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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신나통 들고 죽겠다던 친구 20년만에 만나다

어제 참으로 오랜만에 20여 년 전 동지들과 술을 한잔 마셨다. 1989년 4월 1일을 함께 기억하고 있는 친구들. 그날 그 친구는 쇠파이프에 머리를 얻어터지고 기절하고야 말았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 다시금 날아드는 백골단 화이바에 얻어맞고는 한 번 더 기절.

글쎄, 나는 이친구가 첫 번째 기절한 것은 기억이 나는데 두 번째 기절한 것은 기억이 없다. 실은 닭장차(전투경찰버스)에 개처럼 끌려가 실리고선 나도 그놈에 백골단 화이바에 복날 개 맞듯이 얻어터지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시간이 아침 7시가 조금 못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닭장차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백골단 놈에게 얻어터지며 <5월>을 부르고 있을 때, 철창이 쳐진 창문 너머로 4열종대로 줄지어 달려오는 노동자들이 보였다. 나중에 듣기로 그들은 우리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세신실업 노조원들이었다.

아마도 6시 정각에 공격이 개시된 듯싶다. 술이 덜 깬 멍한 상태로 잠이 깬 것은 요란한 소음 때문이었다. ‘와장창’ 하면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 놀라 일어나 보니 정문 쪽에서 이십여 명의 정방대(정당방위대)원들이 정문과 본관 사이에 세워놓은 승용차 유리를 박살내면서 도망치고 있었다.

뒤이어 “와” 하는 함성소리와 함께 본관 정면 언덕에서 노란 화이바 수천 개가 일시에 솟아올랐는데, 실로 일견하기에 족히 수천은 되지 싶었다. 그때의 충격이란. 그때 심정을 솔직히 고백한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아아, 우린 이제 다 죽었구나!’ 겁이 덜컥 났던 것이다.

후퇴하던 정방대원들 중 십여 명은 우리가 머물고 있던 본관 건물 2층으로 올라왔지만 대부분은 밀려드는 구사대를 피해 본관을 지나쳐 공장 끝 담벼락 쪽으로 도망쳤다. 순식간에 공장은 구사대들에게 장악되고 좁디좁은 본관 2층 사장실에 40명이 고립되었다.

구사대들은 매우 질서정연했다. 그들은 정문과 본관 맞은편 언덕을 통해 양면 공격을 해왔다. 말하자면 퇴로는 남겨두었던 것인데, 파업노동자들을 양분시키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그 작전은 주효했다. 1백여 명 가까이 되었던 파업대오는 5분도 안 돼 40여명으로 고립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집중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각자 자그마한 포대 하나씩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엔 돌이 가득 담겨있었다. 두 줄로 늘어선 구사대들은 구령에 맞춰 일제히 돌을 던졌다. 1열이 던지면 물러나고 그 다음 열이 나서서 던지는 식으로. 불과 40평 남짓한 사장실은 우박처럼 쏟아지는 돌세례에 난장판이 되었다.

이때 예의 이 친구가 사장실에 쌓아놓았던(아마 내 기억에 한 4, 50통쯤 됐을 거다) 신나통을 안고 사장책상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라이터를 켜들었다. “가까이 오면 다 죽는다!” 돌 던지면 다 죽는다고 그랬던가? 아무튼 뭐라 외쳤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는 두 명이 더 올라갔다. 신나통을 안고.

당시 공장장은 이모씨라는 서울상대 출신의 인사였는데 매우 강성의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사장이었던 조모씨는 서울법대 출신으로 그와는 동기동창이었지만 차분한 성격으로 말수도 적었던 데 비해 공장장은 매우 다혈질이었다. “뭐하는 거야? 새끼들아. 빨리 소방호스 빼다가 뿌려.”

쩌렁쩌렁한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쇠파이프를 달랑 들고 창가에 서서 나는 그 악귀 같은 소리를 들으며 몸서리를 쳤다. 엊그제 박근혜씨가 TV단독토론이란 걸 하면서 “악랄한”이란 표현을 썼는데, 정말이지 그 순간에 악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방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은 상상을 초월했다. 세상에 이런 강펀치도 없었다. 물세례에 한방 맞으면 그대로 2~3미터 뒤로 나동그라졌다. 사장실은 순식간에 물바다가 되었다. 물이 무릎 언저리까지 찼다. 그 와중에도 나는 신나 기름이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모양을 살피며 공포에 몸을 떨었다.

공장장이 외쳤다. “저 새끼들을 조준해서 뿌려.” 소방호스는 일제히 신나통을 들고 책상 위에 올라선 세 명을 향했고, “으아악” 비명을 지르면서도 세 친구는 물러서지 않았다. 쓰러지지 않으려 악을 쓰는 세 놈을 보면서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새끼들아, 신나통은 내려놓아. 우리 다 죽는단 말이야.’

나는 사실 겁이 많은 놈이다. 어쩌면 파업 10일 동안 야금야금 절반 이상이 새어나갈 때도 도망가지 못했던 것도 겁이 많아서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동지들을 버리고 도망갔다는 욕을 듣는 것이 두려워서. 그때도 그랬다. 친구 세 놈이 신나통을 들고 섰을 때 나는 와락 겁부터 먼저 났었다.

신나통을 들고 라이터를 켜들자 일순 돌을 던지는 구사대들이 손이 멈췄는데 아마 그들도 사람이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공장장의 악랄한 다그침이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뭐하는 거야, 새끼들아. 계속 던져.” 깨끗이 빗어 올리고 기름을 바른 그의 머리가 아침햇살을 받아 번쩍거렸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3월 파업이라 부르는 노조민주화투쟁은 막을 내렸다. 4월 1일 오전 6시부터 시작된 전투는 6시 50분께 끝을 맺었고 우리는 줄줄이 굴비처럼 길게 늘어서서 닭장차에 올랐다. 그리고 새벽부터 잠도 못자고 나왔다며 투덜거리는 백골단 대원에게 개 맞듯이 맞으며 노래를 불렀다.

“5월, 그날이 다시 오면…… 피피피.”

아, 그 전날 밤에 파업 10일 만에 좀 색다른 일이 있었다. 매우 무료하고 그래서 서서히 진이 빠지기 시작하던 시점에 반가운 친구들이 찾아왔다. 공작과의 최모 등 몇 명이었다. 노조민주화 파업투쟁에(원래 이들도 함께 했던 동지들이었다) 동참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술을 사들고 왔던 것이다.

소주에 맥주에 안주로는 새우깡. 쥐포도 몇 마리 있었던가? 캡틴큐에다 나폴레옹 뭐라 부르던 국산양주도 있었다. 우리는 매우 기뻤다.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아마도 이리 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지들, 걱정하지 마쇼. 우리는 어차피 다 같은 동지 아니요. 당신들은 밖에서 우리는 안에서 함께 싸웁시다.”

밤늦게 그들이 돌아가고 우리는 행복한 잠에 취했지만, 새벽은 참혹한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승리했다. “난로불 다 꺼. 이새끼들 전부다 신나통에 들어앉았다 나온 놈들 같다. 불날라.” 경찰간부의 그 한소리에 우리는 오들오들 떨며 조사를 받아야 했었다. 그리고 오후 1시쯤? 훈방.

창원 내동상가에서 대각선으로 마주보이는 체육공원까지 터덜터덜 내려온 우리는 잔디밭에 빙 둘러앉았고 연행되지 않았던 정방대원 중에 한 친구가 오토바이를 타고 급히 달려와서는 상황을 전하는 것이었다. “4월 6일부터 정상 출근한다고 공고 붙었다.”

4월 6일 아침 정문에서 다시 농성을 시작한 우리의 숫자가 3백, 4백으로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하자 공장장이 다시 뛰어내려왔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노조위원장의 명찰을 잡아떼며 이렇게 외쳤던 것인데 이게 노조민주화투쟁 승리의 단초가 될 줄 그가 알았으랴. 

“야 이새끼야. 니가 위원장이야? 위원장이 이런 것도 하나 해결 못해? 너는 새끼야, 위원장 자격이 없어.”

우리에게 어용으로 낙인 찍히고도 늠름하게 버티던 그 위원장은 이 한방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마 조합원들 앞에서 회사 공장장에게 “너는 위원장 자격 없다” 소리를 들으며 명찰을 떼이는 수모를 당하자 곧바로 자진사퇴를 결심하고 노민추에 전권을 주는 위임장을 써주고 말았던 것이다. 

음, 그렇게 신나통을 들었던 그 세 명 중 한명은 구속됐고(알고 보니 이른바 위장취업자였음), 한명은 한 달 넘게 병원에 입원했으며, 한명은 노조위원장이 되었다. 어제 만난 친구가 바로 그 친구 중 한명이었다.

노조사무실을 접수하고 난 다음 노민추 위원 12명이 모여 누구를 위원장으로 추대할지 투표를 했는데 그 친구가 5표, 내가 4표, 최모라는 친구가 3표가 나왔던 것이다. 나중에 그 순서대로 위원장, 사무장, 부위원장을 했다.

아, 그러고 빠진 이야기가 하나 있다. 당시 구사대 측에서도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이 있었는데 총무과 직원이었던 그가 맡은 임무는 지붕을 뚫고 농성장으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련한 이 사람이 지붕에 구멍을 뚫다 발을 헛디뎌 그만 아래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다행히 바닥이 물바다가 되어 있었으므로 떨어지는 충격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사자우리에 떨어진 격이 되었으니…. 분노에 평정심을 잃은 쇠파이프들이 그의 몸에 집중됐고 “살려주세요” 하고 비명을 지르던 그의 몸은 불과 1~2분 만에 개구리처럼 늘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저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큰 사단이 나도 났을 것이다. 그는 두 달 넘게 병원에 입원해있었다. 우리의 친구와는 달리 그는 회사에 큰 공을 세운 공신이었던 것이다. 이건 뭐 짐작이지만, 그는 총무과에서도 꽤 편한 보직을 받아 안락한 회사생활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 지난 옛날이야기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 덕에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외에도 무수한 이야기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지만 시간이 짧아 다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오늘 저녁 다시 만나 한잔 더 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건 하나의 여담이지만, 당시 동지들은 대부분 나이또래가 비슷한 친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