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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막내딸 아내, 내게 처제가 있었다니

암흑 속으로부터 문득 정신이 돌아왔다. 꺼져있던 TV가 켜지면서 갑자기 환하게 밝아진 화면으로부터 치이이 하는 정규방송 전에 나는 소음이 들려오는 듯이 느껴진다. 눈을 뜰까말까 망설이다 눈을 뜬다.

아직 방안은 캄캄한 어둠 속이다. 희미한 오렌지빛깔 보안등 불빛이 창가에 서서 흐느적거린다. 목이 마르다. 물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무거운 몸을 이불속으로부터 끄집어낸다.

억지로 일어나 방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대낮처럼 환한 빛살에 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두 눈을 찡그린다. 아, 뭐하는 거지? 거실은 온통 살림살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책장에 얌전히 앉아있어야 할 책들이 수북이 쌓여있고 선풍기가 날름 그 위에 올라앉아있었다. 장롱에서 막 뛰어나왔을 옷가지들은 그 옆에 제멋대로 뒹굴고 의자며 책상들은 현관문을 가로막고 서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아내가 그 건너편, 그러니까 저기가 어딘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곳인데, 원래 베란다가 있던 곳인가? 매끈하게 검은색으로 빛나는 커다란 풍선을 여러 개 모아다놓은 듯한 모양의 울퉁불퉁한 바위처럼 생긴 구조물을 걸레로 열심히 닦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내는 마치 내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하던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내의 눈빛에서 다정한 감정을 느낄 수는 있었다.

“이제 일어난 거야? 거실이 좀 지저분하지? 곧 정리될 거야. 걱정하지 말고 부엌에 가서 물 꺼내 마시고 좀 더 자라구.”

꼭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는데, 혹시나 핀잔을 듣지나 않을까 웅크려졌던 마음이 안심이 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당신은 늦잠이나 자고 대체 뭐하는 거야?”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 짜증을 냈을 텐데 오늘은 왜 이렇게 마음이 넓어졌을까?

그러나 그것은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반겨야 할 일이 아닌가. 별 일 아니란 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무심한 표정을 짓고서 부엌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인가. 부엌문이 잘 열리지 않는다.

억지로 조금 열린 문틈으로 안을 보니 부엌 바닥도 온통 살림살이들로 가득차서 발 디딜 틈이 없다. 부엌문에서부터 냉장고에 이르는 길목에는 주로 커다란 화분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런 젠장, 어떻게 들어가지? 겨우 문을 열고 화분들 틈을 비집고 냉장고 문을 연다. 0.5리터짜리 작은 콜라병이 두 개 보인다. 두 개 다 마시다 남겨둔 것인 듯 반쯤밖에 차있지 않다.

‘이걸 내가 마시면 아이들이 일어났을 때 자기들 거 마셨다고 화 낼 텐데’ 하는 걱정이 잠시 들었지만 갈증에 타들어가는 목은 그런 걱정일랑 집어치우고 얼른 콜라병을 집으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싱크대에서 컵을 골라 콜라를 부어 마셨다. 검은 액체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며 내는 소리가 마치 계곡물소리처럼 청량하다. 아내는 계속해서 걸레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내 옆에서 함께 걸레질을 하고 있던 여자를 미처 보지 못했다. 젊은 여자가 나를 보고 말없이 환하게 웃는다. ‘내게 처제가 있었던가?’ 일순간 혼란이 일었지만 너무도 다정한 그녀의 눈빛은 이내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틀림없는 처제였다. 자연스러운 몸짓, 다정한 눈매, 사랑이 넘쳐나는 환한 웃음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나도 말없이 어색하게 눈웃음을 한번 지어보이고는 방으로 들어와 다시 캄캄한 어둠 속에 몸을 누였다.

이내 암흑의 평화가 찾아들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나른해지더니 깊은 망각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금 정신이 번쩍 하고 들었을 때, 여전히 방안은 캄캄했다.

예의 희미한 오렌지빛깔 보안등 불빛은 아까처럼 창가에 서서 변함없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목이 말랐다. 물이 마시고 싶어졌다. 어슴푸레한 윤곽만 보이는 방문을 바라보다 문득 거실 저편, 그러니까 베란다가 있던 자리에 새로 생긴 방에서 울퉁불퉁한 바위처럼 생긴 구조물을 걸레로 열심히 닦고 있던 아내와 처제에게 생각이 미쳤다.

가만 그러고 보니 내게 정말 처제가 있었던가? 아니야, 아내는 막내딸이다. 위로 언니만 셋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느닷없이 처제라니.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일까. 나는 잠시 혼돈에 휩싸였다. 그리곤 정신을 차렸다.

아, 꿈이었구나. 내가 꿈을 꾼 것이었어. 그렇다면 살림살이들로 어지럽혀진 거실이나 화분으로 발 디딜 틈이 없던 거실 따위는 없는 것이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어둠에 싸인 거실이 휑하니 다가왔다. 아무도 없었다. 적막만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0.5리터짜리 작은 콜라병 두 개가 보였다. 하나는 거의 다 마셨고 하나는 반쯤 남아있었다.

‘아, 그렇군. 어젯밤 술 마시고 들어오다가 애들 주려고 통닭하고 콜라 두 병 사가지고 왔었지. 그런데 이걸 내가 마시면 아이들이 일어났을 때 자기들 거 마셨다고 화 낼 텐데’ 하는 걱정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갈증에 타들어가는 목은 그런 걱정일랑 집어치우고 얼른 콜라병을 집으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싱크대에서 컵을 골라 콜라를 부었다. 검은 액체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며 졸졸졸 내는 소리가 그렇게 맑을 수가 없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덮고 누웠다. 아직도 창가에 서서 흐느적거리고 있는 오렌지빛깔 보안등 불빛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말하는 것 같다. “그건 길몽이야. 틀림없이 길몽일 거야.” 오늘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그래 혹시 어떤 귀인을 만나게 될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 그런 것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