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9.07.20 회룡포에 빼앗긴 이름, 의성포의 사계 by 파비 정부권 (12)
  2. 2009.05.17 택시기사들이 직지사로 간 까닭은? by 파비 정부권 (6)
  3. 2009.04.09 개도 만원 짜리를 입에 물고 희희낙락하던 시절? by 파비 정부권 (2)

낙동강 4차 도보기행, 우리는 마침내 경북 안동 풍산면 화회마을을 거쳐 예천 풍양면의 삼강나루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을 지나면서 유독 바람 풍자가 많은 동네란 생각을 했습니다. 풍산과 풍양 외에도 바람 풍자가 들어간 동네 이름들이 곳곳에 있었거든요. 풍산이라 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풍산 유씨죠. 하회마을은 바로 풍산 유씨의 집성촌입니다.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회원인 공윤님이 촬영한 삼강의 아침. 내가 찍으면 이렇게 안 나온다.


그럼 풍양은요? 물론 요즘 풍양하면 삼강나루와 삼강주막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얼마 전 한나라당의 박희태 대표가 이 삼강주막에서 자기 부인과 막걸리를 마시며 양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나갈 건지 말 건지를 고민했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가면 그냥 나갈 것이지 왜 하필 이곳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기자를 불렀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삼강주막이 요즘 꽤 유명한 건 사실인 모양입니다. 

풍양은 본래 조선 후기 안동 김씨와 더불어 세도정치의 한 축을 담당했던 풍양 조씨의 본향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 예안-안동-풍산-풍양, 이 벨트야말로 양반들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예안은 퇴계 이황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곳입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정치사에서 이곳을 비롯한 영남은 철저하게 배척당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정조 임금이 도산서원 앞 시사단에서 영남 선비들만을 위한 과시를 열었을 때, 7천명이나 모여들었을까요? 우리들의 도반 신정일 선생에 의하면 조선시대 정치사에서는 호남만 배척 당한 것이 아니라 영남도 철저하게 배척 당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유흥준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서울에서 세도를 부리던 안동 김씨들을 이곳에선 인정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이곳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들은 이단이었던 것이지요.

삼강이란 지명은 이곳이 금천과 내성천,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아마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양수리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 같습니다. 이 삼강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너면 문경 영순입니다. 역시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문경은 국민학교와 중학교까지 제가 자라던 곳입니다. 풍양에는 외가 친척들도 있었지요.
 

삼강주막 뒤 회나무 아래 평상에 앉으면 삼강이 시원하게 보였을 터다. 그러나 이제 다릿발과 제방만 보인다.


그러나 이제 삼강은 나룻배를 띄우지 않습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다리가 삼강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풍양과 문경을 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하필 세개의 강이 합쳐지는 한복판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았을까요? 교량에 새겨진 준공일자(2004. 3. 11일)를 살표보니 다리가 생긴 지가 불과 5년입니다. 한편으로 삼강주막을 선전하고 또 한편으로는 거기에 다릿발을 세워 기를 죽이는 아이러니…

그러므로 삼강주막의 유명세를 듣고 한적한 강변의 정취를 기대하고 오시는 분들이라면 적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도 무척 실망했습니다. 거대한 교각 아래 초라한 초가집과 500 년 묵은 회나무를 덩그러니 넓은 마당과 주차장에 서서 지켜보려니 차라리 을씨년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이 삼강이 유명해진 것은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우리나라 최고의 물돌이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성천이 굽이쳐 내려오다 낙동강에 몸을 풀기 전 마지막 용트림을 대지에 새겨놓았습니다. 바로 의성포입니다. 낙동강의 하회마을과 동강의 물돌이동이 유명하지만 의성포에 견줄 바가 못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의성포는 의성포라 부르지 아니하고 회룡포라 부릅니다. 회룡포란 이름은 예천군청에서 이웃한 의성군과 지명이 혼동된다고 하여 새로 정한 이름입니다. 1999년부터 그리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은 여전히 의성포를 의성포라 부릅니다. 이 또한 지방자치제가 만들어낸 폐단의 한 단면이란 생각이 듭니다. 

의성포란 이름은 오래 전에 의성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해 살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는 등 여러가지 설이 있겠지만, 뜻풀이로 보자면 '의를 이룬다'는 의미가 이 지역의 전통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인 듯하여 섭섭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름을 버린다는 것은 굳이 따져 말하자면, 이름에 깃든 역사도 함께 버린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새벽 5시 반에 기상한 우리는 삼강나루가 아닌 삼강다리 위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일찍 아침을 먹고 의성포로 향했습니다. 의성포를 보기 위해선 비룡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비룡산은 낮으막한 산이지만 올라가는 길은 뱀처럼 구불거리는 게 낙동강 만큼이나 험합니다. 이곳까지 차가 올라갑니다.  

비룡산에 올라 회룡대에 서니 의성포가 보입니다. 장관입니다. 의성포의 물돌이는 350도에 이른다고 합니다. 의성포의 목 부분은 불과 80여m, 끊어질 듯 아슬아슬합니다. 저것이 끊어지면 섬이 되겠지요. 그러나 물은 그렇게 잔인하지 않습니다. 막으면 돌아가는 게 물의 천성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절경도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지요.  

아래는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게시판에 올렸던 의성포의 사진입니다. 사진 솜씨가 조잡하여 현장의 감동을 전하기엔 역부족이지만 그래도 올려봅니다. 아마 의성포를 가보실 수 있는 분은 별로 많지 않으리라 봅니다. 저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불과 3~40리 거리에 살았지만, 처음이었답니다.    
     파비

낙동강 도보기행 4차, 회룡대에서 찍은 의성포 사진입니다. 요즘은 의성포라 하지 아니하고 회룡포라 부른다지만, 저는 의성포가 더 좋습니다. 이웃에 있는 의성군을 의식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곳의 오래된 풍습에도 의성포가 더 어울리는 이름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그러나 지역민들이 굳이 회룡포라고 부르길 원한다면 그렇게 불러주어야겠지요.  

이리하여 마음이 약해 잘도 변하는 제가 찍은 회룡포 사진입니다. 6월 28일에 찍은 사진이니 여름 풍경이 되겠네요. 그 아래 하얀 겨울 풍경도 있습니다. 오곡이 풍성한 가을 풍경의 회룡포도 있고요. 이렇듯 회룡대에 오르니 푸른 회룡포 뿐아니라 하얗고 노랗고 또 히끄무리한 모든 풍경을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실은 하얗고 노란 풍경 사진은 회룡대 벽에 걸려있던 사진을 찍은 것이랍니다. ㅎㅎ 혹시 눈앞에 보이는 회룡포의 절경에 취해 이것을 못 보신 분이 계실지 몰라서 올려봅니다. 감상은 무료이니 마음껏 즐기시기를…


카메라로 한 번 찍었지만 완전히 안 잡혀서 다시 한 번 더 찍었지만 역시 다 못 잡았네요. 화각이 1mm 부족한 것 같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사진 찍을 때 무조건 자동모드입니다. 다른 건 손댈 줄 모릅니다요. 카메라는 꽤 비싼 걸 샀습니다. 낙동강을 위해서… 캐논 450d 번들인데요. 85만 원 들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회룡포 마을로 건너가는 다리를 찍은 사진입니다. 망원이 아니라 제대로 잡진 못했습니다.


회룡포의 모가지가 사슴 목보다 더 가늘어 보입니다. 회룡포를 한바퀴 휘돌아온 강은 다시 반대로 꺾어 우리가 서있는 회룡대의 뒤로 흘러갑니다. 정말 장관이지 않습니까? 이렇듯 아무리 앞을 가로막아도 구불구불 휘돌아 마침내 가야할 길을 가고야 마는 강의 인내가 정말 대단합니다. 태백에서는 돌아갈 길이 없을 때는 결국 산을 뚫어서라도 가고야 마는 부드러운 물길의 강철같은 의지도 보았었지요. 구무소에서…


이하는 제 사진이 아니고 회룡대에 걸려있던 전문가들의 사진입니다. 어차피 그걸 또 제가 찍었으니 제 사진이라는 것도 맞는 말 아닐까요? 그냥 제 사진으로 보아 주십시오. ㅎㅎ

Posted by 파비 정부권

택시운전을 하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네 회사 노조에서 야유회를 가는데 따라가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남의 회사 야유회 가는데 왜 따라가냐고 했더니 조합원 가족이나 친구들 초청해서 함께 가기로 했다면서 꼭 오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맛있는 음식과 술도 많이 있다는 유혹과 함께

 

그러나 정작 저를 유혹한 것은 맛있는 술과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야유회의 목적지가 바로 김천 직지사였던 것입니다. 직지사는 오래 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문경은 오래된 불교사찰이 많은 고장입니다. 해방 이후 조계종의 성지로 추앙 받는 봉암사와 대승사, 김룡사를 깊이 묻은 산중은 실로 적막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듯합니다. 지리산 자락의 함양과 산청이 비록 깊다고는 하지만 그 유명세로 인한 번잡함 탓에 적막함으로 치자면 이곳에 비할 바 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곳에서 저는 늘 김천 직지사의 명성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아마 인근 고장의 큰 절이었기 때문이겠지요. 지금으로 말하자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겠지만 당시로서는 까까머리 중학생이 가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습니다. 제가 살던 곳은 읍내에 한번 가려고 해도 한 시간 이상을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곡예 하듯이 골짜기를 지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김천 직자사에 간다는 소리에 홀랑 넘어간 저는 더디 가는 시간을 탓하며 며칠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5 12아침 8 30, 마산역에 남보다 먼저 도착해 아리랑호텔 근처에 있는 T-World에 들어가 고객용 컴퓨터에서 제 블로그를 틀어놓고 집에서 나오기 전에 포스팅한 기사의 오탈자를 검색하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출발시간과 장소는
오전 9 30 마산역전 아리랑호텔입니다. 이곳에 사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야유회 내지 관광을 갈 때는 늘 이곳에서 출발합니다. 모두들 시간 맞춰 도착했습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제가 아는 사람은 제 친구 한 명 뿐입니다. 서먹함을 감추기 위해 구석자리, 항상 그렇듯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에 파고들었습니다.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차창을 적시고 있습니다. ! 직지사에 도착할 때쯤이면 비가 그쳤으면 좋을 텐데 지금 내리는 단비가 농민들에게는 황금보다도 더 값진 것이겠지만, 야유회를 떠나는 사람들에겐 야속하기 그지없습니다. 고속도로변으로 펼쳐진 창녕들에서는 양파들이 오랜만에 단비를 맞으며 무럭무럭 알을 키워가는 것이 보입니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주최측
(?)은 김밥부터 돌립니다. 이런, 미리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나왔는데, 실수했습니다. 애써 차린 성의를 마다하면 예의가 아닙니다. 동방예의지국의 도리를 따지며 억지로 김밥을 밀어 넣고 나니 이번엔 오징어와 땅콩, 방울토마토 등이 담긴 비닐봉지를 1인당 하나씩 나누어줍니다. 접시에 담긴 돼지수육도 자리마다 돌립니다.

 

잠시 후, 소주와 맥주잔이 오가기 시작합니다. ! 이런, 또다시 실수를 절감합니다. 건강검진하기 전에 하룻밤 속을 비워두듯 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이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사회자가 앞자리에서부터 지명하면 의무적으로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음주가 있은 뒤엔 반드시 가무가 따라야 하는 것은 오래된 미풍양속입니다.

 

그러나 그런 미풍양속에 익숙지 못한 저는 차창에 머리를 박고 어젯밤 잠을 못 자 매우 피곤하다는 듯이 조는 시늉을 하며 빨리 도착하기만을 빌었습니다. 버스가 직지사에 도착했습니다. 굵게 내리던 비는 가랑비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미리 예약된 식당으로 가는군요. 몇  시간 만에 식사를 세 번 합니다. 이번엔 산채비빔밥입니다.

 

지금부터 4까지 자유시간을 드릴 테니까 마음껏 구경하시고 다시 이곳으로 모여주세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불리 먹여놓고 관광을 시키려고 그런 것이었구나. 하긴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도 배 고프면 허당입니다. 주최측의 세심한 배려에 고마운 마음을 안고 산사로 향합니다. 비를 머금은 길 주변 나무들의 자태가 자못 싱그럽습니다.

 

, 그럼 지금부터 절 구경을 함께 하도록 하시겠습니다. 사진이 매우 많습니다. 스크롤 압박이 좀 오시더라도 참아주세요. 좋은 절을 이렇게 책상에 앉아 간편하게 구경하는 게 참 즐겁다, 생각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래도 정히 힘드신 분은 중간에 하산하셔도 상관없겠습니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대웅전에 부처님은 알현하시고 가도록 하세요.

 

제일 먼저 만나는 이 커다란 문은 사실 본래의 절과는 상관없는 문입니다. 이 문 옆에는 매표소가 있습니다. 그냥 돈 받기 미안하니까 아마 이렇게 커다란 문을 문화재스럽게 만들어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제 생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성의가 대단합니다. 여기서 1인당 2,500원씩 냈습니다. 단체로 계산하면 꽤 큰 돈이지요.

 

그래도 여기는 싼 편이라는군요. 다른 큰 절에서는 4~5천원씩 받는답니다. 하여간 제가 내는 건 아니니까 일단 논평은 여기서 그만하기로 하고 계속 올라갑니다. 숲으로 둘러싸인 오솔길이 시원합니다. 약수터도 있습니다. 예민한 저는 빗물이 섞였을 듯하여 안 마시지만 다른 이들은 잘도 마시는군요. 시원하답니다.


 

, 드디어 일주문이 보입니다. 절에 들어가는 첫 관문입니다. 기둥 하나(一柱)만을 세워 문을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두 기둥을 일직선상으로 나란히 세워 그 위에 지붕을 얹고 현판을 달아 문을 만들었다는 뜻에서 일주문(一柱門)이라고 한답니다. 네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건축양식과는 달리 특이하지요?

 

다 이유가 있답니다. 일주란 일심(一心) , 한마음을 상징하는데요. 신성한 절에 들어가기 전에 세상사 어렵고 힘든 일은 모두 잊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의미가 있을 테지요. 일주문 현판을 읽어보니 黃岳山直指寺 라고 적혀 있군요. 한글세대를 위해 번역하자면 이렇습니다. 황악산직지사

 

우리나라 절들은 잘 아시겠지만, 대개 선종 계열입니다. 통일신라 초기까지는 교종이 우세했지만, 후기로 접어들면서 선종이 득세하기 시작합니다. 59산이 각축을 벌이지만 차츰 진골귀족의 종교였던 교종은 퇴조하고 선종이 득세하기 시작합니다. 고려 초에 들어와 왕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이 선교통합을 시도해 천태종을 창시하지만, 역시 선종에 기울었지요.

 

송광산 조계사에서 보조국사 지눌이 설법을 전한 이래로 한국불교는 조계종이 대표해왔습니다. 보조국사를 존경하는 왕명에 의해 송광산은 이름을 조계산으로, 조계사는 이름을 송광사를 바꾸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데 서로 이름을 바꾼 데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까요? 그 뜻을 아직 잘 모르겠네요. 저는. 

 

그저 임금이 지눌스님을 존경해서 그랬다고 하기엔 너무 허전하잖아요? 하여간 지눌스님이 설파하신 돈오점수의 선풍이 천 년을 이어왔는데 최근 성철스님이 돈오점수가 아니라 돈오돈수다라는 화두를 던져 불교계에 논쟁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저야 뭐 돈오돈수든 돈오점수든 도무지 이해도 못하는 속물중생에 불과하지만, 그 성철스님이 바로 제 고향 문경 봉암사(정확하게 희양산봉암사로 구산선문의 하나임)에서 득도하셨거든요. 그래서 관심을 가져보는 거지요.

 

이야기가 옆으로 길게 샜습니다. 역시 속물중생이라 일심이 안 되는군요. 계속 올라가시지요. 조금 올라가니 대양문(大陽門)이 나옵니다. 글쎄요. 이 문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보통 일주문 다음에 금강문 그 다음에 사천왕문, 불이문이 나오고 대웅전에서 부처님을 만날 수 있는데요. 갑자기 대양문이 나오니 이게 무슨 문이지요?

 


저도 일단 잘 모르니까 패스하고
조금 더 올라가니 금강문이 나옵니다. 금강문에는 두 명의 역사가 지키고 있는데요. 아금강역사와 훔금강역사입니다. 아금강역사는 입을 아 벌리고 오른쪽 주먹을 불끈 쥐고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대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훔금강역사는 반대로 훔하고 입을 다문 채 왼쪽 주먹을 치켜들고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은 범어의 첫 글자와 끝 글자로서 처음과 끝, 생성과 소멸을 의미한답니다. 공격적인 자세의 의미는 당당함과 역동적인 힘을 상징하며, 방어적인 자세의 의미는 고요하고 정적인 마감을 상징한다고 하네요. 가톨릭 제단에서 상징물로 잘 쓰는 알파와 오메가의 뜻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건 잘 모르는 얘기니까 시비 걸지는 마세요. 

 

사진에서 보니 제 친구와 일행들이 금강역사를 보며 뭐라고 서로 의견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은 합장한 자세로 기도하시는 분도 있군요. 인사라고 해야 하나요? 계속 올라갑니다. 이번엔 사천왕문입니다. 사대천왕이 지키고 있는 곳입니다. 가장 무서운 곳이지요. 원래 사대천왕은 고대 인도의 마왕들이었답니다.

 

석가모니에게 귀의한 뒤로는 착한 마왕이 되어 불국정토의 외곽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서유기에 보면 손오공도 처음에 매우 못된 장난꾸러기 마왕이었지요? 부처님도 아주 우습게 알다가 된통 혼난 뒤로는 개과천선하여 삼장법사를 따라 천축에 불경을 가지러 떠나게 되지요. 말하자면, 손오공도 마왕에서 수호신으로 전향한 셈이지요. ㅎㅎ

 

사천왕문을 지나면 보통 불이문(不二門)이 나오는데 불이문이 보이지 않는군요. 대신 만세루(萬歲樓)가 두 팔을 벌려 우리를 맞습니다. 울창한 나무숲에 둘러 쌓인 만세루가 무척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직지사의 특징 중에 하나가, 계속 사진을 보시면 느끼시겠지만, 모든 전각들이 울창한 나무숲에 둘러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불이문은 해탈문이라고도 하는데 산문의 마지막 문으로서 이 문을 거치며 세상에서의 모든 근심을 벗어버리면 해탈하여 비로소 부처가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불이 즉, 둘이 아니란 말은 곧 하나를 의미하는데 만남과 이별은 둘이 아니며, 시작과 끝도 둘이 아니며, 삶과 죽음 또한 둘이 아니니 세상 만사가 모두 둘이 아니랍니다.

 

불이의 이치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해탈에 이르러 부처가 되는 경지라고 하는데, 저는 아직도 불이가 이불인지 요인지 분간이 안 가니 해탈하기는 틀렸나 봅니다. 하여간 직지사에서는 불이문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일주문을 지나 대양문이 있었고 만세루가 대웅전 앞을 지키고 있군요.

 


마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었답니다
. , 이 만세루는 부처님이 한가 하실 때 여유를 즐기시는 곳인가? 그러나 어쨌든 특별한 절 구조를 감상 하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입니다. 드디어 대웅전입니다. 대웅전 앞에는 두 개의 석탑이 멋진 자태를 뽐내듯 서있습니다. 보물입니다. 보물 몇 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나 여러분이나 보물 몇 호 그런 거 잘 모르기도 하지만, 그저 일련번호에 불과한 거지요.

 


직지사 대웅전도 봉암사 극락전과 함께 보물지정 목록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 대웅전 안을 들여다보니 부처님이 떡 하니 앉아 계십니다. 그 부처님 뒤에 색이 바랜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일명 후불탱화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보물입니다. 역시 보물 몇 호인지는 모릅니다. 문 밖에서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그림이 선명하지는 않습니다. 안에 들어가면 촬영 못하게 합니다. 밖에서도 플래시는 잠그고 찍었습니다.

빛을 많이 받으면 색이 계속 바래집니다. 여러분도 주의하세요. 그래도 혼났습니다. 사진만 자꾸 찍고 불전에 절을 안 한다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죄송합니다만, 저는 가톨릭계라서 부처님께 합장하고 인사까지는 해드릴 수 있어도 안에 들어가서 다른 불자님들처럼 그렇게 절을 몇 번씩이고 하는 그건 좀 곤란한데요. 잘 할 줄도 모르고요.

 

그래도 들어와서 하고 가라고 그러더군요. 물론 한번 그냥 씩 웃어주는 걸로 대신했습니다. , 그러고 보니 만세루 옆에 기와불사라고 크게 씌어진 간판을 본 기억이 나는군요. 이 절은 지금 한창 중창불사 중인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불전에 인사들 하라고 하셨던 것이로구나, 평소에 그런 모습을 잘 보지 못했었거든요.

 

기와불사 하니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옛날 가톨릭도 비슷한 걸 한 적이 있었습니다. 소위 면죄부판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에 거대한 성 베드로 성당을 지을 건축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그랬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가톨릭은 종교개혁의 격랑에 휘말리게 되고 결국 개신교와 분열합니다. 루터의 98개항비판이 시발이었지요.

 

루터는 가톨릭 신부였고 그는 교회의 부패를 질타하며 오리지널로 돌아가기를 촉구했지만, 그가 원했던 대로 오리지널 즉,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간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루터는 이후에 연하의 전직 가톨릭 수녀와 결혼했지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기 부모에게 손주를 안겨주고 싶다면서 말입니다.

 

물론 그는 가톨릭의 오래된 전통을 타파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북유럽의 루터교들이 성직자가 결혼하는 것 외에 가톨릭과 별 다름없는 예배방식을 계속 고수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미국의 개신교들은 가톨릭과 확실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고, 한국의 개신교는 아예 완전히 이질적입니다만.

 

그 와중에 헨리8세는 가톨릭과 결별하고 영국국교회(성공회)를 만들었지요. 합법적으로 재혼을 하기 위해서였는데-가톨릭 교회법이 그의 이혼과 재혼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죠- 이걸 반대하다 유토피아의 저자로 유명한 토마스 모어 경이 헨리8세의 손에 처형되는 비극도 발생했답니다.

 

기와불사를 보며 왜 면죄부가 떠올랐는지 원 그러나 가톨릭은 오늘날도 그 면죄부란 것을 계속 판매(?)하고 있습니다. 저도 가끔 성당에 가서 그 면죄부란 것을 사는데요. 고해성사를 통해서 말이지요. 어두운 고해실에서 제 얼굴을 보지 못하는 신부님을 향해 우선 죄를 고백하지요.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뭐 아무거나 하나 만들어서 고백해도 됩니다. 그러면 신부님이 보이지 않는 저를 향해 사면을 해주시는 거죠. 신을 대신해서.

 

고백한 죄가 진짜라고 생각되면 앞으로 그러지 말라는 훈계를 주실 때도 있지요. 그러고 난 다음 주기도문을 몇 번 외우라든지 뭐 이런 간단한 벌을 내립니다. 그러면 저처럼 순진한 신자는 매우 기뻐하며 벌을 받는 임무를 다하기 위해 기도문을 열심히 외는 거지요. 이게 말하자면 면죄부란 것인데요, 아마 종교개혁 당시에 건축헌금을 요구하는 폐단으로 이용되었겠지요. 그러나 기와불사든 면죄부든 과도하게 그 순수성을 의심하는 자체가 도리어 불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역사책에는 너무 과격하게 당시를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무엇이든 과격해지면 왜곡이란 악마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마침내 주인행세를 하게 되는 법이지요. 제가 배운 역사책(국사나 세계사를 고등학교에선 배우지 못했으므로 중학교 과정을 말하는 것. 그러므로 고교 이상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차이가 있을 수도)에서도 그런 것을 느꼈답니다.

 

제가 불자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법당의 현판에 대웅전이라고 씌어진 것을 보니 이곳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곳입니다. 大雄이란 석가모니를 이름입니다. 진리를 깨달아 세상에 널리 알렸다는 뜻이죠. 대웅전은 부처님의 좌우에 협시보살이라고 해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함께 모신답니다. 만약 대웅보전(大雄寶殿)이면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모시고 뒤에 삼존불 탱화를 그린다는군요. 
 


대웅전을 지나 옆으로 나아가니 비로전(毘盧殿)이 나옵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입니다. 비로자나불은 법신불입니다. 불교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니라 법을 믿는 종교라고 말합니다. 부처님도 열반에 드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오로지 자기자신과 법에만 의지하여 정진하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곧 불교는 진리를 믿는 종교란 뜻이겠죠.


안을 들여다보니 부처님 뒤에 하얀 수백 개의 부처 또는 동자승이 있는데 정확하게 무엇일까요? 모르면 일단 패스. 하여튼 중요한 것은 이 비로전도 보물이란 사실입니다. 역시 몇 호인지는 모릅니다. 보물로 지정된 것이 1970년대란 사실만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납니다. 아 이거 시간이 너무 걸립니다. 지금부터 대충 설명하고 넘어갑니다. 저도 곧 어디 가야 하거든요. 아래 사진에서처럼 비로전 앞에도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역시 보물이고요. 몇 호인지는 역시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조경이 참 잘 되어 있습니다. 배수로도 잘 만들어 놓았고… 이렇게 나무가 울창한 절은 처음입니다. 아래 보이는 누각 옆 등나무 아래에서 잠깐 쉬었습니다.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비로전도 정면에 보시는 바와 같이 누각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이 누각의 이름은 보시는 바와 같이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기억도 잘 나지 않고요. 누각에 범종도 달아놓았네요.


이곳은 객사인지 아니면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인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보지는 못했습니다.  


관음전. 말할 것도 없이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곳이죠. 관음보살은 대자대비의 상징입니다. 관음보살이 머리에 쓴 보관에는 아미타불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관음보살이 아미타불을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공경의 표시라고 합니다.  

여기는 응진전입니다. 16나한을 모시는 곳이죠. 


사명각이라고 쓰인 현판에서 눈치 채셨겠지만, 이 당우는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신 곳입니다.


! 이런 무릉도원이 절 속에 숨어 있었다니 그런데 다리를 건너가려니 <출입금지>랍니다. 아마 스님들이 참선하는 곳인가 봅니다. 그럼 들어가면 안 되지요. 스님들 보통 소림사 권법 기본으로 하시는 거 다 아시죠? 누각의 이름이 안양루라고 적혀 있더군요. 틀려도 할 수 없습니다. 저 한글세대거든요.


이곳도 출입금지입니다. 살짝 들어가서 장독대를 전경으로 건물을 살짝 찍었습니다만, 얼른 나왔습니다. 소림사 무술을 잘 하실 거 같은 스님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담 너머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

 

여기는 무슨 박물관 같습니다. 평일이라 그런지 문을 안 열었습니다. 이 앞뜰을 가로질러 나가니 다시 절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가만 이건 뭐지? 다시 사찰 경내로 들어서는 문을 지나 좌측으로 조금 올라가니 좌측에 아래 사진과 같은 문이 나타났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은 아까 보았던 <외인은 출입을 금합니다>란 팻말이 붙어 있던 스님들과 보살님들이 기거하는 건물-푸른기와의 박물관 옆 건물-로 통하는 문이었습니다.) 











 


다가가 보았더니 이렇게 적혀 있군요.
가던 발걸음 멈추고


뭘 어쩌라는 건지
? 가던 발걸음 멈추고… 돌아가라는 건지, 아니면 조용히 들어오라는 건지…. 무서워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그냥 나왔습니다
.


, 이곳은 찻집입니다. 차는 한잔 못했습니다. 저 혼자 사진 찍고 구경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빨리 내려 오라고 단체 사진 좀 찍어달라네요. 아유, 뭐가 그리들 바쁘셔서, 좀 천천히 구경하다 내려가시지 않고. 하여간 우리나라 사람들 동작이 너무 빠릅니다. 문화재 감상할 때뿐만이 아니고 밥 먹는 시간도 아마 세계에서 따라올 나라가 없을 걸요?

 

 

 

, 개중에 그래도 진득하게 감상할 줄 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사님들, 말도 아주 잘 듣습니다. 합장 한번 해 주세요. 하자 바로 자세 나옵니다. 하하. 사실은 저 두분 중에 한 분은 불교대학 출신이랍니다. 누가 부처님하고 닮았는지 한번 맞춰보세요. 그분이 불교대학 출신이겠지요.

 

여기서부터는 청풍료 앞뜰에 전시된 유물입니다. 바빠서 설명은 길게 못 다니까 알아서 그냥 조용히 감상해 주세요.




자, 유물 감상 계속 하시지요. 아래 보시면 1/4~4/4까지 매직으로 써놓은 유물이 보이실 텐데요. 아마 네 개의 부분이 원래 일체였던 모양입니다. 확실한 것은 저도 모릅니다. 그냥 추측으로 그리고 물고기도 한 마리 보이시죠? 불교에서 이 물고기는 매우 중요한데요. 범종각에도 보시면 물고기가 보이실 겁니다.

목어라고 하지요. 기독교에서도 물고기는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만, 그와는 또 다른 전설이 이 목어에는 담겨 있답니다. 아무리 바빠도 이 이야긴 빠뜨리면 안 될 것 같군요.

 

옛날 한 승려가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늘 그릇된 짓만 일삼다가 몹쓸 병에 걸려 죽은 후 물고기로 태어났답니다. 보통 불교에서 업보라고 하는 그런 것이었겠지요. 그것도 등에 커다란 나무가 솟아난 그런 물고기로 태어났는데 풍랑이 칠 때마다 피를 흘리는 고통을 당하곤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등에 커다란 나무가 솟아난 물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이대고 슬피 울기에 스승이 신통력으로 그 물고기의 전생을 살핀 결과 방탕한 짓을 일삼다가 일찍 죽은 제자였습니다. 불쌍히 여긴 스승은 곧 제자를 위해 수륙재를 베풀어 물고기의 몸을 벗게 해주었습니다.

 

그 날 밤, 스승의 꿈에 나타난 제자는 스승님의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이제부터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저의 등에 있던 나무를 베어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어 나무막대로 쳐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수행자에게 제 이야기는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승은 나무를 베어 물고기 모양의 목어를 만들어 수행자들에게 교훈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 목어로부터 변형된 것이 바로 목탁인데, 둥근 형태에 앞 부분의 긴 입과 입 옆의 둥근 눈이 물고기를 나타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스님들이 목탁을 두드리는 이유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니란 걸 아시겠지요? 수행자들의 나태한 정신상태를 일깨워 맑은 정신으로 수행정진하고, 그리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큰 뜻이 숨어있는 것이겠지요.

 

앞으로는 절에서 목어를 만나면 그냥 가지 마시고 막대기로 한대씩 때려주고 가세요. 하하. 그러면 안 되려나?

 


빨리 내려오라니 부랴부랴 뛰어가는 중입니다
. 다시 일주문입니다. 그래서 돌아가는 기념으로 다시 한 장 찍었습니다. 제가 카메라를 조준하자 올라오시는 분들이 자기들 찍는 줄 알고 움찔 하는군요. 미안합니다.

 

이건 무슨 비석인지 모르겠습니다. 안내 간판도 없습니다. 문도 잠겨있고요. 바빠서 확인할 겨를도 없습니다. 여기도 그냥 패스. , 그런데 청풍료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삼층석탑 사진을 못 찍은 게 생각납니다. 그것도 보물인데. 그러고 보니 직지사석조여래좌상도 못 찍었습니다. 역시 보물입니다.

 

할 수 없죠. 시간도 없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번 더 와야겠습니다. 여기는 완전 보물 천지입니다. 다음에 혼자 와서 조용히 감상해야겠습니다. 역시 단체로 어딜 가서 심도 있게 무얼 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집단이 좋을 때도 있지만, 나쁠 때도 많다는 말이죠.


 

 

 












헐레벌떡 뛰어내려가니 단체 사진 찍으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 한 분이 그러시는군요.
, 작가님 오십니다. 모두 모여주세요. 단체촬영 합니다. ? 이게 무슨 소리랍니까? 사실은 아까부터 저보고 자꾸 작가님, 작가님 하시더라고요. 이것 참, 저 카메라 산지 이제 겨우 두 달 됐는데, 오래 살다 보니 별 소리 다 듣습니다.

 

그런데 마산 우성택시 기사님들 말 참 안 듣습니다. 저렇게 모여달라고 애원을 해도 안 모이는 거 보십시오. 모두들 HID 출신들인가? 북파공작원 말입니다. 거기는 혼자서 행동하는 부대이기 때문에 말 진짜 안 듣는답니다. 완전 개인플레이죠. 택시도 비슷하긴 하군요. 혼자 움직인다는 점에서. 하여간 여차여차 사진은 찍었는데, 보안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출신부대의 특성상 단체사진은 공개 안 하기로 합니다.



바로 위는 직지사 입구에 만들어진 직지공원입니다. 직지사 구경한 다음 여기서 도시락 까먹고 놀기 좋게 만들어 놓았군요. 아이들 데리고 소풍가면 딱 좋겠습니다. 아니면 시민단체들 버스 한대 끌고 소풍가도 딱 좋겠네요. 아래 보시는 사진은 직지사 입구 상가지역입니다. 아까 이곳에서 점심으로 산채비빔밥을 먹었었지요. 늘 그렇듯 더덕 안주에 동동주도 물론 곁들였지요.

소주병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소주잔을 권하는 분은 우성택시 노조위원장이십니다. 그 아래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자세로 인사를 하고 계신 분도 아마 노조 간부이신 모양입니다. 이분은 인사말을 다 하시고 나서 건배 제의를 하실 때도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자세를 소주잔을 들어 “건배” 하시더군요.  

모두들 땡볕에 앉아서도 잘들 먹고 마시고 놀고 있습니다. 나중엔 안 되겠던지 우산까지 등장했습니다. 처음에 비가 오고 날도 흐려 이렇게 난장에 자리를 잡았는데 갑자기 해가 쨍쨍 뜬 것입SL다. 원래 야유회니 운동회니 하게 되면 하늘도 얄궂게 시샘을 하는 법입니다.

이제 먹을 것도 다 먹었겠다 청소 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밀대 들고 열심히 닦고 계시는 기사님, 왕년에 모 은행 지점장님이셨답니다. IMF 덕분에 택시업에 뛰어드셨다는군요. 택시 기사님들 인생 역정 다 들어보면 정말 몇 편의 파노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력도 다양하고 화려합니다. 그래서 단체사진 찍을 때 그렇게들 말을 안 들으셨나? 하하. 하여간 지점장 출신이라는 기사님, 밀대질도 정말 잘 하십니다. 은행 근무하실 때 밀대 들고 청소만 하셨나? 

맨 마지막 사진은 아마도 노조 지도부인 모양입니다. 마산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할 것인지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돌격 앞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일단 작전상 해산할 것인지…. 결론은 돌격 앞으로로 났습니다. 마산역에 도착한 후 일행들은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노래방으로 돌격했습니다. 저도 종군기자(!)로서 끝까지 돌격에 참여했고요. 이상 끝입니다. 

아 참, 그리고 제목에 <택시기사들이 직지사로 간 까닭>이 무엇이냐고요? 그거야 당연히 야유회 간 거지요. 여기까지 오셨으면 다 아실 텐데. 별 거 없어요. 그냥 야유회. 마땅히 달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서요. 이해 바라고요. 여러분도 긴 글 읽으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많이 걸어 다리들 아프시지요? 저는 약속이 있어서 이만. 말이 너무 길어져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오탈자 많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나중에 고칠 게요. 총총.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낙동강 천삼백 리 길을 걷는다

2. 제1구간, 너덜샘에서 분천리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기차길, 추전역
추전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역이다. 해발 855m라는 높이는 내가 살고 있는 마산의 진산 무학산 정상보다도 100m가 높다. 이 높은 곳에 어떻게 기차가 올라왔을까, 기술의 진보가 오늘과 같지 않았을 까마득한 옛날에 말이다.

아마도 태백산 일대에 석탄이며 아연이며 중석이 발견되지 않았던들 이곳은 아직도 태고의 원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추전역으로 올라가는 길 양 옆으로는 오래된 석탄도시의 흔적이 봄기운에 녹아 내리는 눈과 함께 질척거린다. 검은 도시의 영광을 아쉬워 하듯….

 

추전역에 올라서니 바로 코 앞에 거대한 풍차를 머리에 매단 매봉산이 바라다보인다. 대관령을 넘으면서도 저런 풍경을 보았었다. 거대한 풍차의 날개가 돌아가는 모습과 동해바다가 이국적이었다. 석탄도시의 상징 추전역에서 바라보는 풍차의 날개짓…. 추전역은 한산했다. 한쪽 귀퉁이에선 과거에는 석탄을 가득 싣고 분주하게 뛰어다녔을 검은 화물열차가 오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대신 코에 기다랗게 고드름을 매단 삐에로 복장을 한 인형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반긴다.

추전역에서 바라보는 매봉산 풍력발전용 풍차들

한 세월 전국의 에너지 공급을 책임지며 땀을 흘렸던 이 역사는 이제 검은 무연탄 대신 카메라를 들고 알록달록한 등산복으로 치장한 관광객들을 맞는다. 석탄을 가득 싣고 길 떠날 준비에 바삐 움직이던 기관차와 화물열차 대신 선로에는 관광객들의 셔터소리만이 가득하다.

 

한때 태백시는 인구가 20만에 육박하는 고원도시였다. 원래는 삼척군 상장면(또는 1920년대 이전엔 상장성면이라고도 불리었음)으로 화전지대였던 이 곳은 1920년대에 탄층이 발견되면서 탄전지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1961년 삼척군 장성읍으로 승격했고 1973년에는 장성읍 황지리가 삼척군 황지읍으로 분리되었다가 1981년 다시 장성과 황지를 합하여 태백시가 되었다.

 

태백시는 우리나라 최대의 탄광도시였다. 사람들은 그때의 영광을 말할 때 지나다니던 개도 입에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말로 대신한다. 물론 이 말은 그저 우스갯소리다. 사람에게도 귀한 만 원짜리를 어찌 개가 물고 다닐 수야 있겠는가그러나 이런 우스갯소리는 당시의 풍요로움을 그리워하는 듯한 말이어서 한편 못내 서러운 마음을 배척할 수가 없다

내 어린시절 고향도 탄전지대였다. 태백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태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문경이란 또 하나의 탄전지대가 있었다
그런데 내 어릴 적 추억이 묻은 이곳을 소개할 때도 마찬가지로 예의 개도 만 원짜리를 입에 물고 희희낙락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랬던가. 그러나 사정은 달랐다. 광산주에게는 맞는 말일지언정 막장에서 탄을 캐는 광부들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이다.

 

광부들은 땅속에서 일을 했다. 그들은 밀폐된 어두운 곳에서 희미한 카바이드 불빛에 의지한 채 죽음을 친구로 삼아 검은 흙에 삽질을 한다. 발파 후에 채탄작업, 그리고 다시 동발을 세우고 한발 한발 막장이 깊어질수록 채탄장에 쌓이는 석탄의 높이만큼 사끼야마(선산부)들의 폐는 검은 먼지에 색이 변한다. 그렇게 변색되는 폐가 그들의 생활을 얼마나 윤택하게 했을까.

 

얼마나 많은 광부들이 진폐로 생과 이별했던가. 그들은 폐에 묻은 검은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돼지비계와 소주가 필요했다. 갱도 주변에는 수많은 술집과 작부들이 그들의 진폐를 달래기 위해 들어섰고 광산도시는 밤이나 낮이나 흥청거렸다. 글쎄, 어쩌면 그 시절 술 취한 어느 광부의 만 원짜리를 개란 놈이 훔쳐 물고 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머리를 박박 밀고 시커먼 교복과 교모를 눌러쓴 모습이 스스로도 너무나 대견스러워 우쭐거리던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어느 날 하교 길에 국민학교 동창을 만났다. 녀석은 검은 탄가루를 날리며 달리는 재무시(GMC트럭) 조수석에 매달려 있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잽싸게 얼굴을 돌렸다. 나 역시 마치 무슨 큰 죄라도 지은 냥 얼른 눈길을 피했었다.

 

그런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근로기준법에 기재된 아동근로 금지의 원칙 같은 것은 그야말로 법전 속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더 슬픈 기억은… 국민학교 때였다. 양정모 선수가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금메달을 땄다고 흑백 텔레비전에서 카 퍼레이드를 하던 바로 그날이었다. 옆집 형이 복날 개 맞듯이 맞았던 것은….

추전역. 무연탄 적재용 화물열차가 보이고 그 옆에 싣다 만 석탄이 쌓여있다.

옆집 형은 나보다 세 살 위였다. 그는 광산에서 후끼야마(후산부)로 일했는데 그날 낮에 친구들과 막걸리를 많이 마셨던가 보았다. 그는 미성년자였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팬티만 입힌 채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장작으로 빠따를 때렸는데 그 형의 엉덩이와 허벅지에선 피가 줄줄 흘렀다. 그리고 그 몸으로 병반(3교대 중 밤에 일하는 조)을 들어갔던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굴이 무너진 것이다.

 

모두 옛날 이야기다. 새끼줄에 연탄을 매달고 퇴근길을 재촉하던 시절도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다. 탄광도시의 영광도 옛날 이야기 속으로 사라졌다. 광부들의 애환도 작부의 구성진 노래도 모두 개가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니던 과거의 거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제 해발 855m에 외롭게 서있는 추전역사는 관광객들을 맞아 헤픈 웃음을 짓는다.

 

나는 그 추전역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내 친구와 하늘나라에서 살고 있을 옆집 형을 생각했다. 그 모습을 매봉산 정상의 풍차들이 빙글거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추전역을 떠나 두문동재를 향해 버스를 달렸다. 추전역 바로 위에 있는 두문동재는 해발 1268m의 고개다. 두문동이라. 이성계와 정도전에게 멸망한 고려의 충신들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 고개 너머에는 낙동강 발원지 너덜샘이 기다리고 있다.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