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4.01.14 미국 밀항기 by 파비 정부권
  2. 2012.06.21 청바지, 노동자의 작업복에서 권력이 되기까지 by 파비 정부권 (6)
  3. 2011.03.23 유엔의 리비아개입은 또다른 학살인가 by 파비 정부권
  4. 2009.05.11 진중권, 한겨레와 손석춘 완전 맛이 갔네요 by 파비 정부권 (4)
  5. 2008.12.25 크리스마스, 단 하루를 위한 휴전 by 파비 정부권 (2)
  6. 2008.11.12 조선일보 혼내려다 내양심 털나겠다 by 파비 정부권 (25)
  7. 2008.11.06 오바마가 좌파라니요? by 파비 정부권 (9)
  8. 2008.10.12 하재근, "이명박 교육정책은 대한민국 패망의 길" by 파비 정부권 (37)

어젯밤 꿈을 꿨다. 미국에 밀항하는 꿈이었다. 배를 타고 갔는데, 앞이 넓고 뒤가 좁은 낙엽 혹은 오징어 모양의 배였다.

 

평평한 갑판에 경비행기 한대가 내렸다 떴다하기를 반복했었는데 항공모함이었나? 아무튼 배는 무지하게 빨랐다. 물살을 가르는 속도감이 엄청났다. 바람에 창문이 자꾸 열려서 그거 닫는다고 일어났다 앉았다 하다가 나중에는 귀찮아서 자그마한 막대기를 한 개 구해 고정시켰다.

 

사나흘 걸린다고 했는데 금방 미국 북쪽의 어느 해변에 도착해서 좀 이상하게 생각은 했다. 꿈속에서도 북쪽 근처 어디라고 해서 그럼 시애틀 근천가?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그마한 승용차 두 대와 여자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자는 우리의 여권을 일일이 확인했다. 나는 꿈속에서, 아니 밀항하는데 여권은 왜 확인하는 거지? 하고 생각했다.

 

그녀들은 우리에게 차를 한대 넘겨주었고 우리는 그 차에 탔다. 우리와 함께 간 일행(우리는 네 명이었는데 나를 빼고 모두 여자였다)이 그녀들에 돈을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다른 우리의 일행도 돈을 나누어 주었다. 그녀는 1달러짜리 석장씩 주었고 그 앞에 여자는 얼마를 주었는지 잘 모르겠다. 더 많이 주었던 것 같다. 나는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손을 흔들고 우리는 차를 달려 그 자리를 떠났다. 그때 나는 두 가지 걱정을 했다. 하나는 우리가 다시 돌아가라 때 배가 별 일 없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고, 하나는 배가 기다리지 않을 경우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맞아 여권이 있으니 비행기는 타고 갈 수 있을 거야, 하고 안도했다. 그래서 밀항하는데 여권을 검사했던 거였나? 그런데 그녀들은 뭐지? 얼굴도 기억나는데…… 브로커? 그런데 웬 여권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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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파비 정부권
TAG , 미국, 밀항

본 도서 리뷰는 TISTORY와 알라딘이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
청바지변천사,
자유와 저항에서 구속과 권력으로

청바지는 원래 작업복으로 태어났다. 노동계급의 작업복. 청바지가 탄생할 즈음, 1848년은 세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한 해였다. 혁명의 소용돌이가 유럽을 휩쓸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2월 혁명은 독일의 3월 혁명으로 이어지며 전 유럽을 혁명의 열병 속으로 밀어 넣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을 발표했다. 이 짤막한 한 권의 책은 유령처럼 나타나 성경을 능가하는 독자를 확보하며 세계를 양분했다.


1848년은 미국에게도 매우 중요한 한 해였으며 전환기였다. 미국은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콜로라도, 네바다, 아리조나, 뉴멕시코, 캘리포니아를 얻었다. 1848년 어느 날,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스코틀랜드 출신 제임스 윌슨 마셜은 제재소의 방수로를 점검하다 번쩍이는 물체를 발견했다. 골드러쉬의 시작이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때 유태인 리바이 스트라우스도 그 대열에 합류했는데 그는 금을 캐기 위해서가 아니라 천막촌으로 변한 캘리포니아에 천을 팔기 위해서였다. 

최초의 청바지는 천막용 천으로부터
그러나 리바이의 천은 품질문제, 재고누적 등으로 곧 커다란 곤경에 처한다. 모든 성공담이 그러하듯 위기는 늘 기회와 함께 찾아온다. 리바이 스트라우스에게도 기회는 위기 속에 숨어 찾아 들었다. 납품 클레임에다 엄청난 재고, 산더미 같은 빚과 밀린 임금에 허덕이던 리바이의 눈에 광부들의 낡은 작업복이 들어왔다. 천막 재고는 당장 캘리포니아 노동자들을 위한 바지로 변신한다.

질기고 튼튼한 작업복은 노동자들로부터 폭발적인 호응을 받았다. 1853년 리바이는 <Levi Strauss Firm>을 설립했고 후일 Livi's사의 시초가 되었다. 리바이스의 청바지는 진화했다. 뻣뻣하고 무겁고 거친 천막용 회색 범포는 프랑스 님 지방에서 생산되는 서지 드 님(데님)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제노바의 이름을 따 진(jean)이라고도 불리는 보다 부드러운 천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뱀을 피해 일 해야 하는 광부들을 위해 푸른 물감을 들였다. 


청바지가 푸른색으로 태어난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광산노동자들의 작업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유는 여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청색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서민들의 색이었다. 바스코다가마(Vasco Da Gama)가 항로를 개척하여 햇빛에 잘 바래지도 않으며 거친 노동에 긁히거나 때도 잘 타지 않는 청색염료 인디고를 얼마든지 값 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도록 해 준 이후로 청색은 서민에게 친숙한 그리하여 너무나 평범한 색이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블루칼라의 옷이 된 것이다.

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 - 10점
TBWA KOREA 지음/알마
 “인간은 상징을 조작하는 동물이다.” 
                        상징은 기호의 한 형태다. 
                인간은 옷으로 그 ‘시대’의 생각을 말할 수 있다.

    청바지는 노동자의 끈기와 강인함에서 새로운 상징으로 진화해왔다.
 

    
청바지 사회문화사로 세상을 읽다
     프래그머티즘에서 팍스아메리카나로,
          제임스 딘에서 양희은으로,
          노동에서 여가로,
     미국에서 세계로,
     실용에서 사치로,
          마초에서 페미닌으로, 
     반항에서 제도권으로,
     해방에서 구속으로,
          변방에서 중심으로,
     대량생산에서 수제로…

청바지 150년의 역사를 기록한 책

《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는 캘리포니아 광부의 작업복으로 태어난 청바지가 어떻게 진화하고 발전했으며 세상을 점령했는가에 대한 지난 150여 년의 역사를 감각적인 디자인과 문장으로 엮어놓은 책이다. 이 책을 보는 순간,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마치 한편의 다큐멘타리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아니 그것은 착각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이 책은 다큐멘타리 영화다. 한 편의 기록영화를 감상하듯 나는 이 책을 단숨에 읽어 치웠다.

표지부터가 스타일뤼시한 이 책의 저자는「TBWA KOREA」다. 티비와 코리아? 이름부터가 생소하면서 남다르다. TBWA KOREA는 광고회사다. 매출기준으로는 업계 2위, 평판에서는 업계 1위의 매우 괜찮은 광고회사다. 무엇보다 이들은 세상에 화젯거리를 던질 줄 아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현재보다는 미래가 더 밝은 광고회사다. 우리 눈에 익숙한 광고를 수없이 만들어 낸 이 회사는 그러나 단순한 광고회사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그들은 거부의 증표 중 하나로 이 책을 냈다. 

우선 이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감상하는 것이라는 필자의 느낌을 확인하듯 저자 소개부터 독특하게 시작한다. 

함께한 사람들
《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는 7명의 TBWA KOREA의 차애리, 허진웅, 윤혜진, 김현우, 이상민, 조주연, 양희선이 글을 쓰고, 1명의 사람 좋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TBWA KOREA 박승욱 부장)가 진행했고, 1명의 익스큐티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TBWA KOREA 박웅현 ECD)가 총감독을 맡았다.


마치 영화의 오프닝이나 엔딩에 등장하는 출연진과 제작진의 자막 같지 않은가? 이 오프닝을 접하는 순간 우리는 “블랙홀 같은 눈빛”과 “스펀지 같은 감수성”에 빠질 각오를 해야 한다. “눈부신 아이디어의 서식지”를 탈출한 이 책은 읽는 내내 “롤로코스터를 타는” 듯한 현기증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실로 이 책은 실존하는 찬란함으로 빛날 뿐 아니라 젊은 시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기까지 한다.

젊음과 자유와 저항의 상징 청바지
우리의 젊은 시절을 대표하는 것이 무엇이었던가? 생맥주, 통기타와 음악다방의 MC,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상징으로 만들어내는 청바지. 청바지가 없이 어떻게 젊음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캘리포니아 광부의 작업복으로 세상에 태어난 청바지는 그러나 우리의 젊음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규제와 구속 대신에 자유와 반항의 상징으로 다시 태어났다.

절제된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으로 대공황과 양차대전을 견디어낸 프롤레타리아의 청바지도 드디어 자유를 갈망하기 시작한다. 팍스아메리카의 영광과 함께 청바지를 입은 제임스 딘이 등장했다. 그는 자유와 반항의 아이콘이었다. 1960년대를 달구었던 변혁의 회오리 바람 속에도 청바지를 입은 젊은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청재킷과 청바지에 전쟁과 핵무기, 침략을 반대하는 구호를 페인팅 했다. 

평화와 평등을 외치는 그들로 인해 “가장 미국적이던 청바지는 미국을 거부하는 상징으로 변했다.” 노동의 복장이 투쟁의 복장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하여 청바지는 “가장 혁신적인 의복이라는 지위를 얻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1980년대에 청바지는 “움직이고 달리는” 투쟁현장의 복장으로 등장했다. 청바지는 자유와 저항의 목소리를 뿜어내는 젊음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2000년대에 이르러 청바지는 다시 한 번 변신을 시도한다.

새로운 종족 보보스,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 KTF의 광고 카피처럼 청바지를 입은 CEO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일명 보보스라고 불리는 신종 엘리트들로서 칼라 없는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캐주얼을 신었다. 이들은 부르주아의 삶을 살지만 보헤미안의 정신세계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헤미안적 저항정신을 보다 전면에 내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물질주의에 반대하는 부자들” “엘리트주의에 반대하며 자란 엘리트”, 이것이 이들에 대한 수사다.

보보스는 WASP(White Anglo Saxson Protestant)라고 불리는 전통적인 기득권 집단이 아니면서 교육 받은 엘리트로서 부르주아의 영토에 진입한 새로운 종족이었다. 이들의 등장은 블루진에도 상당히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고가의 프리미엄진이 등장했다. “보보스는 하위 계층과 같은 품목을 공유하지만 보다 고가의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다. “전혀 다른 지점에 존재하던 보보스와 청바지의 만남은 청바지 역사에 큰 전환점을 만들었다.”

누구라도 잘어울리는 "청바지와 컨버스"의 문화코드에 비해 개성 강한 프리미엄진과 짝꿍 하이힐은 또 하나의 코드다.


19세기 프롤레타리의 작업복으로 탄생한 청바지는 팍스아메리카나의 시작과 함께 검은 음료 코카콜라와 헐리우드와 더불어 세계를 점령했다. 1929년 이전, 청바지는 패셔너블한 옷이 아니었다. 특별한 격식이 필요하거나 멋지거나 스타일뤼시한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저 거친 노동환경에 적합한 질긴 작업복이었다. 그러나 청바지는 대공황을 거치면서 자신만의 상징을 획득했다. 바로 ‘끈기’와 ‘강인함’그리고 ‘힘’이었다. 

대공황으로 무너져가던 미국을 살린 노동계급의 상징성에 카우보이의 멋과 실용주의와 보보스의 철학이 덧칠해졌다. 청바지는 진화했다. 노동현장에서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태어난 블루진이 이제 세계를 주름잡는 팍스아메리카나와 더불어 점령군이 되었다. 블루진은 마지막 식민지라는 여자의 세계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 남성성을 대표하던 청바지는 여자들도 점령했다. 프리미엄화되고 개성이 강해지지기 시작하면서 블루진도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청바지는 여성을 두 개의 계급으로 분열시켰다
《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는 마지막 장에서 여자들이 어떻게 청바지에 구속당하는지에 대해 선명한 LCD화면처럼 자세히 보여준다. 블루진이 하나의 권력이 되기 위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에 대한 디테일을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마지막 임무다. 블루진은 최후의 식민지 여성을 새로운 식민지로 삼았다. 청바지는 여성들의 몸을 중세의 코르셋에서 풀어주는 대신 그녀들의 종교가 된 것이다. 

그리고 청바지는 여성들을 새로운 계급으로 분열시켰다. 이 책은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미국광산노동자. 1981년 브룩쉴즈는 "나와 캘빈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란 캘빈 클라인 블루진광고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전지현이나 정려원처럼 축복받은 몸매를 자신 있게 드러내고
어떤 스타일의 청바지든 멋스럽게 소화해내며
우월감을 느끼는 계급과,

그런 그녀들의 몸과 자시의 몸을 번갈아보며 열등감을 느끼고
몸을 움츠리며, 노출 패션을 조장하는 더운 여름이 한없이
원망스러운 계급”


계급간의 괴리가 생기자, 청바지는 (이전에 노동자 계급의 편에 섰던 것처럼) 열등감을 느끼는 계급의 편에 섰다.


다양한 스타일과 색으로
몸매를 보정해주고
청바지가 가진 스타일뤼시함을
그녀들에게도 선물했다.
청바지의 다양한 스타일과
컬러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중세여성의 코르셋과 재단사를 풍자한 그림


그러나 이런 친절한 디테일을 꼼꼼히 들여다볼 열등한 계급의 여성들이 과연 몇이나 될지는 의문이다.  아무리 뚱뚱하고 짧은 다리를  소유한 여자라도 꼭 전지현과 같은
블루진을 고집하려고 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이면서도 늘 부르주아의 영토를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른지….
블루진 다큐《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의 마지막 나레이션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데님 바지를 갖추고 있는 곳.
현대백화점 무역센터 5층. 청바지 편집 매장 ‘데님바’
그곳에는 9개 나라, 50여 개 브랜드, 450여 가지 스타일의
바지가 가지런히 걸려 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청바지는
과연 얼마나 될까
청바지를 보고 있는 여성들이
청바지를 고르는 것일까
청바지가 이 여성들을 고르는 것일까?
 
 

우리는 과거를 읽었다, 미래를 읽는 건 독자들의 몫?
이 책은 별도로 어떤 결론을 내려고 애쓰는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을 만들어낸 이들이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이들은 이 책의 결말이나 결론도 소비자들의 몫으로 남겨두려고 하는 것일까? 청바지의 미래까지 포함해서…. 경쾌하고 발랄한 문체와 신선한 디자인과 편집은 이 책의 장점이다. 그러나 그 경쾌함과 발랄함 뒤에는 메시지의 모호함이 꽤나 아픈 단점으로 투영된다. 어쩌면 그조차도 광고 전문가들인 저자들의 의도일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또 다른 문제점을 하나 발견했다. 끈질기고 강인한 프롤레타리아의 상징성과 자유와 저항, 재해석과 창조 의지를 담은 청바지를 스타일뤼시하면서 자극적인 디자인으로 편집한 이 책이 매우 아이러니한 결함을 하나 갖고 있었다. 스타일에 치중한 탓인지 제본이 조금 허약하다. 두세 차례 책을 뒤적이고 난 지금 청바지 무늬로 포장된 이 책의 일부가 틑어지기 시작했다.

스타일뤼시하면서도 100년이 가도 틑어지지 않을 튼튼한 책을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청바지처럼…. 청바지처럼 너무나 친숙하고 그리하여 너무나 평범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한 책이라면. 그러나 어쨌든 이 책의 획기적인 시도는 성공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새로운 도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파비   (주) “ ” 안은 《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본문 인용/이미지도 모두 《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속 사진  

Posted by 파비 정부권

참 델리케이트한 문젭니다. 일부러 델리케이트란 생경한 용어를 썼습니다. 그만큼 심경이 복잡합니다. 카다피는 어떤 사람인가? 이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한때 운동권들은 카다피를 쿠바의 카스트로처럼 대단한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아마 자료를 어렵게 찾아야할 테지만, 그에 대한 칭송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심지어 고 리영희 선생조차도 카다피에 대한 환상을 가졌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후 바로 나온 <리영희 평전>의 서평에서도 저는 그 부분을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리영희 선생의 잘못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시계가 반미의 시간에 정지해있었던 것은 그분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사상하고, 오로지 지금 이 순간 리비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실에만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펙트는 엄청난 살상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카다피는 미쳤습니다. 그는 학살을 공언하고 있습니다. 시위대를 향해 발포는 물론 미사일에 전투기, 탱크를 동원한다는 미확인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미확인 보도들은 오래지않아 거의 모두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시위대도 무장했습니다. 이때부터 시위대는 반군으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시위대로 출발한 반군이 제아무리 무장을 한들 리비아 정규군을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생각해봅시다. 광화문에 모인 촛불시위대에 탱크가 주어졌다, 그걸 누가 운용할 수 있을까요?

아랍세계의 반미, 반제국주의를 카다피는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습니다. 그는 시위대를 외세의 앞잡이로 몰아붙이고, 탱크와 전투기를 동원했습니다. 언론의 보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반군으로 불리기 시작한 시위대는 리비아 정규군과 용병의 무차별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벵가지 일원으로 몰렸습니다.

저항하는 자는 모조리 죽여 피의 강을 만들겠다는 아들 카다피의 공언이 그냥 공언일까요? 아니라는 것은 다 알고 있습니다. 자, 이쯤에서 적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죠. 이웃집이 있습니다. 그 집의 가장은 매우 폭력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따라 유난히 시끄럽습니다.

술에 취한 폭력가장은 아내와 아이들을 마구잡이로 폭행합니다. 마침내 이성을 잃은 그는 칼을 집어들고 아내를 죽이려고 합니다. 순간 아이들이 앞을 막아서며 저항합니다. 그러나 속수무책입니다. 결국 아이들은 큰 소리로 이웃에 구조를 요청합니다. 이에 화가 난 폭력가장은 아이들마저 죽여 버리겠다고 큰소리칩니다.

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 집의 일이 남이 간여해서는 안 되는 개인적 영역이므로 그 집 담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걸까요? 자기 집안의 문제는 그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하는 것이므로 이웃이 개입하는 것은 정의에 어긋난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요?

한 블로거께서 제가 쓴 <리비아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차, 왜 생기나; 진보신당만 국제사회에 무력개입 촉구, 정부와 여타 정파들은 침묵>이란 기사에 대해 <또다른 학살을 요구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란 글로 비판했습니다. ‘학살을 요구하고 지지하는’이란 문장에 주목하면 이건 비난이며 심각한 명예훼손입니다.

우리가 학살을 요구하나요? 그는 제 글 외에도 <한겨레신문에 이렇게 실망한 적이 없었다>는 글을 올린 블로거 거다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다른 블로거도 ‘한겨레의 친 카다피 논조에 실망했다’며 ‘지금 이 순간 한겨레보다 카다피의 학살을 막기 위해 카다피군에 대한 폭격에 나선 사르코지의 폭력기가 더 휴머니즘적으로 보입니다’라고까지 말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블로거의 비판보다 거다란의 평가가 훨씬 더 가슴에 와 닿으니 확실히 세상을 보는 눈에 차이가 많이 나는가봅니다. 물론 다국적군의 공습으로 리비아 사태가 더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리비아는 내부 부족들간의 갈등문제도 심각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만약 카다피가 시위대를 향해 군대를 동원하거나 용병을 투입하고, 미사일, 탱크, 전투기까지 동원하는 야만성을 보이지 않았다면 다국적군의 무력개입을 우리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고, 다국적군이 출동하는 불행한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진보신당 대변인도 무력개입을 촉구하는 논평을 내지도 않았겠지요.

거다란의 말처럼 “상황은 너무나 심각했던 것”입니다.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고 있고, 더 많은 학살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북한 문제를 말씀하셨는데, 제 개인적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물론 북한의 민주화는 북한민중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지만, 리비아처럼 된다면 결론은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만약 남과 북이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 것 같습니까? 남한 민중이 탱크에 짓밟히고 전투기가 시위대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그리하여 남한정권이 인구의 3분지 1 정도는 몰살시키겠다고 호언한다면? 저는 기본적으로 이른바 운동권 출신들의 인권의식,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시각에 불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또다른 학살을 요구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에 실린 사진을 보니 아마도 <다함께>라는 국제사회주의자그룹(IS) 조직원들이 다국적군의 폭격을 중단하라는 시위를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만, 저는 거꾸로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카다피에게 학살을 중지하라는 시위를 한 적이 있는가?

제가 <100인닷컴>에다 <리비아사태를 바라보는 시각차, 왜 생기나; 진보신당만 국제사회에 무력개입 촉구, 정부와 여타 정파들은 침묵>이란 글을 올린 이유도 실은 앞에서 <다함께> 등과 같은 운동권 조직에 물어보고 싶은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하긴 뭐 국내문제도 많은데 매일 남의 나라 이야기나 하는 뉴스가 불만인 분들도 있긴 하겠습니다만.

아무튼, 미국이라서, 제국주의적 식민주의 야심이 문제이기 때문에, 거기에 석유가 있기 때문에, 이런 주장들도 많이 보긴 합니다만, 저로서는 도무지…. 6시에 약속이 잡혀있어서 토론은 이정도로 해야겠습니다. 급하게 생각나는대로 쓴 글이라 좀 거칠더라도 이해해주시를 앙망합니다. 그럼...

Posted by 파비 정부권
어제 12시경에 전화를 받고 나갔다가 이제야 집에 들어왔네요. 창녕에 사시는 아는 형님 아들이 죽었다는군요. 이제 겨우 21살인데… 농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식을 놓고 오열하는 형수님을 보고 있으려니 저도 눈물이 앞을 가리더군요. 정말 이런 초상은 처음이었습니다. 밀양의 화장장으로 마지막 떠나는 모습을 보고 마산으로 돌아왔지만,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최진실 씨의 안타까운 사연이 있은 지 오래지 않아 그 상처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엔 장자연 리스트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요. 조선일보의 방사장(나는 이분의 이름을 아직도 모름)이란 분의 이름이 리스트에 올랐다 해서 세상을 더 시끄럽게 했었지요. 그래서 조선일보가 민주당의 이종걸 의원을 검찰에 고발했다지요? 그런데 저는 왜 아직도 그 방사장이란 분의 이름을 모르는 것일까요?

어떤 언론도 가르쳐주는 분이 없으니…. 조선일보의 김대중 고문도 그냥 ‘그분’이라고만 하시더라고요. 주일에 성당에 앉아 졸다보면 신부님이 가끔 그런 표현을 쓰시거든요. ‘그분’…, 이때 그분이란 당연히 하느님을 말하는 것이지요. 하여간 한동안 연예인들의 자살 소식이 세상을 달구었었는데요. 그게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다니,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해 비몽사몽 하다가 머리를 깎고 간신히 정신을 차려 컴퓨터 앞에 앉아 이틀 동안 못 본 뉴스들을 검색하다가, 이런… 제길…, 아주 기분 나쁜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겨레신문이었는데요. 자기가 뭐 조승수 의원에게 후보를 양보했다나요? 졌으면 깨끗하게 진 것이고 진보진영 후보단일화로 승리한 것을 축하해주면 될 일이지 참 더러운 인간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민노당 최고위원 겸 대변인이던 박승흡 씨가 깽판 치며 낙선운동 분위기 조장한 걸로도 모자라더란 말입니까? 김창현 씨가 진보신당 사람들을 비롯한 반주사파 진영의 사람들에게 종북의 수괴로 지목당했던 전과가 있다는 건 사실일 겁니다. 기분 나쁘겠죠. 그러나 거기엔 아무런 근거가 없었던 게 아니잖아요? 김창현 씨가 그런 빌미를 제공했던 게지요.

김창현 씨가 자기를 주사파라 부르지 말고 자주파라 불러다 달라고 했던 기사를 본 기억이 나네요. 옳습니다. 그래 달라면 그래 주면 되는 거지요. 주체든 자주든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건 그렇고, 그런데 우습게도 지금도 종북논쟁을 선도하고 있는 것은 김창현 씨를 비롯한 민노당 사람들이란 겁니다. 

계속 그러시니 종북 문제가 도마에서 내려갈 생각을 안 하지요. 빨리 국 끓여먹고 설거지를 하던지 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하여간 기분 꿀꿀한데 엎어치기로 더 꿀꿀해졌습니다. 하여, 한마디 한마디 안 할 수가 없겠다 싶었는데, 마침 진보신당의 진중권 교수가 적절한 멘트를 날렸네요. 아주 훌륭합니다. 제 생각하고 아주 똑같습니다. 

손석춘 씨는 아마도 김창현 같은 부류의 사람들 눈치 보느라 그러는 거 대충 눈치 채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약칭 새사연)인가 하는 거 만들어 새로운 통합을 선도하면서 나름대로 정치적 지분을 노리는 뭐 그런 고수 흉내를 내보고 싶은 모양인데(그거 이미 이수호 씨가 시도하다 실패한 작전인 거 이분은 아직 모르시나?), 이분 아직 철이 덜 든 거지요.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이 같은 늙은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나이가 많아보이진 않으시던데.

저는 진보신당 아이디가 없어 댓글로 진중권 선수에게 이 글 좀 빌려간다고 허락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냥 여기다 갖다 붙입니다. 뭐 다른 언론들도,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진보신당 게시판에다 읊조린 진중권 교수의 일기를 많이들 인용하더라고요. 제가 볼 때 그 사람들도 일일이 허락을 맡는 것 같지는 않던데, 하여간 이 정도로 하고 저는 부족한 잠이나 채워야 할까 봅니다. 

어쨌든 졸면서 수고했어야 할 피로를 덜어주신 진중권 씨에게 감사드리면서.   파비 

손석춘 완전 맛이 갔네요
오로지 머릿속에 '미국' 밖에 안 들어있나 봅니다. 그러니까 달라이 라마가 미국의 전략에 놀아나는 측면을 왜 못 보냐는 얘기죠. 티벳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당연히 전 세계의 지지가 필요하지요. 세계의 강대국인 미국의 지원은 말할 필요도 없구요. 미국이 중국의 인권문제를 거론하기 위해 달라이 라마를 이용한다 할지라도, 중국에 심각한 인권문제가 존재하고, 그것에 대한 문제 제기가 보편인류적 관점에서 정당한 한, 그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는 거죠. 

또 하나 나를 기가 막히게 하는 얘기는 달라이 라마 망명 전의 티벳이 이상사회가 아니었다는 대목입니다. 이것은 정확히 티벳이 아직 봉건사회였을 때 사람의 가죽을 벗기던 습속이 있었다며 사람 가죽 사진을 서울 시내에 버젓이 전시했던 중국대사관측의 논리죠. 그러는 중국은 봉건사회 때에는 어디 건전했나요? 사람의 살점을 천 조각을 내서 처형하는 능지처참을 하던 야만적 사회였지요. 능지처참의 장면은 아예 동영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손석춘의 말은 결국 일제의 논리와 똑같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에 조선은 과연 해방된 사회였냐는 거죠. 신분제로 민중이 차별받고, 양반계급에게 착취와 수탈을 당하던 사회였지요. 그렇게 억압받던 조선인을 일제가 해방시켜 준 측면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냐, 뭐 이런 얘깁니다. 미국을 비판하며 북한의 중국 추종을 옹호하는 민족좌파, 혹은 주사파의 논리가 결국은 일제를 옹호하는 뉴라이트 논리와 동일하다는 것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하여튼 손석춘이란 사람, 이미 맛이 오래 전에 갔으니, 관심 끊어도 될 것 같습니다. 아울러 손석춘씨, 진보신당에 대한 관심도 좀 끊어주세요. 계속 민노당이랑 항미연북이나 하면서 연방제 통일의 그날을 위해 여러분들끼리 따로 열심히 매진해 주세요. 아울러 이참에 반수구연대를 위해 민주당과 합당을 하시지요. 민주당이 있는데, 민주노동당을 따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야말로 민중 앞에서 대역죄인이 되는 거 아닐까요? 지금 민노당 사람들, 민노당에 들어오기 전엔 다들 그렇게 얘기했었는데.... 

아울러 '연합'이니 뭐니 하는 애들의 수구적 작태나 계속 옹호하시구요. 내가 울산에서 겪어 보니까, 강대표님이 참 불쌍합디다.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선출된 당대표가 무슨 꼭둑각시인지,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이상한 사람의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하더군요. 그 친구, 뭐하는 친구인지 모르겠어요. 민노당 내부에 무슨 정치보위부 같은 게 따로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하여튼 내 눈엔 민노당의 진짜 대표가 강기갑이 아니라 김창현으로 보이더군요. 

하여튼 이 티벳에 대한 태도만 봐도, 진보신당은 민노당과는 완전히 다른 정치적 사상과 목표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북한이 미국에 당하는 것(?)을 비판한다면, 당연히 티벳이 중국에 당하는 것도 비판해야지요. 미국이 어디 북한 사람들 죽입디까? 하지만 중국은 티벳 사람들 마구 죽이더라구요. 이 가공할 인권유린을 보고도, 제기하는 게 달라이 라마와 미국의 유착의혹이라니... 그건 인두껍을 쓰고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죠. 

ps.
한편, 한겨레 기자에게 한 마디. 뭐, 김창현이 겨우 26표 차이로 졌다고요? 게임 규칙은 자기들이 유리할 대로 다 짜놓고, 10배나 더 많은 울산 지역의 당력으로도 모자라, 모자라 전국의 연합조직 총동원해 울산을 온통 주황색 잠바로 도배질하다시피 하고도 졌다면, 적어도 조승수 개인과 김창현 개인의 실력 차이는 확연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역민으로부터 받는 지지는 그렇게 인위적인 방식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게다가 '깨끗하게 승복'했다구요? 승복하기로 약속했으면 승복하는 게 당연한 거죠. 게다가 안 하면 어쩔 겁니까? 그럴 경우 분노한 울산의 유권자들이 민노당 조직을 아예 들어내 버릴 텐데요.... 게다가 깨끗하게 승복한 것도 아니죠. 박승흡인가 뭔가 하는 친구는 승복 못하겠노라로 아예 당직을 내던지더군요. 대변인이라면 그냥 일반 당원도 아니고 당의 공신력을 책임져야 하는 자리 아닙니까? 그런 자리에 있는 분이 선거 끝나기도 전에 수틀린다고 파토부터 놓은 민노당이었습니다.

대동단결하자던 그 사람들이 자기들 후보로 대동단결을 못하게 되자, 자기들이 분열주의 노선을 걷더군요. 이거야말로 민중 앞에서 대역죄를 짓는 게 아닐까요?
                <진중권>
Posted by 파비 정부권
크리스마스 이브! 그러나 오늘밤 나는 쓸쓸히 집을 보고 있다. 아이들과 아이 엄마는 성당에 갔다. 오늘 여덟 살짜리 우리 딸아이가 성탄전야 미사에서 천사로 등장한단다. 얼마나 예쁠까? 그러나 나는 따라가지 못했다. 10년 전 수술했던 허리가 어떻게 삐끗했던지 다시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화장실에도 걸어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하다. 

그럼 혼자 집에서 무얼 할까? 막걸리나 한 잔 할까? 아니지. 그래도 오늘 같은 성스러운 날 그렇게 술이나 마시며 보낼 수야 없지 않은가.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차에 ‘경남도민일보’에서 소개하는 크리스마스 특선영화 생각이 퍼뜩 스쳤다. 그래서 다시 읽어보니 재미있을 거 같다. 나름대로 감동도 있는 영화인 듯싶다. 게다가 EBS 영화라면 믿을만하다.   


그래! 오늘밤 크리스마스 이브는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와 함께 하는 거다. 메리 크리스마스!

이미지="DAUM 영화"


감동실화, “크리스마스, 단 하루를 위한 휴전”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인가? 아니면 신이 내린 가혹한 형벌인가? 

우리에게도 전쟁은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수십 년 전에 동족 간에 총부리를 겨누고 상잔을 벌였던 쓰디쓴 기억이 아직 채 지워지지 않았다. 그 흔적들은 아직도 함양에서 산청에서 또 이름 모를 어느 곳에서 시커멓게 썩어버린 유골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상처를 자극한다.

우리는 어린 시절, 동무들과 어울려 놀 때도 ‘군기놀이’를 하며 놀았다. 미국, 북한, 소련, 한국, 이런 식으로 군기를 만들어 집어던지면 그걸 주워 편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게릴라전을 하듯 이리저리 숨어 다니다가 마주치면 누구든 먼저 “꼼짝 마!” 하고 외친 다음 서로의 군기를 확인하는 것이다. 계급이 높은 쪽이 이기고 낮은 쪽은 적의 포로가 되는 것인데, 어느 편이든 군기가 그려진 병사를 포로로 잡으면 전쟁은 끝나게 되어있다. 

요즘 아이들은 무얼 하고 노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전쟁놀이를 하며 자랐다. 군기놀이가 아니면 산에 지천으로 널린 아카시아 나무를 잘라 칼을 만들어 편을 갈라 ‘칼싸움’을 벌였다. 전쟁만큼 신나는 놀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이 벌이는 ‘진짜’ ‘전쟁’ 은 ‘장난’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내려진 비할 데 없이 참혹한 ‘형벌’이다. 

숨 막히는 전장에 일어난 기적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의 한복판 프랑스 북부 어느 전장도 마찬가지였다. 불과 100m도 안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숨 막히는 접전을 벌이고 있는 이곳에는 자욱한 포연과 죽어가는 동료의 신음만이 가득한 지옥이었다. 이들에게 내일은 없었다. 오로지 맹목적으로 적을 죽여야만 하는 현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죽음의 땅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하얗게 눈 덮인 전장. 적막을 깨고 스코틀랜드 병사의 백파이프 연주가 울려 퍼진다. 잠시나마 긴장을 늦추고자 하는 이 소리에 화답하여 독일군 진영에서도 노래가 흘러나온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이미지="DAUM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하얗게 눈 덮인 전장에서 듣는 백파이프 소리와 캐롤 송은 군인들에게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이어서 독일군 진영에서 참호 위에 수십 개의 트리가 내걸렸다. 그리고 전쟁에 징집된 독일 오페라 스타 니콜라스(벤노 퓨어만)가 촛불로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를 들고 캐롤 송을 부르며 전장의 한복판으로 나온다. 하얀 전장에 비치는 촛불이 노래 소리와 어울려 춤춘다.

크리스마스 이브, 와인으로 축배를 들며 단 하루를 위한 휴전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연합군 진영에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당황한 양쪽 진영의 지휘관들은 그러나 평화의 힘에 이끌려 전장의 한 가운데에서 정상회담을 갖게 된다. 실로 기이한 기적 같은 정상회담은 크리스마스를 위한 단 하루의 휴전을 맺는다. 호츠메이어 대위가 먼저 말한다.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전쟁도 아니고,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하루 쉰다고 누가 나무랄 사람 있겠어요?”

독일군 장교의 제안에 프랑스군 장교도 동의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막사에서 와인을 가져오게 해 축배를 나누어 마신다. 그리고 이어서 전장에 나가는 신도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종군한 스코틀랜드 신부의 집전으로 성탄 미사가 열리고, 장중한 미사곡 대신 남편을 찾아 베를린에서 전장에 찾아온 안나가 아베 마리아를 부른다. 실로 다이앤 크루거의 노래 소리는 천상의 소리다. 

적과 아군이 서로 뒤엉켜 크리스마스 제단에 선 병사들의 지친 눈망울로 천상의 숨결이 스며든다. 아~ 크리스마스 이브, 어둠이 내린 전장의 적막을 타고 흐르는 아베 마리아의 선율은 신이 내린 소리가 틀림없었다. 검은 하늘과 하얀 대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여인의 금빛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러나 전쟁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안녕히 주무세요.” 서로의 적들에게 인사를 남긴 이들은 각자의 참호로 돌아간다. 자기 진영으로 돌아온 프랑스군 지휘관 오데베르 중위는 본부에 어떻게 보고할지를 묻는 부관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독일군 진영에서는 어떠한 적대행위도 없었음.”

그러나 결국 이 평화도 그렇게 오래 가진 못할 것이다. “저들은 불로 모여드는 나방처럼 모두 제단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자들까지도…” 파머 신부가 말하는 불로 모여드는 나방이란 평화를 갈망하는 병사들의 지친 영혼이다. 그러나 곧이어 나오는 지친 영혼의 독백은 평화에 대한 기대가 결국은 허물어지고 말 것임을 예고한다.

“그러나 전쟁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을 걸세.”

이튿날 아침, 적대적 양 진영의 지휘관들이 만나 죽은 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의논하고 이들은 서로의 진영에서 상대편 시신을 수습해 넘겨주고 장례를 치르기로 합의한다. 총 대신 삽을 들고 서로 뒤엉켜서 땅을 파고 죽은 전우의 시신을 묻는다. 삽으로 동료의 시신을 묻으며 한 병사가 말한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에 장례를 치를 수 있다니 정말 좋군요.” 

"평화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인지 몰랐다."

이 평화로운 장면. 그랬다. 수많은 병사들이 어울려 장례를 치르는 모습이 역설적이게도 너무나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이미지="DAUM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


그리고 이어서 이들은 축구시합을 벌이며 즐거운 한때를 갖는다. 이제 더 이상 이들에게 적은 없다. 오로지 친구요 이웃이 있을 뿐이다. “전쟁이 끝나고 파리가 자유로워졌을 때 저희를 바뱅가로 초대해 와인을 함께 마셔 달라”고 부탁하는 호츠메이어와 “꼭 파리에서 다시 만나 와인을 마시자”고 다짐하는 오데베르가 다시 총을 들고 서로를 겨눌 수 있을까?

“평화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인지 몰랐”던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이웃이요 친구인 적에게 총을 쏠수가 없게 되었다. 적에게 총을 쏘는 대신 이들은 자기편이 폭격을 할 때는 적군을 자기네 진지로 불러들여 그들을 보호하고 그 반대의 경우엔 눈  앞에 보이는 친근한 적들의 보호를 받았다. 꼭 총을 쏘아야 할 때는 하늘을 향해 공포를 날렸다. 

반역도로 몰리는 병사들

그러나 이 평온함은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결국 상부에서 이 부적절한 전장의 실태를 알아챈 것이다. 그리고 양쪽에서 새로운 병사들을 데리고 새로운 지휘관들이 내려왔다. 적극적인 전투력을 상실한 이 부대원들은 보다 험한 곳으로 보내져 전장에서 적에게 평화를 선물한 데 대한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했다. 

참전하는 신도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전장까지 따라온 파머 신부도 영국에서 급파된 주교로부터 스코틀랜드 교구청으로 이송명령을 하달 받는다. 평화는 깨졌다. 전쟁이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은 것이다. 주교는 새롭게 편성된 병사들을 모아놓고 전투에 나가 적을 섬멸하라고 독려한다.  

“주님의 검이 여러분 손에 쥐어졌습니다.”
“독일군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들은 주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선하든 악하든 독일인을 모두 없애야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십시오. 아멘.”   

그러나 평화는 전쟁을 이기고 떠난다

호츠메이어와 독일 병사들은 혹독한 러시아 전선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이들은 러시아로 떠나는 화물열차 안에서 자신들을 사지로 내모는 상관을 조롱하듯 흥겹게 합창을 한다. 그리고 노래 소리를 기적처럼 울리며 기차가 하얗게 솟아있는 수림을 뚫고 달리는 엔딩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이 흥미로운 기적은 실화다. 이 이야기는  “영국의 신문
<더 데일리 스케치 Daily Sketch>, <더 데일리 미러The Daily Mirror>등의 기사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 “병사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세 나라의 군대기록보관실에 남아있다”고 한다. 

“2005년 11월 크리스마스를 한 달 앞두고 프랑스 전역 500여개 개봉관에서 상영된 이 영화는 박스 오피스 상위권을 휩쓸며 흥행에 성공했다. 크리스마스 휴전이란 감동적 실화가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자신과 병사들을 적과 내통한 반역자로 몰아세우는 상관을 향해 외치는 오데베르의 외침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칠면조 뜯으며 명령만 내리는 상관들 보다 독일 군인들이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오데베르의 외침은 바로 우리들 이야기

프랑스 장교의 이 외침, 남 이야기가 아니라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 이야기가 아닌가?

2008. 12. 24일 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조선일보에서 돈을 받았다. 명목은 신문을 무료로 8개월간 보고 난 다음 1년간 신문을 보아주는 데 대한 대가였다. 내년 7월부터 수금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 1년 계약기간이 지나면 어쩌느냐고 했더니 그때는 원한다면 또 돈을 받고 무료로 일정기간 본 후에 다시 1년 계약으로 보면 된다고 했다.  

조선일보에서 현금 3만원과 무가지 8개월을 제의 받다

망설여졌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이미 조선일보의 이런 불법 경품을 이용한 영업행위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조선일보가 이따위 방법으로 부수를 부풀리는 이유야 다 아는 일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면 광고주들도 참 딱하다. 이따위 허접한 신문에 광고를 낸다는 게 쪽 팔린다는 생각은 안 해 보았을까? 


그러나 결론은 응하기로 했다. 내 의도야 뻔하다.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하기 위해서다. 6개월여가 지나면 두둑한 신고포상금도 나올 것이다. ‘꿩 먹고 알 먹고’다. 조선일보 혼내주고 돈도 타니 ‘도랑치고 가재 잡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이 아닐까? 조선일보, 딱 걸렸다. 

길거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돈을 돌리는 아저씨가 한편 불쌍하기도 했다. 저 아저씨는 조선일보의 불법행각에 휘둘리는 대가로 얼마를 벌 수 있을까? 행색도 그리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사기꾼의 앞잡이가 되어 움직이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그런 사람들을 다 동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매일 조선일보가 우리 집에 배달되기 시작했다. 두툼한 신문 뭉치에 광고전단지까지 처치 곤란할 정도로 폐지가 집에 쌓이기 시작한다. 조선일보는 처음 받아보지만, 이거 쓸데없이 두껍기만 한 신문은 도대체 무엇을 읽어야 할지 고민스럽게 만든다. 마치 꽉 들어찬 창고에서 물건 하나 찾기가 예사 일이 아닌 거와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왕 들어오는 신문, 조선일보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하기도 해서 열심히 읽어봤다. 그런데 이거 읽으면 읽을수록 걱정이 늘어간다. 내 정신이 자꾸 이상해지는 거 같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명박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나오고, 거기에 다는 기사는 찬양 일색이다. 북한에 로동신문이 있다면 남한에 조선일보가 있다는 식이다. 

북한에 로동신문이 있다면 남한엔 조선일보?

그러나 거기까진 참아줄 수 있다.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찬양하고픈 ‘수령’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사팔뜨기도 아니다. 도사도 아니면서 아예 눈을 감고 세상을 바라본다. 오늘 신문을 완전히 도배한 조선일보 기사는 미국 자동차산업 빅3의 몰락이 자동차 노조 탓이란다. 그래서 한국의 자동차산업도 강성노조부터 배격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충고한다. 그것도 버젓이 사설까지 동원했다. 

이분들은 자기 배 아프면 사돈 논 산 걸 탓할 사람들이다. 이들 논리대로라면 강성노조와 고임금으로 유명한 독일의 자동차는 벌써 망했어야 한다. 아예 노조를 기반으로 만든 사민당이 거의 영구 집권하듯이 한 스웨덴의 볼보나 사브, 그리고 스케니아(SCANIA)는 망해도 백번은 더 망했어야 한다.

좋다. 여기까지도 참아주자. 원래 조선일보가 눈감고 기사 쓰는 ‘찌라시신문’이란 거 몰랐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오늘자 「전문기자 칼럼」란에 실린 ‘스페인 총리의 수모’란 제목의 기사를 보니 가관이 도들 넘었다. 스페인 총리가 수모를 당했다는 설정도 우스운 이야기지만, 미국이 초청하는 G20 명단에 스페인이 빠졌다고 해서 스페인 총리가 부시에게 수모를 당한 거라고 생각하는 조선일보의 사고방식이 더 우습다. 

구매력 기준으로는 G7인 캐나다보다 규모가 큰 세계 9위의 경제대국 스페인을 제쳐두고 초청장을 발송한 부시의 옹졸함이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왜 스페인이 이라크에 파병을 거부하는 명분을 선택했기 때문에 국익을 무시한 재앙을 초래했다고 말하는 것인지 상식을 가진 사람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미국이 주최하는 국제회의에 초청받지 못했다고 재앙이라고 하는 것도 우습지만, 그것이 초강대국을 조롱하는 결정을 내리는 순간 이런 후과(後果)를 각오했어야 한다고 사파테로 총리와 스페인 국민들에게 충고하는 조선일보는 거의 코메디 수준이다. 아예 스페인더러 미국의 식민지가 되라고 조언하는 게 정직하지 않을까 싶다. 이미 조선일보는 정신적으로 미국의 식민지가 된지 오래인 거 같으니 하는 말이다.

조선일보 보다가 내 양심에 털 나겠다

미국은 결국 사파테로 총리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그러나 그건 조선일보가 말하는 대로 2주간 스페인 총리가 구걸한 결과는 아닐 것이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의 조언도 있었겠지만, 만약 스페인을 제쳐두고 G20 회의를 진행한다면 그야말로 이라크 전쟁에 참여한 친미국가들의 친목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을 우려한 미국 정부의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부시 행정부에도 전쟁놀이만 즐기는 무뇌아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무뇌아는 조선일보에 다 모여 있는 것 같다.  

이따위 허접한 기사를 「전문기자 칼럼」이라는 제목으로 떡하니 걸어놓는 조선일보의 배짱도 배짱이지만, 이런 신문을 신문이라고 보는 대한민국 국민이 불쌍하다. 그런데 가만 보니 남 걱정 할 때가 아니다. 조선일보 혼내주려다 내 양심에 털이 나게 생겼다. 이왕 들어오는 신문 그냥 내다버리면 국력 손실이다 싶어 읽어보기는 보는데 이러다가 나도 조선일보처럼 양심에 털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래도 오늘 조선일보 기사 중에 마음에 드는 기사가 딱 하나 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와의 인터뷰 기사다. 주제 사라마구는「눈 먼 자들의 도시」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원작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고 칸 국제영화제에서 개막작으로 선택되었다. 조선일보가 그를 인터뷰한 것이다.

용접공 출신인 사라마구는 포르투갈 공산당원으로 독재자 살리자르에 맞서 오랫동안 공산주의 칼럼니스트로 활약하며 국외로 추방당하는 탄압을 받았지만, 역시 조선일보는 그의 소개에서 이 대목은 삭제했다. 미국 차기 대통령 오바마를 친북좌파라며 호들갑을 떨다가, 그가 당선되자 갑자기 미국 대통령을 좌파라 부르는 불경죄를 지어선 안 된다고 꼬리를 내리는 조갑제 같은 사람이 서식하는 곳이니 오죽하겠는가. 

조선일보는 실명(失明) 바이러스

그러나 어쨌든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기사 내용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사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무엇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가?”

여기에 대한 내 답은 이렇다. 

“다름 아닌 너, 바로 조선일보다!”  

2008. 11. 11.  파비

습지와 인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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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면, 오바마는 좌파가 아니다.

한발 물러서 진보주의자라고 불러주기에도 상당히 어색하다. 물론 미국 내에서는 공화당에 비해 민주당이 덜 보수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거기에다 버락 오바마라는 앵글로 섹슨에게는 생소한 이름의 아프리카계 흑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점 때문에 세계가 마치 미국에 혁명이라도 일어난 듯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겠다.

미국인의 선택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심판


그러나 어쨌든 오바마도 미국 민주당도 좌파는 아니며, 그렇다고 특별히 진보라고 보아줄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라크나 아프카니스탄 또는 북한과 같은 적성국가를 대하는 태도에서 약간씩의 차이를 보여줄 뿐이다. 이 차이도 실상은 최근에 생겨난 것이며,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최악의 전쟁으로 평가 받는 베트남전을 이끈 정부가 실은 민주당이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할 필요도 있다. 

1980년대 이후에 클린턴 행정부를 제외하고 줄곧 공화당 정권이 득세했다. 이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미국의 신자유주의와 패권주의는 절정을 구가했지만, 미국의 경제는 거꾸로 곤두박질쳤다. 이는 전쟁에 대한 반발과 시장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결국 미국민은 오바마와 민주당을 선택했다. 부시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미국민의 심판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조선일보의 조갑제는 미국 대선 레이스가 한창일 때, 마치 오바마가 당선되면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말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오바마가 매우 친북(좌경)적인 사람이며 그래서 위험하다고 생각하던 그들이 갑자기 오바마는 좌파가 아니며 좌파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고 말하니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약간 혼란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래서 어떤 진보인사 한 분은 오바마에게 ‘미국식 좌파’라는 개념을 따로 붙여주기까지 했다. 

사진=경남도민일보/뉴시스


미국이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양당체제에 고착된 독특한 정치체제의 나라라는 점을 감안할 때 오바마에게 ‘미국식 좌파’라는 딱지를 붙여주어도 별다른 이의가 없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좌파-우파의 개념이 상대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개념에 대한 선은 있어야 할 듯싶다. 

노무현을 좌파로 모는 조갑제가 오바마는 좌파로 부르지 말자고?

미국에서도 실제로 오바마를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주로 남부의 보수적인 사람들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마치 노무현이나 김대중을 좌파라고 몰아세우며 ‘우파의 잃어버린 10년’을 노래하는 이명박이나 조갑제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 미국도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이다. 어딜 가나 돌연변이들은 있게 마련이다.

김대중은 집권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IMF를 돌파하는 정책을 펼쳤다. 노무현도 역시 김대중이 닦아놓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충실히 수행했고 미국과의 FTA는 그 결정판이었다. 더욱이 미국의 패권주의적 군사정책에 협조해서 아프간과 이라크에 파병까지 했다. 이 지점들 때문에 오히려 한나라당보다 더 우편향의 정치를 했다고 평가 받기도 했고 노동자 농민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기도 했다. 

또 반면에 김대중과 노무현은 대북정책에 있어서 ‘햇볕정책’으로 대변되는 유화정책을 폈으며 남북화해무드에 많은 기여를 했다. 두 차례나 남북의 정상이 만나고 그 실효성 여부에 불구하고 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는 것은 역사적 진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조갑제 류의 수구인사들은 이게 마음에 안 드는 것이다. 이게 바로 노무현과 김대중이 친북좌파라는 증거라고 끊임없이 물고 뜯는 것이다. 

그런 기준으로 본다면 오바마는 좌파임에 틀림없다. 우선 오바마는 적성국 북한의 최고 통치자인 김정일을 만나겠다고 한다. 여기에다 오바마는 노무현이나 김대중이 신자유주의를 추구한 것과 달리 신자유주의에 종지부를 찍고 과거 뉴딜시대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런 면에서 오바마는 노무현보다 훨씬 좌파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정치인이 되는 셈이다. 그런 오바마를 좌파라고 부르지 말자고 자기네끼리 신호를 주고받는 조갑제류의 행태는 그야말로 코미디다.   

그러나, 좌파라고 하기엔 한계가 뚜렷한 민주당 

그러나 아무리 오바마와 민주당의 리버럴이 좌파나 사회주의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역시 미국 민주당의 한계는 뚜렷하다. 미국은 민주당이 수없이 집권했지만 의료보험 체계도 제대로 만들지 못한 나라이다. 교육에 있어서의 공공성도 최악의 수준이다. 북서유럽의 좌파 사민당이 오래 집권한 나라들의 복지와 비교할 기준조차 제대로 없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그런데 30여년에 걸친 미국식 신자유주의 실험이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낙인찍히며 좌초하는 시점에서 건국 232년 만에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등장했다는 사실이 냉정한 미국의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효과를 부리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반대로 조갑제 같은 이들에겐 노무현보다 훨씬 좌파적인 오바마를 애써 좌파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데에는 숭미사대주의에 기반을 둔 나름의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진보인사들이 앞을 다투어 오바마를 좌파라고 추켜세우며 환영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시나 좌파라면 무조건 빨갱이에 공산주의자로 몰리는 대한민국 현실에서 발현된 어떤 보상심리 같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는 조갑제류의 기회주의와는 다르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섣불리 오바마가 좌파라고 말하기보다, 우선 그가 보다 좌파적으로 행동하기를 촉구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오바마가 신자유주의를 폐기하고 추진하는 뉴딜 식의 경제회생 정책들이 과연 사회복지로 제대로 연결되는지도 주의 깊게 지켜볼 일이다. 그리고 나서 오바마의 좌파에 대하여 평을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오바마를 선택한 주요한 이유 중 하나에는 공화당의 실패한 경제가 있다. 이 점을 잘 아는 오바마가 전통적인 민주당의 보호무역주의를 통해 난국을 돌파하리라는 예상은 이미 충분히 있어 왔다. 실컷 좌파라고 추켜세우다가 결국 뒤통수를 맞았을 때의 황당함보다는 덤덤하게 지켜보는 게 오히려 현명하지 않을까?

오바마의 개혁이 좌파적 복지의 확충으로 이어지길

조갑제나 이명박 같은 이들이야 원래 표리가 부동한 분들이라 좌파라고 생각하는 오바마가 당선된 것이 매우 불쾌하지만 애써 속내를 숨기며 “오바마를 좌파라고 불러선 안 된다.”느니 “오바마와 나는 닮은 데가 많다.”느니 횡성수설하며 꼬리를 치지만 우리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바마를 좌파로 보긴 뭔가 석연치 않지만 그가 진정한 좌파가 되어 보다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으로 미국의 경제만 살릴 뿐 아니라 최소한의 복지시스템이라도 구축하는 실로 역사적인 미국 대통령이 되기를 희망한다. 미국민들이 그저 마시던 코카콜라를 펩시콜라로 바꾼 정도의 불행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은, 오바마가 진정한 좌파로 거듭나길 바라는 것이다.  

2008. 11. 6. 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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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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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 경남도민일보 독자모임이 연속으로 기획한 마지막 순서는 하재근 선생이 강연을 맡았다. 하재근은 작가이며 칼럼니스트이며 시사평론가다. 그리고 '서프라이즈' 편집장이다. 다양한 그의 명함이 있지만, 지금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불꽃같은 정열을 담아 건내는 명함은 <학벌없는 사회> 사무처장 하재근이다.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강연중인 하재근 처장. 사진=도민일보 김주완 부장



그의 인상은 불혹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나이답지 않게 매우 젊어보였는데, 어쩌면 촛불 신세대에 가까워보인다고 생각되었다. (그가 구사하는 부드러운 윗지방 사투리가 그렇게 느껴지게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그런 그의 젊은 인상은 교육문제를 다루는 무거운 강연에 더한 신뢰를 주었다. 어차피 미래는 젊은이들의 것이며, 기득권에 절은 기성세대는 과거의 명예와 현실의 안락함이나 파먹으며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회개혁의 출발은 '학벌 없는 사회'로부터 

그는 '학벌 없는 사회' 없는 '사회의 발전'은 요원하다고 했다. 여기에 한 청중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나름대로 교육문제를 걱정하며 교육개혁운동을 하고 있는 대안학교 같은 곳이 많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대안학교운동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

"글쎄요. 대안학교 등도 나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사회가 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좋은 일은 좋은일로서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저는 좋은 일 하는 것보다는 사회의 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는데 더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대안학교는 제 관심분야도 아니고 별로 잘 알지도 못합니다."

요약하자면, '사람이 살만한' 사회는 학벌 없는 사회, 즉 교육평준화가 이루어져야 가능한 것이고, '학벌 없는 사회'는 핸재의 제도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또한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도개선은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답답하지만 현실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안티를 외치는 반대투쟁 일색인데, 결국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정치로부터 들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선별하지 않는다

그가 강연 맨 마지막에 소개한 핀란드,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의 교육제도는 참 꿈같은 이야기로만 들렸다. 독일만 해도 교육평준화가 100% 이루어진 나라라고 한다. 그런 나라들에선 입시경쟁이나 사교육비 문제 같은 것은 아예 존지해지도 않고 존재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이만해도 우리에겐 꿈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16세가 되기 전까지는 선별하지 않겠다."는 것이 바로 핀란드의 교육원칙이라고 한다. 이 나라에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아무 구별 없이 함께 학교에 다닌다. 그래서 어떤 학교에서는 청각장애인 한 명을 위해 특수교사를 따로 배치하고 나머지 학생들도 모두 수화를 배운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이들 나라들의 국가경쟁력은 어떨까? 온통 고액과외와 특목고로 도배한 것도 모자라 특수신분의 자녀들만 다니는 학교까지 별도로 만들겠다는 우리나라와 경쟁력을 비교해보면 어떨지 모르겠다. 일제고사로 학생들을 서울에서 제주까지 줄을 세워 선별해보겠다는 우리나라의 경쟁력과 비교해보면 도대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는 인민의 집이어야 한다

그러나 애시당초 이들 선진 북구 나라들과 우리나라를 비교하려는 자체부터가 틀려먹었다. 이들 나라들은 보통 국민소득이 6만 불을 넘어가는 선진국에다 국가경쟁력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들 나라들과 비교를 하겠다는 발상부터가 실례인 것이다.
 
스웨덴과 핀란드의 국가 기본정책은 "국가는 인민의 집이어야 한다."는 슬로건에 잘 녹아있다. 이들 나라들은 1930년대 이후 사민당과 노동당 등 좌파정당이 정당지지율 1위 자리를 내어준 적이 단 한번도 없는 나라들이다. 스웨덴의 5대 정당을 들어보면 사민당, 보수당, 농민당, 공산당, 녹색당 순이다. 보수당을 제외하면 모두 좌파정당이다. 

스웨덴은 1932년 이래 사회민주노동당(Swedish Socisl Democratic Party, 사민당)이 70년 동안 집권했다. 세계에서 좌파정당이 가장 오래 집권한 나라다. 그리고 오랜 좌파정권의 결과 세계 최고의 평등도를 자랑하면서도 에릭슨, 볼보, SABB와 같은 세계적인 대기업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실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할 대목이다.
 
그러면, 과연 우리에게도 국가는 인민의 집일까?

그 답은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만 들여다봐도 금방 답이 나올 듯하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을 보면 선택권, 자율성 등 온갖 미사려구를 늘어놓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교육의 선택권, 자율성이란 다름 아니라 교육을 말살시키고 국가를 패망으로 몰아가는 길이라고 하재근은 자신 있게 말한다. 

대한민국 교육정책은 국가 패망의 길

그가 말하는 패망이란 우리나라가 남미의 제국들처럼 다수의 빈민과 소수의 부자들로 구성된 그런 나라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명박의 교육정책이 성공을 거둔다면 우리나라는 남미의 여러 나라들처럼 2~30%의 국민만이 겨우 정상적인 소득을 얻어 생활하고 나머지는 기초적인 수입조차 어려운 그런 나라가 되고 말 거란 것이다.
 
우리나라는 헌법상 민주공화국이다. 민주공화국의 교육제도는 사교육의 몰수에 있다. 만인은 평등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이를 가능하게해주는 거의 유일한 수단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교육이다. 그런데 지금 이명박 정부가 벌이는 교육정책이란 것들은 민주공화국의 거의 유일한 버팀목마저 잘라버리겠다고 도끼날을 갈고 있는 꼴과 하나 다르지 않다. 

하재근은 우리나라는 재벌과 자산가집단, 그리고 이들과 외국자본의 재산을 관리해주는 ('김앤장' 같은)로펌들로 구성된 '그랜드써클'이 지배하는 나라라고 한다. 그리고 이명박이 추진하는 교육정책은 '그랜드써클'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고 항구화하기 위한 작업이라는 것이다.
 
하재근은 잘라 말한다. "이것은 헌법을 파괴하고 국민을 상대로 한 전쟁이다."

국민과의 전쟁을 통해 만들려는 '이명박의 나라'

그러나 하재근은 그가 말하는 '이명박의 나라'(필자주; 이명박의 교육정책이 실현된 나라)는 이미 1993년 김영삼정권 이래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꾸준히 진행돼왔다고 말한다. 1995년 발표된 정책(5·31교육정책)의 핵심인 '소비자주권'과 '자유화'의 이념은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고 한다.

'소비자주권'과 '자유화'란 이 그럴싸한 개념은 우리가 재래시장을 죽이고 대형마트를 선택해야하고, 값비싼 사교육비를 물어가며 일류고등학교를 선택해야하고, 교원평가를 통해 교사를 선택해야하는 모순에 가득차고 불행한 시대를 살아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소위 자유와 주권이 거꾸로 자유를 속박하고 평등한 교육을 받을 권리를 빼앗아가는 역설을 만든 것이다. 

이명박의 모든 정책의 종점은 미국에 있다. 우리나라를 미국처럼 만들겠다는 것이 이명박 정부 정책의 종착점이다. 산업경제모델을 포기하고 금융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하는 미국식 경제를 따라가겠다는 것이 또한 이 정부의 기본 노선이다. 그리고 교육정책도 바로 이런 미국식 추종마인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번에 들끓는 논란 속에 치러지는 '일제고사'도 기실 미국에서 먼저 실시한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영국의 대처리즘과 미국의 레이거노믹스 순으로 진행되었던 것처럼 일제고사도 영국-미국 순으로 실시되었고, 이제 절대다수 여론의 반대 속에 이명박 정부가 강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우리가 본받을만한 나라인가? 대답은 "전혀 아니올시다"이다. 이미 오래전에 유명한 '쌍둥이 적자'만 남기고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파산선고를 받았다. 빈부의 격차, 인종간 갈등, 고질적인 실업으로 병폐화된 나라가 또한 미국이다. '그랜드써클'의 원조는 사실 미국에 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아이비리그'란 곳이 바로 '그랜드써클'의 자녀들이 차별적인 교육을 받고 다시 대를 이어 '그랜드써클'이 되는 가장 모범적인 케이스다. 물론 부시도 아이비리그 출신이다.  

이명박 교육정책, '아이비리그'식 백년지대계

지금 대한민국 교육은 완전 비상사태다. 박정희가 군사독재의 와중에서도 그나마 만들고 유지해왔던 교육평준화 정책을 이명박이 나서서 쓰레기통에 쳐박으려고 하고 있다. 유럽의 복지사회모델은 거들떠보지도 아니하고 미국의 신자유주의 모델만 고집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더불어 갖은 혼맥과 인맥으로 짜여진 거미줄, '그랜드써클'이 영원히 잘먹고 잘사는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한 백년지대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동시에 민주공화국을 해체하고 전근대적 봉건사회로 나라를 되돌리려는 국민과의 전쟁이다. 조선시대에는 아무리 공부를 하고 싶어도 97% 평민과 천민의 자제들은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그에 비해 3%에 불과한 소수 양반계층, 그 중에서도 사대부 명문세가의 자제들은 독선생을 두고 우아하게 공부했음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교육평준화의 해체는 다름 아닌 신분제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재근은 말한다. 곧 과학고나 외국어고 같은 특목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랜드써클'만 다니는 특수학교가 생겨날 것이다. 그곳에서 이명박과 같은 '그랜드써클'의 자제들은 일반서민의 자제들처럼 '박 터지게'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우아하게' 공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대 등 상위대학들은 이들 우아하게 공부한 학생들로만 채워지는 '그랜드써클' 양성소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교육에서 '소비자주권'과 '자유화'가 바로 이런 사회로 가기 위한 핵심 키워드다.  

바야흐로 '우아한 가족', 그랜드써클들만 사는 나라가 도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2008. 10. 12. 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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