른 불륜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할까요? 구일중의 불륜은 우발적이었던 데 비해, 서인숙의 불륜은 계획적인 것이었습니다. 구일중이 김미순과 관계를 가질 동안 서인숙은 서너 달이 넘게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요양이었습니다만, 좀 심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이는 다분히 남자로서의 불평이고, 여자의 처지에서 보면 그 정도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산후조리를 위해 친정에 가 있었을 수도 있고 그 기간이 서너 달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길어도 무방한 일입니다. 심지어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친정에서 아이를 낳고 키워 아이가 장성한 후에야 시댁으로 들어가는 풍속도 있었습니다. 

서인숙의 불륜은 용한 점쟁이의 점괘 때문?

서인숙은 돌아오자 곧 김미순의 임신 사실을 알고 한승재를 시켜 낙태를 시키도록 사주합니다. 그러나 김미순은 산부인과 뒷문을 통해 탈출해 멀리 도망가고 맙니다. 강제 낙태를 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김미순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추방하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서인숙은 여기서 멈춰야 했습니다. 하지만 서인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청평 별장으로 한승재를 부른 서인숙은 그와 불륜관계를 시도했습니다. 이를 거부하는 한승재에게 서인숙은 외칩니다. "당신은 자존심도 없어요?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기고도 그 사람의 수족이 되고 싶은 건가요?"

어릴 때 고아가 된 한승재를 거둔 것은 구일중의 어머니 홍여사였습니다. 한승재는 구일중과 형제처럼 지냈다고 합니다. 그런 한승재로부터 구일중이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았다고 서인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한승재는 은인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하고 수족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 더 이상의 정보는 없습니다. 언젠가 비밀이 밝혀지겠지요. 결국 한승재는 서인숙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서인숙의 속셈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용한 점쟁이가 가르쳐 준 예언(?), 곧 서인숙은 구일중에게선 아들을 얻을 수 없으며 다른 남자를 통해야만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점괘를 믿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서너 달이 지난 시점 청평 별장에서 마주 한 두 사람. 서인숙이 말합니다. "이 배를 만져봐. 여기에 우리 아이가 있어. 세 달 됐어. 반드시 아들을 낳을 거야. 나는 이 아이를, 우리가 만든 이 아이를 거성가의 주인으로 만들어 주겠어. 우리의 아들이 거성가를 물려받는 거야."

우발적인 구일중의 불륜과 계획적인 서인숙의 불륜의 차이

구일중과 김미순의 불륜이 다분히 우발적이고 즉흥적인 것이었다면, 서인숙과 한승재의 불륜은 철저한 계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이 다른 것입니다. 게다가 서인숙은 이 불륜의 결과로 아들을 얻게 되자 그 아들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2차, 3차의 범행을 계획합니다.

그리하여 아시는 바와 같이 홍여사는 비명에 갔으며, 김미순은 실종됐고, 김탁구도 원양어선으로(김탁구가 극적으로 도망쳤습니다만) 팔려갔습니다. 이건 비유하자면 마치 길가다 어깨를 슬쩍 부딪쳤는데 그에 대한 보복으로 깊은 산속으로 납치해 살해하는 것(실제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법의 잣대로도 우발적인 범행과 계획적인 범행은 같은 결과에도 불구하고 양형에 많은 차이가 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서인숙과 한승재는 우발적인 불륜 이후에도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리고 그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 계속해서 연쇄적으로 새로운 범행을 계획하고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정리해서 나열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강제낙태미수사건 ...................... (대상: 김미순)
2. (미필적고의)살인사건 ................ (대상; 홍여사)
3. 아동약취유인미수사건 ................ (대상; 김탁구)
4. 인신매매사건 ............................ (대상; 김탁구)
5. 강간및살인미수사건 ................... (대상; 김미순)
6. 살인미수사건1(조폭동원) ............ (대상; 김탁구)
7. 살인미수사건2(가스폭발) ............ (대상; 김탁구)
8. 기타 예비음모중 ........................ (대상; 김탁구, 김미순)

구일중의 잘못은 분명합니다. 저는 처음에 서인숙이 애처로웠습니다. 혹여 그녀가 <미워도 다시 한번>의 신파역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녀가 과감하게 그걸 차버리자 환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당당한 자유부인에 머물지 않고 악녀로 변신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천박한 부르주아였습니다.
 
서인숙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지만

그녀의 눈에는 가진 것이 없는 서민들은 천민들입니다. 그녀가 신유경을 노골적으로 미워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신유경이 딸 자림이의 친구란 사실도 참을 수 없었지만, 희망의 모든 것이요 삶의 목표라 할 마준과 엮인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들을 못 낳아 시어머니로부터 구박 받는 며느리란 사실만으로(사실 아이를 낳고 집에도 안 들어가고 서너 달 만에 나타나는 며느리가 구박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좀 어색하긴 합니다만), 남편의 사랑에 소외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서인숙을 이해하기엔 그녀가 펼쳐놓은 악마의 뿌리는 너무나 참혹합니다.

그녀는 돈이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신유경을 자취방에서 쫓아낸 것도 돈이었으며, 경찰서에 잡혀간 구자림을 빼내온 것도 돈이었고, 곧 팔봉빵집을 곤경에 빠뜨릴 무기도 돈입니다. 그녀의 정부이며 하수인인 한승재도 그리 생각하기는 마찬가집니다. 그도 모든 범행을 돈으로 처리했습니다.


물론 서인숙에게도 변명의 여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어머니가 그토록 아들 아들 하지만 않았어도, 남편이 조금만 자기를 사랑해줬더라도, 김미순에게 애를 가지게만 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무섭게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그녀의 변명은 얼마든지 공감도 가고, 불쌍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녀는 충분히 위로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그녀의 불륜이 용서될 수 있다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녀의 불륜은 불륜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릇된 야심을 달성하기 위해 범죄의 도구로 이용됐습니다. 그녀의 불륜은 날카로운 칼입니다. 이 칼에 많은 사람들이 다쳤습니다. 한승재와 구일중, 김탁구 그리고 비명에 죽어간 홍여사. 

서인숙이 저지른 계획된 불륜의 최대 희생자는 구마준

그러나 누구보다 그 불륜으로 낳은 아들 구마준에게 서인숙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서인숙이 세운 불륜 계획의 최대 피해자는 바로 그녀가 그토록 사랑해마지 않는 아들 구마준입니다. 아들에게 치명적인 트라우마를 안긴 것은 물론 무엇보다 부모가 저지른 범죄의 공범자 의식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구일중은 우리에겐 부모 세대에 해당하는데, 그의 차갑다거나, 자상함이 모자란다거나, 부부간에 애정표현이 지나치게 부족한 것들은 저로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사실 우리 집도 그랬으니까요. 우리 세대의 아버지들은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었으며 가부장적인 독선에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구일중이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구일중의 죄와 서인숙의 죄를 같은 반열에 올려두고 무게를 달기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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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대길이 설화를 안은 까닭을 대길의 눈물에서 보다

대길이가 마침내 죽은 줄만 알았던 최장군과 왕손이를 만났습니다. 좀체 눈물을 보이지 않는 대길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합니다. 그런 대길을 보며 '참 마음이 여린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대길은 실로 마음이 여린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렇게 마음이 여린 사람이 아니었다면 10년 가까운 세월 언년이를 찾아 헤매지도 못했을 겁니다. 

최장군과 왕손이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이대길


대길의 노비에 대한 연민은 언년이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사람이란 말이 있지요. 마음이 차가운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에겐 몸속에 피도 흐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말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대길은 몸 안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입니다. 업복이는 그를 짐승이라고 생각하며 반드시 죽이겠다고 결심 또 결심을 하지만, 대길이야말로 노비에 대한 뜨거운 연민을 가진 사람이죠. 

그는 언젠가 송태하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네가 혁명을 해 새 왕을 세워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겠다고? 가장 아끼는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면서 누가 누구를 구한단 말이냐!" 대길은 오로지 언년이에게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은 일념에 높은 벼슬을 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포부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의 혁명관은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길이가 바꾸겠다고 한 세상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세상입니다. 노비도 양반도 없는 세상, 모든 사람이 더불어 행복하게 잘 사는 세상, 그런 세상이 대길이가 꿈꾸었던 세상입니다. 대길이가 그런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것은 바로 언년이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지 않고서는 언년이와 영원히 살 수 없기 때문이죠.

언년이의 씨다른 오라비인 큰놈이(대길의 배다른 형이기도 하다니 운명 참 얄궂죠)가 집에 불을 질러 자기 아버지와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도망을 간 이후에 대길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 언년이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추노꾼이 된 것도 그것 때문이었죠. 처음에 많은 사람들이 대길이가 언년이를 찾아 어떻게 할 것인지 궁금해 했지요. "대길이의 목표는 사랑에서 나온 것일까, 증오에서 나온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대길이 설화를 끌어안은 까닭은?

결국 결론은 변하지 않는 대길의 사랑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대길이가 언년이를 찾아 헤맨 것은 원수를 갚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증오심이 아니라 변함없는 사랑이 대길을 추노꾼의 세계에 뛰어들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대길이가 자기 얼굴에 낫자국을 남긴 큰놈이를 찾았을 때도 그이 가장 큰 관심은 언년이의 행방이었지요. 

대길에게 언년이는 인생의 목표였던 셈입니다. 그런 대길이 언년이가 보는 앞에서 설화를 끌어안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대길의 마음에 설화가 들어올 자리는 없습니다. 설화의 간절한 구애에도 불구하고 대길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합니다. 그런 대길의 마음을 잘 아는 설화는 그래서 더욱 대길을 연모하는 마음이 깊어만 갑니다.

설화는 매우 단순하게 살아온 여잡니다. 그녀는 어려서 사당패에 팔려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탓에 많은 생각을 하는 것은 자기 몸만 고될 뿐이란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밥 먹고 자는 것 외에는 생각하지 않기로 작정한 듯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실제로 먹고 자는 것 말고는 별로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대길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도 살펴보면 매우 단순하고 무식합니다. 주변 환경이나 조건, 상황 따위는 안중에 두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녀의 맹목적인 사랑 때문에 대길 패거리가 위험해지지 않을까 몹시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그녀가 서울 저자의 주막으로 찾아가 대길의 행방을 묻다가 월악산 짝귀를 생각해냈을 때, "아이구 큰일 났구나" 했지만 아직 큰 탈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대길의 사랑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헌신하는 것

결국 설화는 주막 큰주모에게 말을 빌려 월악산으로 왔고 대길을 보자 반가운 마음에 대뜸 달려들어 품에 안깁니다. 그런 설화를 멀뚱히 내려다보던 대길이 돌연 설화를 끌어당겨 안았습니다. 그만 떨어지려던 설화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죠. '앗, 이 오라버니가 웬일이람?' 그러나 대길의 그런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언년이(또는 김혜원)이 쳐다보자 일부러 설화를 끌어안는 이대길


바로 지척에서 밥을 지으려고 준비하던 언년이가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대길이가 설화를 끌어안은 것은 언년이를 의식한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토록 찾아 헤매던 언년이를 이제 겨우 만났는데 왜 대길은 언년이 앞에서 설화를 끌어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을까요? 이미 여러분도 모두 잘 알고 계시지요. 그것은 사랑 때문이란 것을.

대길의 사랑은 지배하거나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언년이가 진정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그의 사랑의 목표는 언년이가 안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송태하와 혼례를 치른 언년이에게 대길은 다른 여인을 끌어안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얼마나 지고한 사랑입니까. 그런데 저는 대길의 순수하고 고귀한 마음을 최장군과 왕손이를 만나 흘리던 눈물에서도 보았던 것입니다. 언년이를 찾기 위해 추노꾼이 된 대길에게 최장군과 왕손이는 가족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8년을 고락을 함께 했습니다. 겉으로는 퉁명스럽게 대하지만 대길의 최장군과 왕손이를 향한 마음은 깊고 넓은 바다와 같습니다. 

대길의 눈물에 담긴 유토피아는 사랑에서 나온 것  

언년이와 함께 반상의 구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대길은 최장군과 왕손이게도 똑같은 생각을 합니다. 그는 언젠가는 추노질을 그만두고 조용한 곳에 집을 짓고 최장군, 왕손이와 더불어 안돈해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추노질을 해 번 돈의 상당부분을 빼돌려 저축을 했고 그 돈으로 이천에 땅을 사두었던 것입니다.

지금 그 땅에는 최장군과 자신의 집 그리고 왕손이가 운영할 여각이 지어지고 있는 중입니다. 말하자면, 대길이 꿈꾸고 있는 세상, 작지만 대길의 유토피아가 이천에 건설되고 있는 중이지요. 대길의 꿈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오래 전 유럽에도 대길이처럼 유토피아를 꿈꾸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미국에 건너가 공동체를 만들기도 했었다고 하지요.

어쨌든 대길은 자기가 만들 유토피아의 주요한 시민들인 장군이와 왕손이가 죽어버렸다고 생각하고 크게 상심했을 것입니다. 아니 상심이 아니라 거의 절망에 가까운 충격을 받았을 테지요. 그런 최장군과 왕손이가 살아있는 걸 보았으니 대길의 기쁨은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겁니다. 야차 같기만 하던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은 실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세 사람이 만나 회포를 푸는 장면을 보며 감동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요? <추노>가 20부를 뛰어오는 동안에 가장 뿌듯한 장면이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도 이렇게 기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세 사람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지요. "아, 저들의 유토피아가 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은 저들이 모두 이천으로 가서 행복하게 사는 걸로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 

제발 살려주었으면...

이런 희망은 저만 가진 것일까요? 아닐 겁니다. <추노>를 좋아하는 모든 분들의 공통된 희망이리라 확신합니다. 언년이가 그 유토피아에 합류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세 사람만이라도, 아니 설화까지 더해서 네 사람만이라도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면 대길이도, 장군이도, 왕손이도, 아무도 죽으면 안 되는데요.

아~, 작가님. 제발 살려주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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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오늘, 참 오랜만에 성당에 갔습니다. 미사에 마지막 참례한 것이 무려 5년도 훨씬 전의 일이니 오랜만이라도 한참 오랜만이지요. 무리하게 일을 벌려놓고 객지로 몇 년 동안 돌아다니다보니 주님도 교회도 까먹고 살았나 봅니다. 우리 아들놈은 그래도 성당에 참 열심히 다녔습니다. 주일학교도 열심히 다니고 미사 때 하얀 복사 옷을 입고 신부님을 보좌하기도 한답니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녀석도 이제 다 컸구나 하며 대견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마음 한 켠은 문득 스치는 늦가을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쓸쓸해지기도 합니다. 이제 녀석도 어느덧 품안의 자식이 아닌 게지요.

오르간에 맞춰 부르는 성가대의 음악소리는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가슴을 안아주는 천상의 숨결이 느껴졌습니다. 꿈결 같은 사제의 기도소리, 성체와 성혈을 모실 때 치는 낭랑한 종소리는 정말 어릴 적 고향집 마당에 앉아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습니다. 미사는 여전했습니다. 여전한 경건함과 포근함이 성당 안의 모든 사람들 위에 살포시 내려앉으며 평화를 축원해주는 듯했습니다. 특별한 설교나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은혜의 역사가 없어도 무수한 전통과 교감하는 미사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은총과 사랑과 평화를 나누어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은 예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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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성당 마당의 성모자상

오늘의 복음은 마태오복음 18장 15절부터 20절까지의 말씀이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단둘이 만나 타일러라.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두 셋이 다시 가서 타일러보고 그래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 해결하도록 하라.”는 말씀이 요지입니다. “만약 공동체인 교회의 설득에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다른 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기더라도” 이미 너희 탓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신부님께선 강론에서 이 복음을 이렇게 해석하셨습니다.

“사람에겐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 보통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무관심'이란 것이다. 그게 교회의 가르침이다. 아무리 미운 형제가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함께하고자 노력해야한다. 포기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가장 무서운 적은 무관심이다.” 아마 이런 정도의 말씀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성당에 돌아온 저를 알아보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건 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교회의 관심과 연대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던 끊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제게 보여주려고 하신 말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를 보신 적이 없는 신부님은 저를 알아보시지 못하실 터이므로 그저 제 감상에 불과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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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성당 입구 게시판에 붙어있던 그림을 찍었습니다.  그림 속 신부님 모습이
                        꼭 주임신부님을 닮았네요.  큰수녀님과 작은 수녀님도 금방 알아볼 수 있겠습
                        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대단한 화가시군요.

그러나 교회의 교우들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어렵고 힘든 사람들, 약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목소리도 내시고 싸우기도 하는 신부님의 모습을 간간이 보아왔던 저로서는 그 말씀이 정말 저를 위해 하시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오늘 참으로 오랜만에 하느님의 품에 돌아와서 정말 고귀한 진리를 얻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란 정의 말입니다. 무관심은 미움보다 더 무서운 것이란 사실 말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나와 가족과 이웃과 사회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진리를 오늘 새삼 깨달았습니다.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푸근한 가을 하늘입니다.

2008. 9. 7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