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8.04.03 4.3의거 기념식서 김경영 "4월은 잔인한 달 넘어 결의의 달" by 파비 정부권
  2. 2012.10.15 박근혜는 부마항쟁 군사진압 사과부터 해야 by 파비 정부권
  3. 2011.12.06 마산서 부마항쟁보다 앞선 항쟁모의 있었다 by 파비 정부권 (2)
  4. 2011.10.11 토크콘서트로 유신시대를 추억하니, 새롭네! by 파비 정부권 (4)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은 자라고

추억과 정욕이 뒤엉키고

잠든 뿌리는 봄비로 깨어난다.

겨울은 차라리 따스했다




△ 더불어민주당 경남도당 부위원장 김경영 씨


엘리어트 시인은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겨울을 뚫고 만물이 생동하기 시작하는 4월을 왜 엘리어트는 잔인한 달이라고 했는지 그 의미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우리에게 역사는 실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월 3일, 70년 전 오늘 제주에서는 이른바 제주 4.3사건이 있었습니다. 7년여 동안 무려 3만명의 제주도민이 학살당했던 사건입니다. 당시 제주도 인구가 30만이 안 됐다고 하니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사람들이 군경에 의해 희생당했습니다. 통계에 드러나지 않은 수를 고려하면 훨씬 더 많은 희생자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오늘 문재인 대통령은 4.3추념식에 참석해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린다"고 밝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에 이은 두번째 국가원수의 공식 사과였습니다. "4.3의 완전한 해결이야말로 제주도민과 국민 모두가 바라는 화해와 통합, 평화와 인권의 확고한 밑받침이 될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4.3의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 아직도 낡은 이념의 굴절된 눈으로 4.3을 바라보는 사람들, 아직도 대한민국엔 낡은 이념이 만들어낸 증오와 적대의 언어가 넘쳐난다... 제주도민들이 시작한 화해의 손길은 이제 전 국민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호소에서 보듯이 완전한 해결과 평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들이 많아보입니다. 


△ 김종대 창원시의회 부의장


한편 4월 3일은 99년 전 창원시 마산합포구 삼진지역에서 4.3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날이기도 합니다. 이날 여덟분의 애국지사가 일본제국주의 군경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진동면에서 고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팔의사창의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오늘 오전 11시 30분 '4.3독립만세운동 삼진연합 대의거 기념식 및 재현행사'가 열렸습니다. 안상수 창원시장과 김종대 창원시의회 부의장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참석해 당시 선열들의 우국충절을 기렸습니다.   


4.3의거는 3.1운동 4대의거 중 하나로서 진동면, 진북면, 진전면의 3개 면민이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그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각기 다른 면의 면민들이 모여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조직적으로 운동을 이끌었다고 하니 독립운동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거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기념사를 하고 있는 창원시의회 부의장 김종대 의원


오늘 4.3 독립만세운동 기념식에 김경영 씨도 참석했습니다. 함께 만세도 불렀습니다. 4.3 독립만세운동 이후에도 마산은 역사의 전환점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15의거와 김주열열사의 시신이 마산앞바다에 떠오른 4월 11일 2차 시위 그리고 마침내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운동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종말을 고했습니다. 


박정희권이 무너지게 된 10.26도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부마민주항쟁이 그 도화선이었습니다. 87년 6월항쟁과 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도 창원과 마산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창원과 마산은 그야말로 독립운동사와 민주화운동사의 산 증인인 것입니다. 


△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목숨 바쳐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순국선열들을 생각하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고 넘어야 할 산은 너무나 크고 높습니다. 


일제 군경의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순국선열들... 


△ 만세운동 재현


……

그분들을 생각하며 향을 피웁니다.

……


△ 김경영 더불어민주당 경남도당 부위원장(여성정치인권특위 위원장)


……

그리고 엄숙한 마음으로 추모합니다. 

다시는 빼앗기지 않겠다는... 

반드시 지키겠다는...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우리 아이들을 위해, 

자손만대 우리 후손들을 위해, 


다짐을 합니다. 


이제 4월은 잔인한 달이 아닙니다. 

결의의 달이며 시작의 달입니다.

생동하는 4월입니다.  


모두 함께 더불어 나아가야 합니다. 


새날을 위하여. 



△ 김경영 씨가 팔의사창의탑에 묵념하고 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박근혜 후보는 부마민주항쟁 군사진압에 대한 사과와

진상규명 등의 요구에 대한 응답부터 하라

박근혜 후보진영에서 ‘부마민주항쟁기념식은 국민대통합 차원에서 박 후보가 꼭 가야 한다’는 입장이라 한다. 그리고 이번 주 중 ‘경남을 찾아 부마민주항쟁기념식에 참석할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고 14일 보도되고 있다.

먼저, 본회는 18일 창원시 마산의 부마민주항쟁기념식에 박근혜 후보는 물론 어느 대선 후보도 초청한 사실이 없음을 밝힌다. 과거사위원회의 결정에 의하면 박 후보는 부마항쟁 관련 국가 폭력 및 인권침해의 가해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3년간 역사적 재평가와 진상규명이라는 요구를 외면해 왔고, ‘부마민주항쟁’ 언급조차 없었으며, 사과 한 마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기념사업회가 박 후보를 먼저 초청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는 쓸개 빠진 일이다. 박근혜 후보가 먼저 대선후보라는 권위를 내세워 기념식에 참석 하겠다면, 이는 정치도의나 인간에 대한 예의에 크게 벗어남을 분명히 밝힌다.

15일 박근혜 후보가 새누리당 경남선대본부 출범을 위해 마산에 온다고 한다. 박 후보는 그간 여러 차례 우리가 요구한 바에 대해 먼저 답부터 해야 한다. 우리의 요구를 다시 간추리면 박정희 정권의 ‘반국가적 부마 폭도 난동’ 규정과 이에 대한 합법적, 불법적 군사진압이 잘못이라는 것, 반유신 부마항쟁이 헌법적 가치 회복을 위한 주권자의 정당한 민주화 운동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부마항쟁 진압과 수사 과정의 사망, 인권유린에 대한 정중한 사과와 이에 대한 책임을 표명하는 것, 이후 후속 조치로 부마항쟁 관련 전면적 진상규명과 부산·마산시민 명예회복, 배상과 예우 등에 대한 제도적 입법 조치 등이다.

참고로 사업회는 해마다 기념식을 하면서 정당을 불문하고 경남도지사, 도의회 의장/의원, 창원시장·의회의장/의원과 지역구 국회의원 등 선출직 대표들을 초청해 왔다. 지난 해 마산지역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야당 국회의원들의 부마항쟁특별법 발의에 호응하여 한나라당 경남도의원들이 부마항쟁특별법 통과촉구 결의안을 채택했지만 한나라당은 이를 부결한 바 있으며 올해 다시 재발의 추진 중이다.

2012년 10월 14일

(사)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 부마항쟁기념사업회에서 보내온 성명서 전문입니다. 저는 부마기념사업회 회원은 아니지만(그 당시 중학생이었음), 성명서 전문에 깊이 공감하는 바라 여기 게재합니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

부마민주항쟁보다 앞서서 유신반대시위가 모의됐었다는 증언이 새롭게 나왔다. 12월 5일 오후 6시 30분, 경남 창원 ‘웨딩의 전당(구 가든예식장)’에서 열린 <부마항쟁증언집 마산편: 마산, 다시 한국의 역사를 바꾸다>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이 증언집에 이러한 증언들이 수록됐다.

<증언집>은 가나다 순으로 40여 명의 증언자들이 구술한 녹취록을 실었는데 그중 제일 첫 번째로 올라온 김용백 신부(현 마산월영성당 주임신부)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경남대 학생이던 최갑순, 옥정애 씨 등이 주도하여 유신반대데모를 준비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9월 말에 경남대 방송실을 점거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위를 벌이기로 했으나 함께 하기로 했던 남학생들이 모이지 않아 실패했으며, 다시 10월 22일을 디데이로 잡고 가톨릭학생회, YMCA, JOC, 각 서클장들과 학과장들을 비밀리에 만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 정성기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의 인사 모습.

보다 치밀한 계획과 발로 뛰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들은 정성기(현 경남대 교수), 경남대 극예술연구회 회장 이윤도 씨, 신정규 씨 등과 합세해 거사계획을 세웠는데, 10월 22일을 디데이로 잡은 것은 그때가 중간고사 시기라는 점을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김 신부는 증언록에서 “처음에 두 여학생이 나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서 너희들 그거 하면 죽는 줄 아느냐? 하고 물으니, 다 안다면서 감수하겠다고 했다. 처음엔 말렸지만 젊은 처자들이 의지가 너무 강하고 죽음도 불사한다는데 안 도와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 신부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은 18일 마산에서 항쟁이 일어나기 이틀 전에 부산에서 먼저 시위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18일 저녁 상남성당에 모여 선언문 등을 완결 짓기로 했다. 그런데 경남대에서 먼저 터진 것이다.”

18일 오전 1교시를 마치고 학교를 빠져나와 유인물 작업을 하던 두 여학생은 학교에서 데모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택시를 타고 부랴부랴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1차 시위를 마치고 교내에 흩어져있던 학생들을 다시 규합해 거리로 나왔다.

당시 같은 경남대 학생이었던 한 증언자는 “여학생 둘이가 정말 대단했다. 우리가 미적거리고 있으니까 ‘남자××들이 × 달고 뭐하는 거냐?’면서 호령을 하기에 ‘여학생들도 저러는데 우리가 이래서 되겠나’ 해서 용기를 내 다시 모였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 두 여학생은 그러나 학생들이 거리로 진출해서 마산시청을 거쳐 3․15탑 주변에서 경찰과 대치하던 초반에 연행되고 만다. 시위대열의 선두에서 선동을 하고 있던 이 두 여학생을 경찰이 기습적으로 체포해 경찰차에 싣는 과정에서 십여 명의 남학생들이 함께 연행됐다.

▲ 한 참가자가 증언집을 읽고 있는 모습.

최갑순 씨의 증언에 따르면 “남자친구와 가포해수욕장에 데이트를 다녀오다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고 있는 통에 길이 막혀있던 한 쌍의 연인도 그때 함께 체포됐는데 부산 계엄사까지 함께 갔다. 나중에 어떻게 됐는지 소식을 모른다”며 안타까워했다.

스무살 가량의 그 여인은 가방에서 조약돌이 나왔는데 ‘애인과 가포에 갔다가 해변에서 주운 것’이라고 해도 경찰은 막무가내로 시위용품으로 몰아 마산경찰서를 거쳐 부산 계엄사까지 끌고 갔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다른 증언자의 증언에도 들어있었다.

이 두 여학생은 입고 있던 바지와 치마가 다 찢겨질 정도로 난폭하게 연행되었는데, 마산경찰서에서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온갖 고문과 폭력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이년들은 애도 못 낳게 만들어야 된다”는 욕설과 함께 자행된 고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옥정애 씨는 증언에서 “79년 여름방학이 지나면서 시위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유신정권은 택시에서 박정희 대통령 욕을 한 승객을 신고한 택시기사가 포상(개인택시)을 받는 용납할 수 없는 단계까지 갔다. 누군가 성냥불 하나만 던지면 확 일어날 것 같은 상태였다”고 회고했다.

그녀에 따르면 김용백 신부 외에도 최동호 교수(현재 고려대), 고 이선관 시인 등이 모의에 조언을 주었으며, 학생들 중에는 이신모, 학보사 편집장 김명섭, 송창호, 정인권 씨 등 여럿이 함께 했는데 구체적인 계획은 두 여학생과 정성기, 신정규 씨가 짰다.

이들이 짠 계획을 보면 ‘먼저 방송실을 점거한 다음 최갑순이 마이크로 학생들을 모으고, 1차 시위로 교문 앞 진출을 시도하다가 흩어지면 2차로 마산의 상징적인 장소인 3․15탑으로 집결, 그때부터는 마산시민들의 몫으로 저녁까지 시위가 이어지면 3차 집결장소로 퇴근시간에 맞춰 수출정문으로 간다’는 식이었다.

그녀는 “그런데 갑순이가 전화를 하고 오더니, ‘큰일 났다. 부산에서 일이 크게 터졌다는데 그 여파가 마산에도 올까봐 휴교령을 내린 모양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세운 계획 터트려보지도 못하고 막 내리는 거 아니냐’면서 안절부절 했다. 급히 택시를 타고 학교로 갔다”고 말했다.

▲ 허성무 부지사가 축사를 하고 있다.

한편, <증언집>에는 부마항쟁에 시위대로 참여했던 인사들 뿐 아니라 전경으로서 반대편에 서있었던 사람들의 증언도 몇 편 실렸다. 이들의 증언은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 MBC, 경남매일 등에서 근무하던 기자의 증언도 3자적 관점에서 실렸다.

무엇보다 시선을 끄는 것은 소문으로만 돌던 부마항쟁 희생자의 유족의 증언이 <내 아버지 죽음의 진실, 32년 만에 밝힌다>란 제목으로 실렸다는 것이다. 경찰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증언자의 부친을 부검한 다음 서원곡에 가매장했다.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여러 사람이 축사를 했지만 이은진 교수(경남발전연구원장)의 축사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분류되는 사람들보다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움직였을 때 바뀐다.”

그래서 그는 “세상이 어떤 면에선 불공평하다”고 말했다. 부마항쟁증언집도 결국 정부가 위험하다고 분류한 사람들의 취조기록이나 공판기록을 토대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며 앞으로 이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부마항쟁에 앞서 데모를 주도적으로 기획했던 두 여학생이 10월 18일 시위초반에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한 시민들로부터 둘 중 하나는 죽었을 거란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곧이어 10․26이 터졌고 독재자 박정희가 죽고 난 후 이들은 무사히 사회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최갑순 씨는 여성운동에 투신해 경남여성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창원여성문제상담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옥정애 씨는 중등교사가 되었으며 전교조 조합원으로서 노조활동에도 대단히 열심이라고 한다.

<증언집> 제목처럼 ‘두 번이나 독재자를 쓰러뜨린’ 역사의 중심에 어린 두 여학생이 있었다는 사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ps; 1. 주대환 씨(한국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는 이은진 교수의 말에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사실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말로 해석을 달았다. <증언집>에는 그의 증언도 들어있다. 그는 구치소에서 박정희의 죽음 소식을 듣고 “기쁘지 않느냐?”는 간수의 물음에 “사람이 죽었는데 무엇이 기쁘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2. 주대환 씨처럼 최갑순 씨도 구치소에서 박정희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통방(수감자들끼리 창살을 통해 연락을 취함)을 해서 기도를 할 것을 제안해 “불쌍한 영혼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마산사람들은 두 번이나 독재를 무너뜨렸지만, 대개 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이 <증언집>에는 자기 아버지의 말을 믿고 애인을 밀고했다가 그 애인이 물고문, 전기고문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미쳐버린 이야기도 실려 있다. 증언자는 그러나 “나는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잘 살고 있는데 그녀는 그렇게 돼버려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고 말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서울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을 때 그녀의 오빠는 “만나면 괴롭기만 할 거다. 과거의 기억은 잊는 게 좋다. 만나지 말고 그냥 떠나 너라도 잘 살아라”고 했다 한다. 창원대 출신인 그는 현재 인천에 살고 있다.

4. 북마산파출소 등을 불태운 당사자의 증언도 생생하게 실려 있다. 당시 그는 18세의 청년이었다. 그는 “그때 정말이지 희열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잠겨있던 울분이 폭발하면서 느낀 전율 혹은 오르가슴 같은 것이었을지도.  

5.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79년 당시에는 경찰이나 중정, 보안대보다도 헌병대가 민간인 사찰에서 큰 활약을 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읽고 느낀 바로는 헌병들이 경찰보다 훨씬 우수한 자원이 많았던 듯하다. MBC 기자였던 신용수 씨의 증언에서 그걸 느꼈다. 첨언하면, 일정시대 헌병들이 생각났다.

6. 그러고 보니 나도 부마항쟁을 목격한 사람 중의 하나다. 당시 나는 중3으로서 부산에 고등학교 시험을 치러갔다가 탱크와 군인들이 도열해있는 것을 목격했다. 후일에 내가 보았던 현장을 찍어놓은 사진으로 안 것이지만 탱크는 장갑차였다. 당시만 해도 경북의 어느 골짜기 산골소년이었던 나는 탱크와 장갑차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 해운대에 숙소를 정하고 동백섬에 바람 쐬러 나갔는데 갑자기 써치라이트가 켜지면서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같은 수하가 들려왔다. 당연히 나는 손을 들고 덜덜 떨면서 수백 개나 되는 계단을 올라갔다. 어찌나 멀든지. 철모를 쓴 두 명의 군인 앞에서 나는 빌었다. “저 중학생이에요. 내일이 시험인데 저 멀리 시골에서 왔어요. 살려주세요.”

그들은 “밤에는 위험하니 나다니지 마라. 빨리 가서 자거라” 하면서 보내주었다. 정말이지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렸다. 너무 놀라서 다음날 어떻게 시험을 봤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때가 아마도 10월 18일 경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1주일 정도 지나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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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이렇게 좋은 행사에 이렇게 사람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10월 8일 오후 3시, 경남민예총이 주최하고 주관한 토크콘서트 ‘노래 하나 이야기 하나’는 우리 지역에서는 실로 보기 힘든 기획이었지만 아쉽게도 행사장에는 사람이 별로 모이지 않았다.

대략 30여명이 듬성듬성 앉은 3.15아트센터 국제회의장의 드넓은 객석은 썰렁하다 못해 황량해보였다. 하지만 사회자는 별로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는 “객석을 가득 메워준 청중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인사를 보냈다. 사회자는 김갑수였다.

사회자도 말했듯이 오해를 할 것 같아 미리 밝히자면 그는 탤런트 김갑수가 아니다. 그러나 그도 실은 방송인 출신이다. 아마도 기억하는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그는 마산MBC에서 오랫동안 토크 프로그램 진행을 맡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그전에 그는 DJ(디제이) 출신이었다.

..... ▲ 사회를 맡은 김갑수 씨 @사진. 박영주 지역사연구가


노무현 후보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 열린우리당 캠프에 합류했고 그로부터 한동안 서울에서 정치물을 먹던 그는 2008년 영국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다가 최근에 귀국했다. 꽤나 길다고 할 수 있는 세월 마이크를 놓았던 그는 그러나 디제이 출신답게 여유가 있었다.

이날 김갑수 씨와 대화를 나눌 패널은 김용기 경남대 교수였다. 맨 먼저 김용기 교수가 불려나왔다. 놀랍게도 김용기 교수는 이전에 디제이 출신이었다고 했다. 그것도 잠깐 한 것이 아니라 무려 3년이나 디제이생활을 했다고 고백한 것이다. 젊은 시절의 3년은 노년의 30년과 맞먹는 세월이다.

▲ 김용기 경남대 교수 @사진. 박영주

그러고 보니 역시 김용기 교수의 토크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착 가라앉은 듯이 하면서도 낭랑한 목소리가 제법 디제이 출신답다. 게다가 그의 입술을 타고 술술 흘러내리는 대중음악의 역사는 “아, 이이가 진짜 디제이가 맞구나!” 하고 실감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죽이 척척 맞았다.

그리고 이어 불려나온 초청자 김의권 씨. 중간에 소개되어진 바에 의하면 그는 부마항쟁의 전설이라고 불리어지는 최갑순 씨의 남편이라고 했다. 여기서 잠깐 최갑순 씨에 대해 언급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어쨌든 이날 토크콘서트의 바탕에 깔린 주제는 부마민주항쟁이었으니까.

10.18부마민주항쟁 당시에 경남대 학생이었던 그녀는 옥정애 씨와 더불어 부마항쟁에 기름을 부은 사실상 주동자의 한사람이었다. 여러 증언들에 의하면 악바리 같은 그녀들 두 사람 때문에 남학생들이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느냐” 하면서 결의를 다지고 거리로 뛰쳐나왔다고 한다.

이들 두 여학생은 10월 18일 시위 초반에 체포돼 이후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맛보게 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 두 사람과 더불어 몇몇의 경남대생들이 10.18 이전에 따로 유신반대시위를 모의했었다는 사실이다. 김모 신부의 증언에 의하면 10월 22일이 그날이었으며 이 모의에는 김의권 씨도 한다리 걸쳐있었다 한다.

▲ 김의권 씨 @사진. 박영주

아무튼 김의권 씨는 그런저런 인연으로 82년 최갑순 씨와 결혼했으며 장성한 아들과 딸을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이때 김용기 교수가 익살스럽게 끼어들었다. “보통 방송에서는 이 대목에서 전화 연결을 하던데?” 당황한 김갑수 씨 왈, “하 이거 여긴 지금 시스템도 안 돼 있고, 그렇다고 제 휴대폰으로 어떻게 해서 할 수도 없고….”

김의권 씨도 디제이 출신이었다. 그는 베테랑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왕년의 가수들은 우리의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도록 만들어주었다. 마치 입안에 구슬이라도 몇 개 집어넣고 굴리는 듯이 미끄러지는 발음들. 옛날 트랜지스터로 초롱초롱하게 ‘별밤’을 들었던 이라면 알 것이다.

마지막 초청자는 이영범 씨. 이날 출연자들 중에서 유일한 현역이다. 그는 현재 마산 창동골목의 ‘청석골’이라는 주점에서 디제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창동상인회에서 운영하는 음악방송에서도 디제이를 맡고 있다. 현재 이 방송은 인터넷을 타고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필자도 청석골에서 디제이를 하는 그를 본 적이 몇 번 있는데, 마치 이종환을 닮은 그러면서도 이종환보다도 더 매력적인 그의 목소리가 참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예의 미끄러지는 발음. 사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나로 말하자면 외국가수의 그 미끄러지는 이름들이 경이로운 추억이다.

이영범 씨가 들려주는 마이클 잭슨의 빌리진은 실로 우리를 추억의 세계로 몰고 갔다. 암울했던 시절이었지만 마이클 잭슨의 이 노래는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을 매료시키며 위로를 주었던가. 그 노래를 들으니 아련한 학창시절이 다시금 선명하게 잡힐 듯이 떠오른다.

......▲ 직접 엘피판을 들고와 틀어주는 현역디제이 이영범 씨 @사진. 박영주

추억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70년대와 80년대에 유행했던 노래 한곡을 들으며 나누는 이야기들은 정말 아름다웠다. 청바지, 통기타, 그리고 금지에 관한 이야기들. 70년대는 무수한 금지가 남발되었던 시절이다. 이미자, 김추자, 양희은의 노래들 그리고 젊은이들의 긴 머리와 야간통행이 금지되었던 시절.

그 시절 노래와 함께 되새겨보는 그 시대는 그러나 아름답게 다가왔다. 추억의 힘이었을까. 두 시간 가까운 토크콘서트는 청중들을 충분히 사로잡았다. 여기에 하나 더.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두 시간은 단 1초의 편집도 필요 없이 방송에 내보낼 수 있을 만큼 기획이 완벽했다.

그리하여 처음에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좋은 행사에 이렇게 사람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어떻게 하다가 이 콘서트의 주관자로 경남민예총과 함께 이름이 오르게 된 100인닷컴의 운영자로서 실로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좋은 프로그램인 줄 알았으면 좀 더 노력했을 것을. 이름만 올려놓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다못해 사전 홍보기사 하나 쓰지 못했으니 정말 할 말이 없다. 이 글을 빌어 이 행사의 기획과 진행을 도맡아 한 경남민예총과 ‘노래하는’ 김산 씨에게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그러나 굳이 위로의 말씀을 드리자면 정말이지 지역 문화계로서는 획기적인 기획이었다는 것, 처음이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정말 깔끔한 진행이 돋보였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용이 알차고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습관대로 비판적 견해도 하나 밝히고 가자.

..... ▲ 왼쪽부터 사회자 김갑수 씨, 패널 김용기 씨, 초청자 김의권 씨 @사진. 박영주

서태지까지 나온 것은 너무 과한 욕심 아니었을까. 아무래도 난센스였다는 생각이다. 10.26사태에 이어 12.12사태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이 등장할 무렵 함께 나온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에서 그쳐주었다면 더없이 좋았으리란 생각이다.

아니 좀 더 욕심을 부리더라도 농촌의 젊은이들이 화려한 도시로 몰려들며 겪게 되는 애환을 다룬 1990년 조용필의 노래 ‘꿈’ 정도까지도 좋았겠다. 어떻든 콘서트는 너무 좋았다. 노래와 함께하는 토크콘서트를 보지 못한 우리 경남블로그공동체의 여러 회원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을 정도로.

그리하여 다시 한 번 경남민예총이 이런 행사를 기획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한다. 그때는 여러 시민들과 더불어 많은 블로거들이 꼭 참여해주기를 권하고 싶다. 속된 말로 정말 쓸 게 많다. 블로거들이야 늘 그런 게 고민 아니던가. “오늘은 뭘 쓰지?”

그러나 무엇보다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행복할 것이다.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