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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야기

내가 구멍가게보다 대형마트를 선호하는 이유

실은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딸 이야기다. 내가 딸에게 부탁했다. “혜민아, 배고픈데 비빔면이나 해먹을까?” “싫어, 나 배 안고파. 그리고 난 비빔면 별로 안 좋아해.” 내가 다시 부탁했다. “그럼 좀 사다주면 안 돼?”

아시는 분은 아실 것이다. 이럴 때 요즘 아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 그런 걸 왜 애한테 시키는 거야? 아빠가 직접 가서 사와.” 혹은 이렇게 말한다. “어린애가 혼자 나갔다가 안 좋은 일 생기면 어쩌라고?” 그럼 정말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어릴 땐 아버지 술심부름에 어머니 부식 심부름까지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다 했다. 가끔 반 되짜리 주전자에 막걸리를 담아오다 홀짝홀짝 마시고 물을 섞어 아버지께 갖다드린 추억을 고이 간직하고 사는 이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본다.

그런데 오늘 딸이 하는 변명은 평소와 달리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슈퍼에 정말 가기 싫단 말이야.”
“왜?”
“거기 아줌마가 나는 정말 싫어. 짜증나.”
“가서 인사하면 무시해. 다른 데만 쳐다보고 있고. 그리고 물건 고르느라 한참 생각하고 있으면 이렇게 말해. ‘빨리 골라라.’ 정말 짜증나.”
“그래?”
“그래서 나는 대형마트가 더 좋아. 대형마트는 오래 있어도 빨리 가라거나 그런 소리 절대 안 해. 내가 인사 안 해도 친절하게 먼저 인사도 하고 ‘천천히 고르세요’ 이러기도 해. 그러니 얼마나 좋아. 그런데 우리 동네 슈퍼는 인상만 팍 쓰고 있고 , 쳐다보지도 않고, 빨리 가라고만 그러니까.”

그런데 사실 이 슈퍼 아줌마는 내가 가도 그런다. 가면 멍하니 TV만 보고 있거나 아무 일 안 하고 있어도 힐끔 보고는 곧바로 눈길을 돌려버린다. 그럴 땐 나 역시 속으로 무척 짜증난다. ‘아니 이 아줌마가 사람 무시하는 거야?’ 물론 내게까지 빨리 고르라거나 빨리 가라거나 보채지는 않는다.

게다기 동네슈퍼는 대형마트에 비해 그렇게 물건 값이 싸지도 않다. 오히려 훨씬 비싸다. 1000원 하는 소주가 우리 동네 슈퍼에서는 1200원이다. 라면도 더 비싸고 과자도 더 비싸고 아이스크림도 더 비싸다.

사실 불친절이 ○○○슈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슈퍼로부터 약 50M 위에 있는 ●●●슈퍼도, 약 100M 아래에 있는 ◐◐◐슈퍼도 불친절하긴 마찬가지다. 모르긴 몰라도 이 슈퍼들도 아이들이 오랜 시간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고르고 있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빨리 안 고르고 뭐하니?”

나도 대형마트의 무분별한 확산에 반대하는 1인이지만 동네 구멍가게의 이런 모습들을 보면 정말이지 한숨이 나온다. 이러고서 과연 대형마트의 문어발식 영역확장에 자신 있게 비난성명을 내놓을 수 있을지에 대해선 나도 잘 모르겠다.

▲ 홈플러스에서 물건을 구경하고 있는 고객들. 대형마트는 물건을 구입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쉼터이기도 하다. 이런 대형마트들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네 구멍가게들이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사진. 경남도민일보

얼마 전에 롯데마트가 이름하여 ‘통큰치킨’이란 것을 턱없이 싸게 팔아 사회적 문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반대로 턱없이 비싼 가격과 질 떨어지는 서비스에 대한 문제는 없는 것일까? 그래도 통닭집들은 워낙 경쟁이 치열해 친절하기는 하다. 하지만 동네슈퍼는?

손님도 별로 없이 파리만 날리다보면 잠도 오고, 그러면 오는 손님에도 무신경할 수밖에 없겠다는 이해심과 더불어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딸아이는 투덜거리면서도 심부름을 갔다. 왜냐하면, 비빔면보다 더 비싼 아이스크림도 사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딸아이가 빨리 오지 않는다. 이거 이러다 혹시 슈퍼주인에게 또 핀잔을 듣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빨리 안 고르고 뭐하는 거야!” 하고 말이다.