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2.10.15 박근혜는 부마항쟁 군사진압 사과부터 해야 by 파비 정부권
  2. 2012.09.26 박근혜에게 부마항쟁은 아직도 폭도들의 난동인가? by 파비 정부권 (2)
  3. 2011.11.30 눈물의 기록, '마산, 다시 한국역사를 바꾸다' by 파비 정부권 (3)
  4. 2009.03.16 3·15 의거 기념식에서 느끼는 황당 시츄에이션 by 파비 정부권 (4)
  5. 2008.10.27 10·26의 추억, 부마항쟁과 유신의 종말 by 파비 정부권 (5)

박근혜 후보는 부마민주항쟁 군사진압에 대한 사과와

진상규명 등의 요구에 대한 응답부터 하라

박근혜 후보진영에서 ‘부마민주항쟁기념식은 국민대통합 차원에서 박 후보가 꼭 가야 한다’는 입장이라 한다. 그리고 이번 주 중 ‘경남을 찾아 부마민주항쟁기념식에 참석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고 14일 보도되고 있다.

먼저, 본회는 18일 창원시 마산의 부마민주항쟁기념식에 박근혜 후보는 물론 어느 대선 후보도 초청한 사실이 없음을 밝힌다. 과거사위원회의 결정에 의하면 박 후보는 부마항쟁 관련 국가 폭력 및 인권침해의 가해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3년간 역사적 재평가와 진상규명이라는 요구를 외면해 왔고, ‘부마민주항쟁’ 언급조차 없었으며, 사과 한 마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기념사업회가 박 후보를 먼저 초청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는 쓸개 빠진 일이다. 박근혜 후보가 먼저 대선후보라는 권위를 내세워 기념식에 참석 하겠다면, 이는 정치도의나 인간에 대한 예의에 크게 벗어남을 분명히 밝힌다.

15일 박근혜 후보가 새누리당 경남선대본부 출범을 위해 마산에 온다고 한다. 박 후보는 그간 여러 차례 우리가 요구한 바에 대해 먼저 답부터 해야 한다. 우리의 요구를 다시 간추리면 박정희 정권의 ‘반국가적 부마 폭도 난동’ 규정과 이에 대한 합법적, 불법적 군사진압이 잘못이라는 것, 반유신 부마항쟁이 헌법적 가치 회복을 위한 주권자의 정당한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부마항쟁 진압과 수사 과정의 사망, 인권유린에 대한 정중한 사과와 이에 대한 책임을 표명하는 것, 이후 후속 조치로 부마항쟁 관련 전면적 진상규명과 부산·마산시민 명예회복, 배상과 예우 등에 대한 제도적 입법 조치 등이다.

참고로 사업회는 해마다 기념식을 하면서 정당을 불문하고 경남도지사, 도의회 의장/의원, 창원시장·의회의장/의원과 지역구 국회의원 등 선출직 대표들을 초청해 왔다. 지난 해 마산지역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야당 국회의원들의 부마항쟁특별법 발의에 호응하여 한나라당 경남도의원들이 부마항쟁특별법 통과촉구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한나라당은 이를 부결한 바 있으며 올해 다시 재발의 추진 중이다.

2012년 10월 14일

(사)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 부마항쟁기념사업회에서 보내온 성명서 전문입니다. 저는 부마기념사업회 회원은 아니지만(그 당시 중학생이었음), 성명서 전문에 깊이 공감하는 바라 여기 게재합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기자 회견문 /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박근혜 후보에게는 ‘부마민주항쟁’이

아직도 ‘반국가적 폭도들의 난동’인가 ?

24일 박근혜 후보의 과거사 관련 기자회견을 접하고 우리는 오히려 참담하고 시민적 공분이 끓어오른다.

1979년 10월의 ‘반유신 부산·마산사건’에 대해 박정희 정권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사회를 혼란시키는 폭도들의 난동인 ‘부마사태’로 규정하고, 군대까지 동원하여 진압했다. 이후 끈질긴 진상규명, 명예회복 투쟁을 거쳐 적어도 1999년 이후에는 정치적, 법적으로 3.15의거,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항쟁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인 ‘부마민주항쟁’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는 정치 일선에 나선 이래 십 수년간 단 한 번도 부마항쟁과 이에 대한 군사진압과 고문 등으로 인한 시민적 피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철저히 무시했다. 전태일, 장준하, 인혁당 사건을 언급하고, 광주 5.18과 제주 4.3을 방문해도, 마산의 3.15 국립묘지를 방문해도 유신체제하에서 죽어가던 3.15의거 정신을 되살린 부마항쟁에 대해서는 눈뜬 장님과 벙어리 행세를 했다. 최근 부마항쟁과 관련하여 과거사위원회가 국가에 대해 ‘인권침해 피해자 확인, 그 명예회복, 피해 구제조치’를 권고하고, 이 부실조사 이후 지난 해에는 32년만에 부마항쟁 당시 참혹하게 사망한 시민 유치준 님의 유족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지난 해에는 부마항쟁 진상조사 등을 위한 특별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어도 친박계 중심의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이를 부결, 폐기해 버렸다.

이런 무시와 침묵 정치의 연장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24일의 기자회견에서 인혁당을 언급하면서도 부마항쟁에 대해서 끝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날 오후 부마항쟁 현장인 부산에서의 한 마디를 기대했지만, 우리를 조롱하듯 세간에 유행하는 말춤 시늉을 보여 주었을 뿐이다. 마산 출신의 중진 국회의원이 박근혜 집권 새누리당 중역을 맡고, 박 후보 선거 캠프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그렇다.

박근혜 후보가 33년 전 청와대의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던 시절 날벼락같이 일어난 부마항쟁과 이에 대한 군사적 진압은 아버지 박정희마저 흉탄에 가게 한 10.26 사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니 끔찍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박근혜 후보가 너무나 늦었지만 다행히 5·16과 유신은 명백하게 헌법적 가치를 훼손했다고 인정했다. 그렇다면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내건 부산·마산사건은 민주헌정질서 회복을 위한 박정희 치하의 최대 민주화운동이 아닌가 ? 더욱이 박 후보가 그렇게 자랑하는 ‘한강의 기적’이 박정희 정권 말기에 정치경제위기에 처하면서 고통을 겪어 온 학생, 시민, 노동자들의 분노의 몸부림이 아닌가 ?

이런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박근혜 후보의 역사 인식의 건전성과 진정성에 대해서, 적어도 부마항쟁에 관한 한 우리는 전혀 인정할 수 없다. 박 후보는 아직도 엄중한 과제가 산적한 시대의 대한민국에서 박정희의 딸이라는 생물학적 관계의 성벽에서 온전하게 벗어나지 못한 미성숙한 정치인일 뿐이다. 더욱이 박정희 대통령의 행적과는 별도로, 퍼스트 레이디로서 경남 마산 등지에서 대규모의 충효예 한마음운동 관제조직을 만들며 ‘유신만이 살 길’이라고 한 박 후보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거나 알아도 모른 척 하고 있다.

1979년 10월, 유신체제 선포 7주년에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내건 부마민주항쟁은 이제 항일·반유신독재 지도자 장준하 선생 타살 의혹 사건, 그리고 3.15의거 당시 김주열 시신 모습을 보도한 부산일보·정수장학회 사건 등과 함께 유신시대의 3대 미해결 사건이다. 그리고 부마항쟁은 집권 공당의 대선 후보 박근혜의 진정성을 시험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박근혜 후보는 이제라도, 대선 후보자로서 그리고 당시 퍼스트 레이디로서 반유신 부마항쟁이 헌정질서 회복을 위한 정당한 민주항쟁임을 명확히 인정하라. 동시에 이에 대한 야만적이고 불법적 군사진압이 헌법적가치를 훼손한 것임을 인정하라. 그리고 부마항쟁 관련 사망자 유족, 고문 등의 피해자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하라. 이것을 거부하면, 박 후보가 ‘박정희의 딸’에 갗히어 아직도 부마항쟁을 ‘폭도 난동 사태’라는 퇴행적이고, 반민주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주권자 국민으로서 합당하게 대응할 것이다.

2012년 9월 26일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Posted by 파비 정부권
1979년 10월. 마산은 "유신독재 물러가라는 함성"으로 들끓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한발의 총성이 청와대 옆 한 비밀궁전에서 울려퍼졌다. 영원할 것 같던 독재자 박정희가 죽은 것이다. 이로써 마산은 두번에 걸쳐 독재정권의 막을 내리는 진원지가 됐다.
하지만 그 역사적 의의에 비해 마산이 받는 대접은 너무나 약소하다. 온갖 인사들이 정치판에 나와 과거의 민주화운동 이력을 들먹이지만, 1979년 10월 부마항쟁의 주역들은 망각과 무관심의 그늘 속에 창동골목의 허름한 술집에서만 그 영광이 되살아날 뿐이다.

2011년.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가 뒷골목에 숨어있던 그늘진 영광을 끄집어내 한권의 책을 만들었다. 최초로 발간하는 증언록에는 우선 40여명의 육성이 담겼다. 앞으로 더 많은 증언자를 찾아내 보완된 책을 낼 계획이라고 한다. 이 첫번째 증언록을 만드는 데는 일부 나의 공도 들어있다.
나는 부마항쟁 당시 중학교 3학년짜리로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지만, 실로 눈물겨운 녹음테이프를 활자로 옮기면서 울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숨도 무지 나왔다. 그 다음에 밀려드는 어쩌면 지독하게 처절하고 슬픈 한편의 영화를 보고 난 다음의 공허함.
이게 모두 진짜로 벌어진 일들이었을까. 부마항쟁 며칠 후, "알아서 처리해주겠다'는 부모의 말을 믿고 애인을 밀고했고, 그 애인이 중정과 39사단에 끌려가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갖은 고문이란 고문은 다 당한 것을 알고 자신은 결국 정신병자가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 아, 이런 이야기들이 모두 진실이란 말인가.  

12월 5일 오후 6시 30분. 창원역 맞은편 (구)가든예식장 1층에서 <부마항쟁 증언집- '마산, 다시 한국의 역사를 바꾸다'>가 망각과 무관심의 그늘로부터 과감하게 몸을 끄집어내 세상에 나온다. 아래 소개하는 글은 그 역사의 현장에 여러분을 모시는 글이다. 특히 블로거들이 많이 와서 잊혀진 이야기들을 세상에 많이 알려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 파비 

이 증언집은 1989년의 『부마항쟁10주년 자료집』에 비해 증언자 수가 3배 가량이며, 다양한 신분의 입체적 증언이 풍부하게 수록되었다. 항쟁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경남대·창원대 학생, 고교생, 교수, 시민, 노동자, 기자, 음악실 DJ 등은 물론, 유족 증언과 함께 전투경찰 소방관, 마산시청 공무원 등 40여명이 겪은 생생한 증언들이 담겨 있어 당대의 드라마틱한 상황을 다양한 관점에서 폭넓게 알 수 있다. 특히 생애사적 접근방법을 통한 인터뷰 방식으로 기술하였으므로 당대의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 전반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가능하며 마산시민의 집단적 용기가 정의로운 저항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그물망처럼 꼼꼼하게 그려서 부마항쟁을 입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다.

증언집 내용에 있어서도 부산항쟁 이전 경남대 학생의 목숨을 건 사전 시위 계획과 종교인의 지원 사실, 근로대중들의 잠재된 정치적 분노, 용기있는 현장 취재와 언론탄압 등 그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거나, 떠돌던 소문에 대한 새로운 증언들이 풍부하게 드러났다.

이 증언집은 그 자체로서도 의미가 크지만, 부마항쟁특별법 제정의 당위성을 촉구하는 근거로서의 의미도 크다. 또한 아직도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박정희 시대 ‘개발독재’의 환상과 실체를 되새기며, 새로운 정치·경제, 새로운 사회를 전망하는 데 학계, 교육계를 비롯하여 각계에 매우 의미있는 자료가 되리라 판단된다.


<증언집 수록 내용>

김용백(당시 마산 상남성당 주임신부) • 미리 준비되었던 부마항쟁   23

김의권(당시 마산 수림음악실 디제이) • 음악실 DJ가 겪은 유신시대   37

김종대(당시 마산시청 공무원) • 억압세력에 대한 저항정신의 표출  65

김지근(당시 경남대 학생) • 여전히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자부심  85

김채윤(당시 경남대 학생과 직원) • 빗방울 모여서 강물 되고 바다 되듯이  95

김철수(당시 마산대 학생) • 박정희 총통제 차단한 부마항쟁  107

김태만(당시 창원공단 내 대한중기 사원) • 형제가 겪은 3·15와 10·18  129

남부희(당시 경남매일 사회부장) • 부마항쟁은 제2의 3·15의거  139

박봉환(당시 경남대 학생) • 부마항쟁의 시민정신과 화해의 정신  167

박진해(당시 해군 장교) • 긴 역사에 대한 낙관론  185

박홍기(당시 자동차보험 대리점 운영) • 작지만 큰 저항의 몸부림  215

배장수(당시 전투경찰대원) • 유신의 전경  235

손해규(당시 자영업) • 불의에 항거한 정신 계승되어야  257

송윤도(당시 마산시 월영2동 동장) • 국민을 하늘 같이 여겨야지  295

신용수(당시 마산문화방송 기자) • 역사의 현장을 취재하다  307

양석우(당시 자영업) • 부마항쟁, 올바로 자리매김 돼야  347

옥정애(당시 경남대 학생) • 자유와 용기를 갖게 해준 부마항쟁  365

유성국(당시 무직, 고 유치준씨 유족) • 내 아버지 죽음의 진실, 32년만에 밝힌다  385

이경호(당시 마산대 학생) • 모진 고문과 보상받을 길 없는 민주화 투쟁  401

이부웅(당시 마산소방서 소방관) • 소방차 포기하고 몸만 피신하다  433

이승기(당시 씨알의 소리 마산보급소장) • 박정희 정권을 더 연장시켜서는 안 된다  439

이윤도(당시 경남대 학생) • 영원히 잊지 못하는 노래  451

이재구(당시 마산대 학생) •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꾼 민주항쟁  481

이종상(당시 경남대 교수) 법학교수, 유신헌법 홍보를 거부하다  491

이창곤(당시 마산 경상고 학생) • 고등학생에게 가해진 야만적인 국가폭력  505

장정욱(당시 경남대 학생) • 박정희 유신정권의 누적된 문제들  527

정성기(당시 경남대 학생) • 역경을 극복하는 개인과 도도한 역사의 물결  541

정인권(당시 경남대 학생) • 역사의 소용돌이에 던져진 삶  575

정현섭(당시 공업전문대 학생) • 민주화로 가는 첫걸음을 만들어준 계기  605

정혜란(당시 무직) • 사람이 변해야 사회도 변해  623

조순자(당시 마산대, 경남대 음악과 강사) 마산은 두번이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특별한 곳  635

주대환(당시 서울대학교 제적생) • 억압됐던 민중의 본능이 자연스럽게 분출된 부마항쟁  643

지경복(당시 정비공장 직원) • 부마항쟁 참여로 고단하고 힘든 삶  669

진이호(당시 자영업) • 우리가 싸웠던 것은 제대로 살아보자는 뜻  687

최갑순(당시 경남대 학생) • 여성운동으로 다시 태어나  701

한석태(당시 경남대 교수) • 유신독재 붕괴 촉발시킨 부마항쟁  737

한양수(당시 경남대 학생) •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10·18  761

한철수(당시 회사원) • 마산 민주항쟁의 역사, 하나의 맥으로 연결되어야  783

현태영(당시 마산기동대 전경대원) • 마산에서 일어나면 정권이 바뀐다  795

황성권(당시 외국어대 휴학생) • 숨 막히는 독재를 끝낸 투쟁  813

다음카페 “부마항쟁” http://cafe.daum.net/buma1018

Posted by 파비 정부권
어제가 3·15의거 49주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래 사진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김태호 경남도지사, 이주영 한나라당 의원, 안홍준 한나라당 의원, 황철곤 마산시장 등이 3·15묘지에 머리 숙여 참배하고 있습니다. 이 사진은 오늘 경남도민일보 신문 1면 머리에 실린 사진입니다. 저는 이 사진을 보며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습니다.  3·15 영령들 앞에 엄숙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고개 숙인 저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또, 저분들의 절을 받고 있는 3·15 영령들은 지하에서 무슨 생각들을 하고 계실까요? 자신들이 돌을 던지며 독재타도를 외쳤던, 그리하여 마침내 4·19혁명의 불길로 이승만 독재를 몰아냈던 그 자랑스런 역사를 한 순간에 군화발로 짓밟아버린 5·16군사정변의 후예들이 오늘날 갑자기 영령들의 무덤에 근엄한 표정으로 절을 하며 올해 3·15를 국가기념일로 지정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내년 50주년 행사에는 반드시 이명박 대통령을 모시고 이자리에서 다시 사진을 찍자고 입들을 맞추니 “이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인가?” 하고 놀라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곳 마산에서는 저런 류의 황당한 시츄에이션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보기 드문 일도 아닙니다. 지난 가을 10·18 부마항쟁 기념식장은 또 어땠겠습니까? 그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마항쟁의 살아있는 진정한 영웅들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타도를 외쳤던 유신독재의 잔당인 한나라당 출신 국회의원들과 시장들이 축사를 하고 유신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났던 마산과 부산시민들의 기개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할 때, 쓸쓸하게 부림시장의 막걸리집에서 잔을 기울이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산시 구암동 국립 3·15민주묘지에 참배하는 기관장 및 국회의원들. 사진출처=경남도민일보 김구연기자


전언에 의하면 내년에는 3·15의거 기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승격될 것이 확실하다고 합니다. 국회의원 전원이 서명한 ‘3·15의거 국가기념일 제정 촉구 결의안’이 국회에 접수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3·15의거 50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이명박 대통령도 참석할 거라고 합니다. 그러면 내년 오늘 경남도민일보 1면 머리에는 위 사진에다 김태호 경남도지사 옆에 이명박 대통령이 또 엄숙하고 근엄한 듯한 표정으로 영령들에게 절하는 모습이 추가된 똑같은 사진이 실릴 것입니다. 

안홍준 의원은 인사말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3·15의거는 유일한 도 기념일인데 이렇게 도 단위 기관장이 적게 참여해서는 국가기념일로 해달라는 명분이 서지 않는다. … 우리 모두 자신이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인지 반성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할지도 모를 내년 기념식에는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


“안홍준 의원처럼 약자를 괴롭히고 탄압하는데 앞장서는 한나라당 사람이 약자의 편에 서서 독재에 저항했던 3·15열사들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부끄럽지도 않소?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무릎 꿇고 참회의 눈물부터 보이시오. 게다가 내년에는 이명박 대통령도 이 자리에 서신다고 하니 더욱 그리 하시는 게 옳을 듯하오. 그러지 아니하면 영령들께서 지하에서 돌을 들고 당신들을 기다리고 계실 것이 틀림없소.”

그나저나 저분들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천지개벽이 일어난다 한들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위에 적은 내 생각은 그저 부질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겠지요. 그러나 아무튼 시민의 힘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3·15와 4·19의 혁명정신을 기리기 위해 국가기념일로 제정하는 것이 의미있는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거기에 이의를 달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황당한 시츄에이션에 자꾸 웃음이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군요. 

그런데 3·15의거 50주년이 되는 내년 오늘은 더 크게 한바탕 웃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숨가쁜 기대로 온몸이 충만합니다. 허허…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곧 10·26사태 29주년이다. 한 사람이 비참하게 죽은 날을 무엇이 기념할 것이 있어서 이런 제목까지 달고 추억하겠냐마는 그래도 이맘때만 되면 아련한 기억이 향수와 함께 밀려드는 걸 어쩔 수 없다. 산골에서의 어린 시절 추억과 더불어 그곳을 마지막 떠나기 전에 일어났던 유신독재의 종말이라는 시대적 사건은 나에게 영원히 잊혀 질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

1979년 10월 27일,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매일 아침마다 3학년 교실에 문제풀이 시험지를 돌려야 하는 게 내 일이었다. 교무실에 가면 전날 밤에 등사된 문제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산골이라 고입을 앞둔 중학교 3학년이면서도 도시처럼 학원이나 과외 같은 걸 받을 수 없었던 사정을 고려한 선생님들의 배려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나는 문제지를 돌리기 위해 아침 일찍 등교했다. 그런데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나보다 먼저 온 녀석이 있었다. 기종이란 친구 녀석이 책상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반 부실장이기도 한 이 친구는 공부도 매우 잘하는 똑똑한 녀석이었다. 도가사상에 심취해서 늘 가방에 장자를 넣고 다니던 친구였다. 그래서 내가 “어이, 도사님.” 하며 놀리곤 했었다.

만주군 장교 시절 박정희/위키미디어

나보다 먼저 온 것도 의외였지만, 어깨를 흔들며 흐느끼는 친구를 보니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난처하다는 듯이 녀석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야 기종아, 도대체 왜 그러나.”

내가 물어보자 녀석은 더 슬프다는 듯이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어~어엉 어엉 엉~ 각하께~서 돌아~가~셨~다~.”

“뭐라고?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라.”

나는 이 친구가 정녕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장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엔 통곡하며 우는 모습과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물었던 것이다.

“대통령 각하께서 어엉 엉~ 서거 하셨단다.”

순간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친구는 진정 각하의 서거가 애통해 우는 것 같았지만, 나는 전쟁을 생각했다. 국가원수가 죽었다는 슬픔보다 당장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먼저 나를 엄습했다.

잠시 후 교무실에 불려간 나는 급히 비상조회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모든 것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교단에 올라서신 교장선생님은 운동장에 집결한 학생들에게 슬픈 소식을 전했다. 이 자리에는 예외적으로 학교 육성회장인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도 참석했다. 많은 학생들이 슬픔에 잠겨 고개를 떨어뜨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눈물을 흘리는 저 많은 학생들은 모두 내 친구 기종이처럼 정말 애통해서 우는 것일까? 아니면 나처럼 전쟁의 불안으로 몸서리치는 공포에 떠는 아이들도 있는 것일까? 그날 아침은 학교 뿐 아니라 온 나라 온 천지가 비통한 슬픔으로 눈물바다가 된 것만 같았다.

1966년 각국 정상과 함께한 박정희 대통령/위키미디어공용


나는 10·26사태가 나기 불과 며칠 전에 부산에 다녀 온 적이 있다. 부산에 있는 모 고등학교에서 실시하는 특차모집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서였다. 기차를 탔다. 차창 밖에서 달려드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밀려오는 낯설고 신기한 풍경들에 나는 마음을 흠뻑 빼앗겼다. 읍내에도 몇 번 가보지 못한 산골 소년에겐 시험을 치러 간다는 부담감조차 까맣게 잊을 만큼 화려한 외출이었다. 곧 있으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가는 대도시 부산이다.

그런데 부산역에 내린 나를 맨 먼저 반겨주는 것은 줄지어 늘어선 군인들과 탱크들이었다. 난생 처음 본 육중한 탱크는 철모르는 어린나이에도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마음을 졸이며 버스를 타고 해운대로 향했다. 여인숙을 잡고 저녁을 먹은 다음 내일 시험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그러나 역시 부담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잠이 오지 않았다.

여인숙을 나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해운대 백사장을 돌아 동백섬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머리를 식혀주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에 이끌려 나는 계단을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갯바위에 기대앉아 부서지는 파도를 지켜보고 있는 인어상도 보였다. 나도 그 모양으로 바위 한쪽을 차지하고 저 멀리 깜깜한 수평선 너머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부산에 진주한 계엄군/신동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환한 서치라이트 불빛이 나를 사로잡았다. 연이어 우레와 같은 함성이 들렸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무슨 일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절며 시키는 대로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은 몹시 가파르고 멀었다. 다 올라오니 내려올 땐 보지 못했던 철책이 양쪽으로 늘어서 있었고 계단 입구에는 문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군인들이 나를 보며 말했다.

“너, 아직 어린 학생이구나. 몇 학년이냐? 이런데 들어오면 안 되는 거 모른단 말이냐?”

너무나 놀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대충 중학교 3학년이며, 입시를 위해 멀리 시골에서 왔고,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 것인지는 몰랐으며, 문이 열려있기에 내려가 본 것뿐이고, 내일 시험도 치러가야 하니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빌었던 것 같다. 다행히 그 군인은 마음씨가 좋아보여서 시골에서 온 어린 학생이라 예외적으로 한 번 봐줄 테니 어서 가서 자라고 했다.

놀란 가슴을 안고 여인숙에 돌아온 나는 부랴부랴 잠을 청하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 바로 가까운 곳에 있던 학교에 가서 시험을 쳤다. 그리고 나는 다음 해부터 3년간 그 학교를 다녔다. 나중에 그곳에 다시 가보았는데, 그곳은 늘 사람들이 붐비는 관광지였다. 그리고 인어상 주변에도 밤낮없이 사람들이 파도도 감상하고 사진도 찍으며 놀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는 부마항쟁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시내에 계엄군대가 진주해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해운대 해수욕장과 동백섬 일원의 해안선에도 무장경계가 실시된 모양이었다. 산골로 돌아온 나는 다시 일상에 파묻혀 도시에서의 긴박했던 순간은 어느덧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10월 27일 아침에 느닷없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우리는 하교 길에 면사무소에 긴급히 마련된 분향소에 들러 다시 도무지 믿을 수 없고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눈물을 흘렸다. 면사무소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모여든 동네 어른들로 붐비고 있었다. 비명에 죽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에 가기 전, 우리 마을에서 가까운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잠깐 잡았던 적이 있다. 그래서 여느 지역에 비해 슬픔이 배는 더 했으리라.

국장이 끝나고 채 열흘이 가기 전에 바로 그 국민학교 교정에 봄에나 피어야 할 꽃이 피었다고 했다. 요즘은 기상이변으로 가끔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그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모두 하늘이 노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수군거렸다. 이 이야기는 신문기자에게도 전해져 세상에 알려졌다고 했다.

10·26이 나던 날과 다음날에도 나는 이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오갔다.


나도 그때는 하늘이 노해서 그런 것인 줄 알고 다시 한 번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순진하게도 산골에서 ‘유신교육의 해’ ‘근면 자조 협동’ 같은 선전문구를 건물 이마에 매단 학교에 다니고, 냇가에서 멱 감으며 놀다가 지나가는 기차를 향해 허옇게 고추를 내놓은 채 학교에서 배운 대로 일렬로 늘어서서 마치 비오는 날 승용차 와이퍼가 좌우로 힘차게 흔들리 듯 질서정연하게 손을 흔들던 산골소년도 이제는 안다.

하늘이 노해서 꽃이 핀 것이 아니라, 국민이 노해서 유신철권통치로 마음껏 권력을 휘두르던 독재자가 비명에 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세월은 인간에게 망각이란 선물을 주어 슬픈 과거를 딛고 미래를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지만, 또한 역사는 끊임없는 비판과 각성의 바늘을 주어 잘못된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열어준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몸을 흔드는 계절이 오면 나는 의례히 30여 년 전 그때를 기억한다.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기억의 편린을 더듬으며 기종이 녀석 생각도 한다. 그 친구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늘 장자를 가방에 넣고 다니며 대통령의 죽음을 자기 부모의 일처럼 애통해하던 감성이 풍부하던 그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보니 다시금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2008. 10. 23.  파비

습지와 인간
카테고리 시/에세이/기행
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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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