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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이야기

손석형 씨 옹호논리, 어처구니없다

블로그에 쓴 글을 절반 가량으로 줄이고 일부 수정해 경남도민일보에 반론 기고했다. 원고지 20매 가량의 블로그 글을 10매 내외로 줄이려니 새로 쓰는 거보다 더 힘들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신문에 나온 글을 보니 오류가 발견된다.    
"복지사회를 변혁의 최대치로 생각하는 박 씨가 변절한 것이라면 역시 복지사회를 최대치로 생각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이학영 전 YMCA 사무총장은 어떤가", 가 들어갈 위치가 잘못됐다. 그래서 여기선 수정해서 올린다(신문판에선 "‘손석형 사태’의 방패로 그를 삼았다는 것은 실로 난센스란 것이다" 다음에 나온다). 

컴퓨터에선 보이지 않는 것들이 종이를 통해서 보니 잘 보이는 경우가 있다. 역시 아직은 종이가 글을 쓰거나 읽는데 더 우월하거나 더 친숙한 도구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아직도 나는 이해가 안 간다. 왜 '탐욕'은 괜찮은데 '변절'은 안 된다는 건지. 그리고 그 둘의 차이가 대체 무엇인지….

▲ 지난 12월 30일 진보진영 후보 3인 초청 블로거합동인터뷰 때 세 후보가 손을 잡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들은 단일화할 수 있을까? 난형난제다. @사진=실비단안개

손석형 씨 옹호논리 어처구니 없다
-정문수 씨의 칼럼 '욕망과 변절 사이'에 대해

벌써 10여일이 지난 이 시점에서 왜 나는 정문순 씨의 글에 반론을 제기하는가. 그가 이른바 ‘손석형 사태’에 발언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내가 알고 있는 원칙이나 상식 따위와는 정반대의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처구니가 없었다. 우선 글을 쓰는 방법부터 틀렸다. 손석형 전 의원의 중도사퇴를 옹호하고자 민주통합당으로 간 진보신당 박용진 전 대변인을 끌어들이고 싶었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비뚤어진 태도로 상황을 그려야만 했을까. 그는 1월 27일자 <아침을 열며> ‘욕망과 변절 사이’란 칼럼에서 손 씨가 “더 근사한 자리, 더 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를 추구하기 위해 부리는 탐욕”이 박 씨가 “신념체계마저 버리고 민주통합당으로 간 변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변절자의 원조로 김문수, 이재오에다 뉴라이트까지 끌어들인다. 이 대목에선 그저 허허 하고 웃을 수밖에 없다. 문학평론가여서일까. 아주 낭만적이다. 아주 단순명쾌하게 결론 내린다. 나도 잘 모르는 것이 그에겐 명료하기 이를 데 없다.

박 씨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이 추구하던 노선에 회의를 품었다. 그는 새로운 노선을 수용했다. 이른바 미국식 민주당 노선이다. 이 노선은 빅텐트론, 복지동맹 등과 맞물리며 민주진보대통합당 노선으로 발전했다.

좌파운동 내에 미국식 민주당 노선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주지하듯이 주대환 전 민노당 정책위의장이다. 그 역시 박 씨와 마찬가지로 민주통합당에 입당해 창원을에 출마한다고 한다. 이도 변절일까. 의견이 분분할 테지만 최소한 정 씨가 변절 운운 입에 담을 처지는 아니다.

아마도 과거 운동권을 양분했던 NL과 PD라면 변절이라고 말할는지도 모르겠다. 북한사회주의를 금과옥조로 받들며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보면 주 씨는 틀림없이 반동이다. 반대로 북한을 비판하며 남한 내 독자혁명을 꿈꾸는 세력에게도 주 씨는 변절자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반동도 아니며 변절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진 변혁적 사고의 최대치는 사회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북유럽형 복지사회를 꿈꾼다. 다만 주 씨의 표현법을 따르자면 “영국식 노동당 노선을 폐기하고 미국식 민주당 노선을 정치노선으로 선택”했을 따름이다(그것의 옳고 그름을 여기서 따질 필요는 없다).

말하자면 신노선인 셈인데, 이들이 반동이 아니며 변절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민노당과 진보신당 통합파, 참여당이 합당해 통합진보당이 된 것도 마찬가지로 변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작금에 구민노당 주류가 할 수 있는 최대치가 바로 통합진보당이라고 이해한다.

도대체 어떤 신념체계가 변절을 일으켰다는 것일까. 정 씨에겐 통합진보당으로 간 사람들의 신념체계는 그대로인데 진보신당을 이탈해 민주통합당으로 간 이른바 복지파들만 변절자인 것일까. 복지사회를 변혁의 최대치로 생각하는 박 씨가 변절한 것이라면 역시 복지사회를 최대치로 생각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이학영 전 YMCA 사무총장은 어떤가.

여기에 대해선 서로 쓰고 있는 안경이 너무도 달라 사실상 논쟁이 어려울 것 같으므로 이만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해 두고 싶은 것은, 박 씨를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손석형 사태’의 방패로 그를 삼았다는 것은 실로 난센스란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정 씨가 손 씨를 옹호하는 논리다. “인간의 바탕에 자리한 기본적인 욕구”를 위해 도민과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려도 좋다는 그의 논법은 참으로 고약스럽다. 들어보라. “정치인은 도덕군자를 뽑는 것이 아님과, 인간에게 내재한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정치의 수준을 높인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는 약과다. “끝까지 현 직분을 완주하는 것이 박수 받을 만한 일이긴 하겠지만 다음 총선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너무 길고 개인으로서 손해 봐야 할 것이 많다”는 대목에 이르면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해진다. 손 씨가 봐야 할 손해라니, 그게 대체 뭘까.

정 씨는 고집스럽게 말한다. “변절이 아닌 한, 인간의 약점과 욕망만큼은 최대한 용인하고 부추기는 방향으로 정치가 흐른다면 좋겠다.” 이쯤에서 이렇게 질문지를 만들어본다. 그가 말하는 ‘욕망과 변절’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둘 사이엔 끈끈한 유대만이 존재할 뿐이다. 변절은 비뚤어진 욕망의 자식이다. 이들이 손잡고 걷는 길이 원칙과 상식의 포기다. 손 씨가 걷는 길도 원칙과 상식의 포기란 길이다. 어느 시민운동 원로의 말씀이 생각난다.

“‘처음처럼’이 아니라 ‘처음부터’라고 해야 해. 처음부터 그런 사람들이었어.”

그리 생각하니 욕망이니 변절이니 하는 말들이 참으로 부질없이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