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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

창원 온 한스 슐레겔, "한국영화는 몰라요"

한스 슐레겔.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다. 우리가 익히 들어 귀에 익은 대부분의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혹은 심사위원장이며 프로그래머다. 베를린영화제, 칸영화제 등등…. 그가 창원에 온단다. 그래서 그를 보기 위해 창원으로 갔다. 물론 경남문화정책연구소 윤치원 소장의 초대도 있었다.

윤 소장은 오래 전부터, 그이가 아마도 마산의 어느 허름한 건물에서 영화 관련 사무소(‘춘향’이란 이름이 기억나지만 너무 오래 됐다)를 운영할 때부터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 10여 년 전에도 역시 그이 초대로 어느 독립영화 감독이 만든 귀향(?)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비전향 장기수들이 출소 후에 남한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밀착 취재한 것을 다큐멘터리 식으로 만든 영화다. 다큐멘터리 영화였지만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와 기대로 창원으로 갔던 것이다.

........ △ 고운메디칼 빌딩 강연장은 꽉 들어찼다. @경남문화정책연구소

한스 슐레겔은 독일인이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첫 인상은 “미스터 슐레겔, 독일인 맞아?”였다. 그는 독일인답지 않게 무려 35분이나 지각했다. 준법과 격식을 중시하고 근엄함과 장중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독일인치고는 의외의 파격이었다고나 할까.

아마도 80은 되었을 그의 나이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여유를 우리에게 준 것은 그나마 매우 다행이었다. 늦게 도착한 그는 콧수염이 달린 매우 귀여운 미소로 지각한 것에 사과를 표명하며 양해를 구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사람들은 웃음으로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월 16일 2시에 시작하기로 한 강연이 2시 40분이 다 되어 시작했지만 그래서 화기애애하게, 다시금 저명한 영화학자이며 각종 국제대회의 심사위원에 대한 기대로 가득차서 경청할 수 있게 해주었다. 창원시청 옆 고운메디컬 빌딩 13층 문화원은 40여분이나 기다린 사람들로 가득했다.

슐레겔이 강연할 주제는 에이젠슈테인과 타르코프스키였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그랬던지 에이젠슈테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모든 관심은 타르코프스키에게 맞춰졌다. 에이젠슈테인 이론의 세계적 학자인 슐레겔은 그러나 에이젠슈테인보다는 타르코프스키에 더 관심이 많은 듯이 보였다.

강연을 들으면서 알게 되었지만 슐레겔은 타르코프스키의 절친한 벗이었다. 그는 타르코프스키와 함께 베를린의 거리를 자주 산책했다. 물론 서베를린이다. 당시 독일은 동과 서로 분단된 상태였다. 타르코프스키가 사망한 해가 1986년이었으니 그는 독일의 통일을 보지 못했다.

타르코프스키는 누구인가? 1932년 러시아 볼가강변에서 시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를 졸업한 그는 러시아에서 감독이자 작가, 오페라 연출자로 활동했다.

아름다운 영상과 종교적 테마를 담은 작품들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타르코프스키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감독으로 꼽히고 있지만 많은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다. 슐레겔은 이에 대해 소비에트 정권의 감시와 통제 때문이었다고 증언했다.

슐레겔은 타르코프스키가 “나는 소련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영화를 만들 수 없다”고 했으며 결국 돌아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타르코프스키는 망명객으로 이국땅에서 쓸쓸하게 죽었다. 1983년 작 노스탤지어는 바로 그런 자신의 이야기였을까.

노스탤지어를 본 한 네티즌은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왜 영상시인인지 보여주는 영화. 영원히 기억될 영화!”라고 평가했다. 당연히 평점은 10점 만점이다. 두고 온 정신에 대한 육체의 갈망을 고혹의 세레나데로 보여주는 영화, 노스탤지어.

........ △ 맨 앞(우)에 앉아 필기하고 있는 것이 필자 @경남문화정책연구소

타르코프스키의 초기작 <이반의 어린 시절>을 빌어 그의 영화를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시각에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대체로 그에 대한 평가는 종교, 형이상학, 신비주의, 정신, 교양주의의 완성과 같은 단어들이 주류를 이룬다. 슐레겔도 마찬가지다.

슐레겔은 타크코프스키가 동양적 정신의 세계를 동경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러시아 문장에 나오는 (하나는 동쪽을, 하나는 서쪽을 보고 있는) 두 마리의 독수리 모양과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즉, 동양을 동경하면서도 러시아정교에 침잠해있었다는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독실한 정교도였지만 한편 러시아정교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러시아정교적인 감독으로 오해를 하지만 그의 관심은 다오이즘(도가사상)에 있었으며 교회를 국가와 마찬가지로 전체주의적 제도라고 비판했다.

한때 지휘자가 되려고 했던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에 특별한 악기음악은 필요 없다는 독창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소리는 자연에 다 있으며 들을 준비가 돼 있으면 다 들린다”는 것이다.

슐레겔은 타르코프스키가 에이젠슈테인을 계승한 제자로 이해되고 본인도 그를 슈퍼아버지로 생각했지만 그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고 한다.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던 타르코프스키는 롱테이크 기법을 즐겨 구사했다.

그의 유작인 1986년 작 <희생>에서는 무려 12분에 걸친 롱테이크가 사용되기도 했다. 그는 이 영상기법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조차도 보여주려는 그의 의도’를 관철시키려는 것이었을까.

타르코프스키는 소비에트연방의 유물론적 이데올로기에 상처를 입고 서방으로 망명했지만, 그는 이곳에서도 소비적 물질주의에 고통 받았다. 공산주의 소련이나 자본주의 서방은 모두 타르코프스키에겐 예술창작의 신비를 파괴하는 척박한 땅이었던 것이다.

강연이 끝나고 슐레겔은 “좋은 영화란 어떤 영화인가?”란 질문에 “상업영화를 만들더라도 타르코프스키처럼 미묘한 방식으로 정신적 자극을 주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역시 ‘안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영화감독이 좋은 감독’이라는 것.

한 청중으로부터 “세계적인 영화학자로서 주목할 만한 나라를 꼽아보라”는 질문에 슐레겔은 아쉽게도 한국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그는 보통의 영화인들이 그러하듯 일본의 구로자와 아키라를 존경한다고 했다. 이어 중국과 이란 영화를 흥미롭게 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브라질, 인도, 러시아, 슬로바키아, 폴란드, 독일 등의 국명을 나열한 후에도 끝내 대한민국은 호명하지 않았다. 이에 참지 못하겠다는 듯 다른 청중이 “아는 한국인 감독을 말해 달라”고 했지만 역시 아무도 기억해내지 못해 사람들을 아쉽게 만들었다(우리끼리만 깨춤 추고 있었던 것일까?).

........ △ 한스 슐레겔과 경남문화정책연구소 관계자들의 기념촬영 @경남문화정책연구소

이날 통역은 경상대 홍상욱 교수가 맡아서 해주었다. 슐레겔은 독일인이었지만 러시아어를 잘하는 홍 교수를 위해 러시아어로 말했다. 통역을 거쳐서 들어야하는 청중들로서는 조금 답답한 감이 없지 않았다. 다양한 이미지를 중간에 삽입해가면서 강연을 했더라면 하는 불만도 있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예쁜 그릇에 담아야 그 진미를 알 수 있는 법. 내용은 좋았지만 재미있는 강연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랬던지 몇몇은 졸고 몇몇은 자리를 비웠다. 그럼에도 강연 내용은 대단히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한스 슐레겔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는 화려한 이력도 그렇지만 우리에겐 생소한 러시아의 거장 타르코프스키를 만난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참에 타르코프스키가 쓴 <봉인된 시간>도 짬을 내 꼭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윤치원 소장은 내년 봄쯤에 영화제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글쎄, 어떤 형식일까? 이날의 강연을 본 소감으로 말하자면, 그때는 좀 아니 지나치게(!) 재미있는 영화제를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시 대중은 뭐니뭐니 해도 재미가 있어야 한다. 질은 그 다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