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06.08 여자들이 화장하는 이유는 신의 뜻이었다? by 파비 정부권
  2. 2009.05.21 브레이브 하트는 아일랜드인 아닌 스코틀랜드인이 주인공 by 파비 정부권 (2)
  3. 2009.05.17 택시기사들이 직지사로 간 까닭은? by 파비 정부권 (6)
  4. 2009.02.16 심산선생 무덤에 절하던 김추기경, 시대의 선구자 by 파비 정부권 (4)
신부님이 내린 여성들의 화장에 관한 심오한 해석

"여자들이 화장을 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세대별로 다 다른 거라.
10대는 화장이라 하지 않고 치장이라고 해요. 화장 하는 게 아니고 치장하는 거지. 
그럼 20대는? 20대는 진짜 화장이에요. 
30대에 하면 그건 위장이라. 
그럼 40대는? 분장이라고 그래. 하하. 
그럼 50대에 화장 하면 그걸 뭐라고 그러겠어요? 그때는 변장이라, 하하하하. 
60대에도 화장을 하지요? 여기도 보니 많이들 하셨네. 60대엔 뭐라 그럴까? 
그땐 환장 하는 거야. 
70이 넘어도 여자는 역시 화장을 하더라고, 그때는 포장을 하는 거야, 포장. 
그럼 80 넘으면 안 할까? 아니야 그때도 해요. 그때는 아주 끝장을 보는 거지." 

첫영성체를 받는 어린이들이 따로 공연도 준비했습니다.


오랜만에 성당에 가서 들은 화장에 관한 이야깁니다. 딸아이가 첫영성체를 하는 날이었습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평소에는 성당에 잘 가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써놓고 보니 좀 미안하군요. 아무튼 오랜만에 성당에 앉았더니 감회가 새롭군요. 신부님도 바뀌셨습니다.

그런데 새로 오신(최소한 제게만은) 신부님은 무척 재미있는 분이셨습니다. 미사 내내 신자들은 웃느라 배꼽이나 성했을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이날은 첫영성체 의식이 있는 날이었던 만큼 신부님의 강론은 역시 영성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영성체란 무엇인가?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해드리자면 이렇습니다. 하느님의 몸을 받아먹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몸을 받아먹는다고? 뭔 이런 끔찍한 일이! 하고 놀라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진짜 몸을 받아 먹는 게 아니고 밀로 만든 빵떡을 받아먹는 거니까요.

본래 예수께서 하신대로 하자면 몸도 받아먹고 피도 받아먹어야 하지만, 포도주는 비싸서 그런지 평소에 피를 받아먹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가끔 아주 특별한 때에 피(포도주)에 살짝 찍은 몸(빵)을 받아먹을 수도 있지만, 그야말로 아주 가끔입니다. 

영성체 때 받아먹는 것은 밀떡입니다.


그럼 이렇게 하느님의 몸을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가? 아닙니다. "내 몸을 받아먹었으니 너도 가서 네 몸을 나누어 주어라!" 이것이 하느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첫영성체를 하기 전에―이 의식에 참여하는 이들은 모두 열 살짜리 어린이들입니다―신부님이 물었습니다. 

"여러분도 하느님이 몸을 나누어주신 것처럼 그렇게 하실 수 있겠지요?" 

선뜻 대답이 안 나오자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몸을 내어줄 수 없는 사람은 영성체 하면 안 돼요.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만 손들어 보세요" 하고 신부님이 말했겠지요. 그러자 모두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손을 번쩍 들더군요. 물론 우리 딸도요. 

그렇군요. 가톨릭 미사의 핵심은 바로 성찬의 전례라는 것인데요. 그건 다름 아닌 하느님의 몸을 나누어 먹는 의식이랍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몸을 사람들이 서로 갈라 먹는 거지요. 역시 끔찍하다구요? 그런데 하느님의 몸을 처음 먹어본 우리 딸이 뭐라고 소감을 말했을까요?

"아빠, 먹어보니까 맛이 하나도 없더라. 나는 엄청 맛있는 줄 알고 기대가 컸었는데."

음, 실망이 컸던 모양이로군요. 아직 아이는 빵떡의 진정한 의미보다는 감미로운 맛이 더 기다려졌던 모양입니다. 그런 아이를 위해서였던지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름 사람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기는 참 쉽지 않지요. 어떤 사람들은 또 '나는 내어줄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하지요?'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분들은 늘 평화로운 얼굴을 보여주면 되는 거예요. 그 얼굴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한다면 그게 곧 내 몸을 내어주는 것과 같지요."

우리 아이는 첫영성체 교리시간에 개근했다고 선물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신부님은 예의 화장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정말 재미있더군요. 물론 이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는 어떤 이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듣는 이든 이미 알고 있는 이든 모두들 즐거워했습니다. 영성체와 화장을 비교하는 신부님의 재치가 엄숙한 미사를 활기차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렇죠. 화장을 하는 것도 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니 좋은 일이죠. 그러나 너무 떡칠 하지는 마세요. 하더라도 적당히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이 말에 모두 한 번 더 배꼽을 잡았지만, 저는 그 말에도 진리가 숨어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중용의 미덕 같은 거라고나 할까…! 흠, 오버가 심했나요? 아무튼 오랜만에 즐거운 미사였습니다. 게다가 여성들이 화장을 하는 것이 신의 뜻을 전하는 성스러운 행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더욱 뜻깊은 미사였다고나 할까요? 하하하~ 
Posted by 파비 정부권

이미지=다음영화

안녕하세요, 김태훈님.
<김태훈의 사생활과 공생활http://metablog.idomin.com/> 잘 보고 있습니다, 오늘 <경남블로거스> 추천글(민요의 변신은 무죄)에 올라온 아일랜드 민요도 잘 들었고요. 고맙습니다.  
댓글로 달 이야기를 이렇게 블로그에 올려 트랙백으로 보냅니다.
그냥 심심해서 실험적으로 해보는 거니까 너무 나무라지는 마시고요. 

사실은 이렇게 긴 댓글은 블로그에 적어 트랙백으로 보내는 게 더 좋지 않겠느냐고 저의 블로그 사수이신 김주완 기자님이 말씀하셨던 게 생각나서요.
제가 댓글이 대체로 길다보니 몇 번 그런 충고를 받았었거든요.
그래서 오늘 최초로 그 충고를 받아들여봅니다.
하랄 때는 안 하다가, 꼭 청개구리가 지 애미 무덤 냇가에 만들어놓고 비올 때마다 우는 짓을 따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일랜드, 님의 말씀처럼 민족성이 우리하고 비슷하다고 하더군요.
저야 뭐 아일랜드 가본 적도 없고, 아일랜드 사람 본 적도 없지만.
아일랜드는 독실한 가톨릭계 나라라고 하지요.

천주교의 자율적인 조직 중 레지오라고 있는데 그 본부가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습니다.
레지오란 로마군단에서 따온 것이구요. 철저한 군대규율을 따른다고 하지만, 그렇게 군대적이지도 않습니다.
미국은 개신교의 나라인데 최초로 케네디가 아일랜드계 가톨릭으로 대통령이 되어 유명해지기도 했지요.

그런데 오늘 죄송합니다만, 제가 안티를 하나 걸어야 되겠네요. 감상 잘 하고 나서는... 흠~


멜 깁슨이 주연한 브레이브 하트의 무대는 아일랜드가 아니고 스코틀랜드랍니다.
독일의 앵글로와 작센지방에 살던 게르만족이
(이 작센이란 말이 변해 삭슨, 색슨으로 발음된다고 하던데요. 저는 그 이상은 잘 모릅니다)
켈트족이 살던 브리타니아로 쳐들어가서 초지(평지)가 많은 잉글랜드를 차지하고,
켈트족들은 모두 산악지방인 스코들랜와 웨일즈 지방으로 쫓아냈다고 하더군요.

나중에는 이 스코틀랜드마저 집어삼키자 저항이 일어났던 것이고,
그 저항군의 지도자 윌리엄의 일대기를 영화한 것이 브레이브 하트였죠.
이 영화에는 소피 마르소도 등장했었는데,
제가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해서 이 소피 마르소도 꽤나 좋아했었답니다.
1980년 라붐이었지요? ㅎㅎ 다시 소시적으로 가는 느낌.
하여튼 죄송합니다만, 윌리엄은 스코틀랜드 인이고,
아마 잘은 몰라도 이 스코틀랜드인과 아일랜드인은 같은 켈트족으로 알고 있습니다. 

님의 블로그에서 말한 신교는 영국국교회(성공회)를 말하는 것일 텐데요.
이 신교란 것이 헨리8세가 자신의 이혼과 재혼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톨릭으로부터 이탈해 교황의 지위에 영국국왕을 올려놓은 결과로 탄생한 것인데요.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이혼문제지만, 그 속에는 국왕과 봉권귀족들간의 권력게임이 숨어있는 것이지만서도)
지금도 영국성공회의 수장은 엘리자베스 여왕이죠.
신부가 결혼한다는 것 말고 가톨릭과 차이가 하나도 없어보인답니다.

그러니 신구교간 갈등이라기보다는 오래된 민족간 갈등, 침략의 역사로부터
오늘의 문제를 진단하는 게 옳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가보지 않고 말하는 게 좀 그렇긴 합니다만… 대충 주워들은 풍월로는 그렇습니다.
여행 안내책에 보면 스코틀랜드에 가서 "유아 잉글리쉬?" 이러면 무척 화낸답니다.
"유아 스카치?"라고 해야 좋아한다는군요.


좋은 노래 잘 들었습니다.
역시 우리하고 민족성이 비슷하다더니 아리랑하고도 비슷한가요?
이것도 모르니 패스. 그냥 제 느낌이었습니다요.

앞으로도 자주 좋은 자료 많이 보여주세요. 고맙습니다.
제발 비는 안 와야 할 텐데…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택시운전을 하는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네 회사 노조에서 야유회를 가는데 따라가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남의 회사 야유회 가는데 왜 따라가냐고 했더니 조합원 가족이나 친구들 초청해서 함께 가기로 했다면서 꼭 오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맛있는 음식과 술도 많이 있다는 유혹과 함께

 

그러나 정작 저를 유혹한 것은 맛있는 술과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야유회의 목적지가 바로 김천 직지사였던 것입니다. 직지사는 오래 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문경은 오래된 불교사찰이 많은 고장입니다. 해방 이후 조계종의 성지로 추앙 받는 봉암사와 대승사, 김룡사를 깊이 묻은 산중은 실로 적막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듯합니다. 지리산 자락의 함양과 산청이 비록 깊다고는 하지만 그 유명세로 인한 번잡함 탓에 적막함으로 치자면 이곳에 비할 바 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곳에서 저는 늘 김천 직지사의 명성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아마 인근 고장의 큰 절이었기 때문이겠지요. 지금으로 말하자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겠지만 당시로서는 까까머리 중학생이 가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였습니다. 제가 살던 곳은 읍내에 한번 가려고 해도 한 시간 이상을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곡예 하듯이 골짜기를 지나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김천 직자사에 간다는 소리에 홀랑 넘어간 저는 더디 가는 시간을 탓하며 며칠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5 12아침 8 30, 마산역에 남보다 먼저 도착해 아리랑호텔 근처에 있는 T-World에 들어가 고객용 컴퓨터에서 제 블로그를 틀어놓고 집에서 나오기 전에 포스팅한 기사의 오탈자를 검색하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습니다.


출발시간과 장소는
오전 9 30 마산역전 아리랑호텔입니다. 이곳에 사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야유회 내지 관광을 갈 때는 늘 이곳에서 출발합니다. 모두들 시간 맞춰 도착했습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제가 아는 사람은 제 친구 한 명 뿐입니다. 서먹함을 감추기 위해 구석자리, 항상 그렇듯 앞도 아니고 뒤도 아닌 어중간한 자리에 파고들었습니다.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차창을 적시고 있습니다. ! 직지사에 도착할 때쯤이면 비가 그쳤으면 좋을 텐데 지금 내리는 단비가 농민들에게는 황금보다도 더 값진 것이겠지만, 야유회를 떠나는 사람들에겐 야속하기 그지없습니다. 고속도로변으로 펼쳐진 창녕들에서는 양파들이 오랜만에 단비를 맞으며 무럭무럭 알을 키워가는 것이 보입니다.


차가 출발하자마자 주최측
(?)은 김밥부터 돌립니다. 이런, 미리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나왔는데, 실수했습니다. 애써 차린 성의를 마다하면 예의가 아닙니다. 동방예의지국의 도리를 따지며 억지로 김밥을 밀어 넣고 나니 이번엔 오징어와 땅콩, 방울토마토 등이 담긴 비닐봉지를 1인당 하나씩 나누어줍니다. 접시에 담긴 돼지수육도 자리마다 돌립니다.

 

잠시 후, 소주와 맥주잔이 오가기 시작합니다. ! 이런, 또다시 실수를 절감합니다. 건강검진하기 전에 하룻밤 속을 비워두듯 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이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사회자가 앞자리에서부터 지명하면 의무적으로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음주가 있은 뒤엔 반드시 가무가 따라야 하는 것은 오래된 미풍양속입니다.

 

그러나 그런 미풍양속에 익숙지 못한 저는 차창에 머리를 박고 어젯밤 잠을 못 자 매우 피곤하다는 듯이 조는 시늉을 하며 빨리 도착하기만을 빌었습니다. 버스가 직지사에 도착했습니다. 굵게 내리던 비는 가랑비로 변했습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미리 예약된 식당으로 가는군요. 몇  시간 만에 식사를 세 번 합니다. 이번엔 산채비빔밥입니다.

 

지금부터 4까지 자유시간을 드릴 테니까 마음껏 구경하시고 다시 이곳으로 모여주세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불리 먹여놓고 관광을 시키려고 그런 것이었구나. 하긴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도 배 고프면 허당입니다. 주최측의 세심한 배려에 고마운 마음을 안고 산사로 향합니다. 비를 머금은 길 주변 나무들의 자태가 자못 싱그럽습니다.

 

, 그럼 지금부터 절 구경을 함께 하도록 하시겠습니다. 사진이 매우 많습니다. 스크롤 압박이 좀 오시더라도 참아주세요. 좋은 절을 이렇게 책상에 앉아 간편하게 구경하는 게 참 즐겁다, 생각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래도 정히 힘드신 분은 중간에 하산하셔도 상관없겠습니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대웅전에 부처님은 알현하시고 가도록 하세요.

 

제일 먼저 만나는 이 커다란 문은 사실 본래의 절과는 상관없는 문입니다. 이 문 옆에는 매표소가 있습니다. 그냥 돈 받기 미안하니까 아마 이렇게 커다란 문을 문화재스럽게 만들어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제 생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성의가 대단합니다. 여기서 1인당 2,500원씩 냈습니다. 단체로 계산하면 꽤 큰 돈이지요.

 

그래도 여기는 싼 편이라는군요. 다른 큰 절에서는 4~5천원씩 받는답니다. 하여간 제가 내는 건 아니니까 일단 논평은 여기서 그만하기로 하고 계속 올라갑니다. 숲으로 둘러싸인 오솔길이 시원합니다. 약수터도 있습니다. 예민한 저는 빗물이 섞였을 듯하여 안 마시지만 다른 이들은 잘도 마시는군요. 시원하답니다.


 

, 드디어 일주문이 보입니다. 절에 들어가는 첫 관문입니다. 기둥 하나(一柱)만을 세워 문을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두 기둥을 일직선상으로 나란히 세워 그 위에 지붕을 얹고 현판을 달아 문을 만들었다는 뜻에서 일주문(一柱門)이라고 한답니다. 네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일반적인 건축양식과는 달리 특이하지요?

 

다 이유가 있답니다. 일주란 일심(一心) , 한마음을 상징하는데요. 신성한 절에 들어가기 전에 세상사 어렵고 힘든 일은 모두 잊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의미가 있을 테지요. 일주문 현판을 읽어보니 黃岳山直指寺 라고 적혀 있군요. 한글세대를 위해 번역하자면 이렇습니다. 황악산직지사

 

우리나라 절들은 잘 아시겠지만, 대개 선종 계열입니다. 통일신라 초기까지는 교종이 우세했지만, 후기로 접어들면서 선종이 득세하기 시작합니다. 59산이 각축을 벌이지만 차츰 진골귀족의 종교였던 교종은 퇴조하고 선종이 득세하기 시작합니다. 고려 초에 들어와 왕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이 선교통합을 시도해 천태종을 창시하지만, 역시 선종에 기울었지요.

 

송광산 조계사에서 보조국사 지눌이 설법을 전한 이래로 한국불교는 조계종이 대표해왔습니다. 보조국사를 존경하는 왕명에 의해 송광산은 이름을 조계산으로, 조계사는 이름을 송광사를 바꾸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는데 서로 이름을 바꾼 데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까요? 그 뜻을 아직 잘 모르겠네요. 저는. 

 

그저 임금이 지눌스님을 존경해서 그랬다고 하기엔 너무 허전하잖아요? 하여간 지눌스님이 설파하신 돈오점수의 선풍이 천 년을 이어왔는데 최근 성철스님이 돈오점수가 아니라 돈오돈수다라는 화두를 던져 불교계에 논쟁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저야 뭐 돈오돈수든 돈오점수든 도무지 이해도 못하는 속물중생에 불과하지만, 그 성철스님이 바로 제 고향 문경 봉암사(정확하게 희양산봉암사로 구산선문의 하나임)에서 득도하셨거든요. 그래서 관심을 가져보는 거지요.

 

이야기가 옆으로 길게 샜습니다. 역시 속물중생이라 일심이 안 되는군요. 계속 올라가시지요. 조금 올라가니 대양문(大陽門)이 나옵니다. 글쎄요. 이 문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보통 일주문 다음에 금강문 그 다음에 사천왕문, 불이문이 나오고 대웅전에서 부처님을 만날 수 있는데요. 갑자기 대양문이 나오니 이게 무슨 문이지요?

 


저도 일단 잘 모르니까 패스하고
조금 더 올라가니 금강문이 나옵니다. 금강문에는 두 명의 역사가 지키고 있는데요. 아금강역사와 훔금강역사입니다. 아금강역사는 입을 아 벌리고 오른쪽 주먹을 불끈 쥐고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대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훔금강역사는 반대로 훔하고 입을 다문 채 왼쪽 주먹을 치켜들고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은 범어의 첫 글자와 끝 글자로서 처음과 끝, 생성과 소멸을 의미한답니다. 공격적인 자세의 의미는 당당함과 역동적인 힘을 상징하며, 방어적인 자세의 의미는 고요하고 정적인 마감을 상징한다고 하네요. 가톨릭 제단에서 상징물로 잘 쓰는 알파와 오메가의 뜻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건 잘 모르는 얘기니까 시비 걸지는 마세요. 

 

사진에서 보니 제 친구와 일행들이 금강역사를 보며 뭐라고 서로 의견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은 합장한 자세로 기도하시는 분도 있군요. 인사라고 해야 하나요? 계속 올라갑니다. 이번엔 사천왕문입니다. 사대천왕이 지키고 있는 곳입니다. 가장 무서운 곳이지요. 원래 사대천왕은 고대 인도의 마왕들이었답니다.

 

석가모니에게 귀의한 뒤로는 착한 마왕이 되어 불국정토의 외곽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습니다. 서유기에 보면 손오공도 처음에 매우 못된 장난꾸러기 마왕이었지요? 부처님도 아주 우습게 알다가 된통 혼난 뒤로는 개과천선하여 삼장법사를 따라 천축에 불경을 가지러 떠나게 되지요. 말하자면, 손오공도 마왕에서 수호신으로 전향한 셈이지요. ㅎㅎ

 

사천왕문을 지나면 보통 불이문(不二門)이 나오는데 불이문이 보이지 않는군요. 대신 만세루(萬歲樓)가 두 팔을 벌려 우리를 맞습니다. 울창한 나무숲에 둘러 쌓인 만세루가 무척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직지사의 특징 중에 하나가, 계속 사진을 보시면 느끼시겠지만, 모든 전각들이 울창한 나무숲에 둘러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불이문은 해탈문이라고도 하는데 산문의 마지막 문으로서 이 문을 거치며 세상에서의 모든 근심을 벗어버리면 해탈하여 비로소 부처가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불이 즉, 둘이 아니란 말은 곧 하나를 의미하는데 만남과 이별은 둘이 아니며, 시작과 끝도 둘이 아니며, 삶과 죽음 또한 둘이 아니니 세상 만사가 모두 둘이 아니랍니다.

 

불이의 이치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해탈에 이르러 부처가 되는 경지라고 하는데, 저는 아직도 불이가 이불인지 요인지 분간이 안 가니 해탈하기는 틀렸나 봅니다. 하여간 직지사에서는 불이문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일주문을 지나 대양문이 있었고 만세루가 대웅전 앞을 지키고 있군요.

 


마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었답니다
. , 이 만세루는 부처님이 한가 하실 때 여유를 즐기시는 곳인가? 그러나 어쨌든 특별한 절 구조를 감상 하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입니다. 드디어 대웅전입니다. 대웅전 앞에는 두 개의 석탑이 멋진 자태를 뽐내듯 서있습니다. 보물입니다. 보물 몇 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나 여러분이나 보물 몇 호 그런 거 잘 모르기도 하지만, 그저 일련번호에 불과한 거지요.

 


직지사 대웅전도 봉암사 극락전과 함께 보물지정 목록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 대웅전 안을 들여다보니 부처님이 떡 하니 앉아 계십니다. 그 부처님 뒤에 색이 바랜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일명 후불탱화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보물입니다. 역시 보물 몇 호인지는 모릅니다. 문 밖에서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그림이 선명하지는 않습니다. 안에 들어가면 촬영 못하게 합니다. 밖에서도 플래시는 잠그고 찍었습니다.

빛을 많이 받으면 색이 계속 바래집니다. 여러분도 주의하세요. 그래도 혼났습니다. 사진만 자꾸 찍고 불전에 절을 안 한다고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죄송합니다만, 저는 가톨릭계라서 부처님께 합장하고 인사까지는 해드릴 수 있어도 안에 들어가서 다른 불자님들처럼 그렇게 절을 몇 번씩이고 하는 그건 좀 곤란한데요. 잘 할 줄도 모르고요.

 

그래도 들어와서 하고 가라고 그러더군요. 물론 한번 그냥 씩 웃어주는 걸로 대신했습니다. , 그러고 보니 만세루 옆에 기와불사라고 크게 씌어진 간판을 본 기억이 나는군요. 이 절은 지금 한창 중창불사 중인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불전에 인사들 하라고 하셨던 것이로구나, 평소에 그런 모습을 잘 보지 못했었거든요.

 

기와불사 하니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옛날 가톨릭도 비슷한 걸 한 적이 있었습니다. 소위 면죄부판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에 거대한 성 베드로 성당을 지을 건축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그랬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가톨릭은 종교개혁의 격랑에 휘말리게 되고 결국 개신교와 분열합니다. 루터의 98개항비판이 시발이었지요.

 

루터는 가톨릭 신부였고 그는 교회의 부패를 질타하며 오리지널로 돌아가기를 촉구했지만, 그가 원했던 대로 오리지널 즉, 초대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간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루터는 이후에 연하의 전직 가톨릭 수녀와 결혼했지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기 부모에게 손주를 안겨주고 싶다면서 말입니다.

 

물론 그는 가톨릭의 오래된 전통을 타파함으로써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북유럽의 루터교들이 성직자가 결혼하는 것 외에 가톨릭과 별 다름없는 예배방식을 계속 고수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미국의 개신교들은 가톨릭과 확실한 차별성을 보이고 있고, 한국의 개신교는 아예 완전히 이질적입니다만.

 

그 와중에 헨리8세는 가톨릭과 결별하고 영국국교회(성공회)를 만들었지요. 합법적으로 재혼을 하기 위해서였는데-가톨릭 교회법이 그의 이혼과 재혼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죠- 이걸 반대하다 유토피아의 저자로 유명한 토마스 모어 경이 헨리8세의 손에 처형되는 비극도 발생했답니다.

 

기와불사를 보며 왜 면죄부가 떠올랐는지 원 그러나 가톨릭은 오늘날도 그 면죄부란 것을 계속 판매(?)하고 있습니다. 저도 가끔 성당에 가서 그 면죄부란 것을 사는데요. 고해성사를 통해서 말이지요. 어두운 고해실에서 제 얼굴을 보지 못하는 신부님을 향해 우선 죄를 고백하지요.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뭐 아무거나 하나 만들어서 고백해도 됩니다. 그러면 신부님이 보이지 않는 저를 향해 사면을 해주시는 거죠. 신을 대신해서.

 

고백한 죄가 진짜라고 생각되면 앞으로 그러지 말라는 훈계를 주실 때도 있지요. 그러고 난 다음 주기도문을 몇 번 외우라든지 뭐 이런 간단한 벌을 내립니다. 그러면 저처럼 순진한 신자는 매우 기뻐하며 벌을 받는 임무를 다하기 위해 기도문을 열심히 외는 거지요. 이게 말하자면 면죄부란 것인데요, 아마 종교개혁 당시에 건축헌금을 요구하는 폐단으로 이용되었겠지요. 그러나 기와불사든 면죄부든 과도하게 그 순수성을 의심하는 자체가 도리어 불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역사책에는 너무 과격하게 당시를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무엇이든 과격해지면 왜곡이란 악마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마침내 주인행세를 하게 되는 법이지요. 제가 배운 역사책(국사나 세계사를 고등학교에선 배우지 못했으므로 중학교 과정을 말하는 것. 그러므로 고교 이상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차이가 있을 수도)에서도 그런 것을 느꼈답니다.

 

제가 불자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법당의 현판에 대웅전이라고 씌어진 것을 보니 이곳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곳입니다. 大雄이란 석가모니를 이름입니다. 진리를 깨달아 세상에 널리 알렸다는 뜻이죠. 대웅전은 부처님의 좌우에 협시보살이라고 해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함께 모신답니다. 만약 대웅보전(大雄寶殿)이면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불을 모시고 뒤에 삼존불 탱화를 그린다는군요. 
 


대웅전을 지나 옆으로 나아가니 비로전(毘盧殿)이 나옵니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입니다. 비로자나불은 법신불입니다. 불교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니라 법을 믿는 종교라고 말합니다. 부처님도 열반에 드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오로지 자기자신과 법에만 의지하여 정진하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곧 불교는 진리를 믿는 종교란 뜻이겠죠.


안을 들여다보니 부처님 뒤에 하얀 수백 개의 부처 또는 동자승이 있는데 정확하게 무엇일까요? 모르면 일단 패스. 하여튼 중요한 것은 이 비로전도 보물이란 사실입니다. 역시 몇 호인지는 모릅니다. 보물로 지정된 것이 1970년대란 사실만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납니다. 아 이거 시간이 너무 걸립니다. 지금부터 대충 설명하고 넘어갑니다. 저도 곧 어디 가야 하거든요. 아래 사진에서처럼 비로전 앞에도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역시 보물이고요. 몇 호인지는 역시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조경이 참 잘 되어 있습니다. 배수로도 잘 만들어 놓았고… 이렇게 나무가 울창한 절은 처음입니다. 아래 보이는 누각 옆 등나무 아래에서 잠깐 쉬었습니다. 



대웅전과 마찬가지로 비로전도 정면에 보시는 바와 같이 누각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이 누각의 이름은 보시는 바와 같이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습니다. 기억도 잘 나지 않고요. 누각에 범종도 달아놓았네요.


이곳은 객사인지 아니면 스님들이 기거하는 곳인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보지는 못했습니다.  


관음전. 말할 것도 없이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곳이죠. 관음보살은 대자대비의 상징입니다. 관음보살이 머리에 쓴 보관에는 아미타불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관음보살이 아미타불을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공경의 표시라고 합니다.  

여기는 응진전입니다. 16나한을 모시는 곳이죠. 


사명각이라고 쓰인 현판에서 눈치 채셨겠지만, 이 당우는 사명대사의 영정을 모신 곳입니다.


! 이런 무릉도원이 절 속에 숨어 있었다니 그런데 다리를 건너가려니 <출입금지>랍니다. 아마 스님들이 참선하는 곳인가 봅니다. 그럼 들어가면 안 되지요. 스님들 보통 소림사 권법 기본으로 하시는 거 다 아시죠? 누각의 이름이 안양루라고 적혀 있더군요. 틀려도 할 수 없습니다. 저 한글세대거든요.


이곳도 출입금지입니다. 살짝 들어가서 장독대를 전경으로 건물을 살짝 찍었습니다만, 얼른 나왔습니다. 소림사 무술을 잘 하실 거 같은 스님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담 너머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

 

여기는 무슨 박물관 같습니다. 평일이라 그런지 문을 안 열었습니다. 이 앞뜰을 가로질러 나가니 다시 절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가만 이건 뭐지? 다시 사찰 경내로 들어서는 문을 지나 좌측으로 조금 올라가니 좌측에 아래 사진과 같은 문이 나타났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은 아까 보았던 <외인은 출입을 금합니다>란 팻말이 붙어 있던 스님들과 보살님들이 기거하는 건물-푸른기와의 박물관 옆 건물-로 통하는 문이었습니다.) 











 


다가가 보았더니 이렇게 적혀 있군요.
가던 발걸음 멈추고


뭘 어쩌라는 건지
? 가던 발걸음 멈추고… 돌아가라는 건지, 아니면 조용히 들어오라는 건지…. 무서워서 들어가지는 못하고 그냥 나왔습니다
.


, 이곳은 찻집입니다. 차는 한잔 못했습니다. 저 혼자 사진 찍고 구경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빨리 내려 오라고 단체 사진 좀 찍어달라네요. 아유, 뭐가 그리들 바쁘셔서, 좀 천천히 구경하다 내려가시지 않고. 하여간 우리나라 사람들 동작이 너무 빠릅니다. 문화재 감상할 때뿐만이 아니고 밥 먹는 시간도 아마 세계에서 따라올 나라가 없을 걸요?

 

 

 

, 개중에 그래도 진득하게 감상할 줄 아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사님들, 말도 아주 잘 듣습니다. 합장 한번 해 주세요. 하자 바로 자세 나옵니다. 하하. 사실은 저 두분 중에 한 분은 불교대학 출신이랍니다. 누가 부처님하고 닮았는지 한번 맞춰보세요. 그분이 불교대학 출신이겠지요.

 

여기서부터는 청풍료 앞뜰에 전시된 유물입니다. 바빠서 설명은 길게 못 다니까 알아서 그냥 조용히 감상해 주세요.




자, 유물 감상 계속 하시지요. 아래 보시면 1/4~4/4까지 매직으로 써놓은 유물이 보이실 텐데요. 아마 네 개의 부분이 원래 일체였던 모양입니다. 확실한 것은 저도 모릅니다. 그냥 추측으로 그리고 물고기도 한 마리 보이시죠? 불교에서 이 물고기는 매우 중요한데요. 범종각에도 보시면 물고기가 보이실 겁니다.

목어라고 하지요. 기독교에서도 물고기는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만, 그와는 또 다른 전설이 이 목어에는 담겨 있답니다. 아무리 바빠도 이 이야긴 빠뜨리면 안 될 것 같군요.

 

옛날 한 승려가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늘 그릇된 짓만 일삼다가 몹쓸 병에 걸려 죽은 후 물고기로 태어났답니다. 보통 불교에서 업보라고 하는 그런 것이었겠지요. 그것도 등에 커다란 나무가 솟아난 그런 물고기로 태어났는데 풍랑이 칠 때마다 피를 흘리는 고통을 당하곤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등에 커다란 나무가 솟아난 물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이대고 슬피 울기에 스승이 신통력으로 그 물고기의 전생을 살핀 결과 방탕한 짓을 일삼다가 일찍 죽은 제자였습니다. 불쌍히 여긴 스승은 곧 제자를 위해 수륙재를 베풀어 물고기의 몸을 벗게 해주었습니다.

 

그 날 밤, 스승의 꿈에 나타난 제자는 스승님의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이제부터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바라건대 저의 등에 있던 나무를 베어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어 나무막대로 쳐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수행자에게 제 이야기는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승은 나무를 베어 물고기 모양의 목어를 만들어 수행자들에게 교훈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 목어로부터 변형된 것이 바로 목탁인데, 둥근 형태에 앞 부분의 긴 입과 입 옆의 둥근 눈이 물고기를 나타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스님들이 목탁을 두드리는 이유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니란 걸 아시겠지요? 수행자들의 나태한 정신상태를 일깨워 맑은 정신으로 수행정진하고, 그리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큰 뜻이 숨어있는 것이겠지요.

 

앞으로는 절에서 목어를 만나면 그냥 가지 마시고 막대기로 한대씩 때려주고 가세요. 하하. 그러면 안 되려나?

 


빨리 내려오라니 부랴부랴 뛰어가는 중입니다
. 다시 일주문입니다. 그래서 돌아가는 기념으로 다시 한 장 찍었습니다. 제가 카메라를 조준하자 올라오시는 분들이 자기들 찍는 줄 알고 움찔 하는군요. 미안합니다.

 

이건 무슨 비석인지 모르겠습니다. 안내 간판도 없습니다. 문도 잠겨있고요. 바빠서 확인할 겨를도 없습니다. 여기도 그냥 패스. , 그런데 청풍료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삼층석탑 사진을 못 찍은 게 생각납니다. 그것도 보물인데. 그러고 보니 직지사석조여래좌상도 못 찍었습니다. 역시 보물입니다.

 

할 수 없죠. 시간도 없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번 더 와야겠습니다. 여기는 완전 보물 천지입니다. 다음에 혼자 와서 조용히 감상해야겠습니다. 역시 단체로 어딜 가서 심도 있게 무얼 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집단이 좋을 때도 있지만, 나쁠 때도 많다는 말이죠.


 

 

 












헐레벌떡 뛰어내려가니 단체 사진 찍으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 한 분이 그러시는군요.
, 작가님 오십니다. 모두 모여주세요. 단체촬영 합니다. ? 이게 무슨 소리랍니까? 사실은 아까부터 저보고 자꾸 작가님, 작가님 하시더라고요. 이것 참, 저 카메라 산지 이제 겨우 두 달 됐는데, 오래 살다 보니 별 소리 다 듣습니다.

 

그런데 마산 우성택시 기사님들 말 참 안 듣습니다. 저렇게 모여달라고 애원을 해도 안 모이는 거 보십시오. 모두들 HID 출신들인가? 북파공작원 말입니다. 거기는 혼자서 행동하는 부대이기 때문에 말 진짜 안 듣는답니다. 완전 개인플레이죠. 택시도 비슷하긴 하군요. 혼자 움직인다는 점에서. 하여간 여차여차 사진은 찍었는데, 보안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출신부대의 특성상 단체사진은 공개 안 하기로 합니다.



바로 위는 직지사 입구에 만들어진 직지공원입니다. 직지사 구경한 다음 여기서 도시락 까먹고 놀기 좋게 만들어 놓았군요. 아이들 데리고 소풍가면 딱 좋겠습니다. 아니면 시민단체들 버스 한대 끌고 소풍가도 딱 좋겠네요. 아래 보시는 사진은 직지사 입구 상가지역입니다. 아까 이곳에서 점심으로 산채비빔밥을 먹었었지요. 늘 그렇듯 더덕 안주에 동동주도 물론 곁들였지요.

소주병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소주잔을 권하는 분은 우성택시 노조위원장이십니다. 그 아래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자세로 인사를 하고 계신 분도 아마 노조 간부이신 모양입니다. 이분은 인사말을 다 하시고 나서 건배 제의를 하실 때도 두 손을 공손하게 모은 자세를 소주잔을 들어 “건배” 하시더군요.  

모두들 땡볕에 앉아서도 잘들 먹고 마시고 놀고 있습니다. 나중엔 안 되겠던지 우산까지 등장했습니다. 처음에 비가 오고 날도 흐려 이렇게 난장에 자리를 잡았는데 갑자기 해가 쨍쨍 뜬 것입SL다. 원래 야유회니 운동회니 하게 되면 하늘도 얄궂게 시샘을 하는 법입니다.

이제 먹을 것도 다 먹었겠다 청소 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밀대 들고 열심히 닦고 계시는 기사님, 왕년에 모 은행 지점장님이셨답니다. IMF 덕분에 택시업에 뛰어드셨다는군요. 택시 기사님들 인생 역정 다 들어보면 정말 몇 편의 파노라마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력도 다양하고 화려합니다. 그래서 단체사진 찍을 때 그렇게들 말을 안 들으셨나? 하하. 하여간 지점장 출신이라는 기사님, 밀대질도 정말 잘 하십니다. 은행 근무하실 때 밀대 들고 청소만 하셨나? 

맨 마지막 사진은 아마도 노조 지도부인 모양입니다. 마산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할 것인지 작전회의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돌격 앞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일단 작전상 해산할 것인지…. 결론은 돌격 앞으로로 났습니다. 마산역에 도착한 후 일행들은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 노래방으로 돌격했습니다. 저도 종군기자(!)로서 끝까지 돌격에 참여했고요. 이상 끝입니다. 

아 참, 그리고 제목에 <택시기사들이 직지사로 간 까닭>이 무엇이냐고요? 그거야 당연히 야유회 간 거지요. 여기까지 오셨으면 다 아실 텐데. 별 거 없어요. 그냥 야유회. 마땅히 달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서요. 이해 바라고요. 여러분도 긴 글 읽으시느라고 수고하셨습니다. 너무 많이 걸어 다리들 아프시지요? 저는 약속이 있어서 이만. 말이 너무 길어져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요. 오탈자 많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나중에 고칠 게요. 총총.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
교회 담장 헐어낸 참 성직자, 김수환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그는 1969년 로마교황 요한바오로 16세에 의해 추기경에 임명됐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었다. 또 그는 최연소의 나이에 추기경에 오르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최고령 추기경으로서 오늘 영면의 길에 들었다. 그러나 그런 어떤 기록들보다도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에 기록된 그의 모습은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들의 편에 서서 교회의 담장을 헐었던 참 신앙인의 모습이었다. 

1981년. 마더 테레사 수녀와 김수환 추기경. /「다음까페」『성직자가사는이야기』아래 사진들도 모두.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던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70년대 박정희 철권통치에 저항하던 수많은 지식인들과 80년대 전두환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싸우던 학생, 노동자들에게 명동성당은 따뜻한 품이었다. 김 추기경은 "교회의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소신을 몸소 실천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무덤을 찾은 김추기경
몇 년 전이었던가? 김수환 추기경은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산을 올랐다. 김창숙 선생은 행동하는 유림으로 이 시대 마지막 선비로 일컬어지는 분이다. 그는 이승만에 맞서 반독재의 선봉에 섰던 진정한 선비로서 유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김 추기경이 움직이자 기자들이 구름처럼 모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기자들은 이미 곳곳에다 사진기를 설치해놓고 후레쉬를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과연 김 추기경이 심산 선생의 무덤에 절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심산 김창숙은 단지 위대한 선각자일 뿐만 아니라 유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언론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대니 나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절을 할까?

김 추기경은 묵묵히 산을 올라 심산 선생의 무덤에 정중히 절을 했다. 그것도 두 번 했다. 나중에 하신 말씀이지만, “돌아가신 분에게는 두 번 절하는 것이라고 해서 두 번 했다.”고 말해 주위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는 또 존경하는 분에게 절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게 세인들의 관심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나는 속으로 매우 흡족했다. 

 그 전에 나는 혹시나 김 추기경이 심산 선생의 무덤에 절을 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었다. 물론 내가 할 필요가 없는 부질없는 걱정이다. 천주교는 전래 초기에 조상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든지, 반상의 법도를 깨트린다든지 하여 왕조로부터 무수한 탄압을 받았다. 순교자가 수만에 이르렀고, 이를 피하여 깊은 산에 들어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으나 이들 중 절반이 호랑이 밥이 되었다 한다.

1972년. 정부의 8·3 긴급조치에 대한 시국메시지를 발표하는 김추기경. "7·4공동성명을 평화를 위장한 전쟁준비와 정치기만술로 이용하지 말 것" …… "온갖 특혜에도 경제를 파탄낸 정부와 기업가들에게 항의와 맹성을 촉구" ……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신교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강경한 어조가 생소하지 않다. 한 세대가 흘렀건만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일까?


예수를 닮는 것은 가난한 자들 편에서 평등사상을 실천하는 것   
그러나 오늘날 천주교는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반상과 적서의 차별을 없이 한 선열들의 정신은 훌륭한 것이었으나 조상을 공경하는 풍속까지 배격한 것은 잘못이었다는 반성을 내놓았다. 매우 옳은 처사다. 그러므로 김 추기경이 심산 선생의 무덤에 절하는 것이 특별한 일도 하등 주저할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처럼 나 역시 그 결과가 궁금했다.   

김 추기경은 역시 대범하고 거칠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불교로 말하자면 마치 도를 터득한 경지에 올랐다고나 할까. 물론 그는 자서전에서 “평생을 노력했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으며, 예수를 닮는 사제가 되지도 못했다.”고 자책했지만. 그는 최고의 성직자였다. 독재 시절 민주화운동 인사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했으며 스스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는 중요한 고비마다 성직자로서의 양심과 소신을 지키기위해 최선을 다했다. 

1977년. 철거민촌의 김추기경



서울대교구장을 은퇴하고 명동성당을 떠난 그가 몇 차례 가진 인터뷰 등에서 밝힌 변화한 사회에 대한 인식을 놓고 과거 민주화시대의 잣대로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나 역시 그런 감정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어놓고 하느님께로 돌아가려는 사람에게 우리가 너무나 세속적인 기대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제 그는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가 있을 때 명동성당은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그는 장애인과 철거민, 빈민들과 만나고 대화했다. 그는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는 독재와 불평등한 현실에 강경한 발언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우리 곁을 떠나는 지금 이 순간, 명동성당은 달라지고 있다.  

며칠 전, 명동성당은 용산참사 철거민들의 농성을 막기 위해 경찰에 시설보호 요청이란 것을 했다. 철거민들과 만나지 않기 위해, 그들이 교회의 담장 안으로 걸어들어오는 것을 막기위해 경찰을 불러 철의 장막을 쌓은 것이다.   교회의 벽을 헐어 가난한 사람들과 만나고자 했던, 장애인과 철거민, 빈민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했던, 그리하여 고립된 담장 안이 아니라 사회 속에 교회를 심고자 했던 김수환 추기경의 고귀한 정신이 마치 녹슨 철로변의 빈 역사(驛舍)처럼 버려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아직 그가 완전히 떠나기도 전에….

1995년.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영화「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관람.

 

교회의 높은 담장을 헐어낸 참 성직자, 김수환 
오늘 김수환 추기경의 영면 소식을 접하며 더욱 슬픈 것은 갈 수록 변해가는 교회의 보수화 바람 때문이다. 교회는 보수적일 필요도 진보적일 필요도 없다. 다만, 가난하고 핍박 받는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되는 것, 그들의 편에 서서 함께 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주고 간 진리다.  그러나 오늘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천주교, 너 마저도!”

이럴 때일 수록 가톨릭 뿐아니라 이 사회에는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이 절실하다. 이제 누가 있어 성당의 담을 헐고 가난한 사람들과 핍박받는 사람들 속에 교회를 세울 것인가.

2009. 2. 16.  파비
Posted by 파비 정부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